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근원 신화 ― 요한의 비밀서 내용을 요약
태초에 모든 것은 하나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신(The One)이 있었다.
그 신은 빛으로 가득 찬 충만(Plērōma)을 펼쳤다.
충만은 완전했고, 평화로웠으며, 어떤 분리도 균열도 알지 못했다.
그 안에는 아이온(Aeon)이라 불리는 신성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 중에 소피아(Sophia), 지혜를 품은 존재도 있었다.
소피아는 알고 싶었다.
자신 안에 깃든 힘으로, 자신만의 존재를 낳고 싶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근원의 허락 없이 혼자 창조를 시도했다.
그 욕망은 충만 속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충만 바깥으로, 데미우르고스(Demiurge)가 태어났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믿었다.
그는 빛을 알지 못한 채, 물질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산과 바다, 별과 생명체들, 그리고 인간까지.
그러나 그의 창조는 충만의 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빛을 잃은 모방이었고, 균열과 고통이 깃든 세상이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인간을 만들었지만,
알지 못했다.
그 속에 여전히 충만의 빛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인간 영혼은 물질 세계에 갇혔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잊지 않은 기억을 간직했다.
그 기억은 근원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이었다.
어떤 이들은 꿈속에서, 고통 속에서, 또는 사랑 속에서,
깊은 어둠을 꿰뚫고 빛을 느꼈다.
구원은 누군가 바깥에서 내려주는 선물이 아니었다.
구원은 잊혀진 기억을 스스로 깨우고,
자신 안의 빛을 다시 찾는 여정이었다.
그들은 알게 되었다.
자신은 단순한 물질의 조각이 아니며,
플레로마의 심연에서 온 기억의 파편임을.
그리고 그 깨달음은,
모든 세계를 다시 충만으로 이끌어갈 첫 번째 진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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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창세 신화 ― 카르토잔 등의 채록본에 따라
먼 옛날, 아무것도 없던 시대,
온 세상은 끝도 없이 펼쳐진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도 땅도 없고, 오직 무한한 물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그 위를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이 함께 걸어다녔다.
두 존재는 물결 위를 나란히 걸으며, 새로운 세계를 세우려 했다.
하느님은 결심했다.
"이 물 위에 땅을 만들어야겠다."
그러자 하느님은 사탄에게 명령했다.
"깊은 심연 아래로 내려가 흙을 가져오너라. 내 이름으로 가져오너라."
사탄은 두 번이나 심연 속으로 잠수했다(scufundare).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기 이름만을 속삭이며 흙을 움켜쥐었다.
그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흙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흘러내려버렸다.
세 번째 시도에 이르러서야,
사탄은 마지못해 하느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흙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흙은 손톱 밑에 겨우 남은 한 줌뿐이었다.
하느님은 이 작은 흙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작은 땅을 빚었다.
작은 섬처럼 물 위에 떠오른 땅.
하느님은 그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 광경을 보고 불만에 가득 찼다.
"하느님을 물에 빠뜨려버리자. 그래야 내가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사탄은 하느님을 물속으로 밀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밀면 밀수록,
땅은 오히려 더 커지고, 더 넓게 퍼져 나갔다.
사탄의 반역은 실패했다.
하느님은 물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세상은 점점 자라나며 강과 들과 산을 품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렇게 완성되지 않은 채 시작되었다.
물과 땅의 경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긴장과 균열을 품은 채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 위에서, 인간은 존재하게 되었다.
물과 흙, 순응과 반역, 창조와 균열이 섞인 이 세계 위에서,
인간 역시 모순과 긴장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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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속인 김쌍돌이 구연한 창세 신화 ― 김열규, 조동일, 서정범 등의 논문에서
아득한 옛날,
하늘과 땅은 아직 하나였다.
구별도 경계도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미륵(Maitreya)이 세상에 내려왔다.
미륵은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갈랐다.
해와 달과 별들을 하늘에 띄우고, 땅 위에는 산과 강과 들을 펼쳤다.
그는 칡을 삼아 하늘 아래 베틀을 짜고, 옷을 만들었다.
이 세상에는 불이 없었고,
미륵은 생곡식으로 음식을 지었다.
그는 풀메뚜기와 개구리와 새앙쥐에게 물었다.
"물이 어디서 왔느냐, 불은 어디서 태어났느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쥐가,
수줍게 진실을 속삭였다.
미륵은 쥐에게 천하의 뒤주를 맡겼다.
생명의 씨앗을 품은 작은 존재가 세상의 보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륵의 세상에 석가(Sŏkka)가 찾아왔다.
석가는 미륵과 세상의 지배권을 걸고 내기를 청했다.
병에 끈을 매달아 바다에 띄우는 내기,
강 위에 얼음을 얹어 겨루는 내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꽃이 어느 무릎에 피느냐를 보는 내기.
석가는 마지막 내기에서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았다.
속임수였다.
하지만 승리는 석가의 것이 되었다.
미륵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너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에는 무당이 생기고, 솟대가 서고,
과부와 역적이 넘칠 것이다."
말세의 징조가 시작되었다.
질서가 흐트러지고, 조화가 깨어졌다.
미륵은 더 이상 다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산으로 물러났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기억을,
자신의 빛을
변함없이 지켜냈다.
구원은 다른 세계로 달아나는 일이 아니었다.
미륵은 무너지는 세상 안에서,
묵묵히 존재를 심화시키고,
다시 올 때를 준비했다.
인내와 기억,
그것이 그의 무기였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그 기억을 가슴 어딘가에 품은 채,
다시 심화의 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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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0여 년 전 한국 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시작된 연구였으나, 여러 이유(본래 연구 계획에서 수정됨 등)로 등재 학술지에는 게재하지 않았다가 대중에게 먼저 발표하는 것이다.
『창조 속의 균열: 블라가 철학으로 읽는 영지주의, 루마니아, 한국 창세 신화』
서론
1. 연구 문제 제기
2. 연구 대상 및 자료
3. 연구 목적
4. 연구 방법론
제1장 ― 창조의 출발: 원초적 하나와 분리
1.1 영지주의 신화: 플레로마와 소피아의 과오
1.2 루마니아 창세 전승: 무한한 물과 신-악의 공동 존재
1.3 우리나라 창세 신화: 하늘과 땅이 하나였던 시대
1.4 창조는 분리와 질서화의 시작이다
제2장 ― 악의 등장: 창조 내부에서 발생하는 균열
2.1 영지주의: 소피아의 하강과 데미우르고스 탄생
2.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흙 훔치기와 창조 간섭
2.3 우리나라 신화: 석가의 등장과 미륵 세계에 대한 도전
2.4 악은 창조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자라난다
제3장 ― 악의 기능: 창조를 심화시키는 긴장
3.1 영지주의: 타락한 창조와 구원을 향한 투쟁
3.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반역이 낳은 세계 확장
3.3 우리나라 신화: 석가의 승리 이후 말세의 도래
3.4 악은 창조를 방해하는 동시에 심화시킨다
제4장 ― 악의 자기 붕괴: 스스로 무너지는 구조
4.1 영지주의: 데미우르고스의 무지와 세계의 파편화
4.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실패와 존재 확장의 역설
4.3 우리나라 신화: 석가 세상의 붕괴 구조
4.4 악의 자기 모순(Self-Contradiction)
4.5 악의 자기 소모(Self-Consumption)
4.6 악의 자기 초과(Self-Excess)
제5장 ― 철학적 종합: 악과 존재의 모순적 구조
5.1 악은 선의 부재(privatio boni)인가, 변형적 촉매(catalizator)인가
5.2 존재는 모순적 구조(structură antinomică)를 본질로 지니는가
5.3 루치안 블라가의 존재론: 모순과 초월
5.4 악은 존재의 심화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긴장이다
제6장 ― 구원의 방법: 내적 회복, 순응, 인내와 기억
6.1 영지주의: 내적 회복과 초월(Anamnēsis)
6.2 루마니아 전승: 순응과 존재 심화
6.3 우리나라 신화: 인내와 기억을 통한 초월
6.4 구원은 일탈이 아니라 존재 심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제7장 ― 결론
1. 세 신화 비교를 통한 악의 구조 요약
2. 악의 자기 붕괴 구조의 존재론적 의미
3. 현대적 의미: 존재의 균열을 통한 성숙과 초월
주요어: 창세 신화, 악의 자기 붕괴, 존재의 모순, 김쌍돌이, 루마니아 민속, 영지주의, 루치안 블라가
Keywords: Creation Myth, Self-Destruction of Evil, Antinomic Ontology, Kim Ssangdoli, Romanian Cosmogony, Gnosticism, Lucian Blaga
이호창 : 한국외국어대학교 루마니아어과 외래교수
서론
1. 연구 문제 제기
창조 신화는 세계와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인간 문화의 근원적 서사이다. 그러나 이 신화들은 단순히 선(善)의 창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창조의 순간 또는 그 직후에 ’악(惡)’이라 불릴 수 있는 균열, 긴장, 반역이 등장한다. 이러한 악은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창조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때로는 존재를 심화하거나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창조는 균열과 함께 시작되는가? 악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스스로를 무너뜨리는가?”
