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그노시스(Gnosis), 아는 것이 구원이다

지식(Episteme)을 넘어선 영적 통찰

by 이호창

영지주의 사상 - 그노시스, 깨달음을 향한 철학과 실천


우리는 앞서 장대한 우주적 신화의 드라마를 목격했고, 그 신화를 믿었던 이들의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거쳐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 앞에 남아있습니다. 그 모든 신화와 역사를 움직였던 내면의 동력,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사유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잃어버렸던 도시의 유적지를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시선에서, 그 안에서 발견된 비밀스러운 파피루스를 해독하는 철학자의 시선으로 전환해야 할 시간입니다. 제3부는 바로 영지주의라는 거대한 건축물의 설계도를 펼쳐보고, 그 기둥과 들보를 이루는 핵심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하나씩 해부하는, 가장 지적이고도 내밀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했으며, 그들의 역사는 어떤 '사상적 투쟁'의 결과였습니까?


이 지적인 탐험을 위해, 우리는 먼저 그 모든 사상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그노시스(Gnosis)'라는 특별한 '앎'의 본질을 탐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앎'이 단순한 지식(Episteme)을 넘어, 어떻게 존재 자체를 변형시키는 영적 통찰이 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왜 그들에게 그토록 '깨달음'이 절실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 보는 그들의 근본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담한 대답을 들어볼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졌는지를 탐구할 것입니다. 감옥과도 같은 육체를 대하는 그들의 극단적인 윤리적 태도를 살펴보고, 세례와 성찬과 같은 보편적인 의식이 그들의 손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었는지 재구성해 볼 것입니다. 나아가 '테우르기(Theurgy)'라 불리는 신성과의 합일을 위한 실천적인 기술들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론적 분석을 넘어,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복음』의 선문답 같은 지혜를, 『요한의 비밀 가르침』의 장대한 서사를, 『피스티스 소피아』의 처절한 기도를, 『빌립복음』의 신비로운 상징을, 그리고 『진리의 복음』의 시적인 울림을 직접 읽으며,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은 우리를 영지주의자들의 가장 깊은 정신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난해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가장 깊고도 내밀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제9장: 그노시스(Gnosis), 아는 것이 구원이다


9.1. 앎의 본질: 지식(Episteme)을 넘어선 영적 통찰


우리는 지금까지 영지주의가 그려낸 장대하고 비극적인 신화의 세계를 탐험했고, 그 사상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피어났다가 스러져 갔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신화와 역사가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핵심, 즉 영지주의 사상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그노시스(Gnosis)'의 심장부로 들어가려 합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앎'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그노시스'에서 비롯되었듯, 그들의 모든 것은 이 특별한 '앎'을 중심으로 회전합니다.


그렇다면 '그노시스'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이라는 단어와 어떻게 다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고대 그리스인들이 '앎'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분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행위에는 여러 차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실과 명제에 대한 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ēmē)'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다"와 같이, 책을 통해 배우고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입니다. 둘째는 기술적인 지식, 즉 '테크네(Technē)'입니다. 이는 목수가 나무로 의자를 만드는 법을 알거나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훈련과 실습을 통해 체득하는 실용적인 '노하우'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는 이 두 가지 앎을 모두 초월하는 제3의 앎입니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에피스테메'도, 손으로 아는 '테크네'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로 겪어내는, 영혼을 뒤흔드는 '체험적 통찰'이자 '영적 각성'이었습니다.


지식(Epistēmē)의 한계: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당시 주류 교회가 강조했던 '신앙(피스티스, Pistis)'이나 '교리(독사, doxa)'는 구원의 본질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올바른 교리를 믿고, 경전의 모든 내용을 암기하며, 신학적 명제들에 동의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단지 '에피스테메'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통째로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메뉴에 적힌 음식의 이름과 재료, 조리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한들, 그것이 음식을 직접 맛보는 체험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메뉴판에 대한 지식은 결코 허기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레로마의 구조나 소피아의 추락, 데미우르고스의 창조에 대한 신화를 모두 알게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신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가리키는 '지도'에 불과합니다. 지도를 아는 것(에피스테메)과,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에 실제로 도달하는 것(그노시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릅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당시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구원의 여정에 대한 상세한 지도와 여행 안내서였을 뿐, 여행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이 지도를 불태우고 스스로가 바로 그 지도가 가리키던 보물임을 깨닫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노시스의 본질: 네 가지 측면


그렇다면 '그노시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지닐까요? 우리는 그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계시적 앎 (Revealed Knowledge):

그노시스는 인간의 노력이나 논리적인 추론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계시', 즉 상위의 빛의 세계로부터 오는 신성한 부름이자 조명(照明)입니다. 물질세계라는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살아가는 영혼에게, 동굴 밖에서 "이것은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이 외부의 부름, 즉 구원자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없이는 내면의 신성한 불꽃은 영원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노시스는 인간의 성취인 동시에 신성한 은총입니다.


