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네모네모 골짜기의 약속
1장: 잿빛 속삭임과 네모 안경
아주아주 먼 옛날, 세상의 구석진 곳에 네모네모 골짜기가 있었어요. 그곳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반듯한 세상이었답니다. 골짜기를 둘러싼 산들은 날카로운 칼로 자른 듯 네모난 능선을 뽐냈고,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리는 시냇물조차 구불거리는 법 없이,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으로 흘러갔지요.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은 동그란 꽃잎 대신 네모난 꽃잎을 가졌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마저 솜사탕처럼 둥글지 않고, 하얀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네모네모 골짜기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생긴 네모 안경을 쓰고 살았어요. 태어나서 처음 눈을 뜨는 순간, 부모님은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었지요. 바로 반짝이는 잿빛 테두리에, 흠집 하나 없는 네모난 유리알이 박힌 안경이었어요.
“아가야, 이 안경을 쓰면 세상이 아주 잘 보인단다.”
엄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모든 것이 반듯하고, 깔끔하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보이지. 이 안경만 있으면 길을 잃을 걱정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릴 걱정도 없단다.”
아이들은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었어요.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은 정말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질서의 세계였거든요.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매끄러운 보도블록처럼 보였고, 제멋대로 자라난 풀들은 모두 똑같은 키로 자란 잔디처럼 보였어요. 안경은 복잡한 세상을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만들어 주었지요.
네모네모 골짜기에는 언제나 조용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맴돌았어요.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잿빛 속삭임’이라고 불렀지요. 그 소리는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부드러운 솜이불처럼 골짜기 전체를 감싸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어요.
“모두 똑같이, 모두 안전하게.”
잿빛 속삭임은 언제나 그렇게 말을 시작했어요.
“네모난 길을 벗어나면 안 된단다. 정해진 길 밖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야. 다른 모양, 다른 생각은 우리를 어지럽히고 아프게 할 뿐이란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네모, 하나의 생각 안에서 행복해야 해.”
사람들은 잿빛 속삭임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생각했어요.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모든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그저 잿빛 속삭임이 이끄는 대로, 모두와 똑같이 네모난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어요. 그래서 골짜기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의 네모 안경을 의심하지 않았답니다. 그것은 눈의 일부이자, 마음의 일부였으니까요.
이 평화로운 골짜기에 ‘루미니짜’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루미니짜’는 아주 먼 옛날 말로 ‘작은 빛’이라는 뜻이었지만, 그 뜻을 아는 사람은 골짜기에 아무도 없었지요. 루미니짜도 다른 아이들처럼 네모 안경을 쓰고, 잿빛 속삭임을 들으며 자라났어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었답니다.
루미니짜는 가끔, 아주 가끔씩,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따끔거리는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어요. 마치 작은 씨앗 하나가 딱딱한 땅을 뚫고 싹을 틔우려는 것처럼, 아주 작은 물음표 하나가 마음속에서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지요.
“정말로 세상은 온통 네모뿐일까?”
그럴 때마다 잿빛 속삭임은 더욱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루미니짜의 마음을 감싸주었어요.
“루미니짜, 착한 아이. 이상한 생각은 하면 안 된단다. 모두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거란다. 자, 저기 반듯한 구름을 보렴. 얼마나 아름답니?”
속삭임을 듣고 나면 루미니짜의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어요. ‘그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했나 봐.’ 루미니짜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네모난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진 그 작은 물음표 씨앗은, 사라지지 않고 아주 조용히, 다음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든 위대한 모험이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직 루미니짜 자신도, 그리고 네모네모 골짜기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답니다.
2장: 완벽한 질서, 그림자 없는 세상
네모네모 골짜기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이 시작되었어요. 네모난 지붕 위로 네모난 해가 떠오르면, 골짜기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똑같이 네모난 침대를 정리하고, 똑같이 네모난 식탁에 앉아, 똑같이 네모난 빵을 먹었어요.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결코 뛰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어요. 모두가 똑같은 보폭으로, 땅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그어진 듯 반듯한 직선을 따라 걸었답니다. 길모퉁이를 돌 때에도 부드러운 곡선은 용납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마치 로봇처럼 몸을 탁, 탁, 90도로 꺾어 방향을 바꾸었지요.
