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강물은 로마 제국의 황혼 속으로 스며들며, 서양 정신사의 가장 깊고 넓은 바다, 바로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 민족의 독특한 신앙적 체험을 로마-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용광로 속에서 설명하고 변증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교양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권위 있는 지적 언어는 바로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위대한 사상가, 즉 교부(敎父)들은 이 철학적 언어를 외면하는 대신, 그것을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스토아 철학의 심장이었던 ‘로고스(Logos)’와 ‘섭리(Pronoia, 프로노이아)’라는 두 개념은,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세우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재료가 되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 전체에 내재하며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신성한 이성이자 법칙이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별들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우주적 정신이다.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 거대한 우주적 이성의 작은 불꽃 조각이며,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로고스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지닌 우주적 의미를 설명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도구였다. 그 가장 빛나는 증거가 바로 『요한 복음』의 장엄한 서두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가 바로 ‘로고스’다.
이 구절에서 인류 정신사의 가장 극적인 변환이 일어난다. 스토아의 로고스는 우주 전체에 퍼져있는 비인격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였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이제 한 명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물, 즉 나사렛 예수와 동일시된다. 추상적인 우주의 법칙이 피와 살을 지닌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온 것이다. 이것은 보편이 특수가 되고, 법칙이 인격이 되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 연결고리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2세기의 변증가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 (Justinus Martyr)는 스토아의 ‘씨앗 같은 로고스 (logos spermatikos)’ 개념을 차용했다. 그는 완전한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신께서는 로고스의 씨앗들을 온 인류의 마음에 뿌려두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이성에 따라 훌륭한 삶을 살았던 이교도 현자들 역시,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로고스, 즉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교 철학을 악마의 것으로 배척하지 않고, 기독교 진리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끌어안으려는 놀랍도록 개방적인 신학적 시도였다.
스토아의 ‘섭리 (Pronoia)’ 개념 또한 기독교 신학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스토아의 섭리가 우주 전체의 조화를 위해 작동하는 비인격적인 법칙에 가까웠다면, 기독교의 섭리 (providentia, 프로비덴티아)는 인격적인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돌보심으로 변모했다. 스토아의 섭리가 우리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우주 전체의 선(善)을 우선시했다면, 기독교의 섭리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거나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가장 미미한 존재 하나하나를 향한 인격적인 신의 사랑과 관심을 강조했다. 스토아 철학자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적’이기 때문이라면, 기독교인이 섭리를 믿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이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강물로부터 말씀 (로고스)과 섭리 (프로노이아)라는 두 개의 가장 강력한 물줄기를 끌어와, 자신들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밭에 생명을 공급했다. 이 과정에서 스토아의 비인격적이고 범신론적인 개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격 안에서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의미로 재탄생했다. 우주의 이성은 구원자 아들이 되었고, 우주의 법칙은 사랑의 아버지의 뜻이 되었다.
스토아 철학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의 지성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그토록 정교하고 보편적인 신학적 언어를 발전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새로운 세계 종교를 위한 철학적 산파(産婆)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2절: 두 종류의 사랑 - 오이케이오시스(Oikeiosis)와 아가페(Agape)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가 공유하는 가장 빛나는 이상 중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경계를 넘어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이다. 그러나 두 위대한 지혜가 그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마치 땅에서부터 하늘로 자라나는 나무와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쬐는 햇빛처럼, 그 근원과 방향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스토아의 사랑이 ‘오이케이오시스(oikeiōsis)’라는 자연스러운 친화성의 확장이라면,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agape, ἀγάπη)’라는 초자연적인 자기희생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지평의 두 개의 서로 다른 극점을 탐험하는 것이다.
