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구원을 위한 길: 윤리와 의식

by 이호창

제10장: 구원을 위한 길: 윤리와 의식


10.1. 육체에 대한 태도: 극단적 금욕주의와 자유주의


우리는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심오한 신화와 그 토대가 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우주는 불완전한 창조주의 작품이며, 우리의 육체는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한 영(프네우마, Pneuma)을 가두고 있는 어두운 '감옥(soma sēma)'입니다. 이처럼 급진적인 전제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근본적인 실천적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감옥과도 같은 육체를 입고, 이 이질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이 내놓은 대답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동일한 신학적 전제 위에서, 서로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개의 극단적인 삶의 방식, 즉 '극단적 금욕주의(Extreme Asceticism)'와 '급진적 자유주의(Radical Libertinism)'를 도출해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윤리적 태도는 영지주의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사상이 지닌 복잡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첫 번째 길: 극단적 금욕주의 (Extreme Asceticism)


영지주의자들이 택했던 길 중에서 더 보편적이고, 그들의 문헌에서도 더 자주 발견되는 것은 바로 금욕주의적 삶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매우 명료하고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근거:

만약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고, 육체적 욕망(식욕, 수면욕, 성욕 등)이 바로 그 감옥의 벽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영혼을 물질세계에 묶어두는 쇠사슬이라면, 구원을 향한 길은 이 쇠사슬을 끊어내고 감옥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즉, 육체의 요구를 최소화하고 그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내 안에 갇힌 영(프네우마)이 육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힘과 자유를 되찾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라는 '적'을 상대로 영혼의 해방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천 방식 (아스케시스, Askēsis):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들은 엄격한 자기 수련, 즉 '아스케시스'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금식을 통해 식욕을 억제하고, 잠을 줄여 육체의 나태함을 경계했으며, 세상의 부와 명예를 뜬구름처럼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性)과 결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성적 결합과 출산은, 또 다른 신성한 불꽃을 이 비참한 물질의 감옥 속에 가두는, 데미우르고스의 창조 행위에 협력하는 가장 끔찍한 행위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영지주의자는 독신을 통해 이 타락한 세계의 재생산 고리를 끊어내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주적 해방을 위한 실천적 투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추구하는 경지:

그들의 목표는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격정(파토스, pathos)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아파테이아, apatheia)'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스토아 철학(Stoicism)의 이상과도 유사하지만, 그 동기는 달랐습니다. 스토아 철학이 이성적인 삶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다면, 영지주의적 금욕주의는 이 자연(물질세계)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토마스 선수(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와 같은 문헌은 이러한 금욕주의적 투쟁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번째 길: 급진적 자유주의 (Radical Libertinism)


바로 이 지점에서 영지주의의 놀라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동일한 전제, 즉 '육체는 감옥이며, 내 안의 영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두 번째 길은 주로 이레나이우스와 같은 이단 논박가들의 비난 속에 등장하기에 그 실체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그 철학적 논리는 금욕주의만큼이나 일관성이 있습니다.


철학적 근거:

만약 나의 참된 자아가 육체가 아닌 신성한 영(프네우마)이라면, 그리고 그 영은 지고의 신에게서 온 파편이기에 본질적으로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 비천한 육체가 무슨 짓을 하든 나의 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진흙 속에 떨어진 진주가 그 가치를 잃지 않듯이, 신성한 영은 육체의 행위로 인해 결코 오염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와 그 창조주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모든 도덕률과 사회적 규범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위반하고 조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자유를 증명하는 행위가 됩니다.


실천 방식:

이들의 행동 원리는 '세상의 법칙에 대한 완전한 경멸'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은 독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탐닉함으로써 그 힘을 소진시키고, 그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단 논박가들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심지어 성적인 문란함을 통해 데미우르고스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인파(Cainites)와 같은 그룹은 구약성서의 악인들, 즉 카인, 에사오, 소돔 사람들, 심지어 예수를 배반한 유다까지도 데미우르고스에게 저항한 위대한 영적 영웅으로 숭배했다고 전해집니다.


