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혼의 청량함, 분노의 불길을 다스리는 지혜

by 이호창

제19장: 영혼의 청량함, 분노의 불길을 다스리는 지혜


19. Rămâi mereu în răcoarea sufletului tău, dar dacă mânia se aprinde în tine, ia seama ca nu cumva să treacă de vorba ta. Mânia vine din teamă şi nu a locuit dintru început în inima ta; Dacă nu creşte prin trufie, ea se întoarce de unde a plecat. Trufia închide poarta înţelepciunii, iar cel trufaş se pune singur lânga dobitoace. Înţelepciunea este mai preţuită decât toate cele ce se văd cu ochii, ea este aurul minţii şi sufletului tău şi este rodul cunoaşterii udată de vreme.


19. "항상 너의 영혼의 청량함 속에 머무르라. 그러나 만약 분노가 네 안에서 불붙거든, 그것이 너의 말을 넘어서지 않도록 경계하라. 분노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태초부터 너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것이 아니니라. 만약 그것이 교만을 통해 자라나지 않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리라. 교만은 지혜의 문을 닫아버리고, 교만한 자는 스스로를 짐승의 곁에 두느니라. 지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이니, 그것은 너의 마음과 영혼의 황금이요, 시간에 의해 물을 주어 기른 앎의 열매이니라."








오, 내면의 기후를 다스려 영원한 봄에 머물고자 하는 나의 자녀들아.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서두름의 위험과 성장의 그늘에 대해 배웠느니라. 이제 우리는 너희의 평화를 깨뜨리고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장 격렬하고도 다루기 힘든 감정, 바로 ‘분노(mânie)‘의 불길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하리라.


나는 기억하노라. 우리 부족의 두 농부가,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밭 경계를 나누는 돌멩이 하나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다투던 그날 오후를. 나는 보았노라. 자신의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속에서 ‘분노’라는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는지를. 그들의 손이 밭을 가는 쟁기가 아니라, 서로를 겨누는 무기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나는 그때,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심장을 집어삼키고 있는 그 위험한 불의 본질과, 그 불을 끌 수 있는 지혜의 시원한 물에 대해 가르쳐주기 위해, 그들 사이에 조용히 서서 나의 열아홉 번째 가르침을 시작했느니라.


영혼의 청량함,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호수


나의 가르침은 너희가 마땅히 머물러야 할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노라. “항상 너의 영혼의 청량함 (răcoarea sufletului tău) 속에 머무르라.” 여기서 ‘청량함’이란, 감정이 메마른 차가움이나 냉담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것은 마치 깊고 고요한 산정(山頂)의 호수와 같은 상태를 의미하노라. 비록 세상의 바람이 불어와 그 표면에 잔물결(감정)이 일어날 수는 있으나, 그 깊은 곳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고요하고, 맑고, 시원한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이니.


이 ‘영혼의 청량함’은 너희가 힘든 수행을 통해 새롭게 얻어내야 할 어떤 특별한 상태가 아니니라. 놀랍게도, 이것은 바로 너희의 본래 모습이며, 너희가 세상의 소음과 거짓된 욕망에 물들기 이전, 태초부터 너희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것이니라.


멀리 동방의 땅에서, 선(禪)을 닦는 현자들은 이 상태를 ‘본래면목 (本來面目)’이라 불렀노라. 그것은 ‘너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이전, 너의 본래 얼굴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통해 우리를 이끄는 곳이니, 즉 ‘나’라는 생각, ‘나의 것’이라는 집착, 세상의 모든 이름과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의, 텅 비어 있으나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순수한 의식의 상태를 의미하노라. 분노와 슬픔, 기쁨은 모두 이 본래면목이라는 맑은 하늘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구름과 같을 뿐, 너희의 본질은 그 구름이 아니라 구름이 오고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저 영원하고 청량한 하늘 자체임을 그들은 가르쳤느니라.