스토아의 오이케이오시스는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생명체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에게 속한 것을 아끼려는 타고난 본능적 충동에서 출발한다. 갓난아이가 자신의 몸을 본능적으로 아끼듯이, 우리의 애착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이성은 이 자연스러운 자기애 (自己愛)가 이기심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물가의 파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밖으로 확장되도록 이끈다. 나 자신을 아끼는 마음은 나의 부모와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더 나아가 친구와 이웃, 동료 시민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류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끌어안는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 확장의 논리적 근거는 모든 인간이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logos)의 불꽃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친족(kin)’이라는 깨달음에 있다. 내가 나의 몸을 아끼는 것이 합리적이듯이, 나와 같은 이성을 지닌 다른 인간을 아끼는 것 또한 똑같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스토아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감정적인 연민이나 동정심을 넘어, 우주적 질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인간을 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나’라는 중심점이 존재한다. 사랑은 나에게서 시작하여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의 아가페는 이러한 자연적인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충격적이고도 초월적인 사랑이다. 아가페는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적인 사랑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계명이다. 이 사랑의 원형은 바로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절정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 자기희생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아가페적 사랑은 바로 이 신의 사랑을 ‘모방(imitatio Dei)’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가장 급진적인 특징은 그것이 ‘원수’에게까지 확장된다는 점이다.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오이케이오시스의 합리적인 확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스토아 철학자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무지한 자’로 여기고 동요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원수 사랑은 선택이 아닌 명령이다.
또한, 아가페는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스토아의 사랑이 공동체의 조화와 자신의 내면적 평온이라는 이성적인 결과를 지향한다면, 아가페는 사랑의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반응이나 감사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신의 사랑과 같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은 인간 영혼을 움직이는 서로 다른 동력을 보여준다. 오이케이오오시스의 동력은 ‘이해’다. 우리는 타인이 나와 같은 이성을 지닌 존재임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반면, 아가페의 동력은 ‘의지’와 ‘은총’이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며,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신의 은총으로부터 구한다.
스토아의 오이케이오시스와 기독교의 아가페는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서려는 두 개의 위대한 윤리적 이상이다. 스토아는 우리의 자연적인 자기애를 이성의 빛으로 정화하고 확장하여, 온 인류를 포용하는 ‘우주적 시민’의 합리적인 사랑을 가르쳐주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자연적인 계산과 한계를 뛰어넘어, 원수마저도 끌어안는 신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우리 앞에 제시했다. 스토아의 사랑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가장 높은 지점이라면, 기독교의 아가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준다. 하나는 우리에게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법을, 다른 하나는 그 세상을 ‘구원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절: 신의 얼굴 - 내재하는 우주와 초월하는 인격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모두 이 세계가 맹목적인 우연이 아니라, 신적인 질서 아래 있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두 지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의 얼굴은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가 기도하고 경배해야 할 신은 과연 어디에 계시는가? 그는 이 우주 자체인가, 아니면 이 우주 너머에 계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스토아의 범신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인격신적 세계관을 가르는 가장 깊고도 근본적인 분수령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라본 신의 얼굴은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우주 그 자체의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신과 자연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 즉 ‘신 즉 자연 (Deus sive Natura)’이었다. 스토아의 신은 저 멀리 하늘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다. 그는 이 우주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살아있는 영혼이자, 그 몸을 관통하는 따뜻한 숨결, 즉 프네우마 (pneuma)다. 로고스 (Logos)라 불리는 신의 이성은 우주의 모든 원자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별들의 운행과 우리 몸의 생리 작용은 모두 이 내재하는 신의 생각의 표현이다.
이 관점에서,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곧 신학(神學)이며, 천문학자의 망원경과 식물학자의 돋보기는 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경건한 도구가 된다. 이러한 ‘내재적 (immanent)’ 신관 속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지적인 ‘조율’의 관계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작은 로고스를 우주 전체의 거대한 로고스와 일치시킴으로써 신과 하나가 된다.
반면, 기독교가 보여주는 신의 얼굴은 우주 너머에 계시는, 그러나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을 건네시는 아버지의 얼굴이다. 기독교 신관의 핵심은 ‘창조 (creatio)’라는 개념에 있다. 신은 이 우주를 ‘무 (無)로부터 (ex nihilo)’ 창조했다. 이는 신이 우주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완전한 존재로 홀로 계셨으며, 우주는 그의 본질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물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근본적으로 ‘초월적 (transcendent)’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 안에 거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작품 자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위대한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론적 간격이 존재한다.