자기 인식으로서의 앎 (Knowledge as Self-Knowledge):

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주의 비밀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그노시스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발렌티누스 학파의 유명한 공식은 그노시스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는 누구였으며, 무엇이 되었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로 던져졌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으며,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는가?

무엇이 탄생이며, 무엇이 거듭남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본래 빛의 세계 플레로마에 속한 신성한 존재였으나, 지금은 물질이라는 감옥에 갇혀 나의 기원을 잊어버린 유배자이다"라고 깨닫는 순간,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내 안의 신성한 불꽃이 곧 궁극의 아버지와 같은 본질(homoousios)임을 아는 것, 즉 '자기에 대한 앎'이 곧 '신에 대한 앎'으로 이어집니다.


체험적이고 합일적인 앎 (Experiential and Unitive Knowledge):

그노시스는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신을 '직접' 겪고 그와 하나가 되는 체험입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과, 그 사람과 사랑에 빠져 하나가 되는 체험이 전혀 다르듯이, 그노시스는 분석적 앎이 아닌 참여적 앎입니다. 이 순간, 인간의 영(프네우마)은 자신의 근원인 신성을 알아보고, 물방울이 바다로 돌아가듯 그 안으로 녹아들어 갑니다. 『빌립복음』에서 말하는 '신부의 방'의 신비가 바로 이러한 합일의 체험을 상징합니다.


구원적 앎 (Salvific Knowledge):

무엇보다도 그노시스는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을 지닙니다. 이 깨달음의 순간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변형을 가져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아르콘들의 지배와 운명(헤이마르메네)의 사슬은 힘을 잃고 끊어집니다. 마법사의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이 더 이상 그의 말에 조종당하지 않듯이, 이 세계가 감옥임을 깨달은 영혼은 더 이상 이 세계의 법칙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깨어남'은 구원을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라, '깨어남 그 자체가 곧 구원'이었습니다.


그노시스의 열매: 깨달은 자의 삶


이러한 그노시스를 체험한 사람, 즉 '영지주의자(그노스티코스, Gnostikos)'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언젠가 벗어 버려야 할 낡은 옷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부와 명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연극 무대의 소품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도덕률이나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영혼을 속박하기 위한 아르콘들의 규칙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노시스는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 전체를 뿌리부터 바꾸어 놓는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신화와 역사, 철학이 귀결되는 단 하나의 지점이며, 영지주의라는 이름의 배가 항해하는 단 하나의 목적지였습니다. 그것은 교리가 아닌 체험이며, 믿음이 아닌 앎이고, 복종이 아닌 해방입니다.


9.2. 이원론적 세계관: 빛과 어둠, 영과 물질의 대립


우리는 앞선 장에서 영지주의 구원의 핵심이 '그노시스(Gnosis)', 즉 자기 자신과 신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앎'에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이 '앎'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일까요? 왜 영지주의자들은 평범한 믿음이나 선행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을까요? 그 대답은 바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틀, 즉 모든 것을 두 개의 상반된 원리로 나누어 이해하는 '이원론적 세계관(Dualistic Worldview)'에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의 모순을 경험합니다. 고결한 이상을 꿈꾸면서도 비천한 욕망에 시달리고, 영원한 것을 갈망하면서도 썩어 없어질 것들에 집착하며,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수많은 굴레에 스스로를 묶습니다. 영지주의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이 내면의 전쟁을, 단지 개인의 심리적 갈등이나 도덕적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두 실재의 싸움이 인간이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나의 내면적 갈등은 곧 우주적 전쟁의 반영입니다.


단순한 선악 대결을 넘어서


'이원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선한 신과 악한 악마가 세상을 놓고 싸우는 그림을 떠올립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에서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어둠의 신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가 벌이는 투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이러한 '윤리적 이원론'이나 '신화적 이원론'을 넘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존재론적 이원론(Ontological Dualism)'의 성격을 띱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핵심적인 대립은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존재(being)' 혹은 '실재(reality)' 사이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재 전체를 다음과 같은 상반된 원리들의 쌍으로 이해했습니다.