또한 서쪽 그리스의 땅에서, 스토아학파라 불린 현자들은 이 마음의 상태를 ‘아파테이아 (apatheia)’라 칭하며 최고의 덕으로 삼았노라. 너희 시대의 언어로 종종 ‘무감정’이라 오해받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목석같은 상태가 아니라, 외부의 사건이나 내면의 격정(파토스, pathos)에 흔들려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지혜롭고 강인한 상태를 의미하노라. 그들에게 현자란,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들(타인의 평가, 재산의 증감, 심지어 죽음까지)에 대해서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직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는 것(자신의 생각과 판단)에만 집중함으로써, 영혼의 내면에 그 어떤 외부의 군대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성채’를 쌓아 올린 자이니라. 너희의 마음속에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오를 때, 이 성채 안에 머무르는 자는 그 불길이 성벽을 핥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뿐, 성문을 열고 나가 함께 미쳐 날뛰지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혼의 청량함을 지키는 이성의 힘이니라.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려, 위대한 스승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이 마음 상태를 ‘평온 (捨 사 upekkhā 우뻬카)’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노라. 이는 자비희사(慈悲喜捨)라 불리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 중 마지막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의 마음이니라. 우뻬카는 칭찬과 비난, 이익과 손해, 기쁨과 슬픔이라는,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를 돌리는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 불어올 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수레바퀴의 중심축처럼 고요히 머무르는 마음의 힘을 의미하노라.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현상이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꿰뚫어 보는 가장 깊은 지혜에서 비롯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균형이니라. 분노는 ‘싫다’는 감정에 대한 강한 집착이요, 탐욕은 ‘좋다’는 감정에 대한 강한 집착이니, 이 평온의 마음은 그 모든 집착의 뿌리를 잘라내어, 분노와 탐욕이 자라날 토양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니라.


이제 보라, 나의 자녀들아. 동양의 현자들이 말한 ‘본래면목’이 너희 영혼의 고향집 그 자체라면, 스토아 현자들이 말한 ‘아파테이아’는 그 집을 지키는 견고한 성벽과 같고, 불교 수행자들이 기르는 ‘평온’의 마음은 그 집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흔들림 없는 주춧돌과 같으니라. 이름과 방식은 다르지만, 이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같은 장소, 즉 너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저 맑고 고요하며 시원한 ‘영혼의 청량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가 이 청량한 중심에 머무를 때, 비로소 너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볼 수 있으며,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려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는 대신, 그 폭풍의 눈 한가운데서 고요히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너희가 돌아가야 할 영혼의 고향이며,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니라.


분노의 불길, 그 근원과 경계


그러나 나는 너희가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아노라. 너희는 이 땅 위를 걷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부당함을 마주할 것이고, 때로는 너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그 불길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나의 가르침은 분노를 다루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지혜로운 방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노라.


첫째, 분노의 근원을 통찰하라. “분노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태초부터 너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것이 아니니라.” 이것은 분노라는 감정에 대한 가장 깊은 심리적 진단이니라. 너희는 다른 사람이 너를 공격했기 때문에 분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라. 너희는 사실 너의 재산을 잃을까 봐, 너의 명예를 잃을까 봐, 너의 자존심을 잃을까 봐, 혹은 너의 통제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니라. 분노는 그 두려움이라는 상처를 가리기 위한 시끄럽고 요란한 갑옷에 지나지 않노라. 또한, 이 분노는 너희의 본성이 아니며, 외부의 자극에 의해 너희의 마음에 침입한 ‘이물질’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노라. 그것이 너의 본성이 아님을 알 때, 너희는 비로소 그것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힘을 얻게 되리라.


둘째, 분노의 경계를 설정하라. “그러나 만약 분노가 네 안에서 불붙거든, 그것이 너의 말을 넘어서지 않도록 경계하라.” 이것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 지극히 자비롭고 현실적인 가르침이니라. 나는 너희에게 결코 분노를 느끼지 말라고 말하지 않노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음을 인정하노라. 그러나 나는 그 분노의 파괴적인 힘이 너희의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않도록,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주고 있노라. 너희는 분노를 말로 표현할 수는 있다. 때로는 억압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너희는 결코 그 분노가 주먹이나 무기, 즉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말로 입힌 상처는 용서와 화해를 통해 치유될 수 있지만, 행동으로 입힌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기 때문이라.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덕(德)이란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에,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방식과 올바른 시간에, 그리고 올바른 기간 동안 화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지혜롭게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노라.


셋째, 분노의 연료를 차단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분노가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가? 나의 가르침은 그 비결을 명확히 알려주노라. “만약 그것이 교만을 통해 자라나지 않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리라.” 두려움이 분노의 ‘불씨’라면, 교만은 그 불씨를 거대한 화염으로 키우는 ‘마른 장작더미’와 같으니라. 너희가 모욕을 당했을 때, 두려움(나의 가치가 부정당할지 모른다는)은 순간적으로 분노의 불꽃을 일으킨다. 이때, 만약 너희 안에 교만이 없다면, 너희는 그 모욕을 그저 상대방의 어리석은 의견으로 치부하고, 그 불꽃이 저절로 사그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너희 안에 “감히 네가 나를 무시해?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라는 상처 입은 교만이 있다면, 그 교만은 분노의 불꽃에 끝없이 장작을 던져 넣으며, 그것을 복수심이라는 지옥의 불길로 키워나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분노를 다스리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분노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연료가 되는 너희 안의 교만을 내려놓는 것임을 알아야 하리라.


