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를 흐르던 강물은 언젠가 다시 지상으로 솟아오를 기회를 맞이하는 법입니다. 20세기 후반, 서구 사회는 물질적 풍요의 정점에서 깊은 영적인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와, 핵무기의 공포, 그리고 산업 사회의 비인간화에 지친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와 과학이 제공하는 해답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양의 명상과 선(禪), 인도의 요가와 같은 대안적인 영성의 길로 눈을 돌렸고, 동시에 서양의 잊혀졌던 비의 전통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 거대한 문화적, 영적 전환의 파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지하를 흐르던 헤르메스 주의의 강물은 마침내 ‘뉴에이지(New Age)’라는 이름의 새로운 대중적 물결과 만나, 다시 한번 세상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남은 헤르메스의 지혜가 소수의 비밀결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긍정적인 ‘빛’의 측면과, 그 본래의 깊이가 희석되고 상업주의와 결합하는 ‘그림자’의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는, 복합적이고도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특정한 교리나 조직을 가진 단일한 종교가 아니라,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영성 운동의 총칭입니다. 그 중심에는 다가오는 물병자리 시대(Age of Aquarius)에, 인류의 의식이 거대한 도약을 이루어 새로운 영성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동서고금의 모든 영적인 가르침들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 녹여내는 혼합주의적(Syncretic) 특징을 지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헤르메스 주의의 핵심 사상들은 뉴에이지 운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첫째, ‘상응의 법칙’과 ‘만물의 연결성’이라는 헤르메스의 가르침은 뉴에이지 세계관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에너지이며,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우주 전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우리는 모두 하나(We are all one)’라는 뉴에이지의 핵심 슬로건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둘째, 소우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간 각자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신적인 존재라는 ‘의식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당신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와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은, 헤르메스 주의의 마법적 세계관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가장 대중적인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점성술, 타로, 수정 치유, 아로마테라피 등 뉴에이지 운동에서 널리 실천되는 수많은 대안적 치유법들은, 자연물과 천체의 힘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헤르메스의 공감(Sympathy)의 원리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헤르메스 주의라는 고대의 지혜를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형태로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덕분에 헤르메스의 가르침은 더 이상 먼지 쌓인 고서나 비밀결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살아있는 지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뉴에이지 운동이 지닌 명백한 ‘빛’의 측면입니다.
그러나 이 대중화의 과정에는 그만큼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지혜가 대중 소비 시장의 논리와 결합하면서, 그 본래의 깊이와 엄격함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피상적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헤르메스 주의가 지닌 엄격한 자기 수련과 지적 탐구의 과정이 대부분 생략되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헤르메스 주의의 길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고, 고대의 문헌들을 깊이 연구하며, 어려운 상징들을 해독하는 고독하고도 험난한 ‘철학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뉴에이지 시장에서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 없이도, 단 몇 번의 워크숍이나 긍정 확언의 암송, 혹은 비싼 수정을 구매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영적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안일한 약속이 남발되었습니다.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은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끔찍한 ‘흑화(Nigredo)’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뉴에이지에서는 종종 ‘부정적인 생각’을 회피하고 ‘오직 긍정적인 것’에만 집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그림자와의 통합을 통해 진정한 전체성을 이루려는 융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또한, 헤르메스 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신성과의 합일(Henosis)’이라는 숭고한 이상은, 종종 세속적인 성공과 개인적인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의식의 힘’은 우주의 뜻과 하나가 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과 자동차, 이상적인 파트너를 ‘끌어당기기’ 위한 자기계발의 기술로 축소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God)’ 혹은 ‘하나(The One)’라는 초월적 실재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우주적 자동판매기나, 나 자신을 무한히 긍정해주는 거대한 에고의 거울로 왜곡되곤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개별적 자아마저도 제물로 바쳐 신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려 했던 신성마법의 궁극적인 목표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오히려 자아를 더욱 강화시키는 ‘영적 유아론(Spiritual Infantilism)’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피상성과 상업주의는, 헤르메스 주의를 비롯한 모든 진정한 영적 전통의 가치를 훼손하고, 그것들을 단순한 유행이나 심리적 위안 상품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수정 목걸이를 파는 상점과, 주말 워크숍을 홍보하는 광고의 소음 속에서, 헤르메스가 전하고자 했던 침묵과 내적 성찰의 목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게 됩니다.
