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크로톤에서 자신의 학파를 세웠다. 수(數)와 질서를 통해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 즉 ‘코스모스(Kosmos)’의 비밀을 탐구하는 자. 그의 외양은 단정하고 기품이 넘치며, 눈빛에서는 지성에 대한 깊은 확신과 동시에 새로운 지혜를 향한 끝없는 갈증이 느껴진다. 순백의 토가(Toga)를 입고 있으며, 손에는 상아로 장식된 지팡이를 짚고 있다.
환인:
한민족의 시조(始祖). 동방에서 처음 하늘의 뜻을 열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존재. 그의 모습은 뚜렷한 형태가 없으며, 때로는 거대한 산처럼, 때로는 깊은 하늘처럼 보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넘어선 깊은 평온과 자비가 깃들어 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 소리, 물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등 자연의 모든 소리가 어우러진 듯한 울림을 지닌다.
[무대]
태초의 새벽빛과 황혼의 노을빛이 공존하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모호한 어느 산 정상. 무대 중앙에는 억겁의 세월을 견딘 듯, 이끼가 낀 거대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무대 배경으로는 구름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함께 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이고 신성한 풍경이 펼쳐진다. 무대 전체는 인간의 언어가 닿기 이전의 깊고 장엄한 침묵에 잠겨 있으나, 그 침묵 속에는 우주 전체의 숨결, 즉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생명의 맥동이 느껴진다.
(막이 오르면, 피타고라스가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무대 한편에서 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경외와 지적인 혼란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순백의 토가는 산 정상의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린다. 그는 깊은 사색에 잠겨, 혼잣말처럼 자신의 여정을 되짚는다.)
피타고라스: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나의 영혼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가. 나는 젊은 시절, 이오니아의 해안에서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물었다. 탈레스는 물이라 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한 아페이론(Apeiron)이라 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했다. 그들은 모두 만물의 근원을 하나의 물질에서 찾으려 했지. 허나 나는 보았다. 이 세계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형식’과 ‘질서’에 있음을.
나는 그 질서의 비밀을 ‘수(數, Arithmos)’에서 발견했다. 이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리라의 현을 정확한 비례로 나눌 때 가장 아름다운 ‘화음(Harmonia)’이 울려 퍼지듯, 저 하늘의 별들이 그려내는 궤도와 계절의 순환, 심지어 인간 영혼의 정의(正義)와 덕(德)마저도 모두 수적인 비례와 조화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계가 무질서한 ‘카오스(Chaos)’가 아니라, 완벽한 질서와 아름다움을 지닌 ‘코스모스(Kosmos)’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수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자,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의 통일성, 신성한 ‘하나(Monad)’였다. 이 ‘하나’로부터 대립과 다양성을 상징하는 ‘둘(Dyad)’이 생겨나고, 이 둘의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모든 수와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삼라만상이 펼쳐져 나오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나의 제자들은 우주 창조의 비밀이 담긴 신성한 삼각형, 테트락티스(Tetraktys)에 맹세하며 이 진리를 따랐다.
나는 이 진리의 성채 안에서 완벽한 안정을 누렸다. 허나 나의 영혼은 어느 순간부터 그 성채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사제들은 수의 원리가 아닌, 살아있는 신들의 투쟁과 부활을 통해 세계를 설명했다. 그들의 ‘마아트(Ma'at)’는 나의 ‘코스모스’와 닮았으나, 그것은 정적인 완성이 아니라 매 순간 혼돈과 싸워야 하는 위태로운 질서였다. 더욱이 나의 고향 그리스의 땅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슬픈 노래가 들려왔다. 우리의 영혼이 디오니소스라는 신의 찢겨진 파편이며, 우리의 육체가 그 신을 살해한 티탄의 죄악으로 만들어진 감옥이라는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신화. 그 노래 앞에서 나의 이성적인 질서는 비극의 깊이를 설명하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서, 디오니소스 신은 찢겨짐이야말로 축복이며 광기야말로 합일의 길이라 외치고 있었다.