2. 연구 대상 및 초점
본 연구는 서로 다른 세 문화권에서 전승된 창조 신화를 비교한다. 영지주의(Gnosticism)의 창조 신화는 충만한 세계(플레로마) 내부에서의 균열을 다루며, 루마니아 민속 창세 전승은 신과 악의 긴장 속에서 세계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는 조화로운 세계가 내부 경쟁에 의해 전복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신화들은 문화와 언어를 달리하지만, 모두 창조 과정 안에서 긴장과 악의 요소가 어떻게 발생하고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본 논문은 이 공통 구조를 탐구하고자 한다.
3. 연구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창조 신화에 나타난 악의 의미와 기능을 분석하고, 악이 단순한 파괴자가 아니라 존재를 심화시키는 내재적 긴장임을 밝히는 데 있다. 특히 악이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창조 자체의 내적 긴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임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존재의 심화와 초월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4. 연구 방법론
본 연구는 다음 네 가지 방법을 통합하여 접근한다. 첫째, 신화학적 분석을 통해 세 신화의 내적 구조와 악의 등장 방식을 해석한다. 둘째, 비교 종교학적 접근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 신화의 공통 구조를 비교 검토한다. 셋째, 존재론적 분석을 통해 악을 도덕적 범주가 아닌 존재 자체의 긴장으로 이해한다. 넷째,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의 ‘모순적 구조(structură antinomică)’ 개념을 도입하여, 악을 존재 심화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긴장으로 재해석한다.
5. 추가 정의: 코스모고니(cosmogony)의 개념과 자료 출처
본 논문에서는 창세 신화를 ’코스모고니(cosmogony)’의 개념으로 바라 보았다. ’코스모고니’란 단순한 물질적 우주의 발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질서가 근원적 무(無, Nihil) 또는 혼돈(Chaos)으로부터 분리되어 나타나는 근원적 발생 사건을 의미한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영지주의 신화, 루마니아 민속 창세 전승,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를 모두 코스모고니적 신화로 간주하고 분석할 것이다.
본 논문의 분석 대상인, 영지주의 코스모고니 신화는 요한의 비밀서, 루마니아 창세 신화는 니콜라에 카르토잔(Nicolae Cartojan) 등의 채록본을, 우리나라 창세신화는 김열규, 조동일, 서정범 등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무속인 김쌍돌이의 구연본을 1차 자료로 삼았다.
제1장 ― 창조의 출발: 원초적 하나와 분리
1.1 영지주의 신화: 플레로마의 충만과 존재의 시작
영지주의(Gnosticism) 신화에서 창조의 출발은 무(無)나 혼돈이 아니라 충만(Plērōma)이다. 플레로마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신적 하나(The One)의 빛과 생명으로 가득 찬 세계이며, 그 안에서는 모든 아이온(Aeon)들이 고요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각각의 아이온은 신적 의지의 다양한 발현으로, 서로 간섭하거나 분리되지 않고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었다. 존재는 아직 자신과 근원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자족적이었다. 플레로마는 고요한 빛의 바다와 같았으며, 존재는 그 빛 안에서 스스로를 알 필요조차 없이 단순히 존재했다. 창조의 시작은 이러한 충만한 하나가 자기 내적 생동성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품어내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1.2 루마니아 창세 전승: 끝없는 물과 최초의 움직임
루마니아 민속 창세 전승에서는 세계의 근원적 상태가 무한히 펼쳐진 물(noian întins de apă)로 그려진다. 하늘도 땅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경계 없는 물의 심연 속에 잠겨 있었다. 이 물 위를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이 함께 거닐고 있었다. 아직 어떠한 형태도 구체화되지 않았고, 두 존재 사이에는 갈등이나 대립의 흔적이 없었다. 물 위를 걷는 이 초기의 움직임은 최초의 질서화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자체로 아직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존재는 아직 흐름과 연속성 속에 있었고,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창조는 이 무한한 심연 위에서 뭔가를 분리하고 고정시키려는 최초의 의지에서 시작된다.
1.3 우리나라 창세 신화: 하늘과 땅이 하나였던 시대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도 세계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했다. 하늘과 땅이 붙어 있었고, 위아래도 안팎도 구분되지 않았다. 이 하나의 세계에 미륵(Maitreya)이 나타나, 자연스럽게 질서를 세우기 시작한다. 미륵은 하늘과 땅을 가르고, 해와 달과 별을 제자리에 두며, 세계에 리듬과 경계를 부여한다. 그의 창조 행위는 폭력이나 강제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자신의 형태를 찾아가는 듯한 유기적인 과정으로 펼쳐진다. 미륵은 칡을 삼아 베틀을 짓고 옷을 만들며, 불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아간다. 아직 인간과 자연, 삶과 시간 사이에는 본격적인 긴장이나 분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는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존재는 자연과 하나 되어 있었다.
1.4 창조는 분리와 질서화의 시작이다
영지주의, 루마니아 전승, 한국 우리나라 신화 모두에서 창조는 무로부터의 발생이 아니라, 원초적 하나의 흐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하나는 영지주의에서는 빛과 생명의 충만으로, 루마니아 전승에서는 끝없는 물의 심연으로,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붙어 있던 하늘과 땅의 통합 상태로 나타난다. 창조는 이 하나를 분리하고 구분하여, 각각의 존재가 자리를 갖게 하는 과정이다. 이 분리는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존재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고, 질서를 세우려는 본질적 운동이다. 분리는 동시에 세계를 풍요롭게 하고 복합적으로 만든다. 존재는 원초적 통일성 안에 있을 때에는 구분되지 않았지만, 분리를 통해 시간, 공간, 개체성을 획득하며, 세계는 비로소 다양성과 심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창조란 바로 이 분리와 질서화의 시작이며, 존재가 보다 깊은 차원으로 스스로를 실현하는 출발점이다.
제2장 ― 악의 등장: 창조 내부에서 발생하는 균열
2.1 영지주의: 소피아의 하강과 데미우르고스 탄생
영지주의 신화에서 세계의 최초 균열은 플레로마(Plērōma) 내부에서 발생한다. 충만하고 조화로운 빛의 세계는 완전성 속에서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 소피아(Sophia)는 근원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창조를 시도하는 충동을 품는다. 소피아는 근원의 신적 질서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에서 스스로 존재를 낳으려 했고, 이 자발성은 즉시 균열을 일으켰다. 그녀는 근원의 충만과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 단독으로 창조를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지(agnoia)가 발생하였다. 무지는 소피아가 자신의 존재를 근원과 분리하여 인식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데미우르고스(Demiurge)라는 불완전한 존재가 탄생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착각하였고, 플레로마의 완전함을 모방하려 하면서 물질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빛을 결여한 모사(模寫, imitation)였으며, 참된 생명력이나 신성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형성하였다. 소피아의 하강은 단순한 실패나 실수가 아니라, 존재 내부에서 처음으로 자율성과 무지가 출현하는 사건을 상징한다. 이 사건은 악의 발생을 외부의 침입으로 설명하지 않고, 존재의 내적 긴장과 분리의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하게 한다. 플레로마 안에서 완전성만이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은, 존재가 스스로 분화하고 심화하려는 충동을 내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피아의 충동은 창조적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했으며, 그로 인해 세계는 빛과 어둠, 영과 물질이 섞인 복합적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데미우르고스의 탄생은 플레로마 내부 충만의 복제 실패를 의미하며, 이로부터 인간의 고통과 물질 세계의 불완전성이 비롯되었다. 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심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균열로 나타난다.
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심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균열로 나타난다. 이 신화는 완전한 충만 속에서도 존재 내부의 자율성과 무지가 긴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존재 구조가 필연적으로 파생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흙 훔치기와 창조 간섭
루마니아 민속 창세 전승에서 악의 등장은 세계 창조 과정 속에서 내부 긴장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최초의 세계는 끝없는 물의 심연(noian întins de apă)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은 이 무한한 물 위를 함께 거닐고 있었다. 하느님은 땅을 창조하기로 결심하고 사탄에게 물속으로 내려가 흙의 씨앗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흙을 가져올 때 반드시 자신의 이름으로 취하라고 명시한다. 사탄은 교만과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혀 이 명령을 어긴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흙을 가져오려 했고, 그 결과 두 차례나 잠수(scufundare)했지만 손에 쥔 흙은 모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버렸다.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그는 빈손이었고, 세계 창조는 지체되었다. 겨우 세 번째 시도에서야 하느님과 자신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흙을 취할 수 있었으나, 그때도 손톱 밑에 남은 극소량에 불과했다. 이 잠수 모티프는 원초적 심연으로부터 질서의 씨앗을 끌어내려는 시도 속에 이미 불순종과 긴장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상징한다. 사탄의 불순종은 세계 창조를 방해하려는 단순한 파괴적 의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자율성과 자기주장(spontaneitate)의 드러남이다. 이후 하느님은 사탄이 가져온 적은 흙을 이용해 납작한 땅(turtă de pământ)을 만들고, 그 위에 앉아 쉰다. 그러나 사탄은 하느님이 잠든 틈을 타 그를 물속으로 밀어 넣어 세상의 지배권을 차지하려 한다. 하느님을 물 쪽으로 밀어낼수록 오히려 땅은 점점 커지고 확장되었으며, 물은 더 이상 땅을 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사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반역적 행동은 세계의 구조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다. 루마니아 전승은 창조가 선의 순수한 의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창조 내부에서 발생하는 교만, 불순종, 자율성의 긴장이 오히려 존재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신화적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 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행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필연적 균열로 발생한다.