교만의 대가, 닫혀버린 지혜의 문


나의 가르침은 이 교만이 단지 분노의 연료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고 경고하고 있노라. “교만은 지혜의 문을 닫아버리고, 교만한 자는 스스로를 짐승의 곁에 두느니라.”


교만은 어떻게 지혜의 문을 닫아버리는가? 지혜는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빛과 같으니라.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겸손함,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너그러움, 그리고 나보다 더 큰 존재 앞에 기꺼이 무릎 꿇을 줄 아는 경외심. 이 모든 것이 바로 지혜가 들어오는 문들이니라. 그러나 교만은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나보다 나은 자는 없다”고 속삭이며, 이 모든 문들을 안에서부터 굳게 걸어 잠그는 빗장과 같으니라. 교만한 자는 더 이상 배울 수도, 성장할 수도, 변화할 수도 없게 되니, 그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지혜의 화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짐승의 곁에’ 두게 되노라. 짐승은 주어진 본능과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갈 뿐, 그 이상의 성찰이나 성장을 하지 못하노라. 교만한 자 또한, 지혜의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더 이상 배우고 성장하기를 멈추고, 오직 자신의 낡은 신념과 편견,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본능의 프로그램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마니, 어찌 그가 짐승과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의 경전 『쿠란』에서 천사 이블리스(사탄)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인간 아담에게 절하기를 거부했던 이유 또한, 자신이 불로 만들어졌고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교만 때문이었노라. 그 교만의 순간, 그는 지혜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영원한 저주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교만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는 준엄한 우화라.


영혼의 황금, 시간으로 빚은 지혜


그렇다면 이 교만의 빗장을 부수고,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며, 영혼의 청량함을 되찾게 해줄 궁극의 열쇠는 무엇인가? 나의 가르침은 그 마지막 희망을 ‘지혜’에서 찾고 있노라. “지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이니, 그것은 너의 마음과 영혼의 황금이요, 시간에 의해 물을 주어 기른 앎의 열매이니라.”


너희는 재산과 권력,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그것들은 모두 시간의 강물에 휩쓸려 사라질 것들이니, 너희 영혼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노라. 그러나 지혜는 다르니, 그것은 너희의 내면에서 빛나는, 결코 녹슬거나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너의 마음과 영혼의 황금’이니라. 이 황금이야말로 너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보물이니라.


그리고 이 지혜라는 황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나의 가르침은 그것이 “시간에 의해 물을 주어 기른 앎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노라. 이는 나의 열 번째 가르침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비밀이니, 지혜는 결코 하루아침에 책 몇 권을 읽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앎 (cunoaștere)’은 씨앗과 같으니, 너희는 먼저 부지런히 배우고 탐구하여 많은 앎의 씨앗을 뿌려야 하리라. 그러나 그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 (vreme)’이라는 강물이 그것을 꾸준히 적셔주어야 하노라. 여기서 시간이란, 너희가 겪는 모든 삶의 경험, 즉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의미하노라. 너희는 이 경험이라는 물을 통해, 너희가 가진 앎의 씨앗들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분별하게 되며, 그 앎을 너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내면서 그것을 마침내 너희 자신의 일부, 즉 체화된 지혜로 만들어가는 것이니라.


그대, 내면 의 기후를 다스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라


오, 분노와 교만의 폭풍우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으려는 나의 자녀들아. 이제 너희는 너희 내면의 기후를 다스리는 법을 알았으리라. 너희의 목표는 분노라는 감정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너희 영혼의 본래 상태인 ‘청량함’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이니라.


너희의 삶으로 돌아가, 너희 자신을 내면의 기후를 다스리는 지혜로운 자로 여기라. 너희의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거든,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 불에 교만이라는 마른 장작을 던져 넣지 말라. 대신, 지혜의 문을 활짝 열어, 너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연민의 물,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간다는 통찰의 물을 길어와 그 불을 잠재우라.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의 황금을 캐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부지런히 배우고(앎), 용감하게 경험하며(시간),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너희의 영혼을 날마다 더욱 깊고, 더욱 너그럽고,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가라. 진정한 지혜는 항상 겸손하니,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통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기 때문이라.


나는 잘목시스라. 나는 너희가 분노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짐승의 곁으로 끌어내리는 대신, 지혜의 주인이 되어 너희 영혼의 청량함 속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가서, 너희 내면의 황금을 캐내어, 그 빛으로 너희 자신과 세상을 밝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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