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일기 2
베토벤 비창 소나타 3악장-화음과 아르페지오(펼친 화음)
모차르트 소나타의 거대한 산 앞에 절망한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골라 준 베토벤 비창 소나타 3악장. 학생 때 전 악장을 쳤을 텐데 뇌와 손가락이 처음 보는 거라고 거부권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한 음씩 다시 시작해야지 뭐. 노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내 생에 남은 시간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써버리면 된다. 보다 생산적인 방법으로.
왼손을 먼저 연습한다. 아르페지오가 펼쳐져 있는 첫 페시지를 치는데 눈물이 난다. 아르페지오 손가락 연습을 위해 아농 20번을 찾아 친다. 또 눈물이 난다. 나는 아농 39번 스케일 마무리 화음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여러 번 치면서 여러 음이 동시에 내는 음의 파동을 즐긴다. 그런데 이 펼친 화음은 동시에 치는 화음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서너 개의 음이 시간 차를 두고 펼쳐지는 아르페지오. 차례대로 치는 음과 음 사이의 시간은 각각의 음의 파동으로 여러 개의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겹쳐지면서 소리를 완성한다. 수면에 펼쳐지는 물결의 시각적 효과를 청각의 경험으로 대치한다. 그 파동은 무한히 퍼져 나간다. 여러 소리를 포섭하면서 소우주를 만들어 간다.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