이 모든 완벽한 질서의 비밀은 바로 ‘빛’에 있었어요. 네모네모 골짜기의 하늘에 떠 있는 네모난 해는, 언제나 골짜기의 정중앙, 바로 머리 위에서만 빛을 내리쬐었어요. 빛이 모든 것을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비추었기 때문에, 골짜기에는 ‘그림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답니다.
잿빛 속삭임은 그림자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림자는 아주 못된 것이란다. 그것은 사물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울퉁불퉁하고 어지러운 착각을 만들어내지.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비밀이 생기고, 비밀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싹튼단다. 그림자 없는 우리 골짜기야말로 가장 투명하고 정직한, 완벽한 세상이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림자 없는 세상을 자랑스러워했어요. 모든 것이 명확하고, 숨겨진 것이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일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서로의 안경이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걸음걸이가 직선에서 벗어나지는 않는지를 늘 서로 살피며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만족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루미니짜는 그 완벽한 세상이 어딘가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마치 숨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요. 모든 것이 너무나 명확해서, 상상할 수 있는 빈틈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은 친구들과 ‘네모 블록 높이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골짜기의 유일한 놀이였지요. 누가 더 반듯하게, 더 높이 쌓는지를 겨루는 놀이였어요. 루미니짜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어요. 네모 블록들을 똑바로 쌓는 대신, 살짝 비스듬히 엇갈리게 쌓아 올리기 시작했지요.
“루미니짜,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쌓으면 무너지잖아!”
친구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아니야, 이렇게 하니까 꼭 춤을 추는 것 같지 않아?”
루미니짜가 웃으며 말했지만, 친구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어요.
“이상한 모양이야. 잿빛 속삭임이 싫어할 거야. 어서 반듯하게 다시 쌓아.”
친구들의 단호한 말에, 루미니짜는 시무룩해져서 비뚤어진 블록들을 다시 네모반듯하게 바로잡아야만 했어요.
그림자가 없다는 것도 루미니짜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어느 맑은 날, 루미니짜는 네모난 해를 등지고 땅바닥에 손을 펼쳐 보았어요. ‘이렇게 하면 내 손 모양대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땅 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빛이 너무나 강하고 똑바로 내리쬐어서, 루미니짜의 손을 그냥 통과해 버리는 것만 같았지요.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아주 잠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루미니짜는 자신의 손 주변으로 아주 희미하고 흐릿한 무언가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색깔도, 모양도 없는, 그저 ‘존재한다’는 느낌뿐인 옅은 어른거림이었어요.
“어! 방금…!”
루미니짜가 놀라 소리치며 옆에 있던 아빠를 불렀어요.
“아빠! 제 손에 뭔가 이상한 게 보여요 이게 그림자 아니예요?”
아빠는 인자한 미소로 루미니짜의 안경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주며 말했어요.
“우리 딸, 안경에 먼지가 묻었나 보구나. 세상에 그림자 같은 건 없단다. 자, 이제 깨끗하게 보이지?”
루미니짜가 다시 손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까와 같은 희미한 어른거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그날 오후에는 ‘하루 네모 바로잡기’ 시간이 있었어요. 하루에 한 번, 골짜기 광장에 모든 사람이 모여 서로의 자세가 네모반듯한지, 안경이 제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지요. 어른들은 커다란 네모 자를 들고 다니며 아이들의 어깨와 등, 팔다리의 각도가 완벽한 90도를 이루는지 꼼꼼하게 점검했어요.
“루미니짜, 어깨가 조금 처졌구나. 가슴을 펴고 반듯하게 서야지.”
한 어른의 지적에, 루미니짜는 억지로 몸에 힘을 주어 뻣뻣한 자세를 취했어요.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자세, 똑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어요.