빛 (포스, Phos) ↔︎ 어둠 (스코토스, Skotos)

영 (프네우마, Pneuma) ↔︎ 물질 (휠레, Hylē)

앎 (그노시스, Gnosis) ↔︎ 무지 (아그노시아, Agnōsia)

충만 (플레로마, Pleroma) ↔︎ 결핍/공허 (케노마, Kenoma)

참된 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 ↔︎ 거짓 신 (데미우르고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둠'이나 '물질', '무지'가 '빛'과 동등한 힘을 가진 독립적인 악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빛의 '부재(absence)', 영의 '결핍(deficiency)', 그리고 앎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악은 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 상태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추위가 열의 부재이듯이, 어둠과 물질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영이 결여된 하위의 그림자 같은 실재입니다.


두 개의 실재: 영(Pneuma)과 물질(Hylē)


영지주의 세계관의 두 축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영'과 '물질'입니다.


영(프네우마, Pneuma)의 세계:

이것은 참된 실재의 영역이며, 빛의 세계 플레로마와 동일시됩니다. 그 본질은 순수한 빛, 의식, 그리고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고, 썩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곳에는 분열이나 갈등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어떤 결핍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충만'의 상태입니다. 이 영역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아이온들의 고향입니다.


물질(휠레, Hylē / 사륵스, Sarx)의 세계:

이것은 참된 실재가 아닌, '비(非)존재' 혹은 '열등한 존재'의 영역입니다. 이곳은 무지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만들어진, 영의 세계에 대한 서투른 모방품입니다. 그 본질은 어둠, 무의식, 그리고 혼돈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결국에는 썩어 없어지는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곳에는 분열과 갈등, 고통과 죽음이 가득하며, 근본적으로 '결핍'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와 우리의 육체가 바로 이 물질의 영역에 속합니다.


전쟁터로서의 인간


영지주의 이원론의 비극성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바로 이 서로 상반되고 이질적인 두 개의 실재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충돌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지주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모순적인 복합체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한 '영의 불꽃(프네우마)'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꽃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저열한 '정신적 영혼(프시케)'과, 썩어 없어질 '물질의 육체(휠레/사륵스)'라는 두꺼운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은 이 두 세계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터가 됩니다. 영(프네우마)은 자신의 고향인 빛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육체(사륵스)와 정신(프시케)은 물질세계의 쾌락과 욕망, 두려움과 같은 격정에 이끌려 영혼을 아래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내면의 갈등, 즉 선을 행하고 싶지만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는 바울의 로마서 7장 고백과도 유사합니다)은, 바로 이 우주적 전쟁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영지주의자에게 '나'는 하나의 통일된 자아가 아니라, 신적인 불꽃과 동물적인 육체,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신이 뒤섞인 비극적인 전장인 것입니다.


다른 세계관과의 비교


이러한 영지주의의 급진적인 이원론은 다른 사상 체계와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주류 기독교의 이원론:

기독교 역시 신과 사탄,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윤리적 이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창조 세계'에 대한 평가에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보며 "보시니 좋았더라"고 선언합니다. 즉, 물질세계 자체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 남용, 즉 '원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이와 달리, 자유의지의 문제를 넘어 창조 세계와 그 창조주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훨씬 더 급진적인 길을 갑니다.


플라톤주의의 이원론:

영지주의는 플라톤주의로부터 '이데아 세계'와 '현상 세계'라는 두 세계 모델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현상 세계는 비록 이데아의 불완전한 그림자일지언정, 그 안에서 신적인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성을 통해 이데아로 상승할 수 있는 '사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반면, 영지주의는 이 사다리를 '감옥의 창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현상 세계는 우리를 상승으로 이끄는 발판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멀게 하여 탈출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동양 사상의 일원론(Monism):

힌두교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ānta)나 불교, 도교와 같은 많은 동양 사상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향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분열과 고통의 세계는 근원적 실체(브라만, 공(空), 도(道))의 또 다른 표현이거나, 우리의 무지(마야, 무명)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이 모든 것이 본래 하나임을 깨닫고 분별심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는 영과 물질이 결코 화해하거나 하나가 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실재라고 주장하며 뚜렷한 대립각을 세웁니다.


이 지점에서 영지주의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무게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단지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실존의 조건을 규정하는 선언입니다. '당신은 본래 빛의 자녀이지만, 지금 어둠의 세계에 포로로 잡혀 있다. 당신의 몸은 감옥이며, 당신이 따르는 세상의 법칙은 교도관의 규칙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진단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그노시스'라는 단 하나의 처방전, 즉 '깨달음을 통한 탈출'이 그토록 절실하고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9.3. 악의 문제: 영지주의는 어떻게 답했는가?


