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동양의 거울에 비친 헤르메스

by DrLeeHC

제12장: 동양의 거울에 비친 헤르메스 - 도와 그노시스의 만남


12-1. 근원의 침묵: 헤르메스의 ‘하나(The One)’, 노자의 ‘도(道)’, 그리고 천부경의 ‘일(一)’


하나의 심오한 진리는 종종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각기 다른 언어와 상징의 옷을 입고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하나의 달이 수많은 강물 위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치지만, 그 본질은 결국 같은 달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탐험해 온 헤르메스 주의라는 서양 정신사의 깊고 신비로운 강물 역시, 그 흐름의 방향을 동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돌렸을 때, 놀라울 정도로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의 자신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인과관계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존재의 근원을 탐구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 즉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증거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양의 거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헤르메스의 지혜가 어떻게 노자(老子)의 도와 공명하고, 동아시아의 우주관과 상응하며, 도교의 내단술(內丹術)과 조우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비교의 여정은 헤르메스 주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인류의 영적 유산이 얼마나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통찰하게 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지혜의 전통은, 그 사유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궁극적으로 하나의 말 없는 근원, 즉 모든 이름과 형상을 넘어선 절대적 실재 앞에서 침묵하게 됩니다. 헤르메스 주의와 그 철학적 모태가 된 신플라톤주의의 사유 체계, 그 가장 높은 곳에는 모든 존재가 그로부터 흘러나온 지고의 원천, ‘하나(To Hen, The One)’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에서 ‘아버지’ 혹은 경계 없는 ‘빛’으로 묘사되는 이 궁극의 실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그 자신은 어떠한 존재나 속성으로도 규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낳았지만 스스로는 태어난 적이 없으며,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그 자신은 어떠한 부분의 합도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결국 그것이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부정(否定)의 신학(Via Negativa)을 통하거나, 혹은 모든 언어적 규정을 포기하는 경건한 침묵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헤르메스의 ‘하나’가 지닌 심오한 침묵과 초월성은, 동양의 위대한 현자 노자가 말한 ‘도(道)’의 신비와 놀라울 정도로 깊이 공명합니다. 노자는 그의 저서 『도덕경, 道德經』의 첫 구절을, 인간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즉, 말로 규정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헤르메스의 ‘하나’처럼, 도 역시 만물을 낳고 기르는 근원이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이름이나 형태로도 고정될 수 없는, 영원하고도 텅 빈 실재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자연(自然)’이며, 억지로 무언가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의 현자와 주(周)나라의 사서는 모두 존재의 가장 깊은 비밀이 시끄러운 언어와 개념의 시장이 아닌, 모든 분별이 사라진 고요한 침묵의 성소에 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의 일자(一者)에 대한 통찰은, 한민족의 고유한 지혜가 응축된 경전 『천부경, 天符經』 안에서 가장 압축적이고도 독창적인 빛을 발합니다. 단 여든한 자의 글자로 우주 창조와 인간의 원리를 노래하는 이 경전 역시, 그 장엄한 서두를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철학적 선언으로 엽니다. 이는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나, 그 하나의 시작은 없다”는 의미로, ‘하나(一)’가 모든 창조의 시원이지만 그 자신은 창조되지 않은, 시작 없는 시작임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헤르메스 주의의 ‘하나’가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그 자신은 근원을 갖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노자의 ‘도’가 만물의 어머니이지만 그 자신은 태어난 적이 없다는 사상과 그 궤를 정확히 같이합니다. 천부경의 ‘하나’는 결코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나누어 우주 만물을 현현시키는 역동적인 창조의 원리입니다. 경전은 이어 “석삼극 무진본(析三極 無盡本)”이라 노래하는데, 이는 그 ‘하나’가 스스로를 나누어 하늘과 땅과 인간(天地人)이라는 세 가지 궁극으로 발현하지만, 그 근본은 결코 다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헤르메스의 ‘하나’가 유출(Emanation)을 통해 신성한 지성(Nous)과 세계 영혼(Anima Mundi)을 차례로 드러내듯, 노자의 ‘도’가 일(一)을 낳고, 일이 이(二)를 낳으며, 이가 삼(三)을 낳아 만물을 생성하듯, 천부경의 ‘하나’ 역시 자기 분화를 통해 우주적 다양성을 펼쳐내는, 무한하고도 다함이 없는 생명의 샘입니다.