모두가 완벽하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수많은 종이 인형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 것만 같았지요. 그리고 그 종이 인형들 사이에서, 오직 자기만이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는 외로운 느낌이 들었어요.
루미니짜는 자신의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요. 아까 보았던 그 희미한 어른거림을 떠올리면서요.
‘만약… 만약에 나에게 진짜 그림자가 있다면 어떤 모양일까?’
그림자 없는 완벽한 세상 속에서, 루미니짜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그림자를, 자신만의 고유한 모양을 꿈꾸기 시작했어요. 그 꿈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에요.
3장: 루미니짜의 마음에 싹튼 작은 물음표
그림자 없는 세상, 완벽한 질서 속에서 루미니짜는 애써 ‘착한 네모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아이들처럼 네모난 침대를 반듯하게 정리했고, 길을 걸을 때면 땅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으려 발걸음에 신경을 썼지요. 친구들이 ‘네모 블록 높이 쌓기’ 놀이를 할 때면, 더 이상 춤추는 모양을 만들지 않고 누구보다 반듯하게 블록을 쌓아 올렸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 간질간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갔어요. 한번 보았던 동그란 빗방울의 기억, 손 주변에서 아른거리던 희미한 그림자의 느낌이 자꾸만 루미니짜의 생각을 간지럽혔습니다. 마치 마음속 깊은 땅속에 심어진 작은 씨앗 하나가, 단단한 흙을 밀어내고 고개를 내밀려는 것처럼요.
네모네모 골짜기의 학교는 ‘네모 학교’라고 불렸어요. 그곳에서는 ‘각도기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각도기 선생님은 언제나 커다란 네모 자를 들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네모의 원리로 설명해 주었어요.
“자,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양은 무엇일까요?”
각도기 선생님이 물으면,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외쳤어요.
“네모입니다!”
“맞습니다. 네모는 네 개의 곧은 선과 네 개의 올바른 각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어디 하나 빈틈이 없어 안정적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 네모처럼 반듯하고 예측 가능해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을 때였어요.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그 작은 물음표 씨앗이 꿈틀, 하고 움직였어요. 루미니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답니다.
교실의 모든 시선이 루미니짜에게로 향했어요.
“루미니짜, 할 말 있나요?”
각도기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미니짜는 용기를 내어 물었어요.
“선생님, 그런데요… 동그라미는 왜 나쁜 건가요? 저는 비 오는 날, 동그란 물방울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예뻤어요. 반짝반짝 빛났어요.”
순간, 교실 안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어요. 아이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각도기 선생님의 얼굴에서는 다정한 미소가 사라졌어요.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미니짜에게 다가왔어요.
“루미니짜. 그건 아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생각이구나.”
선생님은 루미니짜의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루미니짜의 네모 안경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했어요.
“동그라미에는 곧은 선이 없단다.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지. 그런 혼란스러운 모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네 마음이 지금 조금 피곤해서 그럴 거야. 자, 선생님이 안경을 닦아주었으니 이제 세상이 더 반듯하게 보일 거란다.”
각도기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루미니짜를 아주 걱정해 주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루미니짜는 칭찬받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느낌이 ‘틀렸다’고, 심지어는 ‘아픈 것’이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눈빛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어요.
그날 이후, 친구들은 루미니짜를 조금씩 피하는 것 같았어요. 놀이 시간이 되면 자기들끼리 모여 속삭였지요.
“루미니짜는 자꾸 삐뚤어진 질문을 해.”
“잿빛 속삭임이 들으면 어떡하지? 우리까지 위험해질 거야.”
루미니짜는 혼자가 되었어요.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 루미니짜는 발끝만 보며 걸었어요. 네모반듯한 보도블록, 네모난 그림자가 없는 깨끗한 길.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루미니짜는 너무나 외로웠어요.
‘정말 내 마음이 틀린 걸까? 아니면… 모두가 쓰고 있는 이 안경이 틀린 걸까?’
