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간결한 텍스트는 헤르메스 사상의 근간을 이례적일 만큼 명료하게 개괄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그 쾌락에 대한 거부, 그리고 마음(Mind)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인류를 구분하는 점 등은 동시대의 소위 ‘영지주의(Gnostic)’ 문헌들의 일부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그 구분이 인간의 선택(choice)에 달린 문제라고 보는 사상은, 아담의 묵시록과 같은 저술에서 보이는 거의 칼뱅주의적인 숙명론적 색채로부터 벗어난 유쾌한 변주라 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 미드(Mead)는 이 텍스트에 나타나는 ‘잔(Cup)’의 이미지가, 정통에서 벗어난 성찬(Communion)에 대한 관념들을 매개로 하여, 후대의 성배(Holy Grail) 전설과 먼 친연성을 가질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1. 헤르메스: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손이 아니라 이성, 곧 로고스(Logos)로써 보편 세계를 만드셨다. 그러므로 너는 그분을 어디에나 계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의지(Will)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유일무이한 하나(One and Only)로 생각해야 한다.
그분의 이 육체(Body)는 어떤 인간도 만지거나 보거나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늘어날 수 없고 다른 어떤 틀과도 같지 않은 몸이다. 그것은 불도 물도, 공기도 숨결도 아니나, 그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선(Good)하신 그분은 이 육체를 오직 자신에게만 봉헌하고, 그 대지(Earth)에 질서를 세우고 장식하기를 원하셨다.
2. 그리하여 그는 이 신성한 틀의 코스모스(Cosmos)를 땅으로 내려보내셨으니, 곧 인간(man)이며, 죽을 수 없으면서도 죽는 생명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명들과 코스모스를 넘어, 인간은 이성(Logos)과 마음(Mind)으로 인하여 탁월해졌다. 인간은 신의 업적을 관조하는 자가 되었으니, 그는 경이로워하며 그 창조주를 알고자 힘썼다.
3. 오, 타트(Tat)여, 실로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이성(Logos)을 나누어 주셨으나, 아직 마음(Mind)은 아니었다. 그가 누구에게 인색해서가 아니니, 인색함은 그에게서 나오지 않고, 마음이 없는 인간들의 영혼 속, 저 아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타트: 아버지, 그렇다면 왜 신께서는 모든 이에게 마음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헤르메스: 아들아, 그는 그것을 마치 상(prize)처럼 영혼들을 위해 그 한가운데에 세워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4. 타트: 그리고 어디에 그것을 세워두셨습니까?
헤르메스: 그는 거대한 잔(Cup)을 그것으로 채워 내려보내시고, 전령(Herald)을 붙여 인간들의 마음에 이같이 선포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이 잔의 세례로 스스로를 정화하라, 그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여, 그대는 잔을 내려보내신 분께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요,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아는 자로다!’
그리하여 전령의 소식을 이해하고 마음속에 잠긴 자들은 모두 그노시스(Gnosis)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을 받았을 때’ 그들은 ‘완전한 인간(perfect men)’이 되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성(Reason)의 도움만을 가졌을 뿐 마음을 갖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에 의해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5. 그러한 사람들의 감각은 이성 없는 피조물들의 감각과 같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구성이 그들의 감정과 충동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진실로 관조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이들은 인간이 육체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으며, 그들의 모든 생각을 거기에 집중시킨다.
그러나 신의 선물의 일부를 받은 자들은, 타트여, 우리가 그들의 행위로 판단하건대, 죽음의 결박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만물, 즉 땅 위의 것들과 하늘의 것들, 그리고 만약 있다면 하늘 위의 것들까지도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스스로를 높이 들어 올려 그들은 선(Good)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본 뒤, 그들은 이곳에서의 체류를 불운으로 여기며, 육체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경멸하며, 저 유일무이한 하나(One and Only One)를 향해 서둘러 나아간다.
6. 오, 타트여, 이것이 바로 마음의 그노시스이며, 신적인 것들의 환영(Vision)이다. 그것은 신-앎(God-knowledge)이니, 그 잔은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트: 아버지, 저 또한 세례를 받고 싶습니다.