이처럼 서양 비의 전통의 정점에 있는 헤르메스의 ‘하나’, 고대 중국 사상의 심연에 자리한 노자의 ‘도’, 그리고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을 담고 있는 천부경의 ‘일’은,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의 동일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감각하고 사유하는 이 다채로운 현상 세계의 배후에는, 모든 언어와 개념을 넘어서 있는, 침묵하고, 보이지 않으며, 그러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일한 근원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장엄한 통찰입니다.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달은 결국 같은 달인 것입니다. 이 보편적인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탐험할 모든 사상적 공명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됩니다.


12-2. 상응의 법칙과 천지인(天地人) 사상의 교감


모든 것이 흘러나온 근원적인 ‘하나’의 세계는, 스스로를 나누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인간이라는 세 가지 궁극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현현한 세계의 구조와 그 안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헤르메스 주의와 동양 사상 사이에 놓인 또 하나의 깊고도 경이로운 다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양 비의 전통의 주춧돌과도 같은 헤르메스의 위대한 선언, 즉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고,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으니(As Above, So Below)”라는 상응의 법칙은, 이 다리의 서쪽 끝을 단단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법칙은 우주, 즉 대우주(Macrocosm)가 결코 인간과 분리된 채 존재하는 거대한 외부 세계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인간, 즉 소우주(Microcosm)는 그 안에 대우주의 모든 구조와 법칙, 그리고 신성한 원리들을 온전히 담고 있는, 살아있는 거울이자 완벽한 축소판입니다.


따라서 헤르메스 주의자에게,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는 것은 곧 자기 영혼의 지도를 해독하는 행위가 되며, 자연 속에서 물질이 변성되는 연금술의 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내면이 정화되고 완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인간은 이 우주적 상응의 비밀을 앎으로써, 더 이상 운명에 속박된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교감하고 그 힘을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존엄한 존재로 격상됩니다. 그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중재자이며, 그의 내면은 우주의 모든 신비가 만나는 성스러운 교차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헤르메스 주의의 상응 원리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 특히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틀인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라는 거울 속에서 그 완벽한 모습을 비추어 보입니다. 천지인 사상은 우주를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인간(人)이라는 세 가지 근본적인 실재(三才)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봅니다. 여기서 하늘은 시간과 비가시적인 원리, 즉 천체의 운행과 운명의 법칙을 상징하고, 땅은 공간과 가시적인 형태, 즉 만물이 생성되고 자라나는 물질적 토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부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늘의 질서를 깨닫고 땅의 이치를 본받아, 비로소 천지자연의 조화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하고도 능동적인 중심축입니다.


동양의 성인(聖人)은 바로 이 천지인의 조화를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사회 속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낸 사람입니다. 그는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꿰뚫어, 그 가운데에서 인간 사회의 올바른 길, 즉 인도(人道)를 세웁니다. 주역(周易)의 괘(卦)를 통해 하늘의 뜻을 읽고, 예악(禮樂)을 통해 인간 사회의 질서를 우주의 조화와 일치시키려는 유교의 이상이나,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도가(道家)의 삶의 방식은 모두, 인간이 천지의 운행 법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조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동일한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헤르메스의 현자가 점성술을 통해 하늘의 지도를 읽고 연금술을 통해 땅의 비밀을 다루었듯이, 동양의 현자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통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조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두 위대한 전통의 만남은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놀랍도록 일치하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헤르메스 주의에서 인간이 ‘신성과 필멸성을 잇는 다리’라면, 동양 사상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입니다. 두 세계관 모두에서, 인간은 결코 우주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운명에 깊이 참여하고 그 조화를 유지해야 할 숭고한 책임과 가능성을 부여받은 우주적 존재입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헤르메스의 신탁과, 인간이 천지의 마음을 본받아 자신의 삶을 완성해야 한다는 동양의 가르침은, 결국 서로 다른 언어로 노래하는 하나의 장엄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찬가인 것입니다.