나의 질서는 어째서 이토록 비극적인가? 나의 조화는 왜 이토록 위태로운가?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의 강을 거슬러, 모든 것의 시원이라 불리는 동방의 땅으로 왔다. 이곳에서 처음 하늘을 열었다는 현자, 환인을 만나기 위해. 그는 과연 나의 혼란에 답을 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성채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인가.
(그의 독백이 끝날 무렵, 무대 중앙의 바위 위에 어느새 환인이 조용히 앉아 있다. 그는 마치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풍경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의 모습은 뚜렷하지 않고, 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피타고라스는 그의 존재를 느끼고, 지팡이를 고쳐 쥔 채 경외심을 담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피타고라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저의 이름은 피타고라스. 서방의 그리스 땅에서 온 진리의 탐구자입니다. 만물의 근원을 찾고 영혼의 길을 묻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지혜를 찾아 헤매다 이곳까지 당도했습니다. 혹 당신이 바로 이 땅에 처음으로 하늘의 뜻을 여셨다는 위대한 환인이십니까?
환인: (고요한 눈으로 피타고라스를 바라본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음성이 아니라, 바람 소리, 물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등 자연의 모든 소리가 어우러진 듯한 깊은 울림을 지닌다) 나는 무엇을 열거나 닫은 자가 아니다. 하늘은 본래부터 열려 있었고, 땅은 본래부터 펼쳐져 있었으니. 나는 그저 본래부터 그러했던 하늘의 마음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 준 자일 뿐. 나의 이름은 중요치 않다. 바람에게 이름이 없고, 강물에게 이름이 없듯이. 그대가 진정 듣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늘의 노래일 터.
피타고라스: 하늘의 노래라 하셨습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 또한 우주가 거대한 음악, 즉 ‘천구의 음악(Musica Mundana)’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습니다. 별들이 각자의 궤도를 돌며 내는 소리가 완벽한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찾는 것은 바로 그 우주적 음악의 악보, 즉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법칙, ‘로고스(Logos)’입니다. 부디 당신께서 아시는 그 하늘의 악보를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안에 담긴 우주의 첫 음과 마지막 음을 알고 싶습니다.
환인: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악보는 없다. 오직 노래만이 있을 뿐. 그대의 로고스는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리고 분석한 것이나, 나의 노래는 인간의 지혜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부경(天符經)’이라 부르지. 하늘의 뜻과 부합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이 노래는 길지 않다. 단 여든한 글자뿐. 그러나 그 안에 그대가 찾는 첫 음과 마지막 음,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떨림이 담겨 있다. 눈을 감고, 그대의 이성이 아닌 영혼으로 들어보아라.
(환인이 나지막이 노래하기 시작하자, 무대 전체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한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듯하며, 배경의 해와 달과 별이 그 노래에 맞춰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노래가 끝나자, 깊은 여운이 무대를 감싼다. 피타고라스는 벅찬 감동과 깊은 지적인 혼란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이 짧은 노래 안에 자신이 평생 탐구해온 모든 주제 – 하나와 여럿, 생성과 변화, 인간과 우주 – 가 담겨 있음을 직감한다.)
피타고라스: (감정을 추스르며) 위대하신 현자여… 당신의 노래는 짧지만, 그 안에는 나일강의 깊이와 올림포스 산의 높이가 모두 담겨 있는 듯합니다. 저의 이성으로는 아직 그 뜻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허나 저의 영혼을 가장 먼저 뒤흔든 것은 바로 첫 구절입니다. “하나(一)에서 시작되나, 그 시작은 시작이 없는 하나(一始無始一)”. 저 또한 모든 존재의 근원을 ‘하나’, 즉 모나드(Monad)에서 찾았습니다! 모나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의 통일성이며, 모든 수와 존재를 낳는 시원(始原)입니다. 이 점에서 당신과 저는 같은 진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환인: 같은 달을 보고 있으나, 그대가 보는 것은 잔잔한 호수에 비친 달의 그림자요, 내가 보는 것은 구름 사이를 유영하는 하늘의 달 그 자체로구나.