루마니아 전승은 창조가 선의 순수한 의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창조 내부에서 발생하는 교만, 불순종, 자율성의 긴장이 오히려 존재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신화적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 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행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필연적 균열로 발생한다. 이 전승은 창조 과정이 순수한 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존재 내부에서 발생하는 불순종과 긴장이 오히려 세계의 구조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2.3 우리나라 신화: 석가의 등장과 미륵 세계에 대한 도전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 세계는 처음에 미륵(Maitreya)에 의해 조화롭고 질서 있게 구성된다. 미륵은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해와 달과 별을 제자리에 두며, 자연과 존재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한다. 이 세계는 분열이나 긴장 없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움직였으며, 미륵 자신도 생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불을 사용하지 않으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이 조화로운 세계에 석가(Sŏkka)가 등장하면서 균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석가는 미륵과 경쟁하여 세상의 지배권을 차지하려 한다. 두 존재는 내기를 통해 승부를 겨루는데, 석가는 정당한 경쟁에서 두 차례 패배한 뒤 마지막 내기에서 속임수를 사용하여 승리를 얻는다. 석가는 꽃이 어느 쪽 무릎에 피느냐를 겨루는 내기에서 패할 위기에 처하자, 꽃을 꺾어 자신의 무릎에 꽂는 속임수를 써서 승리를 선언한다. 이 순간 조화로운 세계는 근본적 균열을 맞는다. 승리를 얻은 석가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 미륵은 세상을 떠나 숲으로 들어간다. 석가가 다스리는 세계는 미륵이 창조한 원초적 조화의 세계와는 달랐다. 이 세계에서는 솟대가 세워지고, 기생과 무당이 등장하며, 과부와 역적이 많아지고, 세속적 가치가 득세하게 된다. 미륵은 이미 예언했듯이, 석가의 세계는 말세(末世), 곧 고통과 혼란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다. 석가의 등장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 내부의 긴장과 분열이 본격화되는 사건이다. 우리나라 신화는 존재가 원초적 조화 상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내부로부터 경쟁과 변형의 에너지가 발생하여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는 구조를 보여준다. 석가의 승리는 미륵 세계의 붕괴이자 동시에 새로운 존재 양식의 출현이며, 존재가 스스로 심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긴장의 드러남이다.
석가의 승리는 미륵 세계의 붕괴이자 동시에 새로운 존재 양식의 출현이며, 존재가 스스로 심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긴장의 드러남이다. 이 신화는 존재가 단순한 조화에 머무를 수 없으며, 내부로부터 긴장과 도전이 발생하여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2.4 악은 창조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자라난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의 하강은 플레로마 내부에서 발생한 자율성과 무지의 결과였다. 완전한 충만 속에서도 존재는 자기 안에 분리와 긴장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며, 소피아는 이를 외부 침입 없이 스스로 드러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은 하느님과 함께 세계 창조에 참여하는 존재였으며, 그의 불순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자율성과 교만의 표현이었다. 사탄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이름으로 흙을 취하려 했고, 그 결과 불완전한 세계 구조가 확장되었지만, 이 과정 자체가 존재의 심화로 이어졌다.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도 미륵이 세운 조화로운 세계는 석가라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으로 내부 긴장을 겪게 되었으며, 석가는 경쟁과 속임수를 통해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들 세 신화는 공통적으로 악이 외부로부터 침입하거나 부가된 것이 아니라, 창조 행위 자체, 존재 심층의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악은 창조와 분리될 수 없는 내재적 긴장이며, 존재가 완전성만을 지속할 수 없다는 심오한 진실을 드러낸다. 악은 존재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심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균열의 국면을 상징한다. 창조는 순수한 선(善)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잠재된 다양성과 운동성, 자율성과 자기 초과(exces de sine)의 발현을 통해 이루어지며, 악은 바로 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제3장 ― 악의 기능: 창조를 심화시키는 긴장
3.1 영지주의: 타락한 창조와 구원을 향한 투쟁
영지주의 신화에서 악은 단순히 세계를 타락시키는 힘이 아니라, 존재를 심화시키는 필연적 긴장의 형태로 나타난다. 소피아(Sophia)의 무지와 충동은 플레로마(Plērōma) 내부에 균열을 일으켰고, 이로부터 데미우르고스(Demiurge)가 탄생하여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레로마를 모방하여 세계를 만들었지만, 그의 창조는 빛과 진리를 상실한 불완전한 반영이었다. 인간 역시 이 물질 세계 안에 갇히게 되었지만, 인간 영혼 안에는 여전히 플레로마의 빛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이 빛은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을 인간 존재 내부에 심어 놓았으며, 구원(salvatio)에 대한 열망을 발생시켰다. 인간은 단순히 타락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깃든 근원적 기억(anamnēsis)을 따라 물질적 구속을 넘어서는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이 투쟁은 존재가 스스로를 심화하고 초월하려는 움직임으로, 악이 부여한 시련과 고통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운동이다. 소피아 역시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의 고통과 회복 과정은 플레로마 자체의 심화를 이끌어낸다. 플레로마는 단순히 충만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균열과 회복을 거치면서 더 깊은 자기 인식과 조화를 향해 나아간다. 영지주의 신화는 세계의 타락을 단순한 실패로 보지 않고, 존재가 자기 초과(exces de sine)와 심화를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악은 이 과정의 필연적 긴장이며, 존재를 고통 속에서 깨어나게 하고, 잊혀진 근원을 기억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타락한 창조는 존재를 심화시키는 구원의 시작점이며, 악은 세계를 단순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심화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 힘으로 작동한다.
3.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반역이 낳은 세계 확장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 사탄(Satana)은 하느님(Dumnezeu)의 창조 명령을 거부하거나 파괴하려는 의도에서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충동과 교만 속에서 자율성을 드러낸다. 사탄은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흙을 가져오려 했고, 그 결과 물속 깊이 두 차례 잠수(scufundare)했으나 실패를 거듭한다. 겨우 세 번째 시도에서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극소량의 흙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 흙으로 하느님은 땅(turtă de pământ)을 창조한다. 그러나 사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을 물속으로 밀어 넣어 세계의 지배권을 차지하려 한다. 이 반역은 단순히 창조를 방해하려는 악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내재한 자율성과 과잉(exces de sine)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구조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사탄이 하느님을 밀어낼수록 땅은 점점 커지고 확장되었으며, 물은 더 이상 땅을 삼킬 수 없게 되었다. 세계는 사탄의 반역을 통해 더 넓고 견고한 형태로 성숙하게 되었고, 최초의 작은 흙덩이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규모와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루마니아 전승은 창조가 선(善)의 순수한 의도만으로 완성될 수 없으며, 창조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율성, 불순종, 자기 초과의 긴장이 존재의 심화와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신화적으로 보여준다. 사탄의 반역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세계를 더욱 풍요롭고 복잡한 구조로 밀어 올리는 필연적 긴장으로 작용했다. 이로써 악은 존재를 단순히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초과하여 더욱 깊고 복합적인 형태로 전개되는 동력이 된다.
3.3 우리나라 신화: 석가의 승리 이후 말세의 도래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 미륵(Maitreya)이 창조한 세계는 조화와 질서 속에 안정되어 있었다. 하늘과 땅은 갈라지고, 해와 달과 별은 제자리를 찾아 자연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으며, 인간과 자연은 충돌 없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 조화로운 세계는 내부에서 스스로 긴장을 품고 있었다. 석가(Sŏkka)의 등장은 외부 침입이 아니라, 조화 안에 잠재된 자율성과 변형 욕망이 구체화된 사건이었다. 석가는 미륵과 내기를 벌이며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고, 마지막 내기에서는 속임수를 사용하여 승리했다. 그의 승리는 미륵 세계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동시에, 존재를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키는 계기가 된다. 석가가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솟대가 세워지고, 기생과 무당이 생겨나며, 과부와 역적이 많아지고, 기존의 조화롭던 가치 체계가 해체된다. 미륵이 예언했던 말세(末世)가 시작되지만, 이 말세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존재가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석가의 승리는 조화의 파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존재가 스스로를 극복하고 더 복합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신화는 존재가 완전한 조화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으며, 내부로부터 긴장과 대립, 붕괴와 재구성이 반복되면서 심화된다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악과 긴장은 세계를 단순히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새로운 질서로 넘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통로이며, 석가의 승리는 그 통로를 가시화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말세의 도래는 단순한 퇴보가 아니라, 존재의 내적 운동이 만들어낸 심화와 변형의 국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3.4 악은 창조를 방해하는 동시에 심화시킨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Sophia)의 과오와 데미우르고스(Demiurge)의 탄생은 플레로마(Plērōma)의 충만을 방해하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존재는 구원을 향한 심화의 길을 열어젖힌다. 인간 영혼은 물질 세계의 고통 속에서도 근원의 빛을 기억하며, 존재는 타락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운동을 시작한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는 사탄(Satana)의 불순종과 반역이 창조를 방해하려는 시도로 나타나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탄이 하느님을 밀어낼수록 땅은 커지고, 존재는 단순한 흙덩어리를 넘어서는 복합적 세계로 진화한다. 우리나라 신화에서도 석가(Sŏkka)의 등장은 미륵(Maitreya)이 세운 조화로운 세계를 붕괴시키지만, 동시에 존재를 새로운 양식으로 변형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세의 도래는 몰락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내부 긴장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이 세 신화 모두에서 악은 창조를 방해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존재를 심화시키고 구조를 확장시키는 촉매(catalizator) 역할을 한다. 악은 순수한 파괴자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초과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긴장과 균열이다. 존재는 완전한 조화 안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으며,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긴장과 대립을 통해 더 복합적이고 심화된 차원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악은 창조의 실패가 아니라, 창조의 심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작동하는 존재론적 긴장이며, 그 긴장 없이는 진정한 심화도 초월도 이루어질 수 없다.