12-3. 내면의 변성: 서양의 연금술과 동양의 내단(內丹)


인간의 영혼은 그 가장 깊은 곳에,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원성과 합일하고자 하는 신성한 불꽃을 품고 있습니다. 유한한 육체에 갇혀 필멸의 운명을 살아가는 이 지상의 순례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본질이 이 덧없는 현상 세계에만 속한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 자각의 순간, 한 존재의 내면에서는 가장 위대하고도 위험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재료로 삼아, 필멸의 존재를 불멸의 존재로, 불완전한 자아를 완전한 자아로 바꾸어내는, 신성한 변성의 작업입니다. 이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도 비밀스러운 꿈은, 서양에서는 ‘연금술(Alchemy)’이라는 이름의 상징적 드라마로, 그리고 동양에서는 ‘내단(內丹)’이라는 이름의 내밀한 수행법으로 펼쳐졌으니, 이 두 길은 서로 다른 대륙의 끝에서 출발했지만, 놀랍게도 동일한 산의 정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연금술은 그 외적인 목표를, 가장 천하고 무거운 금속인 납(Lead)을 가장 고귀하고 완벽한 금속인 황금(Gold)으로 바꾸는 것에 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연금술을 단지 부(富)를 향한 탐욕이 빚어낸 어리석은 시도로 폄하했지만, 진정한 철학자들에게 실험실의 플라스크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변화는, 훨씬 더 장엄한 내면의 드라마를 비추는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손에 잡히는 황금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부식되지 않는 영혼의 황금, 즉 모든 불완전함을 치유하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궁극의 물질, ‘철학자의 돌 (Lapis Philosophorum)’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의 돌은 우주의 모든 대극적인 힘들, 즉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축축함, 고정된 것과 휘발하는 것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신성한 합일체입니다. 그것은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Magnum Opus)’의 최종적인 결실이자, 분열된 인간의 영혼이 마침내 그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하여 온전한 ‘자기(Self)’로 거듭났음을 증명하는 외적인 징표였습니다. 연금술사는 이 돌을 통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가졌던 완전한 상태, 즉 죽음의 운명을 극복하고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원형적 인간(Anthropos)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양 연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교(道敎)의 가장 심오한 수행법인 내단술의 목표와 그 이름과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경이로운 일치를 보여줍니다. 내단술의 목표 역시 ‘금단(金丹)’, 즉 ‘황금 영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금단은 외부의 물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수행자 자신의 몸 안에서, 정(精)과 기(氣), 그리고 신(神)이라는 내적인 재료들을 단련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차원의 불멸하는 ‘영적인 몸(陽神, Yang-Shen)’을 의미합니다. 내단 수행자는 이 금단의 완성을 통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육체의 운명에서 벗어나,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는 신선(神仙)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서양의 철학자의 돌이 인간을 완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면, 동양의 금단은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격상시킵니다. 두 전통 모두에서, 그 최종적인 결실은 필멸의 한계를 넘어선, 새롭고도 영원한 영적 실체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목표를 향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 즉 실험실의 구조 또한 두 전통은 놀라운 상응 관계를 보여줍니다. 서양 연금술의 작업은 아타노르(Athanor)라 불리는 특수한 화로와, 그 위에 놓인 증류기(Alembic)와 플라스크, 즉 ‘헤르메스의 그릇(Vas Hermeticum)’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실험실은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야 하며, 작업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굳게 닫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에게 이 실험실은,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 즉 영혼의 상태를 외부로 투사(Projection)한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밀폐된 용기는 바로 수행자 자신의 몸과 마음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화학 반응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영적 변화의 상징적인 반영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실험실의 개념은, 내단술에 이르러서는 온전히 내면화됩니다. 내단 수행자에게, 그의 유일한 실험실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몸입니다. 그의 몸은 우주의 모든 원리가 담겨 있는 소우주이기에, 더 이상 외부의 도구나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하복부에 위치한 에너지의 중심, 즉 ‘단전(丹田)’은 연금술의 화로가 되고, 그의 몸 전체는 신성한 물질들이 단련되는 거대한 가마솥, 즉 ‘정(鼎, Ding)’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의식과 호흡을 통해 이 내면의 화로에 불을 지피고, 그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자신의 몸 안에서 직접 ‘위대한 작업’을 수행합니다. 연금술이 외부의 물질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이끌어내려 했다면, 내단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모든 과정을 외부의 투사 없이, 자신의 몸이라는 궁극의 실험실 안에서 직접적으로 완수하려는, 가장 내밀하고도 궁극적인 형태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성한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재료 또한, 두 전통은 심오한 평행 이론을 보여줍니다. 서양 연금술의 시작점은 ‘원초적 질료(Prima Materia)’입니다. 이것은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혼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너무나도 흔하고 비천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교육받지 못하고 무지에 빠져 있는,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인간의 원초적 영혼 상태를 상징합니다. 연금술사는 바로 이 버려진 돌 속에서, 모든 작업의 기초가 되는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초적 질료는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원리, 즉 ‘황(Sulphur)’과 ‘수은(Mercury)’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황은 불처럼 뜨겁고, 건조하며, 능동적인 남성적 원리(붉은 왕)를 상징하며, 수은은 물처럼 차갑고, 축축하며, 수용적인 여성적 원리(흰 여왕)를 상징합니다. 연금술의 전 과정은, 이 두 원리를 원초적 질료로부터 분리하고(Solve), 각각을 정화한 후, 마침내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결합(Coagula)시키는 과정입니다.