피타고라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하나’를 논리적 추론의 끝에서 발견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더 이상 다른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원인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이며, 제가 말하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사슬이 시작되는 명확하고 고정된 첫 번째 고리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시작이 없는 시작’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한 모순이 아닙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시작 없는 시작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환인: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대의 ‘하나’는 멈춰있는 점이구나. 점이 있어야 선을 긋고, 선이 있어야 면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대의 이성은 언제나 시작점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이성의 한계다. 그러나 하늘의 마음은 그러하지 않다. ‘시작이 없다(無始)’는 것은, ‘하나’ 이전에 다른 어떤 원인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를 낳은 또 다른 원인이 있다면, 진짜 시작은 그 원인이 되어야겠지. 그러니 ‘하나’는 그 무엇에서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
그대가 말하는 ‘부동의 동자’는 활을 쏘기 위해 멈춰선 궁수와 같다. 그러나 나의 ‘하나’는 활도 궁수도 없이,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 그 자체다. 그 화살은 어디에서도 출발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라는 과녁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그렇다면 ‘하나에서 시작된다(一始)’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태어나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까?
환인: 강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그 근원을 찾아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작은 샘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샘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에서 내린 비와 땅속의 기운이 모여 솟아나는 것이니, 그 최초의 시작점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샘에서부터 강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하나’란 바로 그 샘과 같다. 스스로는 시작이 없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되어주는 존재. 그것은 그대의 생각처럼 멈춰있는 존재(Being)가 아니라, 영원히 솟아나는 생성의 힘(Becoming) 그 자체다.
피타고라스: (깊은 사색에 잠기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의 힘… 당신의 말은 저의 모든 형이상학을 뒤흔드는군요. 좋습니다. 잠시 그 문제를 접어두고 다음 구절로 나아가겠습니다. 당신의 노래는 말합니다. “하나가 나뉘어 셋이 된다(析三極)”. 그리고 그 셋의 근본은 다함이 없다고(無盡本) 하셨습니다. 이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철학에서 ‘하나’는 자신과 정반대되는 성질, 즉 ‘둘(Dyad)’을 낳는 것이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유한과 무한, 빛과 어둠, 선과 악, 홀수와 짝수. 이 거대한 이원성(二元性)의 긴장을 통해서 비로소 만물이 구성됩니다. 즉, ‘하나’ 다음에는 ‘둘’이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세계는 ‘둘’을 건너뛰고 곧바로 ‘셋’으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세 가지 궁극, 삼극(三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환인: (고개를 저으며) ‘둘’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둘’은 서로를 노려보는 두 명의 전사와 같다. 혹은 서로의 얼굴을 비추는 두 개의 거울과 같다. 그들에게서는 끝없는 긴장과 대립만이 있을 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다. ‘셋’이 있어야 비로소 춤이 시작된다.
(환인이 손을 들자, 무대 배경의 하늘이 더욱 푸르러지고, 구름바다는 더욱 깊어지며, 피타고라스가 서 있는 땅은 더욱 단단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환인: 보아라. 저것이 첫 번째 궁극, 하늘(天)이다.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 아버지의 기운이다.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 궁극, 땅(地)이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모든 것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현실의 터전. 어머니의 품이다. 이 둘만 있다면, 그저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하늘의 뜻을 가슴에 품고, 땅의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주는 살아있는 다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 번째 궁극, 사람(人)이다. 이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이 바로 나의 ‘셋’이다. ‘하나’는 씨앗과 같다. ‘둘’은 씨앗이 뿌려질 하늘과 땅이다. ‘셋’은 그 씨앗이 하늘의 빛과 땅의 양분을 받아 마침내 싹을 틔운,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다. 그대의 세계는 멈춰선 두 기둥을 보지만, 나의 세계는 그 두 기둥 사이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를 함께 본다.