한계와 왜곡: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을 공격했던 적들의 증언이라는 점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자신의 반대파를 '부도덕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흔한 수사적 공격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의 자유주의가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실천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며, 상당 부분은 이단 논박가들의 악의적인 과장과 왜곡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상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지주의의 이원론이 품고 있던 급진적인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상반된 길, 하나의 목표


극단적 금욕주의와 급진적 자유주의. 이 두 길은 표면적으로는 물과 불처럼 서로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두 길 모두 '육체와 물질세계에 대한 깊은 경멸'이라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하며, '육체의 지배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동일한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욕주의자는 감옥의 간수인 '육체적 욕망'을 굶겨 죽임으로써 탈출을 시도합니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간수를 조롱하고 감옥의 규칙을 유린함으로써 자신의 영이 감옥에 속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부류 모두 자신들이 감옥에 갇혀 있으며 간수(데미우르고스)의 권위가 부당하다는 데에는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의 윤리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떤 행위가 내 안의 신성한 불꽃을 일깨우고, 이 어두운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에 도움이 되는가'였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규범의 윤리'가 아니라, 깨달음의 상태를 지향하는 '의식의 윤리'였습니다. 육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극단적인 고민은, 인간 영혼의 해방을 향한 그들의 처절하고도 진지했던 투쟁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10.2. 세례와 성찬: 영지주의 의식의 재구성


우리는 앞선 장에서 영지주의의 급진적인 이원론이 어떻게 육체를 대하는 극단적인 윤리, 즉 금욕주의와 자유주의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삶을 치열하게 성찰했던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는 어떻게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고 실천했을까요? 영지주의는 결코 고독한 철학자들의 사변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화를 재현하고, 구원의 여정을 단계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구체적인 의식(Sacrament), 즉 '미스터리(Mystery)'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근본적인 전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의식의 힘은 사제나 정해진 절차, 혹은 성스러운 물질(포도주와 빵)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물리적 행위는 오직 내면의 영적인 사건, 즉 '그노시스(Gnosis)'의 각성을 촉발하기 위한 '상징'이자 '촉매'일 뿐이었습니다. 받는 이의 이해와 영적인 준비가 없다면, 그 어떤 화려한 의식도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빌립복음(The Gospel of Philip)』이 말하듯, "진리는 이 세상에 벌거벗고 오지 않고, 상징과 이미지 속에 담겨 옵니다." 영지주의 의식은 바로 그 상징이라는 옷을 통해, 그 안에 감추어진 벌거벗은 진리의 몸을 만지려는 신성한 시도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두 의식인 세례와 성찬이, 이 '영적인 시장'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미스터리: 세례, 세상에 대한 죽음의 선포


주류 교회를 형성해가던 '원시-정통파(proto-orthodox)'에게 세례는 매우 중요한 공적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원죄를 씻고, 이교도의 삶을 청산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입문 의식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신자는 구원을 약속받고, 장차 있을 육체의 부활을 희망하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 역시 세례를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여겼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세례는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구원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급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세상과의 결별, 그리고 죽음:

영지주의적 세례는 무엇보다도 이 물질세계와 그 지배자인 데미우르고스 및 아르콘들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결별 의식'이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단순히 죄를 씻는 것을 넘어, 이 세상이라는 어둠과 혼돈의 물속으로 상징적으로 '죽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의 법칙과 운명에 속한 자가 아니다"라고 선포하는, 영적인 독립 선언이었습니다.