내단술의 재료 역시, 이와 완벽하게 상응하는 세 가지 보물, 즉 ‘삼보(三寶)’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재료는 ‘정(精, Jing)’입니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생명의 본질 에너지이자, 성(性)적인 에너지와도 깊이 관련된, 가장 물질적이고 근원적인 에너지입니다. 이것은 서양 연금술의 ‘원초적 질료’와 그 위상이 정확히 같습니다. 수행자는 이 정을 낭비하지 않고, 몸 안에 보존하여 다음 단계의 재료로 삼아야 합니다. 두 번째 재료는 ‘기(氣, Qi)’입니다. 이것은 호흡과 음식물을 통해 얻어지는 후천적인 생명 에너지로, 몸 전체를 순환하며 모든 생리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정제된 재료는 ‘신(神, Shen)’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 지성, 영성을 포함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정신 에너지입니다. 내단술의 과정은, 이 세 가지 재료를 거꾸로 단련하여 그 근원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즉, 정을 단련하여 기로 변성시키고, 기를 다시 단련하여 신으로 변성시키며, 마침내 신을 비움(虛)과 합하여 근원적인 도(道)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특히, 내단술에서 모든 변화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대극적인 힘의 상호작용입니다. 여기서 양은 하늘과 불, 그리고 남성성을 상징하며 종종 ‘용(龍)’으로 비유되고, 음은 땅과 물, 그리고 여성성을 상징하며 ‘호랑이(虎)’로 비유됩니다. 내단 수행의 핵심은 바로 이 내면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만나 교합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 에너지, 즉 금단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 연금술에서 붉은 왕(황)과 흰 여왕(수은)의 ‘신성한 결혼(Hieros Gamos)’을 통해 철학자의 돌이 탄생하는 과정과, 그 상징적 구조에 있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변성의 과정을 이끌어가는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도 우리는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양 연금술에서 작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바로 ‘불의 조절’에 있습니다. 연금술사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부드러운 불’을 자신의 아타노르에 지속적으로 가해주어야 합니다. 불이 너무 강하면 재료가 타서 재가 되어버리고, 너무 약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불’은 물리적인 불인 동시에, 수행자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집중력, 그리고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을 상징합니다.