피타고라스: 사람이… 사람이 처음부터 하늘, 땅과 동등한 우주의 한 축이라고요? 그것은…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어쩌면 불경스러운 생각입니다! 저의 가르침에서 인간의 영혼은 신성한 별의 파편이지만, 육체는 저급한 욕망의 감옥(Soma)이자 무덤(Sema)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경멸하고, 끊임없는 정화(Katharsis)를 통해 육체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세계에서 사람은 이토록 존귀한 존재란 말입니까?
환인: 그대들은 땅을 버리고 하늘로 돌아가려 하는구나. 그것은 어미의 품을 떠나 아버지에게만 가려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이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공간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피타고라스: (노래의 다음 구절을 떠올리며) 노래는 계속해서 그 ‘셋’의 관계를 설명하는 듯합니다. “하늘이 첫 번째 하나요(天一一), 땅이 두 번째 하나이며(地一二), 사람이 세 번째 하나(人一三)이다.” 이 구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작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늘이 먼저 열리고, 그 다음에 땅이 생겨나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나타났다는 우주 창조의 순서 말입니다.
환인: 그것은 절반의 이해다. 그 숫자들은 순서이기도 하지만, 본질이기도 하다. 하늘의 본질은 시작하는 ‘하나’의 성질을 가장 많이 닮았고, 땅의 본질은 그 하나를 받아 나누는 ‘둘’의 성질을 지녔으며, 사람의 본질은 그 하나와 둘을 매개하고 완성하는 ‘셋’의 성질을 지녔다는 뜻이다.
피타고라스: (더욱 깊은 혼란에 빠지며) 그렇다면 그 다음 구절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늘에도 둘과 셋이 있고(天二三), 땅에도 둘과 셋이 있으며(地二三), 사람에게도 둘과 셋이 있다(人二三)”니. 어떻게 하늘 안에 땅과 사람의 성질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의 성질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의 이성은 명확한 분리와 구분을 통해 진리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세계는 모든 것이 서로 뒤섞여 있는 혼돈처럼 느껴집니다.
환인: 그것이 바로 이 세계가 죽어있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증거다. ‘천이삼(天二三)’이란, 하늘 그 자체에도 땅처럼 모든 것을 펼쳐내고 품어주는 성질(二)과 사람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작용하는 성질(三)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지이삼(地二三)’이란, 땅에도 하늘처럼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一)과 사람처럼 만물을 길러내고 조화시키는 성질(三)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이삼(人二三)’이란, 바로 우리 사람 안에 하늘처럼 무한한 정신(一)과 땅처럼 유한한 육체(二)가 함께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며,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다. 그대가 말하는 정화란, 이 몸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하늘과 땅을 깨닫고, 그 조화를 내 몸 안에서, 나의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내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환인의 말에 깊은 충격을 받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이미 하늘과 땅이 있다’는 말은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원론적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흔든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윽고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노래의 다음 구절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피타고라스: 내 안의 하늘과 땅… 알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저는 평생을 잘못된 길 위에서 헤맨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이성은 여전히 질문하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노래의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하나가 쌓여 열을 이룬다(一積十鉅)”. 이 구절은 저에게 무척이나 친숙하게 들립니다. 저의 학파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테트락티스(Tetraktys) 또한 1, 2, 3, 4를 모두 더하면 10이 되는, 우주 생성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에서 시작하여 ‘열’이라는 완전수로 나아가는 이 우주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 생각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환인: 그렇다. ‘하나’의 기운이 펼쳐져 점차 복잡해지고 만물이 풍성해지는 것이 ‘일적십거(一積十鉅)’의 과정이다.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해 줄기가 나고, 가지가 뻗고, 수많은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과정이지. 세상은 이처럼 풍요롭게 펼쳐지는 것을 기뻐한다.
