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주변부의 목소리들

살아남은 영지주의

by 이호창

제7장: 주변부의 목소리들


7.1. 살아남은 영지주의, 만다야교(Mandaeism)


우리는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들이 어떻게 박해받고 소멸하여 마침내 1,500년의 침묵 끝에 나그 함마디의 문서들을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거대한 역사적 단절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은 채, 고대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간직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면 어떨까요? 놀랍게도 그러한 '살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그들이 바로 이라크와 이란 남부의 습지대에서 수천 년간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지켜온 만다야교(Mandaeism)입니다.


만다야교의 존재는 영지주의가 단지 고대의 문헌 속에만 존재하는 박제된 사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들의 신화와 의례, 그리고 공동체를 살펴보는 것은, 마치 우리가 책으로만 읽었던 고대의 영지주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는 것과 같은, 경이롭고도 생생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지식의 사람들'과 빛의 세계


'만다야(Mandaean)'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이 말은 그들의 언어인 만다야어(Mandaic, 아람어의 방언)로 '지식' 또는 '인식'을 의미하는 '만다(Manda)'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를 '만다 드 히야(Manda d-Hiia)', 즉 '생명의 지식(Gnosis of Life)'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노시스'를 통해 구원을 추구했던 고대의 영지주의자들과 정확히 동일한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또한 '나수라야(Nasoraean)'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진리를 지키는 자' 혹은 '비밀의 의례를 소유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보아온 영지주의의 급진적 이원론을 거의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과 어둠의 두 세계:

태초부터 우주에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위대한 생명'이라 불리는 지고의 신이 다스리는, 영원하고 순수한 '빛의 세계(alma d-nhura)'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둠과 혼돈의 왕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alma d-hshukha)'입니다.


불완전한 창조주, 프타힐:

이 물질세계는 빛의 세계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 빛의 세계를 모방하여 어둠의 물질로 세상을 만든 하위의 창조주, 즉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만다야교에서는 이 존재를 '프타힐(Ptahil)'이라고 부릅니다.


유배된 영혼:

인간의 영혼(니심타, nishimtha)은 본래 빛의 세계에 속한 신성한 존재였으나, 프타힐이 만든 육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자신의 고향을 잊어버린 '유배자'입니다.

이처럼 만다야교의 핵심 교리는, 우리가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발견한 세트파(Sethian) 영지주의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라는 거대한 나무의 잃어버렸던 한 가지(branch)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요한의 후예, 예수의 비판자들


그러나 만다야교는 기독교 영지주의와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와 세례 요한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평가입니다.

기독교 영지주의가 예수를 빛의 세계에서 온 구원자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반면, 만다야교는 예수(Yishu)를 그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거짓 예언자'이자 '마법사'로 여기며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대신, 그들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조력자로만 여겨지는 세례 요한(Yihia Yuhana)을 가장 위대하고 진실한 예언자이자 빛의 사자로 숭배합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생명의 지식'과 구원의 길인 '세례'의 비밀을 인류에게 전수해 준 진정한 스승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만다야교가 기독교의 영향권에서 발생한 분파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가 등장하던 시기,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독자적인 '유대-기독교적 침례교단'에서 기원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을 1, 2세기경 요르단 강 유역에서 활동했던, 어쩌면 에세네파(Essenes)와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 세례 공동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은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이주하여,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흐르는 물 속의 구원: 세례 의식 '마스부타(Masbuta)'