헤르메스: 아들아, 네가 먼저 네 육체(Body)를 미워하지 않는 한, 너는 네 참된 자아(Self)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네가 네 참된 자아를 사랑한다면, 너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마음을 가지면 그노시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타트: 아버지, 무슨 의미이십니까?
헤르메스: 아들아, 멸하는 것들과 신적인 것들, 그 둘 모두에 네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들이 둘, 즉 육체(Body)와 비물질적인 것(Bodiless)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 멸하는 것과 신적인 것이 이해되는 한, 선택의 의지를 가진 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남겨진다. 둘은 결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이 맡겨진 그 영혼들 안에서, 하나의 쇠퇴는 다른 하나의 성장을 드러나게 한다.
7. 이제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선택하는 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운명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를 신으로 만들기에, 신에 대한 그의 경건함을 보여준다. 반면, 더 못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을 파괴할지라도, 신의 조화를 오직 이 정도까지만 교란할 뿐이다. 마치 행렬들이 길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다른 이들로부터 길을 빼앗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사람들도 그들의 육체의 쾌락에 이끌려 세상을 행진한다.
8. 그러므로, 오, 타트여, 신에게서 오는 것은 우리의 것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은, 이것이 지체 없이 나아가게 하라. 악한 것들의 원인은 신이 아니라, 선보다 그것들을 선호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들아, 보아라, 우리가 통과해야 할 육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이몬(daimones)들의 합창단이 얼마나 많은지, 저 유일무이한 신께 서둘러 가기 위해 우리가 지나야 할 별들의 경로 체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선에게는 다른 기슭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가 없으며,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 자체를 위해서는 시작 또한 없으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시작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노시스이다.
9. 그러므로 그노시스는 선에게 시작이 아니다. 오히려 그노시스가 우리에게 그것이 알려지게 되는 첫 시작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을 붙잡고, 우리가 통과해야 할 모든 것을 빠르게 지나가자. 우리가 익숙해진 것들, 사방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들을 버리고, 저 옛 길(Old Old Path)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보이는 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믿기 어렵게 만든다.
이제 악한 것들은 더 명백히 보이는 것들이지만, 선은 결코 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니, 그것은 형체도 모습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은 오직 자신과만 같고, 다른 모든 것들과는 다르다. 육체를 가지지 않은 그것이 육체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0. ‘닮은 것’이 ‘닮지 않은 것’보다 우월하고, ‘닮지 않은 것’이 ‘닮은 것’보다 열등함은 여기에 있다. 하나임(Oneness)은 만물의 근원(Source)이며 뿌리(Root)로서, 모든 것 안에 뿌리이자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이 근원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반면, 근원 자체는 다른 무엇으로부터도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부터 왔으니, 그것이 나머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근원이니, 다른 어떤 근원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임은 근원으로서 모든 수를 포함하지만 어떤 것에도 포함되지 않으며, 모든 수를 낳지만 다른 어떤 것에게서도 태어나지 않는다.
11. 이제 태어난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나뉠 수 있고, 증가와 감소에 종속된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Perfect One)에게는 이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증가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임으로부터 증가하지만, 더 이상 하나를 담을 수 없을 때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굴복하고 만다.
이제, 오, 타트여, 신의 형상(Image)이 가능한 한 너를 위해 그려졌다. 네가 그것에 주의 깊게 머물고 네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관찰한다면, 아들아, 나를 믿어라, 너는 위로 이끄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아니, 그 형상 자체가 너의 안내자가 될 것이니, 신성한 봄(Sight Divine)은 이런 특별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을 뜨는 데 성공한 자들을 굳게 붙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니, 마치 자석이 쇠를 끌어당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 4장 해설
마음의 잔: 그노시스를 통한 세례와 완전한 인간
앞선 「거룩한 담론」이 우주의 영원한 순환과 재생의 법칙을 거시적으로 조망했다면, 네 번째 논고인 「잔, 혹은 모나드」는 그 거대한 우주적 드라마가 어떻게 개별 인간의 영혼 안에서 구체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의 열쇠를 제공합니다. 이 논고의 중심에는 ‘거대한 잔(a mighty Cup)’, 즉 크라테르(Krater)라는, 헤르메스주의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희망적인 상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잔’은 신이 인류에게 내려준 신성한 지성의 세례반이며, 이 잔에 스스로를 담그는 자는 필멸의 존재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위대한 변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성한 상급: 이성과 마음의 차이
이야기는 신이 인류에게 베푼 은총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헤르메스는 그의 아들 타트에게, 신께서 모든 인간에게는 이성(Logos)을 나누어 주셨지만, 마음(Nous)은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성(로고스)은 인간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세상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귀한 선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열쇠인 ‘마음(누스)’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위해 “마치 상(prize)처럼”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헤르메스주의의 구원이 단순한 믿음이나 수동적인 기다림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 자신의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참여와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신은 구원의 가능성을 ‘거대한 잔’에 담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 보냈지만, 그 잔을 발견하고, 그 안의 내용물을 마시는 것은 오직 각자의 몫입니다.