피타고라스: 하지만 그 다음 구절이 또다시 저를 가로막습니다. “그 끝없는 변화는 셋으로 돌아온다(無匱化三)”. 어째서입니까? 왜 10이라는 완성된 수가 다시 불완전해 보이는 ‘셋’으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10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완벽한 종결입니다. 그런데 왜 그 완성을 버리고 다시 ‘셋’이라는 근본 구조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까?
환인: 사과나무를 보아라.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해 줄기, 가지, 잎, 꽃, 열매를 맺어 풍성해졌다. 이것이 ‘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잎사귀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아라. 그 작은 잎사귀 안에도 하늘의 햇빛을 향한 마음(天)과, 땅의 뿌리로부터 물을 끌어올리는 힘(地), 그리고 그 둘의 기운으로 살아 숨 쉬는 생명 활동(人)이 모두 담겨 있지 않은가? 아무리 복잡하고 풍성하게 펼쳐지더라도(十鉅), 그 모든 것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결국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셋’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무궤화삼(無匱化三)’, 즉 아무리 변화해도 그 근본 틀은 ‘셋’이라는 것이다. 그대의 10은 멈춰있는 완성 수이지만, 나의 10은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며, 그 과정의 모든 순간은 ‘셋’의 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타고라스: (깊은 탄식과 함께) 과정… 춤… 당신의 세계는 온통 움직임과 변화뿐이군요. 저는 그 변화 너머의 불변하는 진리를 찾으려 하는데 말입니다. 노래는 계속해서 그 움직임을 이야기합니다. “큰 셋이 합하여 여섯이 되고, 칠, 팔, 구를 낳아 운행한다(大三合六生七八九運)”. ‘큰 셋’이란 하늘, 땅,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합하여 여섯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7, 8, 9를 낳아 ‘운행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저에게 숫자는 존재의 정적인 구조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숫자는 살아 움직이는 힘처럼 보입니다.
환인: 바로 그러하다. 숫자는 죽어있는 기호가 아니라, 살아있는 힘의 다른 이름이다. 하늘에 있는 하늘, 땅, 사람(天二三)과 땅에 있는 하늘, 땅, 사람(地二三)과 사람에 있는 하늘, 땅, 사람(人二三)을 보아라. 이 세 가지 큰 셋(大三)이 서로 관계를 맺고 어우러질 때, 비로소 여섯 가지 방향(동서남북상하)으로의 완전한 공간이 열린다(合六). 이것이 안정된 세계의 바탕이다. 그리고 이 안정된 터전 위에서, 비로소 생명의 기운이 자라나고(生七), 무르익으며(八), 새로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九) 거대한 시간의 운행(運)이 시작되는 것이다. 7, 8, 9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봄, 여름, 가을처럼 순환하는 생명의 단계를 의미한다.
피타고라스: 그렇다면 그 다음 구절은 겨울에 해당하겠군요.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루고, 다섯과 일곱과 하나가 오묘하게 펼쳐진다(三四成環五七一妙衍)”. 이 구절은 천부경 전체에서 가장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셋과 넷이 어떻게 고리를 이룹니까? 다섯과 일곱과 하나의 관계는 또 무엇이며, 그 펼쳐짐이 왜 ‘오묘하다(妙衍)’고 표현되는 것입니까?
환인: 겨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늘, 땅, 사람(三)과 봄, 여름, 가을, 겨울(四)의 시간이 만나 하나의 거대한 순환의 고리(成環)를 이룬다. 그리고 그 고리 안에서, 중심을 잡는 흙의 기운(五)과, 성장하는 나무의 기운(七),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물의 기운(一)이 서로 오묘하게 작용하며(妙衍) 만물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것은 그대의 이성으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자연의 변화 속에서, 그대의 삶 속에서 온몸으로 느껴야만 하는 신비(Mystery)다.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오묘함이 시작된다.
