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오랫동안 검은 옷을 입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슬픔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죽음이 그렇게 삶의 반대편에 자리 잡은 것이. 그러나 루마니아 북부, 마라무레슈(Maramureș)의 작은 마을 서픈짜(Săpânța)에 가면, 죽음은 갑자기 다른 옷을 입는다. 푸른 하늘을 닮은 밝은 옷, 웃음과 다정한 농담을 품은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서픈짜의 ‘즐거운 묘지(Cimitirul Vesel)’에는 삶이 끝났다고 말하는 슬픔이 없다. 대신 그곳에 서 있는 푸른 나무 십자가들마다, 짧고 다정한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이 무거운 십자가 아래 내 고약했던 어머니가 누워 있네. 만약 아직 살아 있었다면, 난 편안할 수 없었을 거야." 어머니를 향한 이 짓궂은 농담은 고인을 잃은 슬픔조차 밝게 웃어넘긴다. 삶은 그렇게 웃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억된다.
이 독특한 묘지는 1935년, 스탄 이온 퍼트라슈(Stan Ioan Pătraș)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죽음의 표지를 잿빛 돌이 아닌, 밝은 색으로 물들인 오크 나무 십자가로 바꾸었다. 고인의 모습을 솔직하고 단순한 나이브 아트(naive art) 화풍으로 새겨 넣었고, 그 아래에 시를 적어 두었다. 사람들은 그의 십자가들을 통해 슬픔 대신 웃음을 배웠고, 두려움 대신 다정한 기억을 배웠다.
이 묘지의 십자가는 그림책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이는 생전에 술을 사랑했던 농부였고, 또 어떤 이는 잔소리 많던 장모였으며, 다른 이는 불행히도 기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이었다. 그들의 삶이 완벽하지 않았기에, 십자가 위에 담긴 이야기는 더욱 솔직하고 사랑스럽다. 완벽한 삶은 없으며, 다만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살아낸 순간만이 삶을 빛나게 한다는 것을 서픈짜는 말없이 보여준다.
서픈짜의 즐거운 묘지는 단지 한 예술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 깊은 뿌리에는 루마니아인의 독특한 정신, 바로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가 말했던 '미오리짜의 공간(spațiul mioritic)'이 자리 잡고 있다. 부드러운 구릉과 끝없이 이어지는 골짜기처럼, 삶과 죽음을 흐름으로 보는 그들의 정신이 묘지의 유머와 만나 부드럽게 녹아든다. 이 공간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고 또 다른 시작이다.
또한 이곳의 정신은 루마니아 민요 『미오리짜(Miorița)』의 어린양 목동과도 연결된다. 운명 앞에서 슬픔과 절망 대신, 자연과 하나 되는 온화한 수용을 택한 목동처럼, 서픈짜의 사람들 역시 죽음 앞에서 웃음을 짓는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늘과 별, 바람과 대지의 품에 안기는 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서픈짜의 즐거운 묘지를 걸을 때, 우리는 어떤 무덤 앞에서도 쉽게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무겁지 않은 시 한 줄과 순수한 그림 앞에서 삶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죽음은 빨리 오니까, 포도주를 마시고 웃으며 살았네."라는 농부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잠시 웃고 만다. 그 웃음 속에서 죽음의 무게는 사라지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로 흘러간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과 신성,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흐르는 루마니아인들의 깊은 정신성을 마주한다. 다치아(Dacia) 시대부터 내려온 정신, 즉 죽음을 잘목시스(Zalmoxis)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던 정신이 서픈짜의 묘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들은 슬픔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슬픔조차 삶의 노래 속에 부드럽게 끌어안은 것이다.
장례 행렬
결국 서픈짜의 즐거운 묘지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묻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기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지금 이 순간, 웃을 수 있는가라고. 삶은 거창한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짧고 진솔한 웃음과 따뜻한 눈물로 가득한 시간들임을 기억하라고.
오늘도 서픈짜의 나무 십자가들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노래하고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모든 이별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푸른 십자가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정원이다. 그 정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웃음으로 기억되는 삶을 꿈꾸게 된다.
서픈짜, 그곳은 죽음조차 삶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곳이다. 그리고 영원을 향한 가장 다정한 웃음이 피어나는 곳이다.
[참고]
나이브 화풍 소개
나이브 화풍(naive art)은 이름이 암시하듯 ‘순진하고 꾸밈없는’ 시선을 담은 그림 양식이다. 이 흐름은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들이 스스로의 감각으로 세상을 그려낸 작품들에서 출발하고, 그 특유의 천진한 감성과 과감한 색채, 단순한 형태로 인해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 잡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 화가는 프랑스의 앙리 루소(Henri Rousseau)다. 그는 원근법과 해부학을 무시한 듯한 정적 화면, 꿈결처럼 선명한 색채, 사실적인 듯 비현실적인 열대 정글을 그려 ‘세미나리오(주말 화가)’라는 조롱 속에서도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길목을 열었다. 루소 이후 옛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폴란드 등 동유럽과 중남미 민속화 전통이 맞물리면서, 나이브 화풍은 지역마다 다른 토착적 뉘앙스를 입었다.