마음의 세례: 새로운 입문 의식
신은 이 잔을 내려 보내며, 전령(Herald)으로 하여금 인류의 마음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게 합니다. “이 잔의 세례로 스스로를 정화하라, 그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여, 그대는 잔을 내려보내신 분께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요,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아는 자로다!”
이 선포는 헤르메스주의적 입문 의식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이 세례는 사제가 집전하는 외부적인 의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화하는” 내면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입니다. 둘째, 이 세례는 믿음과 앎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즉, 신에게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faith)’과, 자신이 신성한 기원을 가진 존재임을 아는 근원적인 ‘자기 인식(self-knowledge)’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례가 물로써 원죄를 씻는 기독교의 세례와는 그 목적과 본질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헤르메스주의의 세례는 ‘마음(Nous)의 잔’에 잠기는 것이며, 그 목적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그노시스(Gnosis)’, 즉 신적인 앎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별적이고 유한한 마음을, 우주에 편재하는 신성한 마음의 바다에 온전히 담그고 합일시킬 때, 구도자는 비로소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고 ‘완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G.R.S. 미드는 이 신성한 지성의 잔, 즉 ‘크라테르’의 이미지가 후대 유럽의 ‘성배(Holy Grail)’ 전설의 먼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상징이 지닌 풍부한 신화적 울림을 암시합니다.
두 종류의 인류: 영지주의자와 질료주의자
이 전령의 부름 앞에서 인류는 두 갈래의 길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전령의 소식을 이해하고 마음속에 잠긴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노시스에 참여하게 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며, 육체의 감각적 쾌락을 경멸하고,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하나(One and Only One)”를 향해 서둘러 나아갑니다. 이들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영지주의자(Gnostic)’, 즉 아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그 소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이 부여한 보편적인 이성(Logos)만을 가졌을 뿐, 더 높은 차원의 마음(Nous)을 얻지 못했기에,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의식은 “이성 없는 피조물들의 감각과 같아서”, 오직 “육체의 쾌락과 그 욕망들”에만 모든 생각을 집중하며, 그것을 위해 인간이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이들이 바로 물질세계의 환영에 갇힌 자들, 즉 ‘질료주의자(Hylic)’입니다. 이 논고는 운명론이나 예정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잔은 모두에게 주어졌으며, 그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세례의 대가: 육체의 미움
대화의 마지막, 아들 타트가 자신 또한 그 잔으로 세례받기를 간청하자, 헤르메스는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마지막 전제 조건을 제시합니다. “아들아, 네가 먼저 네 육체를 미워하지 않는 한, 너는 네 참된 자아를 사랑할 수 없다.”
여기서 ‘육체를 미워한다’는 것은, 일부 영지주의 분파처럼 물질세계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육체를 혐오하거나 학대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가 주는 ‘감각적 쾌락’과 ‘덧없는 격정’이 마치 삶의 전부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육체의 폭정’을 미워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필멸의 육체와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결코 불멸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즉 감각의 세계로부터의 의식적인 ‘분리’와 ‘초월’이야말로, 신성한 마음의 잔에 잠기기 위해 치러야 할 마지막 대가입니다.
「잔, 혹은 모나드」는 구원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마음의 잔)을, 인간이 자신의 의지적 선택과 헌신(세례)을 통해 쟁취하는 신과 인간의 공동 작업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작은 조각배에 만족하며 감각의 바다 위를 표류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하게 그 배를 버리고, 그노시스라는 무한한 마음의 대양 속으로 뛰어들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