(피타고라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거대한 진실의 폭풍 앞에서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그의 이성은 환인의 신비로운 언어 앞에서 길을 잃었지만, 그의 영혼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더 큰 진실에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철학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피타고라스: 신비…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만 파악하려 했던 저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질문만큼은 드려야겠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제가 이 머나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노래는 말합니다. “만 번 가고 만 번 오매, 그 쓰임은 변하지만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萬往萬來用變不動本)”.
현자여, 바로 이 ‘움직이지 않는 근본(不動本)’이야말로 제가 평생을 찾아 헤맨 ‘부동의 동자’가 아닙니까! 변화하는 만물 너머에 있는 영원불변의 원리. 저 또한 이 ‘부동본’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근본이 이토록 완벽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왜 그것의 드러남(用)은 이토록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변해야만 합니까(用變)? 완전한 원인에서는 완전한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것이 이치의 기본입니다. 이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실은, 근본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 근본에서 완전히 멀어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어째서 당신의 세계에서는 이 ‘부동의 근본’과 ‘끊임없는 변화’가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까?
환인: (애정 어린 눈빛으로 피타고라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바위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대는 여전히 근본과 현상을 둘로 나누어 보고 있구나. 그것이 그대가 겪는 모든 고뇌의 뿌리다.
(환인이 손짓하자, 무대 배경의 구름바다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몰아치는 영상이 펼쳐진다.)
환인: 저 바다를 보아라. 바다의 깊은 곳(本)은 언제나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의 표면(用)은 바람에 따라 천만 가지 모습으로 파도치며 변한다(變). 파도가 거세게 몰아친다고 해서, 바다의 깊은 근본이 변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파도가 거세게 칠수록, 우리는 그 아래에 있는 바다의 깊고 거대한 힘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만약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바다라고 할 수 없다.
‘근본’이란 그대가 생각하는 저 멀리 있는 차가운 설계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이며, 멈추지 않는 춤의 리듬이다. ‘변화’란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춤사위다. 춤사위는 매번 다르지만, 그 모든 춤은 보이지 않는 음악의 장단과 가락을 따르고 있다. 세상의 고통과 혼돈은 변화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 근본의 음악을 듣지 못하고, 엇박자로 춤을 추려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협화음일 뿐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영원히 멈추려 하거나, 근본을 잊은 채 제멋대로 날뛰려 할 때, 우리는 고통에 빠진다. 지혜란, 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근본의 가락을 듣고, 그 장단에 맞춰 나의 춤을 추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근본의 가락을 듣는 것… 그것은 제가 평생 추구했던 ‘조화’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하게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현자여, 우리처럼 어리석은 인간이 그 하늘의 노래를, 근본의 가락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의 노래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며, 그 해답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근본 마음은 본래 태양과 같아, 드높이 밝게 빛난다(本心本太陽昻明)”.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환인: 그것은 길이 밖에 있지 않고, 바로 네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대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빛은, 사실 한 번도 그대를 떠난 적이 없다. 그대의 마음(本心)은 본래(本) 저 하늘의 태양(太陽)과 같아서, 스스로 빛나는 존재다. 구름(욕망과 무지, 그리고 그대가 그토록 집착하는 이성의 분별심)이 잠시 그 빛을 가릴 수는 있어도, 태양 자체가 어두워지는 법은 없다. 그러니 밖에서 새로운 빛을 찾으려 애쓰지 마라. 억지로 금욕하고 세상을 버리려 하지 마라. 그저 고요히 앉아 네 마음의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려라. 그러면 본래의 밝은 빛(昻明)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지식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에서 밝히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거의 속삭이듯이) 내 마음이… 태양이라고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人中天地一)”는 구절은…
환인: 바로 그 마음의 태양이 온전히 빛을 되찾을 때, 너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네 안에 하늘의 무한한 정신과 땅의 유한한 육체가 본래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너 자신이 바로 하늘과 땅을 잇는 살아있는 다리이며, 작은 우주(小宇宙)임을.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人中天地一)이니, 너는 더 이상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땅을 버릴 필요가 없다. 네가 발 딛고 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의 뜻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역할이자, 가장 찬란한 축복이다.