제4장 ― 악의 자기 붕괴: 스스로 무너지는 구조
4.1 영지주의: 데미우르고스의 무지와 세계의 파편화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e)는 스스로를 최고의 존재라고 착각하며 물질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의 창조는 근원적 빛과 충만을 상실한 불완전한 반영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agnoia)와 독선 속에서 플레로마(Plērōma)를 모방하려 했으나, 진정한 생명력이나 신성에는 도달할 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파편화된 세계를 만들어낸다.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는 본래적 일체성(unio)을 복제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분리와 대립을 확산시키는 세계를 낳는다. 이 세계는 구조적으로 갈등과 붕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 존재 역시 물질에 갇힌 채 고통과 무지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불완전성과 고통이 인간 영혼을 각성시키는 동기가 되며, 존재는 자기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근원의 빛을 회복하려는 투쟁을 시작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무지 때문에 세계를 타락시켰지만, 그 타락 자체가 존재를 심화시키고 구원의 운동을 일으킨다. 더 나아가 데미우르고스 자신도 자신의 무지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세계의 균열과 파편화 속에서 스스로 약화되고 무력화된다. 그의 세계는 점차 자기 모순(self-contradiction)에 의해 균열을 심화시키며, 플레로마의 빛을 지닌 존재들은 이 균열의 틈을 따라 상승하려는 충동을 되찾는다. 영지주의 신화는 악이 스스로의 독선과 무지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며, 그 붕괴 과정이 존재의 구원과 심화를 촉진하는 역설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결국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플레로마를 향한 내적 갈망과 긴장 속에서 해체되기 시작하며, 그 해체 속에서 존재는 다시 근원의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4.2 루마니아 전승: 사탄의 실패와 존재 확장의 역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 사탄(Satana)은 하느님(Dumnezeu)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흙을 취하려 하면서 불순종을 드러낸다. 그는 두 차례나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scufundare)했지만, 매번 흙을 손에 쥐지 못하고 실패한다. 겨우 세 번째 시도에서야 하느님과 자신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적은 양의 흙을 손톱 밑에 남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탄은 이로도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이 만든 최초의 땅(turtă de pământ) 위에서 하느님을 물속으로 밀어넣어 세상의 지배권을 차지하려 시도한다. 그의 반역은 명백히 실패로 끝나지만, 그 과정은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사탄이 하느님을 물로 밀어낼수록 땅은 점점 확장되었고, 물은 더 이상 땅을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사탄의 반역과 실패를 통해 더욱 넓고 견고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최초의 작은 씨앗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복합성과 심화를 획득하게 된다. 사탄은 자신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전승은 악의 시도가 스스로 붕괴하면서 존재를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신화적 구조로 보여준다. 사탄의 실패는 그 자체로 존재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존재 내부에 잠재된 변형과 확장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 악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좌절하지만, 그 좌절이 존재의 성숙과 심화를 이끄는 역설적 경로가 된다. 루마니아 전승은 악이 단순히 패배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를 더욱 심화하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4.3 우리나라 신화: 석가 세상의 붕괴 구조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 석가(Sŏkka)는 미륵(Maitreya)과의 경쟁에서 속임수를 통해 승리하고 세상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세운 세계는 미륵의 조화로운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승리의 순간부터 이미 균열과 붕괴를 내재하고 있었다. 석가의 세계는 솟대가 세워지고, 기생과 무당이 생겨나며, 과부와 역적이 많아지고, 인간 사회 내부에 끝없는 분열과 혼란이 스며든다. 이 세계는 단순히 석가의 통치 실책이나 인간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잠재된 자기 초과(exces de sine)와 긴장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붕괴를 향해 나아간다. 석가는 승리자였지만, 그의 승리는 조화의 붕괴를 가져오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능하게 하는 이행의 문을 열었다. 석가의 세계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소모하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를 해체하면서, 존재가 더 이상 과거의 조화 상태에 머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붕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내부의 모순을 직시하고, 심화를 위해 스스로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우리나라 신화는 세계의 몰락이 외부 침입이나 단순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심층에 내재된 긴장과 자기 초과 충동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석가가 세운 세계는 자신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분열하며, 그 붕괴를 통해 존재는 다시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 이 붕괴 구조는 존재가 단순히 고통받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심화와 변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내재적 과정임을 드러낸다.
4.4 악의 자기 모순(Self-Contradiction)
악은 존재의 외부로부터 가해진 힘에 의해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재한 모순(self-contradiction) 때문에 해체되기 시작한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e)는 자신이 최고 신이라고 착각하고 세계를 창조했지만, 그 창조는 진정한 생명과 빛을 결여한 불완전한 반영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로 끊임없이 분리되고 대립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조화로운 전체성(unio)을 복제하려 했지만, 그 본질적 결핍으로 인해 스스로 균열과 파편화의 길을 걷게 된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Satana)은 세상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하느님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의 시도는 오히려 땅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사탄은 지배를 원했지만, 그의 행위는 지배가 아니라 존재 확장의 촉진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Sŏkka)는 조화로운 세계를 무너뜨리고 지배권을 차지했지만, 그가 세운 세계는 내부 모순 때문에 균열과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석가는 승리를 통해 세계를 장악했지만, 그 세계는 스스로를 소모하며 붕괴해 갔다. 이들 사례는 모두 악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구조를 보여준다. 악은 외부로부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숨겨진 불완전성, 교만, 무지, 과잉의 충동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 파괴적 궤도에 들어선다. 악은 존재를 부정하려 하지만, 오히려 존재를 더 복합적이고 심화된 차원으로 밀어 올리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자기 모순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 모순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존재가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긴장과 해체의 운동을 상징한다.
4.5 악의 자기 소모(Self-Consumption)
악은 자기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킬 뿐 아니라, 그 긴장과 과잉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모(self-consumption)하며 붕괴해 간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e)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지탱할 힘을 스스로 갖추지 못했으며, 물질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분열하며, 결국 데미우르고스 자신의 권위와 지배력은 내부로부터 약화된다. 그는 세계를 창조했지만, 그 세계의 고통과 무질서는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그의 권력을 갉아먹는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Satana)은 자신의 반역적 시도로 존재를 장악하려 했지만, 오히려 세계의 확장과 심화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의 에너지는 하느님의 창조를 돕는 방향으로 소진된다. 사탄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힘을 소모하고 세계 확장의 촉진제로 기능하는 데 그친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Sŏkka)는 조화로운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지만, 그의 세계는 내부 긴장과 갈등 속에서 급속히 붕괴하고, 석가 자신은 세계를 유지할 능력을 점점 소진해 간다. 석가의 승리는 지속 불가능했으며, 그의 세계는 스스로의 과잉과 분열 때문에 소멸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들 모든 신화적 서사는 악이 단순히 외부적 힘에 의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과잉과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소모하여 붕괴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악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더 많은 힘과 통제를 요구하지만, 그 요구 자체가 긴장을 증폭시키고, 결국 악은 자기 존재 기반을 갉아먹으며 소진된다. 이러한 자기 소모 과정은 존재가 단순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스스로를 해체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심화와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깊은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4.6 악의 자기 초과(Self-Excess)
악은 자기 내부의 모순과 소모뿐 아니라, 자기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초과 충동(self-excess) 속에서 스스로를 붕괴시킨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e)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최고의 존재가 되려 하였고, 그 결과 자신의 역량을 초과하는 세계를 창조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초과는 필연적으로 결핍과 왜곡을 낳았으며, 그의 세계는 점차 균열과 붕괴로 향하게 되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신성을 흉내 내려 했지만, 그 모방 행위 자체가 자기 내부의 결핍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기제가 되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Satana)은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했고, 물질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자기 존재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리한 시도였고, 그 결과는 오히려 존재 확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그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자기 초과의 긴장 속에서 붕괴했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Sŏkka)는 조화로운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그의 세계는 복잡성과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내부 구조를 갖추지 못했으며, 자기 한계를 초과하려는 시도 속에서 급속히 붕괴하고 말았다. 석가의 세계는 지배를 통해 완성을 이루려 했지만, 그 과잉이 오히려 붕괴를 불러왔다. 이들 사례는 모두 악이 자신의 본질적 한계와 균형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확장하고 초월하려는 무리한 충동 속에서 붕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악은 자기 초과의 운동 속에서 점점 더 긴장과 모순을 증폭시키고, 결국 스스로를 해체하는 궤도에 들어선다. 이러한 자기 초과는 존재가 심화되고 변형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내적 과정이며, 악은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소멸하고, 존재는 그 틈을 따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다.
