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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가또 Aug 23. 2024

정말이지 작고 소소한 하루

느지막이 일어난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암막 커튼 사이로 햇빛이 얼굴을 비추어 눈이 자동으로 띄었다.


너무 퍼질러지게 잔 것 같은데.. 몇 시지..


핸드폰 시계는 겨우 8시 30분 정도 어제 점심때부터 달린 회식 때문인지 눈은 떴지만 쉽사리 정신이 잘 돌아오지 않는다.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서 몇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야 11시 즈음

부엌으로 나와서 바나나 하나와 두유를 들고는 거실에 앉았다.


창 밖을 보니 분명 태풍 때문에 비 소식이 있었는데 해가 쨍쨍하네..


원체 집 밖을 잘 안 나가다 보니 쉬는 날 중 하루는 집에서 방전된 배터리처럼 충전을 해주곤 한다.


오늘은 뭘 하지.. 아니 뭘 먹지..


요즘 급작스레 생긴 큰 행복한 걱정거리 때문에 지갑 사정을 한껏 조이고 있는 중이라 본의 아니게 냉장고 비우기를 하고 있다.


냉장고에 남은 것 중 냉장실에는 두부 반모, 바나나 두 개, 크림치즈, 어묵 등등등..


머릿속으로 그냥 스쳐가는 생각들을 한번 붙잡아본다.


바나나는 중간중간 간식처럼 먹어주면 될 테고, 어묵은 떡볶이를 할까.. 크림치즈는 치케를 만들던지 아님 블베크림치즈를 만들어서 빵에 발라먹어야 하는데.. 하면서 기왕지사 블루베리가 생각난 김에 블베 베이글과 블베 크림치즈를 만들기로 결정! 매번 저장해두고 해야지 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레시피북과 유튜브를 틀었다.


일단 먼저 베이글 재료부터 거실로 들고 나와서 쏟아붓듯 재료를 세팅했다. 이렇게 먼저 늘어놔버리면 어떻게든 수습을 하기 위해서 끝장을 봐야 할 테니 말이다.


반죽을 만들고.. 발효하고.. 모양 잡고.. 또 발효하고..

베이글이 비싼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꼴랑 밀가루 조금이랑 설탕 소금 이스트 식용유가 전부인데. 정성이 그냥 정성으로는 택도 없을 정도니 시작하기 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이 시작하고 나니 물밀려 오듯 우수수 보이기 시작한다. 발효시간이 길다 보니 중간중간 크림치즈도 미리 세팅해 두고 분명 시작은 1시부터 했던 것 같은데 다 만들고 나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중간중간 아이스크림과 어묵국수로 요기를 채워가면서 베이글이 발효되는 것을 잘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 하는 베이글이라 그런지 모양 잡기도 힘들고, 물에 잠깐 익히는 시간 때도 모양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인가 재료는 다 똑같이 들어갔으니 맛만 있으면 되는 걸!


4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만든 작고 소중한 4개의 베이글

2개는 그래도 누구한테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비주얼은 나오는데 2개는 나 혼자 그냥 잘라서 먹어야겠다.

처음인데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할 정도로 잘했다.

크림치즈는 섞기만 하면 되는 거라 더할 나위 없고.


하루종일 집안에서 설거지거리 쌓아가며 만든 고작 블루베리 베이글과 블루베리 크림치즈라니 이 얼마나 소중하고 바삭하고 꾸덕한 존재란 말인가.


혼자서 4개는 많으니 남은 베이글은 내일 직장에 가지고 가서 간식으로 먹어야겠다.


웨이팅 하며 기다려서 사 먹는 베이글만큼은 못할지언정, 나의 소중하고 바삭하고 꾸덕한 베이글을 마다할 이는 없을터.


하루종일 집에 있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게 되면서 스스로 너무 나태해지는 게 아닐까?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울감에 잘 빠져 든다. 헤어져 나오기도 힘들고, 습관처럼 몸에 들러붙어 잘 떼어지지도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집 안에서 해야 할 것들을 우수수 어질러서 만들어놓고 결국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나를 던져놓아 주면 스스로 헤쳐나가며 우울감이 작고 소중한 성취감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고 작은 것들이 모여 언젠가 빛날 때까지 오늘도 맘껏 어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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