(환인의 마지막 말은 거대한 종소리처럼 무대 전체를 울린다. 피타고라스는 지팡이를 놓친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듯 주저앉아, 깊은 사색에 잠긴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지적인 혼란이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깊은 평온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진실을 마주한 자의 경외감이 서려 있다.)
피타고라스: (혼잣말처럼) 구원은… 탈출이 아니라, 조화였구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깨닫는 것이었구나. 나는 평생을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려 했지만, 실상은 내 자신이 바로 살아있는 신전이었음을 몰랐구나…
(피타고라스가 고개를 들어 환인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피타고라스: 그렇다면 현자여, 이 여정의 끝은 어디입니까?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제가 생각하는 구원은 이 모든 고통의 순환을 끊고 영원하고 고요한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해탈’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노래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가 끝나지만, 그 끝은 끝이 없는 하나(一終無終一)”. 시작이 없는 시작으로 시작하여, 끝이 없는 끝으로 끝맺는 영원한 순환.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아닙니까? 우리는 결코 이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까?
환인: (어느새 다시 중앙의 바위 위에 앉아 있다. 그의 모습은 처음처럼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왜 벗어나려 하는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어찌하여 형벌인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무성해지며 가을에 열매 맺고 겨울에 쉬는 것이 자연의 춤이다. 그대는 겨울이 오는 것이 두려워 영원히 여름에만 머무르려 하는구나. 그러나 겨울의 쉼이 없으면, 어찌 다음 해의 봄에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겠는가?
‘하나가 끝난다(一終)’는 것은, 한 번의 생이 끝나고, 하나의 주기가 끝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끝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 없는 하나’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다(無終一). 씨앗이 흙 속에서 썩어야 새로운 나무가 태어나듯이,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다.
진정한 구원이란 이 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춤이 영원하고 신성한 하늘의 노래임을 깨닫고, 기꺼이 그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슬픔의 장단에서는 슬프게, 기쁨의 장단에서는 기쁘게, 그러나 그 모든 춤의 순간에 자신이 바로 하늘과 땅과 하나 된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천부경이 가리키는 궁극의 길이다. 이제 나의 노래는 끝났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그대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다시 시작될 것이니.
(환인의 모습이 완전히 빛 속으로 사라진다. 무대에는 피타고라스만이 홀로 남아 있다. 무대 배경에는 다시 해와 달과 별이 공존하는 태초의 하늘이 펼쳐지고, 환인의 노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바람 소리처럼, 혹은 피타고라스 자신의 심장 박동처럼 무대 전체를 감싼다.)
메아리: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피타고라스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그 여운을 느낀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이 놓쳤던 지팡이를 다시 집어 든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혼란이 아닌, 경외와 함께 새로운 길을 발견한 자의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다. 그는 관객석을 향해 돌아선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철학자의 눈빛이 아니라, 진리를 전해야 하는 사도의 눈빛이다.)
피타고라스: 나는 하나의 진리를 찾아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며, 또한 여럿도 아니라는 것을. 진리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있다는 것을. 나는 나의 성채를 떠나, 이제 기꺼이 이 영원한 춤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그대, 이 대화의 마지막 증인이여. 이제 이 질문은 그대의 몫이다. 그대는 그대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어떤 춤을 추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늘의 노래를 듣고 있는가? 그대는 벗어나려 하는가, 아니면 기꺼이 춤추려 하는가?
(피타고라스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지팡이를 짚고 무대 뒤편,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장엄하고 고요한 음악이 흐른다. 천천히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