마음속에서 두 개의 생각이 쿵, 하고 부딪혔어요.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잿빛 속삭임이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루미니짜의 귓가를 감싸왔어요.
“작은 루미니짜, 슬퍼하지 말아라. 의심은 너를 외롭게 만들 뿐이란다. 모두가 믿는 것을 함께 믿으렴. 그것이 평화로 가는 가장 쉽고 안전한 길이란다. 자, 눈을 감고 생각해 보렴. 모두와 똑같은 네모가 되는 것이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한지를…”
잿빛 속삭임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해서, 루미니짜는 하마터면 그 말에 넘어가 모든 질문을 포기할 뻔했어요.
그날 밤, 루미니짜는 자신의 방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어요. 창문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요. 네모 안경을 쓴 슬픈 얼굴. 루미니짜는 저도 모르게, 아주 조심스럽게 안경을 벗어 보았어요.
안경을 벗은 세상은 온통 뿌옇고 흐릿했어요. 모든 것이 경계 없이 뒤섞여, 마치 물감 팔레트 위에서 여러 색이 한데 엉겨버린 것 같았지요. 조금 무서웠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숨을 쉬는 것 같았지요.
루미니짜는 깜짝 놀라 얼른 안경을 다시 썼어요.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어요. 잿빛 속삭임이 들려준 적 없는, 아주 이상하고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루미니짜는 안경 없는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한 거예요.
마음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작은 물음표 씨앗은, 이제 더 이상 연약한 새싹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아주 작지만 단단한 줄기를 가진, 자신만의 힘으로 굳건히 서 있는 작은 나무가 되어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이제, 네모네모 골짜기의 단단한 땅을 뚫고, 진짜 햇빛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4장: 창문에 맺힌 동그란 빗방울
며칠 뒤, 네모네모 골짜기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고, 네모난 구름 사이로 네모난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렸지요. 사람들은 익숙하게 네모난 우산을 펼쳐 들고, 튀는 빗물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골짜기에서 비는 그저 성가시고 불편한 것일 뿐이었답니다.
하지만 루미니짜는 달랐어요. 아이는 창가에 바싹 다가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잿빛 풍경이었지만,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는 며칠 전 보았던, 그 동그랗고 무지갯빛이던 물방울의 기억이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루미니짜가 간절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어요. 수많은 네모 빗방울들 사이로, 유난히 크고 맑은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하고 창문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어요. 루미니짜의 네모 안경을 통해서는 그저 조금 큰 네모 물방울로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루미니짜는 그 물방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물방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리 위를 여행하고 있었지요. 루미니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작은 여행자를 따라 시선을 옮겼어요. 그러다 물방울이 창문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섰을 때, 루미니짜는 알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려 얼굴을 창문에 바싹 가져다 댔어요.
차가운 유리창에 루미니짜의 따뜻한 입김이 서려 뿌옇게 흐려졌어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루미니짜의 네모 안경 끝이 창문에 맺힌 그 커다란 물방울에 살짝 닿았답니다.
세상이 바뀌었어요.
물방울은 더 이상 그냥 물방울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아주 특별한 돋보기이자,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었지요. 안경 렌즈와 물방울이 만나는 그 작은 점을 통해, 루미니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풍경을 보았어요.
그곳에는 잿빛 세상 대신 눈부신 색깔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어요. 빨강, 노랑, 파랑… 이름 모를 수만 가지 색깔들이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지요. 반듯한 직선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모든 것이 부드러운 곡선과 활기찬 소용돌이, 그리고 자유로운 모양들로 가득했어요. 마치 그 작은 물방울 하나에, 온 우주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전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답니다.
“아…!”
루미니짜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어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너무나 황홀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요. 이 경이로운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루미니짜는 얼굴을 창문에 더욱 세게 밀어붙였어요.
쨍!
아주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어요. 안경알에 금이 가는 소리였지요. 루미니짜가 너무 세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안경 렌즈가 창문에 부딪혀 물방울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금이 간 거예요.