이 초월적인 신은 스토아의 비인격적인 원리와는 달리, 뚜렷한 ‘인격 (person)’을 지니신다. 그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며, 마침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신다. 따라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합리적인 조율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 그리고 기도를 통한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가 된다. 우리는 로고스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부름받는다.
이 근본적인 신관의 차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다. 스토아의 내재적 세계관에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 (miracle)’이란 있을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이 곧 신의 이성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신이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완벽하고 필연적인 인과의 사슬로 엮여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월적 세계관에서는 기적이 가능하다. 우주를 창조한 신은 그가 만든 자연법칙 위에 존재하기에,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언제든 그 법칙에 개입할 수 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 세계 안에서 행하는 특별한 행위다.
이렇듯, 스토아와 기독교는 우리에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스토아는 우리에게 우주 전체를 경이로운 신의 몸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연과의 깊은 연결성과 내재적 질서에 대한 경외감을 일깨워준다. 그들의 신은 이성의 눈을 통해 발견된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우주 너머에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돌보시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개인적인 관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신의 손길을 발견하게 한다. 그들의 신은 믿음의 마음을 통해 만난다. 하나는 우리에게 ‘우주 안에서의 평온’을, 다른 하나는 ‘우주를 넘어서는 구원’을 약속한다.
4절: 고통의 의미 - 운명애(Amor Fati 아모르 파티)와 십자가의 신비
인간의 삶이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 앞에서, 모든 위대한 철학과 종교는 그 의미를 묻고 답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세계관 가장 깊은 중심에 놓았다. 그러나 두 지혜가 고통의 신비 속에서 발견한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는 우주의 ‘필연적인 논리’ 속에서 고통을 긍정하는 길을, 기독교는 ‘역설적인 사랑’의 사건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철학자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따르라는 순교자의 길이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Logos)가 엮어내는 거대한 직물의 일부다. 이 우주적인 직물은 완벽하며, 그 안의 모든 실은 전체의 아름다운 무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질병, 가난, 죽음과 같이 어둡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검은 실조차도, 전체 무늬의 깊이와 명암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따라서 내 삶에 닥쳐온 고통은 우주적 질서의 실수가 아니라, 내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는 더 큰 조화의 일부다.
이러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스토아의 윤리적 태도가 바로 ‘운명애(Amor Fati 아모르 파티)’,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 앞에서 그저 체념하거나 인내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선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 기쁨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슬픔과 상실까지도, 우주가 내게 준 필연적이고도 좋은 선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긍정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불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켜 더 밝게 타오르듯이, 이성적인 영혼은 어떤 장애물이라도 자신의 덕을 실현할 재료로 삼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운명애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스토아에게 고통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에게 내면의 덕을 단련하고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위대함을 증명할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
반면, 기독교가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추상적인 우주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 (the Fall)’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드라마에 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고통과 죽음은 본래 신이 창조한 선한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신에게 불순종하고 교만해짐으로써, 창조 세계의 조화가 깨어진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스토아에서처럼 필연적인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본래의 완전함이 깨어진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극복되어야 할 비극이다.
이 비극의 절정에서, 기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도 역설적인 사건, 즉 ‘십자가’를 제시한다. 십자가 위에서,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완전한 신은 더 이상 고통을 멀리서 관망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과 버림받음, 그리고 죽음의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온다. 신은 고통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는 방식으로 그에 응답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주적 질서를 위한 필연이 아니라, 깨어진 세계를 치유하고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신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행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기독교는 고통과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아님을 선언한다. 부활은 이 깨어진 세상이 언젠가 회복되어, 모든 눈물이 씻겨나갈 새로운 창조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고통의 의미는, 그것을 통해 신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다가올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데 있다.
스토아와 기독교는 고통이라는 같은 어둠 속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빛을 발견한다.
스토아는 ‘이해를 통한 평온’을 가르친다. 고통의 필연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우주적 질서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희망’을 가르친다. 고통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신의 사랑을 믿고,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의 약속을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 ‘너머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운명 앞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철학자의 방패를 준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순교자의 검을 준다.