현재적 부활과 깨어남:

물에서 다시 나오는 행위는, 미래에 있을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어차피 벗어 버려야 할 감옥이기에, 그것의 부활은 무의미했습니다. 대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지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현재적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세례는 영혼이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처음으로 자각하고, '그노시스'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르콘들로부터의 보호:

영지주의 세례 의식에는 종종 비밀스러운 이름이나 상징, '인장(seal)'을 사용하는 절차가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세례받는 이의 영혼에 일종의 '영적인 문신'을 새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인장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천상의 영역들을 통과할 때, 각 하늘의 관문을 지키는 아르콘들이 자신들의 소유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영적 여권'의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영혼에게 최소한의 보호 장비를 갖추어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어떤 문헌들은 단 한 번의 세례가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깨달음에 이를 때마다 반복되는 여러 단계의 영적 세례가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미스터리: 성찬, 신성한 지혜를 먹고 마시다


세례와 함께 초기 기독교의 핵심 의식이었던 성찬 역시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정통 교회에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고, 빵과 포도주를 그의 몸과 피로 받아 모심으로써 그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적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앎'을 통해 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성찬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습니다.


상징으로서의 몸과 피:

『빌립복음』은 이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제공합니다. "그의 육체는 '말씀(로고스, Logos)'이고, 그의 피는 '성령(프네우마, Pneuma)'이다." 즉, 영지주의자들에게 성찬은 문자 그대로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말씀)'을 받아들여 소화하고, 그의 '신성한 영(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상징하는, 지극히 철학적이고 영적인 행위였습니다.


지식의 양식, 영혼의 음료:

그들에게 빵을 먹는 것은 구원자 그리스도가 전해준 비밀의 지혜, 즉 그노시스를 내면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메마른 영혼이 신성한 생명력과 활기로 가득 채워지는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받는 행위가 아니라, 무지를 깨뜨리고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영적인 식사'였습니다.


선택된 이들의 교제:

이러한 성찬은 모든 신자에게 공개된 대중적인 의례라기보다는, 그 비밀스러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동료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지혜를 공유하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영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성스러운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기존 기독교의 보편적인 의례를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의식의 '껍데기'는 그대로 유지하되,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알맹이를 자신들의 이원론적이고 영적인 세계관에 맞추어 완전히 새롭게 채워 넣었습니다.


그들에게 의식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참여하는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적 드라마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재현하고, 상징을 통해 더 높은 실재와 접속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였습니다. 세례를 통해 영혼은 세상에 대해 죽고 '그노시스' 안에서 다시 태어났으며, 성찬을 통해 신성한 지혜를 양식으로 삼아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이 두 의식은 영혼이 마침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빛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구원의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신성한 관문이었습니다.


10.3. 테우르기(Theurgy): 신성과의 합일을 위한 실천적 기술


우리는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윤리적 삶의 태도와, 세례나 성찬과 같은 핵심적인 공동체 의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실천적 측면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올바르게 살거나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 우주의 감옥을 '실제로' 돌파하여 신성한 근원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철학적 사유와 명상을 넘어, 훨씬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기술들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기술들을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용어인 '테우르기(Theurgy)'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테우르기란 무엇인가: 신학을 넘어 신성 마법으로


'테우르기'라는 단어는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테오스(theos)'와 '일' 또는 '작업'을 의미하는 '에르곤(ergon)'의 합성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신적인 작업' 혹은 '신성 마법'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에 '대해서' 사유하고 말하는 '신학(theology)'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신학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활동이라면, 테우르기는 신성한 실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와 소통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위'이자 '기술'입니다.


또한 테우르기는 개인의 이익이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일반적인 '마술(thaumaturgy)'과도 구분됩니다. 테우르기의 유일하고도 고귀한 목적은, 수행자의 영혼을 정화하고, 물질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끌어올려, 마침내 신적인 존재와 합일(헤노시스, henosis)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테우르기는 기도, 주문, 신성한 이름의 반복, 상징물의 사용, 특정 의례의 집전과 같은 다양한 기술들을 사용합니다.


고전적인 영지주의자들이 '테우르기'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용어는 3세기 후반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이암블리코스(Iamblichus)에 의해 체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수한 철학적 명상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영혼이 너무나도 깊이 물질세계에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사유만으로는 이 속박을 끊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신들이 물질세계 속에 심어놓은 신성한 '상징(심볼론, symbolon)'과 '징표(신테마, sunthēma)'를 사용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위', 즉 테우르기적 의례를 통해 신들과 직접 소통해야만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지주의의 실천적 측면과 깊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 역시 인간의 영혼이 깊은 감옥에 갇혀 있으며,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외부로부터 오는 계시, 즉 '그노시스'와 더불어, 그 깨달음을 실현하고 영혼의 상승을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기술'들이 필요했습니다.