뉴에이지 운동의 파도는 헤르메스 주의의 재발견에 있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던졌습니다. 그것은 닫혀 있던 비의의 문을 활짝 열어,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이끈 긍정적인 계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에서 지혜는 종종 지식으로, 체험은 정보로, 그리고 변형은 상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진정한 구도자의 과제는, 이 대중화의 물결에 휩쓸려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헤르메스 주의라는 강물의 더 깊고 순수한 수원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뉴에이지가 제공하는 수많은 영적인 ‘메뉴’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순간적인 입맛을 만족시키는 ‘패스트푸드’이고,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슬로우푸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영원한 헤르메스의 진정한 후예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13-2. 분열된 세계를 위한 처방전: 생태, 전일주의, 그리고 영성의 복원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세계는 눈부신 기술적 진보와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그만큼 깊고 어두운 균열의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과학혁명 이래로 우리가 걸어온 ‘탈마법화’의 길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정신을 물질로부터, 그리고 과학을 종교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이 거대한 분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전례 없는 힘을 얻었지만, 동시에 존재의 근원적인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깊은 소외와 불안, 그리고 의미의 상실이라는 실존적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파괴적인 생태 위기와, 서로 다른 지식 체계의 불신과 반목, 그리고 수많은 개인들이 겪는 내면의 공허함은 모두 이 동일한 뿌리, 즉 ‘분열’이라는 병의 각기 다른 증상들입니다. 이 깊어지는 병증 앞에서, 우리는 어쩌면 가장 오래된 약 상자 속에서 가장 현대적인 처방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수천 년 동안 서양 정신사의 지하를 흘러온 헤르메스 주의의 지혜는, 바로 이 분열된 세계를 다시 꿰매고 치유하기 위한 세 가지의 강력하고도 시의적절한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처방전은, 우리의 병든 행성을 위한 신성한 생태학(Sacred Ecology)입니다.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단순히 기술적, 경제적 문제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 가장 깊은 뿌리에는,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철학적, 영적인 오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는 자연을 영혼 없는 거대한 기계이자, 인간의 욕망을 위해 무한정 착취해도 되는 자원의 저장고로 간주해왔습니다. 숲의 신음과 강의 눈물을 듣지 못한 채, 우리는 맹목적인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유일한 집을 파괴해왔습니다.
이에 대해, 헤르메스 주의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그들에게 우주는 살아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며, ‘세계 영혼(Anima Mundi)’이라는 신성한 숨결이 그 안의 모든 것에 깃들어 있습니다. 지구는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 가이아(Gaia)입니다. 강과 산, 숲과 바다는 모두 그녀의 살아있는 몸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곧 우리 자신의 몸을 훼손하는 어리석고도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됩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상응 원리는, 오염된 강물이 결국 우리의 혈관을 더럽히고, 병든 대지가 결국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공감(Sympathy)’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다른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지배’의 패러다임을, 모든 생명과의 깊은 연결성을 인식하고 그 조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청지기’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현자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여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리듬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며, 감사와 경외심 속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생태학자입니다.
두 번째 처방전은, 우리의 파편화된 지식을 위한 전일적(Holistic) 패러다임입니다. 현대 사회는 전문화라는 이름 아래 모든 지식을 잘게 나누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수많은 칸막이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과학자들은 종교를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치부하고, 종교인들은 과학을 영혼 없는 유물론으로 비난합니다. 예술가들은 이성을 불신하고, 철학자들은 감각을 무시합니다. 이러한 지식의 분열은 우리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근시안적인 해답만을 내놓게 합니다.
헤르메스 주의는 이 모든 인위적인 칸막이를 허물어 버립니다. 그 지혜의 전통 안에서, 과학과 종교, 철학과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서로 다른 길일 뿐입니다. 헤르메스 주의자는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Physicus)이자, 신의 본질을 사유하는 신학자(Theologus)이며, 동시에 우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가(Poeta)이고, 그 모든 것을 실천하는 마법사(Magus)입니다. 그에게, 연금술 실험실에서 물질의 변성을 관찰하는 것은 곧 신의 창조 과정을 엿보는 종교적 체험이며, 밤하늘의 별들의 운행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우주의 신성한 조화를 느끼는 미학적 체험입니다. 또한, 헤르메스 주의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근대의 가장 근본적인 이원론을 거부합니다. 물질은 단순히 영이 없는 죽은 덩어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진동수를 지닌 영(Spirit)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영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추상적인 실재가 아니라, 모든 물질 속에 내재하며 그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의 작업은, 이처럼 어둡고 무거운 물질 속에 잠재된 신성한 빛, 즉 영적인 가능성을 일깨우는 가장 위대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헤르메스 주의는 분열된 모든 것을 다시 연결하고, 세계를 하나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전일적 패러다임을 제공합니다.