제5장 ― 철학적 종합: 악과 존재의 모순적 구조
5.1 악은 선의 부재(privatio boni)인가, 변형적 촉매(catalizator)인가
서구 전통에서 악은 오랫동안 선의 부재(privatio boni)로 설명되어 왔다. 이 개념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 확립되었으며, 선은 본질을 지니지만 악은 단지 결핍(absența)일 뿐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악은 선의 부재이며, 존재의 본질적 결함이다”(malum est privatio boni, Augustin, De Civitate Dei, Humanitas, 2012, p. 372)라고 단언하였다. 이 관점은 악을 존재의 본질적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왜곡이나 결핍으로 간주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본 연구가 분석한 영지주의 신화, 루마니아 창세 전승, 우리나라 창세 신화는 악이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존재 심화의 내재적 촉매(catalizator)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Sophia)는 충만(Plērōma) 안에서 무지(agnoia)에 빠져 스스로 균열을 일으켰고, 그 결과 데미우르고스(Demiurge)가 탄생하여 물질 세계를 창조하였다. 이 세계는 결핍이나 부재만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층위의 탄생이라는 변형을 포함하였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레로마를 모방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이 실패가 오히려 인간 영혼을 각성시키고 근원을 향해 투쟁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Satana)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흙을 자신의 이름으로 취하려 했으나, 그의 불순종과 반역은 오히려 세계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탄은 하느님을 물속으로 밀어넣어 세계를 장악하려 했지만, 그 시도는 땅을 더욱 확장시키고 존재의 기반을 넓히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Sŏkka)는 미륵(Maitreya)의 조화로운 세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지만, 그의 승리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존재가 새로운 단계로 심화되고 변형되는 계기가 되었다. 석가의 세계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붕괴해 갔지만, 그 붕괴가 존재를 다시 초월과 성숙의 가능성으로 이끌었다. 이 세 신화는 악이 단순히 선의 부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내부의 운동과 심화의 촉진제로 작동함을 서사적으로 증언한다. 악은 결핍(absența)이 아니라 변형(transfigurare)의 힘이며, 존재가 자기 한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긴장이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역시 존재를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모순적 구조(structură antinomică)를 지닌 심화 운동”(“o structură antinomică a existenței”,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58)이라고 규정하였다. 블라가에 따르면 존재는 단일성이나 조화가 아니라,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해 스스로를 심화하고 초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관점은 악을 선의 결핍으로 환원하는 전통적 해석을 넘어, 악을 존재 심화의 필수적 매개로 재해석할 수 있게 한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근원의 빛을 잃었지만, 바로 그 상실과 고통이 인간 영혼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마니아 전승에서도 사탄의 반역이 없었다면 세계는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의 도전이 없었다면 존재는 미륵의 조화 안에 머물며 자기 심화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악은 단순히 결핍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초과하고 초월로 이끄는 촉매(catalizator)로 작동하였다. 물론 악이 고통과 혼란을 동반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필연적 과정을 의미한다. 악은 존재를 소멸시키기 위한 힘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심화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내재적 긴장과 충동이다. 결국 악은 선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심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창조적 긴장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악을 부정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초월하는 길목에서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내적 운동으로 읽어야 한다.
5.2 존재는 모순적 구조(structură antinomică)를 본질로 지니는가
존재를 하나의 통일성과 조화 속에만 머무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사유는, 창조와 심화의 역동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존재의 본질을 단순한 일체성(unicitate)이 아니라 모순적 구조(structură antinomică)로 규정하였다. 그는 『인식 삼부작(Trilogia cunoașterii)』에서 “존재는 내적으로 긴장과 대립을 품은 모순적 구조를 지닌다”(„existența poartă în sine o structură antinomică”,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58)고 밝히며,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운동 속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존재가 고정된 완전성(perfectio)이나 불변성(immutabilitas)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긴장과 모순을 통해 스스로를 심화하는 과정을 본질로 삼는다는 뜻이다. 영지주의 신화는 이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플레로마(Plērōma) 안에서도 소피아(Sophia)는 스스로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를 낳으려 하였고, 그 결과로 데미우르고스(Demiurge)와 물질 세계가 탄생하였다. 플레로마는 완전한 충만을 지녔으나, 그 충만 속에서도 자율성과 무지(agnoia)의 긴장이 잠재해 있었으며, 이 긴장이 존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이 무한한 물의 심연 위를 거닐던 상태는 정지된 일체가 아니라 긴장의 잠재적 운동이었다. 사탄의 반역과 실패는 세계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존재는 단순히 안정된 일원적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내적 대립을 경유해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창세 신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륵(Maitreya)이 세운 조화로운 세계는 석가(Sŏkka)의 도전을 통해 균열되었고, 이 균열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를 심화시키고 변형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처럼 존재는 원초적 통일성을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내부 긴장을 활성화시키며 새로운 질서와 심화를 향해 나아간다. 블라가는 존재의 이 모순적 구조를 인간 인식(cunoaștere)에도 투영하였다. 그는 인간의 인식은 결코 존재를 전면적으로 해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존재의 신비(mister)와 모순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cunoașterea nu dizolvă misterul, ci îl adânceșt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73). 존재를 향한 인간의 모든 접근은 존재의 모순과 긴장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이는 존재 자체가 이미 모순적 구조를 본질로 지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악 또한 단순한 결핍이나 오류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심화를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긴장 구조의 한 국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플레로마 내부에서조차 긴장과 분리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 무한한 물의 심연에서도 대립이 싹틀 수 있었던 것, 조화로운 세계에서도 붕괴와 변형이 불가피했던 것은 모두 존재가 스스로의 심화를 위해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완성(perfectio)이라는 외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끌어안고 자기 초과(exces de sine)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심화와 초월을 모색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 점을 명확히 하였다. 그는 “존재는 자기 동일성(idemitatea)과 자기 초과(excesul de sine) 사이의 긴장에서 살아간다”(„existența trăiește între idemitate și exces de sin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76)고 주장하였다. 악은 바로 이 긴장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변형적 힘이며, 존재가 자기 자신을 갱신하고 심화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존재는 고정된 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모순과 긴장을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초월하는 역동적 구조를 본질로 지닌다고 이해해야 한다. 세 신화 모두는 이러한 존재 구조를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었으며, 루치안 블라가의 존재론은 이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5.3 루치안 블라가의 존재론: 모순과 초월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존재의 본질을 모순과 초월의 긴장 구조로 파악하였다. 그는 존재를 단순한 동일성(idemitate)이나 완결된 실체(substanță închisă)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초과(exces de sine)와 모순적 심화(adâncire antinomică)를 통해 스스로를 심화하고 변형하는 살아 있는 구조로 이해하였다. 블라가는 『인식 삼부작(Trilogia cunoașterii)』에서 “존재는 그 심층에서 초월적 충동을 지닌다”(„existența poartă în adâncul ei impulsul transcenderii”,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0)고 말하며, 존재는 주어진 상태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운동을 본질로 삼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초월(transcendență)은 단순히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존재 내부 긴장과 모순을 심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블라가에 따르면 존재는 항상 두 개의 상반된 경향, 즉 자기 동일성을 지키려는 충동과 자기 초과를 향해 나아가려는 충동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러한 긴장 구조는 존재가 변화하고 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동시에 존재 내부에 필연적 모순과 균열을 생성한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Sophia)는 충만(Plērōma)의 일체성 속에 머물지 않고, 근원의 허락 없이 스스로 존재를 낳으려는 충동을 품었고, 이 초과가 결국 세계의 탄생과 함께 플레로마 내부의 균열을 초래하였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존재의 심화와 확장을 이끄는 내재적 운동이었다. 우리나라 창세 신화 역시 미륵(Maitreya)의 조화로운 세계가 석가(Sŏkka)의 등장으로 인해 균열되면서, 존재가 자기 초과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블라가는 존재가 초월을 통해 심화하는 방식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존재는 자기 내부의 모순을 통과함으로써만 자기 초월을 이룰 수 있다”(„existența își realizează transcenderea numai trecând prin propriile antinomii”,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2). 이 명제는 존재가 단순한 자기 동일성 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모순과 긴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만 더 깊은 차원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플레로마의 균열, 무한한 물의 혼돈 속 긴장, 조화 속에 잠재된 붕괴의 충동은 모두 존재가 스스로를 초과하려는 심층적 충동을 서사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블라가에게 초월은 안정된 상태로부터의 이탈이며, 기존 질서의 해체를 포함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초월은 기존의 존재 구조를 부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존재는 모순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갱신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악은 단순한 부정이나 실패가 아니라, 존재가 초월을 실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긴장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 영지주의 세계에서 인간 영혼은 물질 세계의 속박 속에서 고통받지만, 바로 그 고통이 인간에게 근원의 기억(anamnēsis)을 불러일으키고, 플레로마로의 귀환을 촉발한다. 루마니아 전승에서도 사탄의 반역은 하느님의 창조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며 존재 심화를 촉진하였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석가의 승리 이후 펼쳐진 말세(末世)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존재가 조화와 고요를 넘어 새로운 역동성으로 나아가는 이행기의 징후였다. 루치안 블라가는 존재가 모순 없이, 긴장 없이 심화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존재의 심화는 본질적으로 자기 초과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악과 고통, 혼란은 피할 수 없는 통과 의례(rit de trecere)라고 보았다. 따라서 존재는 완성이나 안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초과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하고 심화해 나간다. 악은 이 심화의 통로에서 발생하는 내재적 긴장이며, 존재가 초월을 실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그림자(shadow)이다. 블라가의 존재론은 우리에게 악을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 심화의 불가피한 징후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5.4 악은 존재의 심화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긴장이다
