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남자 중학교와 N남자 고등학교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장미맨션에 사는 나는 매일 아침, 쏟아져 오는 남자들을 보며 등교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했지만, 그럴 만큼 나의 심금을 울릴만한 이는 없었다.
중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은 조금 쌀쌀한 3월의 어느 아침, 어쩌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온 나는 장미맨션에서 한 정거장 다음의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그를 보고야 말았다. 위아래 옅은 갈색의 교복 단추를 깔끔하게 잠그고, 두 손을 책가방 끈에 단정하게 올린 채 다소곳이 앞만 응시하던 그 오빠. 순간 내 주변의 모든 소음과 움직임은 나와 그 오빠를 위해 멈춘 듯, 나에게는 그저 그 오빠의 모습만 확대되어 보였다. 깔끔하게 자른 짧은 스포츠머리, 야무지게 앙 다문 입술, 새하얀 피부, 또렷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은 빛나는 눈. 그 오빠에게서는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편의상 A로 지칭하겠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빠르게 펌프질 하는 심장은 무서운 속도로 많은 양의 피를 한꺼번에 내 얼굴로 보내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을 숙인 채 A앞을 지난 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그의 존재를 알렸다. 왜인지 나보다 더 신이 난 친구가 A를 쳐다보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내일부터 그에게 나의 존재를 톡톡히 알려줄 테니 걱정을 말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A를 보기 위해 등교를 서둘렀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일어나기를 거부하던 침대를 박차고 나와,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의 아침밥상마저 박차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서둘러 나가는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기 없는 짓 하기만 해바라이."
뭔가 눈치챈 걸까?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 일 없는 듯 한마디 던지고 급히 계단을 뛰어내려 간다.
"머라카노!"
아니나 다를까, 경비실에서 만난 친구가 날 보자마자 급하게 얘기한다.
"우리 엄마가 그라는데, 너거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아무래도 니가 이상하다 했단다."
"왜?"
"아침도 안 먹고, 맨날 먼 일 있는 아처럼 서둘러 나간다고. 먼 일을 벌일라꼬 그라는지, 내한테 물어보라 했단다."
"그래서?"
"내는 아무 말 안 했다. 그냥 지각하기 싫어서 빨리 간다캤다."
눈치 빠른 엄마가 걱정이었다. 남자를 보기 위해 매일 빨리 집을 나간다는 걸 알면 엄마한테 엄청 혼날 터였지만, A를 향한 내 마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항상 그곳에 있던 A가 버스정류장에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갔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항상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나무같이 서 있던 A였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학교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런데 저 멀리, 헐레벌떡 뛰어오는 A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 그도 인간이었다. 아마도 늦잠을 잔 것 같은 A의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고, 항상 침착한 보살 같은 그의 표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친구는 그의 까치집을 보고 실망이라고 했지만, 내 눈엔 그것마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아! A집이 이쪽에 있는갑다!'
나는 A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교복을 통해 다니는 학교를 물어물어 알아냈지만, 몇 학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3학년 사이, 나보다 3살에서 5살이 많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제 어디에 사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디에 사는지 알고 싶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집 근처까지는 알아냈지만, 정확한 집은 알아내지 못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 어느덧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촌스러운 하복을 벗어던지고 그나마(하복보다는) 예쁜 춘추복을 입어서 자신감이 붙은 것이었을까. 어둑어둑한 날씨에 그날따라 내 얼굴이 괜찮아 보였던 걸까.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 센티해진 덕분이었을까. 하교를 하다, 갑자기 오늘은 꼭 A에게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매일을 들러 수다를 떨던 팬시점에 들어가 아저씨에게 오늘 고백을 할 것이라 얘기를 했다. 친구와 아저씨와 같이 고민을 하며 인형과 편지지를 골라, 가게 한구석에서 편지를 썼다. 몇 달에 걸쳐 관찰한 바, 그의 하교시간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팬시점에서 나와, 그가 내리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날 보겠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그냥 선물이랑 편지를 주고 도망갈까?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드디어 나의 마음이 결실을 맺는다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날이 다 어두워지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빨리 집에 간 걸까? 아님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알 수는 없었다. 우산도 없는데 기어이 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사진관 앞으로 뛰어갔다. 거기에 서서 무겁게 떨어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 서러워졌다. 뜨거움에 불타오르던 가슴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혼자 뜨거웠다가 혼자 서러웠다가, 혼자 식어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A를 만나기 위해 서두르지도, 발을 동동 구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는 날이면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고백하고 싶은 마음도,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진 후였다. 1학년이 지나고, 2학년, 3학년이 되고 나서야 나는 A의 나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3학년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그 교복을 입고 그곳에 서 있는 A는 나보다 3살이 많은 것이었다.
고백을 하지는 않았지만, A는 나를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온갖 유난을 다 떨며 매일 자기 앞을 지나던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모를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그는 성인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우리는, 너무 뜻밖이고 반가워 하마터면 인사를 나눌 뻔했다. 결국 둘 다 멋쩍게 웃으며 지나쳤지만, 그는 예전만큼 멋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버스정류장을 보면 A가 떠오른다. 단정하고 하얀 나무 같은 사람. 나의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