세 번째 처방전은, 우리 시대의 가장 깊은 병인 정신적 공허와 의미의 상실을 위한 것입니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깊은 허무함을 느끼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의미와 가치의 원천을 자기 바깥에서, 즉 사회적 성공이나 타인의 인정, 혹은 끊임없는 소비와 쾌락 속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외적인 것들은 결코 우리의 가장 깊은 영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헤르메스 주의는 이 의미를 향한 탐구의 방향을 180도 전환시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하도록 이끕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 위대한 가르침은, 우리 각자가 바로 우주 전체의 비밀을 담고 있는 소우주(Microcosm)임을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보물은 내 바깥이 아닌,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실천적 가르침들, 즉 연금술과 점성술, 신성마법은 모두 이 내면의 우주를 탐험하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한 잠재력, 즉 ‘자기(Self)’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고(Solve), 내면의 모든 대극적 힘들를 통합하여(Coagula), 마침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는 ‘위대한 작업’의 길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기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자신만의 가치와 소명, 즉 ‘다이몬(Daimon)’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적 성찰을 통해, 고갈된 영성을 회복하고 삶의 신성함을 되찾는, 가장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치유의 길입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고대 지혜는 단순히 박물관에 전시된 흥미로운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열이라는 현대 사회의 가장 깊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놀랍도록 시의적절한 처방전입니다. 그것은 파괴되어가는 지구를 위해 자연과의 공생을 가르치는 생태학적 지혜이며, 파편화된 우리의 지식을 위해 만물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전일적 지혜이고, 공허한 우리의 영혼을 위해 내면의 신성을 일깨우는 구원의 지혜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세 번 위대한’ 헤르메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와 통합은 오직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 하늘과 땅, 정신과 물질을 다시 하나로 연결시키는 ‘위대한 작업’을 시작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13-3. 영원한 철학(Perennial Philosophy)의 귀환
우리가 함께 걸어온 이 길고도 깊은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우리가 처음 떠났던 그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이름이 단순한 고대의 현자를 넘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의 경계를 초월하여 인류의 가장 깊은 지혜의 전통들 속에 언제나 존재해왔던 하나의 영원한 목소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특정 시대에 속한 유물이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말했던 바로 그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가장 순수하고도 강력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영원한 철학이란,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신비주의 전통의 외적인 교리와 의례의 껍질 아래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단 하나의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신성(神性)과 다르지 않으며, 인간은 이 내면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헤르메스 주의는 더 이상 서양 비의 전통의 한 갈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영성의 위대한 강물들이 만나는 하나의 거대한 합수지(合水址)가 됩니다. 헤르메스가 말하는 ‘하나(The One)’의 개념은 힌두교 베단타 철학의 ‘브라만(Brahman)’과, 불교가 말하는 ‘공(空, Sunyata)’의 침묵과, 도가(道家)가 말하는 ‘도(道)’의 신비와 깊이 공명합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상응의 원리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관, 즉 하나의 티끌 속에서 우주 전체를 본다는 통찰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라는 소우주를 탐구함으로써 대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헤르메스의 길은, “네가 너 자신을 알면, 너는 너의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이슬람 수피즘의 가르침과 그 방향을 정확히 같이합니다. 이처럼, 헤르메스의 목소리는 이집트의 신전뿐만 아니라, 인도의 아쉬람과 티베트의 사원, 그리고 중국의 도관과 페르시아의 수도원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심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찾아 더 이상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서양이나 동양이라는 지리적 구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특정 종교나 철학의 독점물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우리 모두의 고향과도 같은 것입니다. 헤르메스 주의는 서양의 전통 속에 서서, 바로 이 보편적인 내면의 길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게 제시해 온 하나의 위대한 나침반입니다.
이제 이 기나긴 책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앎이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헤르메스의 지혜는 단지 흥미로운 지적 탐구의 대상일 뿐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힘인가. 이 책의 마지막 메시지는 단호합니다. 헤르메스의 지혜는 결코 과거에 완성된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 각자의 삶 속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고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위대한 작업(Magnum Opus)’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원초적 질료(Prima Materia)’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연금술 실험실이며, 우리가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좌절은 모두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변성시키기 위한 신성한 불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 작업의 지도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삶의 고통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고, 그것이 나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낡은 자아를 해체하는 ‘흑화(Nigredo)’의 과정임을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얻었을 때, 그것이 정화된 영혼의 ‘백화(Albedo)’ 단계임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삶의 모든 대극적인 요소들을 끌어안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적화(Rubedo)’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밤하늘의 별들을 무심하게 올려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출생 천궁도라는 영혼의 지도를 통해, 별들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내면의 소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불운으로 여기는 대신, 나의 특정 행성이 나에게 어떤 성장의 교훈을 주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별들의 리듬과 함께 춤을 추며 자신의 운명을 창조해나가는 지혜로운 항해사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계가 더 이상 우리와 분리된 채 침묵하는 기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무생물처럼 보이는 돌멩이 하나와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공감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병든 행성의 신음은 곧 나의 신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계의 방관자가 아니라, 그 상처를 치유하고 조화를 회복하는 데 동참해야 할 책임과 사랑을 지닌, 우주의 적극적인 공동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여기서 끝을 맺지만, 독자 여러분 각자의 ‘위대한 작업’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진정한 비밀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의 삶이라는 실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책이, 여러분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가장 깊고 신비로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책의 페이지들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태고부터 울려오던 한 현자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헤르메스가 약속한 궁극의 지혜이며, 모든 분열된 것들이 마침내 하나의 사랑 속에서 완성되는, 영원한 철학의 진정한 귀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