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여느 때 보다 반가운 3월의 어느 아침. 나뭇잎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유리구슬을 흩뿌려 놓은 듯 바닥에 굴러다니며 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익숙한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아직은 낯선 초봄의 싱그러운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히고, 수줍은 듯 고개를 미처 내밀지 못한 개나리꽃을 머금은 꽃봉오리가 꼭 나를 닮았다.
오늘 나는 드디어 중학생이 된다.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5층에서부터 이어진 수많은 계단을 나비같이 가볍게 날아오르듯 걸어 1층으로 내려간다. 저 멀리 경비실 앞에 H의 모습이 보인다. 귀 밑으로 똑 자른 단발머리가 서로 낯설다. 중학생이 된 설렘을 애써 숨기며 서로가 다 큰 어른인 척 굴지만 상기되어 붉어진 볼까지는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빨리 중학생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국민학생*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언니, 오빠들처럼 교복을 입고 내 나이를 뽐내고 싶었다. 나보다 더 어린아이들 앞에서 잘난 체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진 데에는 4살 많은 오빠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다음의 4살 차이는 별 것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4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직 유치원에도 다니지 않던 나를 국민학교에 다니던 오빠는 아직 학교도 안 다니는 아기라며 나를 놀리곤 했다. 열심히 커서 국민학교에 들어갔건만 오빠는 이미 5학년이었다. 국민학교에서의 1학년과 5학년의 차이는 마치 하늘과 땅과 같았다.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었다. 오빠를 따라잡으려 숨 가쁘게 달려 3학년이 되자, 오빠는 중학교에 갔고, 국민학교의 대빵*인 6학년이 겨우 되었건만, 오빠는 이미 고등학생이 되고 말았다. 오빠는 항상 나를 어리다고 무시했고, 놀렸고, 나는 그럴 때마다 기분이 나쁘고 속상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기 전 중학생부터 되어야 했다.
남자 중학교와 남자 고등학교 사이에 위치한 장미맨션에서 나와 H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교복을 입은 남자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쏟아지듯 우리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도 이제 그들처럼 교복을 입었다. 어깨가 저절로 당당하게 펴진다. 간혹 멋지게 생긴 오빠가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은 까까머리가 어색한, 오늘 막 중학생이 된 우리 같은 아이들도 보인다. 정작 내가 촌스러운 것은 모르고, 그들이 촌스럽다고 속으로 비웃는다. 수많은 남자 무더기들과 마주하며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내가 다니던 D국민학교의 후문을 지나, B시장을 지나자 학교 앞에 도착한다.
에베르트산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부산에는 산이 많아 높은 지대에 위치한 학교가 많다) 3년을 열심히 오르내리면, 종아리부심 좀 부리는 여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B여자 중학교의 입구 언덕은 듣던 데로 경사가 높고 길었다. 하지만 장미맨션 501호의 계단을 8년 동안 오르내린 나 아니던가.
'훗' 가소롭군.'
높은 경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간다. 반이나 왔을까. 심박수가 빨라져 숨이 차기 시작하고 아직 찬 공기의 기운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H와 나는 대화도 없이 그저 씩씩거리며 가파른 언덕을 열심히 오른다. 잡고 있던 손도 어느새 놓았다. 매일 오르던 계단과 언덕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의 얇은 다리가 알로 가득 차 두꺼워지면 어떡하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만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젓가락 다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다리가 굵어지는 것은 곤란하다. 고뇌하는 사이 어느새 높은 언덕을 다 올라 교문 앞에 도착한다. 무섭게 생긴 선생님과 선도부 언니들이 우리를 위아래로 내다보며 복장을 체크한다. 다리 고민은 어느새 머리에서 사라지고 무서운 기운만이 맴돈다. 국민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던 분위기다. 갑자기 내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잘할 수 있을까...?'
국민학생: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기 전에는 국민학교였다.
대빵: ‘대장’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