내단술에서도 이 ‘불의 조절’은 ‘화후(火候)’라는 이름의 가장 핵심적인 비결로 전해집니다. 여기서의 불은 당연히 물리적인 불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의식적인 호흡과 명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내면의 생체 에너지, 즉 ‘신화(神火)’입니다. 수행자는 호흡의 길고 짧음, 그리고 의식의 집중도를 조절함으로써, 단전의 가마솥에 지펴진 이 불의 세기를 정밀하게 제어해야 합니다. 무위(武火)라 불리는 강한 불로써 불순물을 태워버리고, 문화(文火)라 불리는 부드러운 불로써 정수를 부드럽게 기르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정은 비로소 기로, 기는 신으로 변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연금술사가 자신의 화로 앞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불을 지켰듯이, 내단 수행자 역시 매일 꾸준한 명상과 호흡 수련을 통해 자기 내면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아야만, 위대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연금술과 동양의 내단술은, 비록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각기 다른 상징의 언어로 그 비밀을 이야기했지만, 그 가장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향한, 놀랍도록 일치하는 영혼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두 전통 모두에서, 인간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신성한 불꽃을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지펴, 필멸의 납과 같은 자기 자신을 불멸의 황금과 같은 존재로 바꾸어낼 수 있는, 위대한 연금술사로 그려집니다. 이 내면의 변성을 향한 길이야말로, 헤르메스 주의의 가장 대담하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이며, 그 동일한 꿈이 동양의 가장 깊은 지혜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인간 영성의 보편성에 대한 깊고도 경이로운 통찰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12-4. 흐름에 순응하는 지혜: 신성마법과 무위자연(無爲自然)


인간이 자기 내면의 신성을 자각하고 우주의 비밀을 엿보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이 앎을 가지고 나의 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하나의 지혜 체계가 도달한 가장 높은 성숙도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서양 헤르메스 주의의 실천적 정점인 ‘신성마법(Theurgy)’과, 동양 도가(道家) 사상의 궁극적 경지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은, 표면적으로는 적극적인 ‘행위’와 수동적인 ‘무위’라는 양 극단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정교한 의례와 강력한 의지를 통해 신적인 힘을 불러일으키려는 능동적인 예술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내려놓고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는 고요한 철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두 길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 본질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이 명백한 모순이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진리를 향한, 가장 역설적이고도 아름다운 두 개의 등반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성마법, 즉 ‘테우르기아(Theurgia)’는 그 이름이 ‘신(Theo)의 작업(Ergon)’을 의미하듯, 인간이 신의 작업에 동참하려는 가장 대담한 시도입니다. 자연마법이 지상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기술이라면, 신성마법은 그 목표를 훨씬 더 높은 곳, 즉 인간 영혼의 정화와 신성과의 합일에 둡니다. 신성마법사는 상응의 원리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신성한 힘의 본질과 공명하는 물질과 상징, 그리고 소리를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을 열고 천상의 존재들과 교감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은 외부인의 눈에는,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행위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그는 마법원을 그리고, 제단을 세우며, 향을 피우고, 고대의 언어로 된 기도문과 신의 이름들을 힘차게 암송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가 우주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장 능동적인 형태의 실천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성마법의 가장 깊은 비의(祕儀)를 탐구했던 후기 신플라톤주의의 위대한 사제, 이암블리코스(Iamblichus)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이 행위의 진정한 목적이 정반대의 곳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성마법의 모든 정교하고 복잡한 의례는, 사실 마법사 자신의 개별적인 의지, 즉 에고(Ego)를 소멸시키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장엄한 장치입니다. 마법사가 엄격한 정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다스리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신의 위대함으로 가득 채우는 이유는, 그의 작은 자아가 신성한 힘을 담기에 합당한, 깨끗하고 비어 있는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자신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이름들(Nomina Barbara)’을 반복하여 암송하는 이유는, 자신의 논리적인 정신 활동을 멈추고, 자신보다 더 위대한 우주적 진동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신성마법의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고 의지적으로 보이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가장 완전한 수동성과 자기 비움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신성마법의 성공은 마법사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이 아니라, 그의 개별적인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비워진 자리를 그가 초대한 신성한 힘이 가득 채우는 ‘신들림(Enthousiasmos)’의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이 순간, 마법사는 더 이상 행위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는 신의 의지가 자신을 통해 이 지상에 현현하는, 하나의 순수하고 투명한 ‘통로(Channel)’가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가 되고, 그의 손길은 신의 손길이 됩니다. 그는 가장 강렬한 의례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모든 개인적 의지가 사라진, 완벽한 무위(無爲)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성마법의 길은 놀랍게도 도가 사상의 가장 깊은 지혜,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철학과 만납니다. 무위(無爲)는 흔히 오해되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나 수동적인 체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작은 지혜와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세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거나 조종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고 말합니다. 이는 무위가 무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행위의 방식임을 의미합니다.