악은 단순히 존재를 파괴하거나 타락시키는 힘이 아니라, 존재가 심화되고 초월하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내재적 긴장(tensiune internă)이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e)가 창조한 세계는 근원의 빛을 상실한 왜곡된 반영이었지만, 그 결핍은 인간 영혼을 각성시키고 플레로마(Plērōma)로 돌아가려는 구원의 운동을 촉발하였다.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단순한 실패물이 아니라, 인간이 기억(anamnēsis)과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무대(scena)였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사탄(Satana)의 반역은 하느님(Dumnezeu)의 창조를 위협하기보다, 존재의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탄은 세상을 지배하려 했지만, 그의 시도는 오히려 세계의 뿌리를 깊게 하고 구조를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석가(Sŏkka)의 승리로 인해 미륵(Maitreya)의 조화로운 세계가 붕괴했으나, 그 붕괴는 존재가 단순한 정태적 조화에 머무르지 않고, 갈등과 긴장을 통해 새로운 질서와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는 변형적 과정을 열어주었다. 이들 신화는 모두 악이 단순한 결핍(privatio)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잠재된 심화와 초월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존재를 단일성이나 완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과(exces de sine)하고 변형(transfigurare)하려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실재(realitate vie)로 이해하였다. 그는 존재가 “자기 모순을 통과하여 초월에 이른다”(„existența ajunge la transcendere trecând prin propria antinomi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2)고 말하며, 존재의 심화가 모순과 긴장을 통과하는 운동임을 강조하였다. 악은 이 심화 과정을 활성화하는 내재적 긴장으로서, 존재가 자기 동일성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catalizator)로 작동한다. 영지주의에서 인간은 물질 세계에 갇혀 있지만, 이 갇힘은 단순한 속박이 아니라 영혼이 근원을 기억하고 초월을 향해 몸부림치는 출발점이 된다. 루마니아 전승에서는 사탄의 실패가 세계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하고 심화된 세계 구조를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석가가 초래한 붕괴가 인간 존재를 새로운 긴장과 변형의 길로 이끌었다. 이처럼 악은 창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심화하고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블라가는 존재가 모순을 수용할 때 비로소 초월에 이른다고 보았다. 존재는 자기 내부 긴장을 부정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심화하고 초과함으로써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창출한다. 이 과정에서 악은 필연적으로 등장하며, 존재는 이 악과 긴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심화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다. 존재는 악을 통해 자기 내부의 잠재성을 드러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며, 새로운 세계로 이행한다. 악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존재 심화의 통로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악을 제거하거나 무화시키려는 시도는 오히려 존재 심화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존재는 악을 직시하고, 그것을 통과하며, 그 긴장을 초과할 때만 자기 초월을 실현할 수 있다. 악은 존재의 붕괴를 가져오는 힘이 아니라, 존재를 심화시키고 초월로 이끄는 본질적 긴장이다. 세 신화는 이 진실을 서사적 구조로 드러내었으며, 루치안 블라가의 존재론은 이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존재는 고정된 완성(perfectio)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내부 긴장과 모순을 겪으며 심화하고 변형하는 운동이며, 악은 이 운동을 촉진하는 내재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악은 존재의 심화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긴장으로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제6장 ― 구원의 방법: 내적 회복, 순응, 인내와 기억
6.1 영지주의: 내적 회복과 초월(Anamnēsis)
영지주의 신화에서 구원(salvatio)은 외부로부터 부여되거나 제도적 권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내적 회복(anamnēsis)을 통해 실현된다. 『요한의 비밀서(Secret Book of John)』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물질 세계를 창조한 데미우르고스(Demiurge)와 그의 권속들에 의해 속박되었으나, 영혼의 가장 깊은 층에는 여전히 플레로마(Plērōma)의 빛과 기억(memoria originis)이 남아 있었다. 이 내적 기억은 인간이 스스로를 일깨우고, 감춰진 근원을 회복하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과정이 바로 구원의 핵심이었다. 『요한의 비밀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영혼은 기억을 통해 본래의 근원을 다시 찾는다”(„Sufletul își regăsește originea prin amintire”, The Secret Book of John, trad. Marvin Meyer, Humanitas, 2022, p. 114). 이때 기억(amintire)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존재 심층에 내재한 본질의 회복 운동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망각에 빠진 존재라고 보았다. 악은 인간 본성의 필연적 결함이 아니라, 무지(agnoia)로 인해 발생한 가려움이며, 구원은 외부 구세주의 은총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 깊숙이 감춰진 진리를 재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이 관점은 고대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 뚜렷이 구분된다. 예컨대 기독교 정통파는 은총(gratia)을 외부에서 부여받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영지주의는 은총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서 자라나는 힘으로 이해하였다. 플레로마로부터 파생된 영혼은 본질적으로 신적이었다. 따라서 구원은 새로운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충만을 기억하고 재통합하는 과정이었다. 블라가(Lucian Blaga)가 말했듯이, “존재는 심층에서 자기 본질을 향한 갈망을 잊지 않는다”(„existența nu uită dorința de întoarcere la esența sa”,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200). 이 점에서 영지주의적 구원은 기억(anamnēsis)을 통한 내적 회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회복은 고통과 긴장을 동반한다. 인간은 물질 세계의 그물 속에서 망각하고, 속박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바로 이 망각과 고통이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물질 세계는 단순히 감옥(carcer)이나 처벌(pedeapsă)이 아니라, 영혼이 근원의 빛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통과의 장(rit de trecere)이다. 이 점에서 악 역시 구원의 필수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악은 영혼을 가로막지만, 동시에 영혼을 각성시키는 촉매(catalizator)로 기능한다. 영지주의적 구원은 외부 권위나 종교적 규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내면의 빛을 기억하고,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려는 의지를 활성화할 때 시작된다. 이러한 구원 방식은 인간 스스로의 자발성과 인식을 강조하며, 존재의 심화와 초월을 내재적 운동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 세계를 버리거나 파괴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세계의 고통과 무지를 통과하여 자신의 신적 본질을 다시 찾는 길을 걸어야 한다. 『요한의 비밀서』는 “진리는 너희 안에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자만이 해방될 것이다”(„Adevărul este în voi, și numai cine îl descoperă va fi eliberat”, The Secret Book of John, Humanitas, 2022, p. 117)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영지주의적 구원의 본질을 집약한다. 구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심층에 내재된 신적 빛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구성하고, 물질 세계의 속박을 넘어 플레로마로 귀환할 수 있다. 이 귀환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의 모순과 긴장을 통과하여 도달하는 심화된 통합이다. 영지주의 신화는 구원이 근본적으로 기억의 회복이며, 존재의 내적 초월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본래의 빛을 잊었지만, 잊지 않은 무엇이 그 안에 살아 있으며, 그 살아 있는 기억이 존재를 심화시키고 초월로 이끄는 불멸의 불꽃(flacără nemuritoare)로 남아 있다.
6.2 루마니아 전승: 순응과 존재 심화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 구원은 영지주의적 내적 회복(anamnēsis)이나 격렬한 초월 운동이 아니라, 세계 구조 안에서의 순응(adaptare)과 존재 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이 무한한 물의 심연을 거닐며 세계를 창조하려는 이 신화적 배경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긴장과 균열 속에서 생겨났음을 전제한다. 사탄의 반역과 하느님의 창조 의지는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내부의 긴장과 충돌을 통과하여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루마니아 민속 전승은 인간에게 이 세계를 거부하거나 도피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의 모순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존재를 심화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루마니아적 구원은 세계의 질서에 대한 적극적 순응이나 맹목적 복종(supunere)과는 구분된다. 순응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과 모순을 감지하면서도 그것을 심화와 성숙의 재료로 삼는 지혜(ințelepciune)이다. 이는 『루마니아 민속 신앙 연구』에서 블라가(Lucian Blaga)가 “루마니아 정신은 세계를 부정하거나 탈주하려 하지 않고, 세계 안에 뿌리내리고 세계를 심화시킴으로써 구원을 지향한다”(„spiritul românesc nu neagă lumea, ci caută să se mântuiască adâncind-o”, Lucian Blaga, Spațiul mioritic, Humanitas, 2012, p. 231)고 정리한 관점과 맞닿아 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 하느님은 사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세계 창조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탄이 흙을 가져오는 데 실패하고, 하느님을 물속으로 밀어넣으려 하는 와중에도, 땅은 오히려 확장되고 세계의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 존재가 악이나 실패 앞에서 절망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불완전성과 갈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기를 심화시켜야 함을 상징한다. 루마니아적 구원은 therefore 세상을 떠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머물면서 세상의 불완전성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 순응은 수동적 복종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의 내적 구조를 더욱 풍부하고 복합적으로 만드는 적극적 심화(adâncire activă)이다. 루마니아 전승은 인간이 완전한 조화나 구원을 외부로부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끌어안고 그 모순 안에서 존재를 심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악은 제거되어야 할 외부 침입자가 아니라, 존재를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한 필연적 긴장으로 등장한다. 사탄의 실패조차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듯이, 인간 존재는 실패와 모순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순응의 방식은 영지주의적 내적 기억(anamnēsis)이나 기독교적 은총(gratia)과는 다른 차원의 구원론을 제시한다. 루마니아 전승은 구원이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존재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며, 세상의 모순을 견디고 끌어안으면서 성장하는 살아 있는 흐름이다. 블라가가 강조한 “미오리찌크 공간(spațiul mioritic)”도 바로 이 존재 심화의 정신을 표현한다. 미오리찌크 공간은 고정된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하고 심화하는 존재의 공간이다. 인간은 이 세계의 구조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심화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루마니아 전승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한 탈출(evacuare)이나 거부(refuz)가 아니라, 세계의 균열과 긴장 속에서 존재를 더욱 깊게 하는 끈질긴 자기 심화(adâncire de sine)이다. 사탄의 반역을 통과하면서도 창조를 포기하지 않았던 하느님처럼, 인간도 세상의 불완전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심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순응은 체념(resemnare)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고 확장하는 적극적 힘이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구원은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일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 모순을 견디고 존재를 심화시키는 끈질긴 작업으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6.3 우리나라 신화: 인내와 기억을 통한 초월