영지주의적 테우르기: 영혼 상승의 기술들


영지주의 문헌, 특히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나 세트파(Sethian)의 여러 문헌들은 이러한 테우르기적 실천의 흔적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영지주의가 단순한 비관주의 철학이 아니라,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기술 체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신성한 이름과 주문(Logoi)의 권능:

고대 세계에서는 어떤 존재의 '진정한 이름'을 아는 것이 곧 그 존재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이 원리는 구원의 핵심 기술이었습니다. 그들의 문헌에는 "이아오(Iaō)", "사바오트(Sabaōth)", "아브라삭스(Abrasax)"와 같은 강력한 신의 이름들과, ΑΕΗΙΟΥΩ 와 같이 일곱 개의 모음을 길게 늘어놓은 불가해한 주문들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각각이 우주의 특정 권능과 상응하는 '마법적 공식(formula)'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는 의례 중에 이 이름들과 주문을 정확하게 발음함으로써, 상위의 빛의 존재들을 초환(invocatio)하여 도움을 청하거나, 하위의 아르콘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장(Sphragis)과 상징의 활용:

영혼을 보호하고 변형시키는 또 다른 중요한 기술은 '인장(sphragis)'과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기름 부음(anointing)' 의식은, 신성한 빛의 인장을 영혼에 찍어, 아르콘들이 그 영혼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거나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테우르기적 행위였습니다. 또한 어떤 의식에서는 제단 위에 특정한 기하학적 문양이나 상징을 그리거나, 명상 중에 그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들은 우주의 구조를 축소해 놓은 '소우주(microcosm)'로서, 수행자가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구조를 재편하고 우주적 힘과 조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영혼의 상승 의례: 죽음 이후의 여정을 위한 안내서:

영지주의적 테우르기의 정점은 바로 '영혼의 상승 의례'에서 나타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일곱 겹의 하늘을 통과하여 빛의 고향 플레로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각 하늘의 관문은 사악한 아르콘들이 지키고 서서, 영혼의 통과를 가로막습니다. 이때 영혼은 이승에서 미리 배워둔 테우르기적 기술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영혼은 각 관문에 도달할 때마다, 그곳을 지키는 아르콘의 '진정한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보호하는 '인장'을 보여주며, 통과를 위한 '암호(password)'를 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은 아르콘을 향해 "너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너보다 더 높은 곳, 빛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나는 너의 법칙에 속하지 않으니 길을 비켜라!" 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노시스'를 선언함으로써 아르콘의 권능을 무력화시킵니다. 『피스티스 소피아』나 여러 세트파 문헌들은 바로 이 죽음 이후의 여정을 위한 상세한 '가이드북'이자 '천상계의 지도'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준비된 기술을 통해 능동적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영적인 투쟁입니다.


신성과의 합일: 내가 곧 신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테우르기는, 단순히 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넘어, 수행자 자신이 신적인 존재와 '동일화(identification)'되는 경지를 추구합니다. 특정 의식과 강렬한 명상 속에서, 영지주의자는 자신이 경배하는 그리스도나 특정 아이온을 자신의 내면으로 초환(招還)하여 그 존재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체험을 시도합니다. 이 순간, '나'라는 개별적 자아는 잠시 사라지고, 나는 신성한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의 권능을 잠시나마 공유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내 안의 신성한 불꽃이 그 근원과 다시 만나는, 지상에서 미리 체험하는 '신부의 방'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의 실천적 측면은 우리에게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철학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주론적 지도를 손에 들고, 영혼의 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기도와 주문, 상징과 의례라는 다양한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영적인 기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노시스는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실천되고, 행해지며, 마침내 자신의 존재 전체로 성취되어야 할, 위대한 '신성한 작업(Theurgy)'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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