만다야교 신앙의 심장은 바로 '세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입문 의식이 아닙니다. '마스부타(Masbuta)'라 불리는 이 세례는, 영혼을 더럽히는 물질세계의 죄와 어둠을 씻어내고, 빛의 세계와의 연결을 회복하기 위해, 일요일마다 혹은 필요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거행되는 핵심적인 정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반드시 '살아있는 물', 즉 흐르는 강물(그들은 이를 '야르드나(yardna)'라고 부르는데, 이는 '요르단 강'을 의미합니다)에서만 거행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라스타(rasta)'라 불리는 순백의 의례복을 입고, 사제(타르미다, tarmida)의 집전 아래 강물에 세 번 몸을 담급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육체적, 영적으로 정화되고, 다시금 빛의 세계와의 연결을 회복한다고 믿습니다. 물은 그들에게 생명의 근원이자, 영혼을 정화하여 빛의 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신성한 통로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마시크타(Masiqta)'라고 불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특별한 상승 의례가 있습니다. 이는 영혼이 육체를 떠난 후, 어둠의 세계에 속한 여러 '감시소(matarata)'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빛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 복잡한 의식입니다. 이 역시 영지주의의 '아르콘의 하늘'을 통과하는 영혼의 여정과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증인들의 비극


이처럼 고유한 신앙을 지켜온 만다야교는, 수천 년 동안 이슬람, 기독교 등 주변의 거대 종교로부터 끊임없는 박해와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21세기 들어 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들의 공동체는 거의 파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학살당하거나 고향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지는 난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살아있는 영지주의'의 마지막 후예들은 소멸의 위기 앞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영지주의가 단지 고대의 문헌 속에 잠든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과 믿음, 그리고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이어져 온 하나의 길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만다야교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영지주의의 한 갈래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한 소중한 영적 유산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7.2. 뱀을 숭배한 자들: 오피스파(Ophites)와 그 외 그룹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발렌티누스(Valentinus)나 바실리데스(Basilides)와 같은 영지주의 스승들은, 당대의 철학적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심오한 의미를 재해석하려 했던 지적인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라는 거대한 강줄기에는, 이들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신화적이며,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는 급진적인 지류들이 함께 흘렀습니다. 이들은 주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주의자들의 눈에도 기이하고 위험하게 보였을지 모르는, 가장 논쟁적인 그룹들이었습니다.


이 '주변부의 목소리'들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들의 사상은 대부분 그들을 혐오했던 교부(敎父)들의 기록 속에 단편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단 논박가들이 씌워놓은 왜곡의 안경을 벗고, 그들의 비난 속에 숨겨진 이 급진주의자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지주의적 상상력이 얼마나 대담하고 자유롭게 뻗어 나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피스파(Ophites): 구원자로서의 뱀


이 급진적인 그룹들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이들은 바로 '뱀'을 숭배했던 이들입니다. '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피스(ophis)'에서 이름을 딴 오피스파(Ophites), 그리고 히브리어 '나아쉬(na'ash)'에서 유래한 나아세네파(Naassenes)가 바로 그들입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뱀이 타락과 유혹을 상징하는 가장 사악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의 사상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가치 전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뱀을 숭배했을까요? 그들의 논리는 영지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 즉 '창세기의 창조주는 무지하고 사악한 데미우르고스'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전복의 논리:

만약 에덴동산의 창조주가 인간을 무지 속에 가두어두려는 사악한 교도관이라면, 그 교도관의 '명령'을 어기도록 유도한 존재는 당연히 선한 해방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데미우르고스, 즉 얄다바오트(Yaldabaoth)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자신처럼 지혜롭게 되어 통제 불가능해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거짓말로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지혜의 전달자:

이때 나타난 뱀은, 이 거짓말을 간파하고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준 최초의 교사였습니다. 그는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 신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인간에게 '그노시스(Gnosis)'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따라서 뱀은 사탄의 하수인이 아니라, 오히려 상위의 빛의 세계, 혹은 추락한 지혜의 여신 소피아(Sophia)가 인간의 해방을 위해 파견한 비밀스러운 조력자였던 것입니다. 얄다바오트가 뱀에게 "너는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을 것"이라고 저주를 내린 것은, 그의 계획을 망쳐놓은 지혜의 전달자에 대한 분노와 보복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의례와 상징:

교부 오리게네스(Origen)에 따르면, 오피스파는 자신들의 우주론을 표현한 복잡한 '도해(diagram)'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도해에는 여러 개의 동심원과 함께, 각 천구를 지배하는 아르콘들의 이름(이오, 사바오트, 아도나이 등)이 적혀 있었고, 영혼이 이 관문들을 통과하기 위해 외워야 할 주문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체계적인 신화와 의례를 갖춘 공동체였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이단 논박가들은 그들이 성찬(Eucharist) 의식을 거행할 때, 살아있는 뱀을 풀어놓아 빵 위를 기어가게 함으로써 빵을 축성했다는 충격적인 비난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기록이 악의적인 왜곡일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이는 뱀이라는 상징이 그들의 예배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카인파(Cainites)와 유다: 성스러운 배반자


오피스파의 가치 전도가 '창조주가 금지한 것을 행한 자는 선하다'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카인파(Cainites)는 그 논리를 훨씬 더 극단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들은 "나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원리를 성서 전체에 적용했습니다. 즉, 구약성서의 신(데미우르고스)이 저주하고 벌했던 모든 인물이야말로, 사실은 이 사악한 창조주에게 저항했던 위대한 영적 영웅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Cain)을 숭배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데미우르고스가 총애하던 나약한 존재를 제거한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사오, 신에게 반역했던 코라, 그리고 신의 분노를 사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까지도 모두 데미우르고스의 폭정에 맞선 저항가로 존경했습니다.


카인파의 사상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중요한 인물은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유다를, 카인파는 '가장 완벽한 그노시스를 소유했던 유일한 제자'로 숭배했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유다는 다른 어리석은 제자들과는 달리, 구원자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명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프네우마)이 더러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육체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신성한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배반'은 돈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 기꺼이 역사상 최악의 악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자기희생적인 '성스러운 행위'였습니다. 유다는 데미우르고스와 그의 권속들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파괴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해방시키고 인류 구원의 길을 연 가장 위대한 영지주의자였던 것입니다. 2006년에 공개되어 큰 화제를 모은 『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은, 비록 카인파가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닐지라도, 바로 이러한 '배반자 유다'에 대한 긍정적인 재해석이 고대 기독교 세계에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오피스파와 카인파를 비롯한 급진적인 그룹들은, 정통 교회가 세워놓은 모든 신성한 가치와 도덕률을 의도적으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영지주의적 사유가 단순히 세상을 비관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저항과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들의 목소리는 이단 논박가들의 비난 속에 파편처럼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 파편들은 영지주의라는 거대한 모자이크가 얼마나 다채롭고,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눈부신 빛깔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소중한 흔적들입니다.


7.3. 영지주의 공동체 속 여성들의 역할과 권위


우리가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종종 남성 사도들과 교부(敎父), 주교들의 이름만을 마주하게 됩니다. 점차 체계화되어간 '정통(Orthodoxy)' 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보조적인 역할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이단'들의 도서관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곳에는 남성들과 동등하게, 혹은 때로는 그들을 능가하는 영적인 권위와 역할을 가졌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공동체가 여성들에게 이처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자체에 깊이 뿌리내린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신성한 여성성: 영지주의 신학의 토대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남성적(혹은 중성적) 개념으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수많은 영지주의 신화의 시작점에는 강력하고 주체적인 '여성적 신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신화편에서 보았듯, 궁극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유하여 낳은 첫 번째 생각이자 모든 것의 자궁인 바르벨로(Barbelo), 그리고 비록 추락했지만 우주적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지혜의 여신 소피아(Sophia)가 바로 그들입니다.