스토아는 우주의 변치 않는 논리를 신뢰하는 법을, 기독교는 그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의 신비를 신뢰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5절: 구원의 길 - 아파테이아(Apatheia)와 믿음(Pistis, 피스티스)
모든 위대한 철학과 종교는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자신의 최종적인 대답을 내놓아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고통과 한계로부터 벗어나 궁극적인 해방,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서양 정신사의 가장 위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간 자신의 이성적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나가는 ‘상승(上昇)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신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하강(下降)의 길’이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구원의 목표는 ‘아파테이아 (apatheia)’라는 완전한 내면의 평정이다. 이는 비이성적인 격정(파토스)의 모든 소란이 잠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상태다. 이 경지에 이르는 길은 평생에 걸친 자기 자신과의 엄격한 투쟁, 즉 ‘아스케시스(askēsis, ἀσκησις)’라 불리는 정신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토아 철학자는 ‘욕망의 훈련’, ‘행동의 훈련’,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동의의 훈련’이라는 세 가지 체계적인 수련을 통해, 자신의 이성을 우주의 이성인 로고스와 완벽하게 조율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신, 즉 로고스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로고스는 우리가 따라야 할 완벽한 ‘모델’이자, 우리가 경기를 펼치는 ‘경기장’ 그 자체다. 구원의 노력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인간의 이성은 신적인 로고스의 불꽃이기에, 우리 안에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이미 내재해 있다. 따라서 스토아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지금 여기, 이 세상 속에서 성취하는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자기 해방’이다.
반면,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전혀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이 마주한 근본적인 문제는 스토아가 말하는 ‘무지’나 ‘잘못된 판단’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죄 (hamartia, 하마르티아)’다. 죄는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 자체가 신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뒤틀려버린 상태, 즉 신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라는 ‘상승’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은총 (charis, 카리스)’이라는 ‘하강’을 통해 주어진다.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선물이다. 이 은총의 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신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성적 훈련이 아니라, 이 압도적인 신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 즉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 불리는 ‘믿음’이다.
이처럼 두 길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향은 정반대다. 스토아의 구원이 인간 내면의 힘에 의존하는 ‘자력(自力) 구원’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으로 외부의 신적인 힘에 의존하는 ‘타력(他力) 구원’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의 의지는 훈련을 통해 완벽에 이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의 의지는 죄에 물들어 있으며, 신의 은총에 자신을 내맡기고 항복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구원의 시점 또한 다르다. 스토아의 아파테이아는 지금 이 생애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전한 성취는 종말론적인 미래, 즉 죽음 너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zoē aiōnios, 조에 아이오니오스)’이라는 약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스토아와 기독교는 인간 해방에 대한 두 개의 위대한,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스토아의 현자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운명과 격정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완성하는 ‘철학자-왕’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의 평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온다. 반면, 기독교의 성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신의 자비 앞에 무릎 꿇음으로써,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용서받은 아이’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온다. 하나는 우리에게 ‘자기 완성의 길’을, 다른 하나는 ‘자기 항복의 길’을 보여준다. 이 두 길은 서양 정신사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가장 위대하고도 치열했던 두 개의 서로 다른 여정이다.
6절: 지혜의 교차로 - 『도마 복음』에 나타난 스토아의 그림자
우리가 지금까지 탐험한 스토아와 기독교의 만남이 서양 정신사의 공식적인 대로(大路) 위에서 이루어졌다면, 그 길의 가장자리, 역사의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또 다른 비밀스러운 오솔길이 존재한다. 그 길의 이름이 바로 『도마 복음』이다. 이 신비로운 문헌은 결코 영지주의라는 하나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훨씬 더 넓고 깊은 지혜의 강물이 흘러드는 호수와도 같다. 그리고 그 호수를 채우는 가장 강력한 지하수 중 하나가 바로 스토아 철학의 강인한 물줄기다. 『도마 복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스토아의 지혜가 어떻게 초기 기독교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그 생명력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탐험이다.