그 소리에 놀라 루미니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어요. 창문을 보니, 아까의 그 신비로운 물방울은 이미 아래로 흘러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어요. 하지만 루미니짜는 알고 있었어요. 방금 자신이 본 것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엄마! 아빠! 이리 와서 빨리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진짜 세상을 봤어요! 세상이 이 안에 있었어요!”
루미니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어요. 놀라서 달려온 엄마와 아빠는 루미니짜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얘야, 루미니짜. 무슨 일이니?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아니에요! 저 물방울 안에…!”
루미니짜가 창문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하려 했지만, 엄마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루미니짜의 안경에 생긴 작은 흠집이었어요.
“어머나, 세상에. 안경이 깨졌잖니! 그러니 그렇게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보이지. 얘야, 깨진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위험하단다. 어서 이걸 벗고 새것으로 바꿔야겠구나.”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너무나 사랑스럽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루미니짜를 바라보았지요. 아빠는 루미니짜를 꼭 안아주며 말했어요.
“괜찮다, 우리 딸. 아빠가 내일 당장 새 네모 안경을 맞춰주마. 그러면 다시 세상이 반듯하고 안전하게 보일 거란다.”
루미니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엄마와 아빠는 루미니짜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루미니짜가 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루미니짜의 놀라운 발견은 그저 ‘깨진 안경이 만들어낸 위험한 착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날 밤, 루미니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엄마 아빠는 깨진 안경을 가져가 버렸지만, 루미니짜에게는 아직 자신만의 비밀이 남아 있었어요. 바로, 아주 잠깐 동안 안경 없이 보았던 뿌옇지만 자유로운 세상의 기억, 그리고 물방울 속에서 보았던 눈부신 색깔들의 세상이었지요.
‘세상은 네모가 아니야. 잿빛 속삭임은 틀렸어.’
마음속에서 아주 분명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것은 더 이상 작은 물음표의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진실의 작은 조각을 맛본, 용감한 탐험가의 목소리였답니다.
루미니짜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어요. 하지만 동시에,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뜨거운 용기가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것을 느꼈어요. 이제 더 이상 이 네모난 방, 네모난 골짜기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나는 찾아야만 해.
창문에 맺혔던 그 동그란 빗방울 속에 있던 진짜 세상을.
루미니짜는 조용히 결심했어요. 창밖의 네모난 달님도, 골짜기를 감싼 잿빛 속삭임도 모르는, 아주 비밀스럽고 위대한 결심을요. 작은 빛, 루미니짜의 아주 특별한 모험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5장: ‘다름’이라는 이름의 병
다음 날 아침, 루미니짜의 부모님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의 손을 잡고 ‘모서리 바로잡기 센터’로 향했어요. 그곳은 골짜기 사람들의 안경에 문제가 생기거나, 생각이 삐뚤어졌을 때 찾아가는 곳이었지요.
센터의 관리자인 ‘직각 할아버지’는 아주 커다란 각도기처럼 생긴 의자에 루미니짜를 앉혔어요. 그는 루미니짜가 본 눈부신 색깔이나 동그란 세상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요. 대신, 아주 복잡해 보이는 기계로 루미니짜의 ‘생각의 각도’를 재고, ‘시선의 직선도’를 측정했지요.
한참 동안 기계를 들여다보던 직각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음, 진단이 나왔습니다. ‘마음 곡선증’ 초기 증상이군요.”
부모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마음 곡선증’이라니요? 그게 무슨 병인가요?”
“생각의 곧은 선이 휘어지면서, 세상의 반듯한 네모를 어지러운 곡선으로 착각하게 되는 병입니다. 동그라미나 알록달록한 색깔 같은 혼란스러운 환상을 보게 되지요. 우리는 이 병을 간단히 ‘다름’이라고 부릅니다.”
직각 할아버지는 루미니짜를 병든 아이로, 루미니짜의 특별한 발견을 위험한 증상으로 진단했어요. 루미니짜의 저항은 이제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와 ‘교정’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직 초기니까요.”