신성의 가장 높은 차원에 이처럼 '어머니'와 '지혜의 여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지상의 여성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성한 세계에 여성적 원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면, 이 땅의 여성들 역시 남성들과 동등하게 신성한 지혜, 즉 '그노시스(Gnosis)'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신학적 정당성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영지주의 공동체의 여성들은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예언자이자 교사, 그리고 사도로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경전 속의 증언: 사도를 가르치는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영지주의 공동체 내 여성의 높은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단연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e)입니다. 정통 복음서에서 그녀가 주로 예수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부활의 첫 목격자로 그려지는 반면, 영지주의 문헌 속에서 그녀는 모든 남성 제자들을 뛰어넘는, 예수의 가장 뛰어난 수제자이자 비밀의 지혜를 전수받은 유일한 계승자로 등장합니다.


『마리아복음(The Gospel of Mary)』의 투쟁:

이 복음서는 그 갈등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부활한 예수가 떠난 후,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로부터 개인적으로 전수받은 비밀 가르침을 이야기하며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수장 격인 베드로(Peter)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분개하여 이렇게 소리칩니다. "주님께서 정말 우리 몰래, 한낱 여자에게 그런 비밀을 말씀하셨단 말인가? 우리가 이제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이에 레위(Levi)가 나서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만일 구원자께서 그녀를 합당한 자로 여기셨다면, 당신이 무엇이기에 그녀를 거부하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그녀를 더 잘 아셨고,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셨다"라고 변호합니다. 이 장면은 개인의 직접적인 영적 체험(마리아)과 제도적 위계질서(베드로) 사이의 충돌을, 그리고 당시 기독교 공동체 내에 존재했던 여성 리더십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과 긴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빌립복음(The Gospel of Philip)』의 동반자:

이 텍스트는 마리아를 "구원자의 동반자(코이노노스, koinōnos)"라고 칭하며,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으며, 종종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곤 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스승이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자신의 지혜와 영(pneuma)을 직접 전수하는 가장 내밀한 행위를 상징합니다. 마리아는 구원자의 신성한 지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영적 파트너였던 것입니다.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의 수제자:

이 방대한 문헌에서 마리아는 단연 최고의 제자로 빛납니다. 그녀는 예수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해 다른 모든 제자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가장 깊이 있는 답변을 내놓으며 예수로부터 "모든 여인들 가운데 복된 자여", "네 안에는 빛이 있구나"라는 극찬을 받습니다.


이단 논박가들의 기록 속에 남은 증거


놀랍게도, 영지주의 공동체 내 여성의 활발한 활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일부는 그들을 가장 혐오했던 적들의 기록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단 논박가들은 영지주의의 '잘못된 점'을 고발하기 위해 그들의 집회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분노에 차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이단의 여자들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감히 가르치고, 논쟁에 참여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어쩌면 세례까지 베풀다니!"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는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끔찍한 일탈이었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이 문장은 당시 영지주의 여성들이 교사, 신학자, 치유자, 그리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동등하게 수행했음을 증명하는 생생한 증언으로 읽힙니다.


리옹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 역시 마르쿠스(Marcus)라는 영지주의 스승의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이 여성들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고, 심지어 성찬 의식을 직접 집전하도록 허용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비난 역시 그 공동체 내에 여성 예언자와 여성 사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강력한 반증입니다.


권위의 차이: 카리스마 대 직책


왜 이처럼 두 그룹 사이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갈렸을까요? 그것은 '권위'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정통' 교회는 점차 '직책(office)'과 '제도(institution)'에서 권위를 찾았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주교의 계보, 즉 사도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 권위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은 모두 남성이었기에, 사제직과 주교직 역시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반면, 영지주의 공동체의 권위는 '영적인 카리스마(charisma)'와 '개인의 그노시스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신성한 불꽃, 즉 '프네우마'에는 성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든지 '그노시스'를 통해 깊은 영적 깨달음을 얻고 예언이나 가르침의 은사를 보인다면, 그는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정통'이 승리하고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규정되는 과정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의 승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직책 중심의 남성적 위계질서'가 '카리스마 중심의 양성적 공동체'를 누르고 기독교의 유일한 모델로 자리 잡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바로 이 잊혔던 역사, 즉 초기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여성 리더십의 또 다른 가능성을 우리 앞에 복원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심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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