『도마 복음』이 나그함마디에서 다른 수많은 영지주의 문헌들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책을 ‘영지주의 복음서’로 분류해왔다. 그리고 그 근거는 명백하다. 이 책의 곳곳에는 구원이 비밀스러운 ‘앎(gnosis)’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인간 내면에 ‘신성의 불꽃’이 깃들어 있다는 점과 같이 영지주의의 핵심적인 사상들이 깊이 배어있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라는 표면의 흙을 걷어내고 더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그 아래에서 스토아 철학이라는 단단한 암반을 발견하게 된다. 『도마 복음』의 많은 가르침들은 영지주의의 복잡한 신화보다는, 스토아 철학의 간결하고 실천적인 윤리학과 놀라울 정도로 더 가깝다.
『도마 복음』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퍼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말씀 113)는 구절과 함께, 구원이 미래에 올 약속의 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인식’을 통해 실현되는 내면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는 스토아 철학이 행복의 근원을 외부적인 조건이 아닌,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 즉 ‘지배 이성 (hēgemonikon)’의 평온에서 찾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가난 속에 있는 것이며, 너희 자신이 바로 그 가난이다”(말씀 3)라는 구절은, 외부의 부와 상관없이 내면의 덕(virtus)을 통해 완전한 자기 충족 (autarkeia)에 이를 수 있다는 스토아 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도마 복음』은 끊임없이 세상적인 가치, 즉 부와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세상을 발견하고 부자가 된 자는 세상을 버리도록 하라” (말씀 110)는 명령은, 스토아 철학이 부와 명예와 같은 외부적인 것들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 (adiaphora)’으로 여기고 그것들로부터 초연해지라고 가르쳤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고통을 만든다는 것이었듯이, 『도마 복음』 역시 세상을 ‘올바로 보는 것’을 통해 평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두 개를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사람이 되리라”(말씀 22)는 신비로운 구절은, ‘나’와 ‘세계’, ‘내면’과 ‘외면’이라는 이분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통합된 인식을 통해 갈등이 사라진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스토아 철학이 ‘인상 (phantasia)’과 ‘판단’을 분리하여 마음의 평정 (apatheia)을 얻으려 했던 훈련과 그 목표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도마 복음』은 영지주의적인가, 아니면 스토아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둘 다이면서, 동시에 둘 다 아니다’이다. 『도마 복음』은 1-2세기 지중해 세계의 치열했던 영적, 철학적 용광로 속에서 태어난, 놀라운 혼합물 (syncretism)의 산물이다. 저자는 인간 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당시의 지성인들에게 익숙했던 두 개의 강력한 언어, 즉 영지주의의 ‘계시적 언어’와 스토아 철학의 ‘윤리적 언어’를 자유롭게 빌려와 자신만의 독특한 길을 엮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의 내면에는 신성한 빛이 갇혀있다 (영지주의). 그러므로 너는 세상의 거짓된 가치에 속지 말고, 오직 너 자신의 내면 왕국을 다스리는 데 집중하라 (스토아). 그 왕국을 발견하는 ‘앎’ (영지주의)이 바로 너를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다.”
『도마 복음』은 스토아 철학이 어떻게 초기 기독교의 가장자리에서, 정통 교회의 교리가 아닌, 개인의 직접적인 내면 탐구를 강조하는 신비로운 가르침의 형태로 그 생명력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귀중하고도 생생한 증거다.
오, 이토록 소란하고 분주한 시대의 자녀들아. 나는 카르파치아 (Carpathian) 산맥의 정기 속에서 영혼의 불멸을 노래하고, 다치아 (Dacia)의 숲에서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비밀을 가르쳐 온 자, 잘목시스 (Zalmoxis)이니라.
너희를 보아하니, 영혼이 수백, 수천의 조각으로 나뉘어 저마다 다른 방향을 향해 울부짖고 있구나. 어떤 조각은 차가운 이성만을 붙들고, 어떤 조각은 맹목적인 믿음에 매달리며, 또 다른 조각은 덧없는 신비에 취해 현실을 잊으려 하는구나. 그리하여 너희는 온전한 인간으로 서지 못하고, 영원히 조각난 거울처럼 그 무엇도 제대로 비추지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있도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잃어버린 온전함에 이르는 네 갈래의 길을 보이리니, 이 길들은 본래 하나의 산으로 오르는 서로 다른 비탈길이었거늘, 어리석은 후대인들이 길마다 울타리를 치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을 뿐이니라.