우리나라 창세 신화는 구원의 길을 인내(răbdare)와 기억(memorie)을 통한 초월로 제시한다. 이 신화에서 미륵(Maitreya)이 세운 조화로운 세계는 석가(Sŏkka)의 등장으로 인해 균열되고, 세상은 말세(末世)의 혼란과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이 붕괴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존재가 인내와 기억을 통해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심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석가의 세상은 솟대가 세워지고, 기생과 무당이 생기며, 인간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미륵은 이 붕괴를 정면으로 맞서거나 파괴하려 하지 않고, 산으로 숨어들어 조용히 세월을 견디며 때를 기다린다. 이 미륵의 태도는 단순한 도피나 체념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내부의 기억을 지키며, 고통의 시간을 관통하여 심화되는 인내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인내는 패배가 아니라 심화의 조건이었다. 미륵은 세상의 변질을 막지 못했지만,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고 지키며, 무너진 세계를 언젠가 다시 회복할 준비를 계속한다. 이 태도는 『법화경(法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에서 설해지는 “묵묵히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구원된다”(「但持是經 則為世間大醫王」)는 정신과도 닮아 있다. 우리나라 신화는 불교적 교리의 직접적 반영이 아니지만, 인내와 기억을 통한 존재 심화라는 핵심 구조를 공유한다. 미륵은 세상의 붕괴 앞에서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묵묵히 존재의 진동을 기억하며 버텨낸다. 이 과정에서 인내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 존재를 더 깊게 만드는 능동적 힘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 신화는 세계가 붕괴할 때 인간 존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서사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세계를 파괴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기억하고, 변함없이 존재의 울림을 지키는 일이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존재 심층에 새겨진 본래적 질서의 흔적이며, 이 기억을 잃지 않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초월로 가는 길이다. 이 신화는 악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도 존재가 자기를 보존하고 심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륵은 승리하지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세계가 스스로 붕괴하는 과정을 인내하며 지켜보았고, 그 붕괴 속에서 다시 시작될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였다. 우리나라 신화는 구원이 외부적 승리나 제도적 권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새겨진 기억을 지키고 고통을 견디는 끈질긴 심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미륵은 세상을 다시 지배하려 들지 않고, 다만 존재를 버리지 않고, 기억을 포기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심화시킨다. 이 태도는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가 존재 심화를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 “존재는 고통 속에서도 자기 본질을 잊지 않고 심화한다”(„existența își adâncește esența trecând prin suferință”,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4)와 깊은 울림을 공유한다. 우리나라 신화는 인내와 기억이 구원의 열쇠임을 서사적으로 증언한다. 존재는 붕괴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심화하기 위해 고통을 견디고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 이러한 구원은 전쟁이나 혁명처럼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내면의 구조를 깊게 하고 초월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존재는 자기 본질을 지키며 심화할 수 있다. 이 인내와 기억의 구원 구조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거나 고통을 무력하게 참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모순과 고통을 통과하여 더 깊고 넓은 차원의 심화와 초월을 준비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우리나라 신화는 구원을 다른 세계로의 도피가 아니라, 무너지는 세계 안에서 존재를 지키고 기억을 간직하며 자기 심화를 실현하는 끈질긴 과정으로 제시한다.
6.4 구원은 일탈이 아니라 존재 심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앞선 세 신화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 단순히 다른 세계로 도피하거나 현재 세계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심화하고 초월하는 과정을 의미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인간 영혼은 물질 세계를 속박으로 인식하지만, 구원은 물질 세계를 파괴하거나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근원의 기억(anamnēsis)을 다시 일깨워 스스로 존재를 심화하고 플레로마(Plērōma)로 귀환하는 내적 운동을 통해 실현된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도 인간은 세계의 모순과 불완전성 앞에서 절망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긴장 속에서 존재를 심화하고 세계와 함께 성장한다. 이 순응(adaptare)은 체념이 아니라 능동적 존재 심화이며, 존재가 스스로의 깊이를 확장하기 위해 긴장과 충돌을 끌어안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창세 신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계가 붕괴하고 말세의 징조가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미륵(Maitreya)은 도망치거나 세계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며 인내와 기억을 통해 심화의 길을 걷는다. 이 세 신화는 모두 구원이 단순한 도피(evacuare)나 탈출(fugă)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잠재된 깊이를 발굴하고 심화시키는 끈질긴 작업임을 서사적으로 증언한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존재를 심화(adâncire)와 초월(transcendență)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실재(realitate vie)로 규정하였다. 그는 『인식 삼부작(Trilogia cunoașterii)』에서 “존재는 모순과 긴장을 통과함으로써만 자기 심화와 초월을 실현할 수 있다”(„existența se adâncește și transcende doar trecând prin antinomie și tensiun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5)고 서술하였다. 이 관점에서 구원은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모순을 내면화함으로써 존재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악 역시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은 존재를 단순히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초월로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내재적 긴장을 형성한다. 플레로마의 균열, 무한한 물의 심연에서 탄생한 세계, 미륵 세계의 붕괴는 모두 존재가 완성이나 안정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넘어서는 필연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에서 구원은 근원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심화된 자기 인식을 통한 초월이며, 루마니아 전승에서는 세계와의 긴장을 견디고 그 안에서 존재를 확장하는 과정이며,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붕괴하는 세계 안에서 인내와 기억으로 존재를 지키는 여정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모두 구원을 존재 심화의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존재 심화의 필수 조건으로 내적 긴장과 모순의 수용을 들었다. 그는 “존재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는 심화할 수 없다”(„existența nu se poate adânci fără autonegar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8)고 강조하였다. 이 말은 구원이 단순히 새로운 상태로의 이행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내부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모순을 통과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구원은 존재의 심화이며, 일탈(abandon)이나 탈주가 아니라, 모순 속에 머물고 그 모순을 초과하는 긴 여정이다. 영지주의적 회복, 루마니아적 순응, 한국적 인내와 기억은 모두 이 점을 각기 다른 문화적 서사 구조 속에서 표현하였다. 존재는 완성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모순과 결핍을 통과하고 심화하면서 초월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구원은 도피가 아니라 심화이고, 일탈이 아니라 초과이며, 탈주가 아니라 존재의 내적 성장을 위한 변형이다.
세 신화와 블라가의 존재론은 "구원이란 존재가 자기 자신을 초과하고 심화하는 과정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원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존재를 더 깊고 복합적으로 살아내는 심화의 다른 이름이다.
제7장 결론
인간의 본성을 선(善)이나 악(惡)으로 고정하려는 성선설(性善說)·성악설(性惡說), 그리고 우주를 하나 또는 둘로 환원하려는 일원론(一元論)·이원론(二元論)은 세계를 단순화함으로써 설명력을 얻지만, 그 대가로 현상계 내부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모순과 긴장을 포착하지 못한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신화는 인간 전체에게 이야기한다, 단지 그의 지성에게만이 아니다”(„mitul vorbește întregului om, nu doar inteligenței lui”, Eliade, Sacrul și Profanul, ediția Humanitas, 2023, p. 87)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를 “현실(現實)의 다층 구조를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상징 언어”라 불렀다. 영지주의(Gnosticism)의 창세 서사는 플레로마(Plērōma)의 충만 속에서도 소피아(Sophia)의 무지(agnōia)가 균열을 낳고 데미우르고스(Demiurge)의 불완전한 창조를 불러오며, 그 결과 물질계 안에서 구원을 향한 기억(anamnēsis)의 투쟁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은 끝없는 물 위에서 협력과 반역을 거듭하며 땅을 확장하고,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미륵(彌勒)과 석가(釋迦)의 내기가 조화로운 세계를 붕괴시키지만 동시에 새로운 심화의 계기를 만든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는 “신화는 인간이 맞설 수 없는 세계의 우연성(contingență)을 견디기 위해 마련한 상상적 장치”라고 규정하며, “우리는 신화를 끊임없이 다시 작업하여(„lucrăm neîncetat asupra mitului pentru a compensa contingența lumii”, Blumenberg, Arbeit am Mythos, MIT Press reprint, 2024, pp. 5-7) 현실의 균열을 메운다”고 설명한다. 세 신화는 이런 ‘재작업’의 전형적 사례다. 영지주의자는 물질계를 탈주하지 않고 기억을 깨워 플레로마로 회귀하려 애쓰고, 루마니아 민속은 창조와 반역을 동시에 품어 세계를 넓히며, 한국 민중은 석가의 속임수로도 꺾이지 않는 미륵의 인내와 기억을 통해 붕괴를 견디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 따라서 이 신화들은 선·악이나 일·이의 추상적 대립을 넘어, 존재가 스스로를 심화하고 변형하려는 내재적 운동 속에서 긴장‧모순‧자기 초과가 어떻게 얽혀 작동하는지를 서사적으로 증언한다. 엘리아데가 말했듯, “신화는 이성이 절벽을 마주하는 곳에 다리를 놓는다”(„mitul ridică o punte acolo unde rațiunea găsește un abis”, Eliade, Mituri ale Lumii Moderne, reeditare 2018, p. 42). 결국 영지주의·루마니아·한국 창세 신화는 추상적 철학이 간과하는 물질 세계 내부의 복합성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드러내며, 인간 이성과 학문이 구획해 놓은 경계를 넘어 존재 심층의 역동을 체험하게 한다.