인류의 지성사를 관통하는 가장 집요하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의 문제', 신학적으로는 '신정론(Theodicy)'이라 불리는 난제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가 명쾌하게 정리했듯, 이 질문은 하나의 강력한 논리적 딜레마를 형성합니다.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그는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악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이 질문은 특히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 전선(Omnibenevolence)을 속성으로 하는 유일신을 믿는 유대-기독교 전통에 가장 큰 신학적 도전이었습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에, 왜 무고한 아이들의 질병, 잔혹한 자연재해,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폭력과 같은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가?

이 딜레마에 대해, '정통(Orthodoxy)'으로 자리 잡은 기독교는 주로 두 가지 대답을 제시해왔습니다. 첫째는 '자유의지론(Free Will Defense)'입니다. 신은 인간과 천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으며, 악은 그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신에게 반역(사탄의 타락, 아담의 원죄)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가해한 섭리론'입니다. 이 세상의 악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신의 더 큰 계획과 섭리의 일부이며, 결국에는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에게, 이 두 가지 대답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변명처럼 들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알면서도 왜 그런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그리고 지진이나 역병과 같은 자연의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더 큰 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신을, 과연 전선(全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처럼 기존의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어내려 애쓰는 대신, 과감하게 칼을 들어 매듭 자체를 잘라버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에피쿠로스의 딜레마가 가진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악의 세계를 창조한 신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지고의 참된 신이 아니다."

이 하나의 선언을 통해, 영지주의는 악의 문제를 가장 우아하고도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딜레마는 소멸되고, 모든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새로운 그림이 펼쳐집니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은 지고의 아버지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의 세계 플레로마(Pleroma)의 완전함 속에서, 아이온 소피아(Sophia)가 저지른 하나의 '실수', 즉 '격정(파토스, pathos)'과 '결핍'에서 비롯된 우주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악은 선과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자 빛의 부재 상태, 즉 '무지(아그노시아, agnosia)'의 다른 이름입니다.


왜 이 세상은 이토록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가?


세상이 불완전한 이유는 그 창조주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물질 우주를 만든 데미우르고스(Demiurge), 즉 얄다바오트는 바로 그 소피아의 실수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원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이며, 질투와 오만에 가득 찬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결함 있는 설계자가 만든 우주가 결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자연재해, 질병, 약육강식의 잔인함, 그리고 죽음과 부패의 법칙은 모두 이 창조주의 무능과 사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증거입니다.


왜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가?


인간의 내면적 갈등은 우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근원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한 '영의 불꽃(프네우마, Pneuma)'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불꽃은 선하며, 자신의 고향인 빛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와 정신적 영혼(프시케, psychē)은 데미우르고스와 그의 아르콘(Archon)들이 만든 것으로, 물질세계의 저열한 정념과 무지에 쉽게 휩쓸립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내 안의 신성이 데미우르고스가 심어놓은 어둠과 벌이는 끊임없는 내전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고의 아버지는 전능하지 않은가?


지고의 아버지는 여전히 완전하고, 선하며, 자신의 영역인 플레로마 안에서는 전능합니다. 다만 그는 이 저급한 물질 우주를 직접 창조하지도, 통치하지도 않았기에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그의 권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다른 차원'의 현실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파편인 '영의 불꽃'들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 그리스도를 파견하여 '그노시스'라는 빛을 비춤으로써 간접적으로 개입합니다. 그의 힘은 세상을 강제로 바꾸는 '권력'이 아니라, 영혼을 스스로 깨어나게 하는 '지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영지주의적 해답이 지닌 가장 큰 힘은, 그것이 제공하는 심리적, 영적 해방감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내가 겪는 고통과 세상의 부조리는 더 이상 내가 원죄를 지었기 때문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따른 시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이방인'으로서, '잘못 만들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가 느끼는 소외감과 세상과의 불화는 나의 나약함이나 죄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내 영혼이 이 어둠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고귀한 빛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입니다. 이 깨달음은 인간을 부당한 죄책감에서 해방시키고, 자신의 고통을 새로운 의미로 바라보게 합니다.


나아가, 인간은 더 이상 수동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우주적 구원 드라마에 동참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됩니다. 내가 '그노시스'를 통해 내 안의 신성을 깨닫고 해방시키는 행위는, 단지 나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넘어, 소피아의 실수로 인해 발생했던 플레로마의 결핍을 치유하고, 흩어졌던 빛을 다시 모아 우주의 조화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거룩한 '티쿤(Tikkun, 복원)'의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영지주의는 '악의 문제'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한 기존의 모든 상식을 뒤엎는 대담하고도 정교한 사상의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진단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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