한 지인은 개와 족보를 섞기 싫다고 엄마라는 말 대신에 아줌마라고 자신을 지칭한다. ‘지니야. 아줌마가 해줄게, 기다려.’ 처음에는 인간이 개의 엄마가 되는 것도 이상했지만 엄마라는 단어 대신에 꼬박꼬박 아줌마라 하는 것도 그것 이상으로 불편해 보인다.
‘루비야. 너는 누가 낳아서 요렇게 예쁘니. 이 엄마가 너를 낳았지.’ 강아지 얼굴을 쓰다듬으며 온갖 사랑의 말을 쏟아내면 지나가던 딸이 한심한 듯 쳐다본다고 또 한 지인은 말한다.
이 둘의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겠는가.
엄마, 아빠라는 용어를 개에게 사용하는 것을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성장과 쇠퇴를 거듭하며 변해 간다. 반려견 인구가 1,500만이 넘었다는 시대이다. 개를 하나의 식구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표현일 뿐이다. 국어사전에 뜻풀이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국어사전(Daum)
엄마 1. 주로 어린아이들이 ‘어머니’를 이르는 말
2. ‘어머니’를 정답게 이르는 말
3. 주로 자녀 이름 다음에 쓰여, 아이가 딸린 여자를 이르는 말
여기에 항목을 추가하면 된다.
4. 반려견을 기르는 여자가 반려견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 반려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정도면 개와 인간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족보 운운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 줄게’라는 말은 내가 책임지고 돌보는 상대가 나를 의지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인 셈이다. 그냥 가족이 되는 것이다. 꼭 피를 나누고 족보에 올라야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가끔 자신의 성을 붙여 ‘정콩이’라고 콩이를 불렀다. 굳이 성까지 붙여 족보에 올린 것은 ‘너는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너를 끝까지 책임진다.’의 의미일 것이다.
내리사랑이란 나약한 존재를 보살피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심성을 말한다. 그것은 책임이다. 책임과 의무는 뜻은 비슷하지만 그 쓰임은 다르다. 자식은 책임지는 것이고, 부모에게는 부양의 의무가 있다. 책임은 보다 자발적이고, 의무는 사회적 제도나 규범에 의해 하게 된다. 가끔 화재 현장에서 개나 고양이를 끝까지 껴안고 살려내거나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대신하는 뉴스를 보곤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행동은 책임이지 의무가 아니다. 나약한 동물을 보살피고 끝까지 책임지는 일에 굳이 인간의 법도나 규범의 잣대를 들이밀 일이 아니다.
내가 강아지 엄마라고? 그런들 어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