직각 할아버지는 서랍에서 아주 두껍고 조금 더 어두운 색깔의 새 네모 안경을 꺼내며 말했어요.
“이 특수 안경은 혼란스러운 빛을 더 효과적으로 걸러낼 겁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선 바라보기’ 훈련을 하고, 잿빛 속삭임을 두 배로 듣도록 하세요.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새 안경을 쓴 루미니짜의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네모반듯하고 잿빛으로 보였어요. 안경알이 너무 두꺼워서, 혹시라도 보일지 모를 작은 곡선이나 색깔의 틈조차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 같았지요.
그날부터 골짜기 전체가 루미니짜의 ‘치료’에 동참했어요.
학교의 각도기 선생님은 루미니짜에게 ‘곧은 선 그리기’ 숙제를 산더미처럼 내주었어요. 친구들은 루미니짜의 걸음걸이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루미니짜, 직선! 직선!” 하고 외치며 ‘도와’주었지요.
“널 위해서야.”
“우리는 네가 빨리 낫기를 바라.”
모두가 사랑과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루미니짜를 감시했어요. 그 다정한 시선들이 루미니짜에게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창살처럼 느껴졌답니다. 루미니짜는 더 이상 자신의 느낌을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루미니짜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누구보다 완벽한 네모 아이인 척했지요. 하지만 밤이 되어 모두가 잠들면, 루미니짜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베개 밑에 몰래 숨겨두었던 자신만의 비밀 보물을 꺼내 들었지요. 그것은 얼마 전 시냇가에서 몰래 주운, 동글동글하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어요.
루미니짜는 두꺼운 안경을 벗고, 어둠 속에서 조약돌의 부드러운 곡선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았어요. 딱딱하고 날카로운 네모 세상 속에서, 이 작은 동그라미의 감촉만이 유일한 진실처럼 느껴졌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방 안의 공기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잿빛 속삭임이 그 어느 때보다 애틋한 목소리로 루미니짜의 마음을 파고들었어요.
“가여운 루미니짜… 왜 그 병을 놓지 못하는 것이냐. ‘다름’이라는 병의 끝에는 오직 외로움뿐이란다. 그 차가운 돌멩이를 버리고, 우리 모두의 따뜻한 네모 세상으로 돌아오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잿빛 속삭임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하고 슬펐어요. 루미니짜는 순간 흔들렸어요.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그냥 모두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네모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루미니짜는 한 손에는 동그란 조약돌을, 다른 한 손으로는 두꺼운 네모 안경을 만지작거렸어요. 아이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어요. 네모난 창틀은 마치 감옥의 쇠창살처럼 보였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반듯한 골짜기의 풍경은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숨이 막혀왔어요.
‘따뜻하다고? 사랑한다고?’
루미니짜는 생각했어요. 낮 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들을 떠올렸어요. 그 눈빛들은 다정했지만, 동시에 루미니짜가 조금이라도 네모의 선을 벗어날까 봐 감시하는 교도관의 눈빛과도 같았어요. 아이를 위해 만들어주었다는 이 ‘안전한’ 세상은, 사실은 아이가 다른 꿈을 꾸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은, 아주 커다랗고 안락한 방처럼 느껴졌어요.
바로 그 순간, 루미니짜의 마음속에 이전에는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무서운 단어 하나가 떠올랐어요.
‘감옥.’
어쩌면… 이 네모네모 골짜기 전체가, 아주 커다랗고, 보이지 않는 감옥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정상’이라는 이름의 죄수인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하자, 잿빛 속삭임의 달콤한 목소리는 더 이상 위로로 들리지 않았어요. 그것은 죄수들을 길들이려는 교도관의 목소리였어요. 루미니짜는 깨달았어요. 잿빛 속삭임이 말하는 따뜻함은 온기가 없는 차가운 것이었고, 모두가 함께 있는 그곳에서 자신은 언제나 혼자였다는 것을요. 오히려 이 작은 조약돌을 만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 외롭지 않고 충만하게 느껴졌어요.