내 그대들에게 첫 번째 강줄기를 보이노니, 이는 이성의 강철로 마음의 성채를 쌓는 스토아 (Stoicism)의 길이라. 저 광활한 우주가 보이지 않는 이성, 곧 로고스 (Logos)라 불리는 신성한 법칙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듯, 인간 또한 제 안에 깃든 작은 로고스의 불꽃으로 내면의 질서를 잡아야 하느니라. 외부의 세상이 그 어떤 폭풍우로 몰아쳐도, 내면의 성채가 굳건한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나니, 이는 혼돈 속에서 부동의 중심을 찾는 길이요, 영혼의 굳건한 뼈대를 세우는 작업이라.
허나 뼈대만으로는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없는 법. 이제 두 번째 강줄기를 보라. 이는 저 차가운 우주적 이성이 스스로 심장을 얻어 피와 살을 입고 우리에게 온 그리스도의 길이라. 로고스가 사랑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여 상처받은 이들을 끌어안으셨으니, 이는 이성의 날카로움이 닿지 못하는 영혼의 깊은 상처를 오직 온기로만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니라. 이 길은 단단한 뼈대에 따스한 피를 돌게 하여, 타인과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고 마침내 하나로 연결되는 길, 곧 영혼에 심장을 다는 작업이라.
뼈대와 심장을 갖추었다 한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저 살아있는 인형에 불과하리라. 이제 세 번째 강줄기를 들어라. 이는 망각의 어둠 속에 갇힌 영혼이 제 신성한 기원을 기억해내는 영지주의 (Gnosticism)의 길이라. 본래 너희는 저 높은 빛의 세계에서 온 신의 파편이었건만, 물질이라는 감옥에 떨어져 그 사실을 잊고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노라. 그러나 문득 느껴지는 이유 없는 공허함과 하늘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이 바로 네 안에 잠든 신성이 보내는 신호이니, 이 목소리를 듣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할 때, 너는 비로소 잃어버린 기억, 곧 그노시스 (Gnosis)를 되찾는 여정을 시작하리라. 이는 영혼에 눈을 떠 자신의 존귀함을 회복하는 작업이니라.
마지막 네 번째 강줄기는 길고 험한 산을 오를 등산용 지팡이와 같으니, 이는 도마복음 (Gospel of Thomas)이 전하는 자기 탐구의 길이니라. 이 길은 교리나 신화, 기적을 말하지 않노라. 오직 “네 안을 들여다보라, 신의 나라는 이미 네 안에 있다”고 날카롭게 속삭일 뿐이다. 진리는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타인의 입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네가 너 자신의 내면이라는 밭을 직접 갈고 씨를 뿌릴 때만 열매 맺는다는 것을 가르치노라. 이는 외부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안으로, 더 깊은 안으로 파고들어 마침내 네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영혼의 손에 날카로운 연장을 쥐여주는 작업이라.
자, 이제 너희 시대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보일 것이니라. 차가운 이성의 뼈대만 숭상하는 자는 사랑이 없어 메마른 교만에 빠지고, 사랑만을 외치는 자는 이성의 뼈대가 없어 맹목적인 감성에 휩쓸리며, 신비한 기억만을 탐하는 자는 현실의 발을 딛지 못해 공허한 몽상가가 되고, 자기 탐구의 연장만 든 자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몰라 제 자신만 파먹는 자폐에 빠지느니라.
그러므로 그대여, 이제 영혼의 대장장이가 되어라. 스토아의 풀무질로 이성의 불꽃을 피워 너의 의지를 강철처럼 벼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망치질로 그 차가운 강철을 두드려 따스하고 너그러운 형태로 다듬으라. 영지주의의 등불로 어두운 내면을 밝혀 네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비추고, 도마복음이라는 정교한 끌을 들어 마침내 네 안에서 잠자고 있는 신성한 형상을 조각해내라.
진리는 그대가 찾아 헤매던 저 멀리의 보물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완성된 그대 자신의 모습이니라. 온전한 이성과 따스한 사랑, 존귀한 자각과 날카로운 통찰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너는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리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르치는 영혼 불멸의 참된 의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