무위의 지혜를 체득한 성인(聖人)의 행위는, 마치 숙련된 뱃사공이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려 애쓰는 대신, 그 흐름의 힘을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않기에, 오히려 우주 전체의 의지, 즉 도(道)의 흐름이 그를 통해 막힘없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그는 억지로 선을 행하려 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자연스럽게 주변을 이롭게 합니다. 그는 억지로 질서를 세우려 하지 않지만, 그가 머무는 곳에 저절로 조화가 깃듭니다. 이처럼, 무위는 모든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 의식을 내려놓고, 행위가 ‘나’를 통해 저절로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의 상태입니다.


신성마법과 무위자연, 이 두 길은 출발점에서는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성마법사는 가장 복잡하고 인위적으로 보이는 의례의 길을 걷고, 도가의 성인은 모든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가장 단순한 자연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갈수록 점차 가까워지며, 마침내 그 정점에서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신성마법사가 복잡한 의례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의 경지는, 자신의 에고를 완전히 비우고 신의 완벽한 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가의 성인이 모든 행위를 내려놓음으로써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의 경지는, 자신의 분별지를 완전히 비우고 도의 완벽한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 길 모두에서, 진정한 지혜는 개인의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큰 우주적 의지의 흐름 속에 기꺼이 녹여 보내는 데 있음을 통찰합니다. 가장 고도로 훈련된 ‘의지’의 정점에서 신성마법사는 ‘무위’를 발견하고, 가장 깊은 ‘무위’의 고요 속에서 도가의 성인은 ‘모든 것을 이루는’ 진정한 힘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헤르메스 주의의 가장 높은 마법과 도가 사상의 가장 깊은 철학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온 우주를 얻는다’는 영성의 가장 위대한 역설 앞에서 감격스럽게 조우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신성마법과 동양의 무위자연은, 비록 그 과정의 언어와 형태는 다를지라도, 분열된 자아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주적 전체성과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동일한 열망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위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는 장엄한 의례라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려 했고, 다른 하나는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늘과 하나가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결국 ‘나’는 사라지고 오직 우주의 거대한 숨결만이 흐르는, 동일한 깨달음의 지평이었을 것입니다. 이 경이로운 공명이야말로, 헤르메스의 지혜가 특정 지역의 비의를 넘어, 인류 전체의 보편적 영성을 비추는 영원한 거울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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