‘아니, 이건 병이 아니야. 이건 나야.’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그 순간, 루미니짜는 결심했어요. 더 이상 이 보이지 않는 감옥 안에서 ‘치료’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고. 자신을 ‘병들었다’고 말하는 이 세상을 떠나, 동그라미를 동그라미라고, 무지개를 무지개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이에요.
루미니짜는 작은 주머니에 네모난 빵 한 조각과, 자신의 유일한 진실이 담긴 동그란 조약돌을 챙겨 넣었어요. 창밖의 잿빛 어둠 속에서, 잠든 네모네모 골짜기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지요. 네모난 해가 떠오르기 전, 아주 조용히, 작은 빛 루미니짜는 자신의 감옥이 된 세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제2부: 틀 밖으로
6장: 골짜기 너머
네모난 달님이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온 골짜기를 희미한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루미니짜는 침대에서 조용히 빠져나왔습니다. 작은 등에는 네모난 빵 한 조각과 동그란 조약돌이 담긴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지요.
루미니짜는 살금살금 현관문으로 향했습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어요. 문밖은 집이었고, 가족이었고, 루미니짜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때, 마치 루미니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잿빛 속삭임이 아주 희미하게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돌아가렴, 작은 아이야… 바깥은 춥고 무서운 곳이란다…”
루미니짜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주머니 속 동그란 조약돌을 꽉 쥐었습니다. 조약돌의 매끄럽고 단단한 감촉이 마음속 두려움을 밀어내 주었습니다.
‘아니, 나는 가야만 해.’
끼익…
오래된 경첩이 내는 작은 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집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루미니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깨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내디뎠습니다.
골짜기의 밤은 낮보다 더 네모반듯했습니다. 반듯하게 뻗은 길, 반듯하게 늘어선 집들, 그리고 모든 것을 위에서 똑바로 내리쬐는 달빛 때문에 여전히 그림자 한 점 없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난생 처음으로, 이 완벽한 질서가 살아있는 생명체의 마을이 아니라, 거대한 인형의 집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루미니짜는 골짜기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었습니다. 그곳에는 어른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아주 높고 매끄러운 회색 담장이 있었습니다. 담장은 끝도 없이 이어져 골짜기 전체를 완벽한 네모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지요.
‘어떻게 저길 넘어가지?’
루미니짜가 담장을 따라 걸으며 막막한 마음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아이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습니다. 완벽하게 반듯해야 할 담장의 한쪽 구석, 땅과 맞닿은 부분이 살짝 금이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골짜기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숲속의 오래된 나무뿌리 하나가, 오랜 세월에 걸쳐 단단한 담장을 아주 조금씩, 그러나 끈질기게 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틈은 아주 작고 좁아서 어른들은 결코 지나갈 수 없었지만, 작은 아이인 루미니짜가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만한 크기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루미니짜를 위해 몰래 만들어 놓은 비밀의 문 같았습니다.
루미니짜는 틈 앞에 섰습니다. 틈 안쪽에서는 축축한 흙냄새와 이름 모를 풀 향기가 섞인,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낯선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등 뒤의 네모네모 골짜기는 익숙하고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루미니짜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골짜기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지요. 루미니짜는 작은 몸을 웅크려, 차갑고 거친 담장 틈새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딱딱한 돌멩이가 등을 긁고, 축축한 흙이 옷에 묻었지만, 루미니짜는 앞으로, 오직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루미니짜의 머리카락에 서늘한 밤바람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루미니짜는 틈새를 완전히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숨을 멈췄습니다.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하늘에는 네모난 달님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닮은 초승달이 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달빛은 더 이상 세상을 똑바로 내리쬐지 않았습니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 아래,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팔을 뻗어 밤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있었고, 땅 위에는 동그란 버섯과 뾰족한 솔방울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정적 대신, 귀뚜라미의 노랫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제멋대로이고,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잿빛 속삭임이 말했던 ‘혼돈’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아름답고 자유로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루미니짜는 자신의 얼굴에 씌워진, 두껍고 어두운 네모 안경을 천천히 벗었습니다. 안경알 너머로 보았던 잿빛 세상이, 이제는 진짜 색깔과 모양으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빠져나온 담장 틈 앞에, 이제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무거워 보이는 네모 안경을 조용히 내려놓았습니다.