형식적 특징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원근법과 명암법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단순화한다. 이를 통해 화면은 평면적인 동시에 상징적으로 변한다. 둘째, 색채는 본래보다 한 단계씩 밝게 혹은 강하게 사용된다. 이는 ‘정확한 재현’보다 ‘심리적 울림’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셋째, 세부 묘사는 의외로 집요하다. 건물 벽돌 하나하나, 잎사귀 결마다 정성스러운 패턴을 반복해 ‘아마추어적’이라는 편견을 뒤집는다. 넷째, 주제에서 위계가 사라진다. 왕과 농부, 신화와 일상, 도시와 시골이 화면 안에서 동등하게 공존한다.
내용적 특징은 ‘따뜻한 서사성’이다. 공식 화단의 세련된 구도 대신, 화가는 자신의 기억·마을·축제·믿음을 그대로 옮긴다. 이때 그림은 ‘민속기록’이면서 ‘개인 연대기’가 된다. 예컨대 루마니아 서픈짜(Săpânța)의 푸른 십자가 역시 고인을 주인공으로 한 나이브 회화를 십자가에 새겨 죽음마저 친숙한 이야기로 바꾼다.
나이브 화풍은 흔히 ‘어린아이처럼 그린다’는 오해를 받지만, 사실은 철저히 자율적인 시각 언어다. 교육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미술 제도의 규칙―원근·해부·음영·운필―을 해체해, 시각 경험의 본질을 다시 묻도록 만든다. 그래서 20세기 아방가르드, 특히 초현실주의와 원시주의(Primitivism)는 나이브 화풍에서 해방적 에너지를 발견했고, 현대 일러스트·그래픽 노블·포크 아트 리바이벌이 이 어법을 재해석해 왔다.
오늘날 나이브 화풍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재평가된다. 문화사적으로는 ‘비전문가 예술’이 산업화·식민주의 이후 파괴된 지역 공동체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사회학적으로는 ‘비제도권 감수성’이 예술권력의 이중잣대를 비판한다. 미학적으로는 ‘단순성과 서사성’이 디지털 시대 이미지 피로를 치유하는 진솔한 대안이 된다.
결국 나이브 화풍은 ‘기초를 모른 채 그리는 미숙한 그림’이 아니라, 교육·위계·기준 바깥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초기적(初期的) 충동’의 다른 얼굴이다. 그 충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며, 우리 각자가 지닌 첫 시선을 기억하라고 조용히 권한다.
잘목시스(Zalmoxis) 소개
잘목시스(Zalmoxis, 때로는 Zamolxis·Salmoszis)는 고대 트라키아(Thrace)―특히 오늘날 루마니아·불가리아·몰도바 일대로 추정되는 게타이(Getae)·다치아(Dacia) 족의 신(神) 혹은 신격화된 인간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역사(Histories)』 4권에서 처음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정체와 교리는 대부분 전승과 추정에 의존한다.
1. 기원과 신격 - 인간에서 신으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잘목시스는 게타이인들에게 철학과 의례를 가르친 현자로, 죽음을 가장해 땅속 방으로 사라졌다가 몇 년 후 재출현해 불멸을 증명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하늘(혹은 지하)에 거처하는 신으로 숭배됐다. - 천둥·하늘·부활 후대 자료(익명의 스키타이 연대기·다치아 민속설화)는 그를 천둥·날씨·농경 주기를 다스리는 존재로 묘사한다. 일부 연구자는 인도유럽계 하늘신(Zeus·Perun)과 기능적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 2. 교리와 의례 - 영혼 불멸 게타이인들은 죽음을 ‘잘목시스에게 가는 여행’으로 여겼다. 용감히 죽은 이는 곧바로 그의 곁으로 간다고 믿어 전투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관념은 서픈짜 ‘즐거운 묘지’ 같은 현대 루마니아 문화에도 잔향을 남겼다. - 사자(死者) 전령 의식 4년에 한 번, 부족은 화살이 박힌 사자를 하늘로 쏘아 올려(혹은 던져) 잘목시스에게 소원을 전했다. 화살이 제대로 꽂히지 않으면 전령이 부적격이라 보고 다른 희생자를 선택했다. 3. 철학적 해석 - 비극적 단절 대신 순환 잘목시스 신앙은 탄생·죽음·재생의 순환을 강조해, 기독교 이전 동·남유럽에서 드문 ‘죽음 긍정’ 문화의 근원으로 평가된다. - 블라가와 ‘spațiul mioritic’ 루치안 블라가는 잘목시스를 루마니아 영성의 고대 근원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죽음·신성을 끊지 않고 잇는 ‘미오리짜의 공간’의 시원에 잘목시스 신앙이 스며 있다고 해석했다. 4. 현대 문화 속 잘목시스 - 국가·민족 정체성 19세기 루마니아 민족주의는 잘목시스를 토착적 ‘구원자’로 재발견해 로마적·게르만적 뿌리에 대응하는 자긍심의 상징으로 삼았다. - 문학·예술 미하이 에미네스쿠, 미르체아 엘리아데 등은 작품에서 잘목시스를 영원의 상징·비밀교의 창시자로 소환했다. - 신흥 영성·네오페이건 운동 일부 현대 다키아-트라키아 복원주의 집단은 잘목시스를 중심 신격으로 섬기며, 농경 주기·자연 순환 의례를 재구성한다.
요약 잘목시스는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 신화, 자연과 인간을 잇는 순환 철학, 그리고 루마니아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세 층위에서 의미를 지닌다. 헤로도토스의 기록 이후 2,500년이 지났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귀향’이라는 잘목시스적 직관은 여전히 루마니아 문화와 영성의 숨은 맥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