본 연구는 영지주의 신화, 루마니아 창세 전승, 그리고 한국 우리나라 창세 신화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창조와 악의 관계, 악의 자기 붕괴 구조, 그리고 구원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세 신화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창조 과정 내부에서 균열과 긴장이 발생하고, 이 긴장이 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결국 악이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구조를 공유하였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Sophia)는 플레로마(Plērōma) 내부에서 충만을 초과하려는 충동을 품었고, 그 결과 데미우르고스(Demiurge)가 탄생하여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한 실패물이 아니라, 인간 영혼이 근원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투쟁을 촉발하는 무대가 되었다. 루마니아 창세 전승에서는 사탄(Satana)이 하느님(Dumnezeu)의 명령을 어기고 심연에서 흙을 가져오며 자기에게 열광을 돌리려 하지만, 그의 반역은 오히려 세계를 확장시키고 존재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창세 신화에서는 미륵(Maitreya)의 조화로운 세계가 석가(Sŏkka)의 등장으로 붕괴하지만, 이 붕괴는 존재가 인내와 기억을 통해 심화하고 초월을 준비하는 과정을 촉진하였다. 세 신화 모두 악은 외부로부터 침입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서 발생한 긴장과 초과의 결과였으며, 이 긴장은 단순히 창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심화하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악은 자기 내부에 모순을 품고 있었고, 이 모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긴장과 과잉을 증폭시켜 악을 스스로 소모하고 붕괴하게 만들었다. 영지주의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을 최고의 신이라 착각했지만, 그의 세계는 점차 균열과 분열을 심화시켜 결국 영혼의 각성과 구원의 동력이 되었다. 루마니아 전승에서는 사탄의 반역이 땅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땅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으며,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석가의 승리가 세상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시켜, 인간이 인내와 기억을 통해 존재를 다시 심화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가 강조한 대로, 존재는 “자기 모순을 통과하지 않고는 심화할 수 없다”(„existența nu se poate adânci fără trecerea prin antinomie”, Lucian 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3, p. 198). 이 명제는 악의 자기 붕괴 구조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악은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심화하고 초월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내재적 긴장이다. 존재는 악을 통해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모순을 끌어안으며, 더 깊은 차원의 심화로 이행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본다면, 이 세 신화가 제시하는 악의 자기 붕괴 구조는 오늘날 인간 존재가 직면한 위기와도 깊이 연결된다. 기술 발전과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기 내부의 모순과 긴장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려 하며, 악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외부 요인으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악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악이 생성하는 긴장을 통과하여 존재를 심화시키는 데 있다. 존재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심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구원은 다른 세계로의 도피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 안에서 모순과 긴장을 견디고, 존재의 심층을 일깨우며, 자기 초과를 향해 나아가는 끈질긴 여정이다. 영지주의의 내적 회복, 루마니아 전승의 순응적 심화, 우리나라 신화의 인내와 기억은 모두 이러한 존재 심화의 다양한 양상을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루치안 블라가가 밝혔듯이, 존재는 단순한 동일성(idemitate)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과(exces de sine)를 통해 끊임없이 심화하고 변형하며 초월을 지향한다. 악은 이 초과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긴장이며, 존재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악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통한 존재 심화와 초월의 길을 끝까지 걸어내는 것이다. 세 신화 모두 존재가 고요하거나 완성된 상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긴장과 모순, 그리고 악의 자기 붕괴를 통과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심화하고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열 수 있음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국문 초록
이 논문은 영지주의(Gnosticism), 루마니아 민속 창세 전승, 그리고 한국 김쌍돌이 구연한 창세 신화라는 세 가지 이질적인 문화권의 창조 신화를 비교함으로써, 창조와 악(惡)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들 신화는 모두 창조가 질서와 조화의 완성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과 균열의 발생을 동반하며, 악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결과가 아니라 창조 내부의 구조적 결과로 발생함을 보여준다. 본 논문은 선악 이분법이나 성선설·성악설처럼 인간의 본성을 단일하게 규정하려는 고전적 윤리 이론, 또는 일원론(一元論)과 이원론(二元論)처럼 세계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이들 신화가 드러내는 근원적 모순과 자기 심화의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함을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소피아(Sophia)는 플레로마(Plērōma) 내부에서 무지(agnōia)로 인해 균열을 일으키고, 그 결과 데미우르고스(Demiurge)의 불완전한 창조가 시작되며, 물질계에 떨어진 영혼은 기억(anamnēsis)을 통해 구원을 향한 투쟁을 벌인다. 루마니아 민속 전승에서는 하느님(Dumnezeu)과 사탄(Satana)이 끝없는 물 위에서 협력과 반역을 반복하며 땅을 창조하고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탄의 반역조차 존재 심화를 가능하게 하는 긴장으로 작용한다. 김쌍돌이 창세 신화에서는 미륵(彌勒)이 조화롭고 질서정연한 세상을 세우지만, 석가(釋迦)의 등장과 내기 승리로 인해 세상은 붕괴하고 말세가 도래하며, 미륵은 그 붕괴 속에서도 인내와 기억을 통해 다시 다가올 조화의 세계를 기다린다. 본 논문은 이 세 신화의 내적 구조를 비교하면서,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의 존재론을 해석의 중심 축으로 삼는다. 블라가는 존재란 단순히 조화로운 통일체가 아니라, 내부에 모순(structură antinomică)을 품고 있으며, 그 모순을 통과함으로써 스스로를 심화(adâncire)하고 초월(transcendență)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존재의 심층에서 발생하는 긴장이야말로 진정한 존재 운동의 원동력이며, 인식은 존재를 해명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를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블라가의 철학은 세 신화에 나타난 악의 구조를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 심화의 필연적 조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악은 각 신화에서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겪으며, 그 붕괴는 존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서사적 계기로 작동한다. 영지주의에서는 데미우르고스의 창조가 구원의 기억을 자극하고, 루마니아 전승에서는 사탄의 실패가 땅을 확장하며, 김쌍돌이 신화에서는 석가의 세상이 무너질 때 미륵의 인내가 빛을 품는다. 나아가 본 논문은 각 신화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구원이란 세계를 떠나거나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과 붕괴 속에서 존재를 심화시키는 행위임을 밝힌다. 영지주의는 근원 기억의 회복, 루마니아 신화는 순응을 통한 존재 확장, 김쌍돌이 신화는 기억과 인내를 통한 붕괴 견디기로 구원의 길을 형상화한다. 이 신화들은 추상적 이론이나 논리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심층적 구조를 이야기 형식으로 드러내며, 신화는 철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현상계의 모순과 생명의 역동을 살아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서사적 구조 속에서 악의 자기 붕괴와 존재의 자기 심화를 함께 탐구하며, 신화적 사유가 철학의 공백을 메우고 존재의 복합성과 긴장을 감각적으로 구성하는 중요한 인식 형식임을 논증한다.
Abstract
This paper comparatively examines three cosmogonic myths—Gnostic creation narratives, Romanian folk cosmogony, and the Korean Kim Ssangdoli myth—to explore how the relationship between creation and evil reveals an intrinsic structure of tension and contradiction that resists the dichotomies of good and evil or the metaphysical simplifications of monism and dualism. These myths consistently demonstrate that creation is not the culmination of harmony but the emergence of internal rupture, and that evil does not invade from outside but arises as a structural consequence within creation itself. Traditional ethical theories such as the doctrine of innate goodness or evil, and metaphysical frameworks that reduce the cosmos to either unity or duality, fall short of accounting for the irreducible complexity and dynamic contradictions that these narratives symbolically articulate. In the Gnostic myth, Sophia’s fall from the fullness (Plērōma) generates the Demiurge and his flawed material creation, igniting a struggle of remembrance (anamnēsis) and redemption. In the Romanian cosmogony, God (Dumnezeu) and Satan (Satana) create and expand the earth through a dialectic of cooperation and rebellion atop an infinite sea. In the Kim Ssangdoli myth, Maitreya builds an orderly cosmos which is later disrupted by Sokka’s deception, ushering in a disordered world that Maitreya, through endurance and memory, silently bears and awaits to renew. Drawing on Lucian Blaga’s ontology—particularly his concept of the antinomic structure of being (structură antinomică) and existential deepening (adâncire existențială)—this paper interprets the collapse of evil not as moral retribution but as a necessary process for the intensification and transformation of being. Blaga asserts that being transcends not through equilibrium but through the passage of internal contradictions. The myths reflect this ontological insight by portraying evil as a force that, while disruptive, ultimately self-destructs and thereby initiates a new ontological phase. The Gnostic myth suggests that the Demiurge’s flawed cosmos incites spiritual awakening; the Romanian myth shows that Satan’s rebellion expands creation itself; and the Korean myth narrates that the fall of Sokka’s world is not the end but the condition for future return. By analyzing each myth’s approach to salvation—be it inner recollection, adaptive transformation, or enduring memory—this paper concludes that salvation is not flight from tension but deepening within it. These myths serve as symbolic epistemologies that articulate what philosophy alone often cannot: the dynamic complexity of the phenomenal world and the irreducible depth of being. Ultimately, they reveal that myth, in narrating contradiction and self-surpassing movement, enables us to encounter the structure of being not as a finished totality but as a living process of rupture and renew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