오래된 세계와의 조용한 작별 인사였습니다.
루미니짜는 고개를 들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이제 아이를 이끌어줄 잿빛 속삭임은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속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와, 주머니 속 동그란 조약돌의 감촉만이 함께할 뿐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미지의 숲을 향해, 자신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세계의 균열은 아이에게 두려움이 아닌, 자유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7장: 잿빛 속삭임의 경고, “세상은 위험하단다”
숲속에서의 첫날은 온통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했어요. 루미니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그란 해가 떠오르고, 둥근 버섯들이 이슬을 머금고 반짝이는 것을 보았지요.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모든 것이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세상. 잿빛 속삭임이 경고했던 ‘혼돈’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가슴 벅찬 교향곡처럼 느껴졌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밤이 찾아오자, 숲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낮 동안 따스했던 햇살은 사라지고,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발밑에서부터 스며 올라왔지요.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낮에는 아름답게만 보이던 울창한 나뭇가지들이 이제는 괴물처럼 팔을 뻗어 자신을 붙잡으려는 것만 같았어요.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스스스,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처음 듣는 새의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고, 멀리서 동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도 했지요. 루미니짜는 커다란 나무 등걸에 몸을 웅크렸어요. 무서웠어요. 낮 동안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차가운 후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여긴 너무 무서워….’
바로 그때였습니다. 루미니짜의 마음 가장 깊은 곳, 가장 약한 부분에서 아주 익숙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것은 바깥의 소리가 아니었어요. 아이의 생각 속에서 피어나는 목소리였지요.
“보렴, 루미니짜. 내가 말했잖니.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이란다.”
잿빛 속삭임이었어요. 골짜기를 떠나왔음에도, 그 목소리는 마치 루미니짜의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와 있었던 거예요.
“네모네모 골짜기는 얼마나 안전했니. 그곳에는 뾰족한 가시도, 널 해치려는 짐승도 없었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네모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잖니.”
잿빛 속삭임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하고 그립게 느껴졌어요. 루미니짜의 눈앞에 골짜기의 풍경이 어른거렸어요. 엄마의 따뜻한 손길, 아빠의 다정한 미소, 친구들과 함께하던 반듯한 놀이 시간. 속삭임은 계속해서 루미니짜의 마음을 흔들었어요.
“왜 그 모든 행복을 버리고 이 춥고 외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냐. 너는 지금 혼자잖니. 아무도 너를 지켜주지 않아. 돌아가렴, 작은 아이야.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모두가 너를 용서하고 다시 따뜻하게 안아줄 거란다.”
루미니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어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요. 정말 돌아가고 싶었어요.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실수였다고 인정하고, 다시 안전한 네모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었어요.
루미니짜가 막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순간이었어요. 아이의 손끝에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딱딱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어요. 동그란 조약돌이었지요.
루미니짜는 저도 모르게 조약돌을 꺼내 꼭 쥐었어요. 돌멩이는 차가웠지만, 그 부드러운 곡선이 루미니짜의 마음에 이상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어요. 아이는 눈을 감았어요. 그러자 잿빛 속삭임이 보여주는 두려운 풍경 너머로, 다른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동그랗게 춤을 추던 모습, 제멋대로 자란 산딸기의 새콤달콤한 맛, 폭신한 이끼 위에 누웠을 때의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동그란 빗방울 속에서 보았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세상의 진짜 색깔들.
그 모든 것은 잿빛 속삭임이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 오직 루미니짜 자신만이 온몸으로 겪었던 소중한 진실이었어요.
루미니짜는 눈을 번쩍 떴어요. 그리고 더 이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소리 내어 외쳤지요.
“아니야!”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어둠을 가르는 별빛처럼 단호했어요.
“네 말은 틀렸어! 여기가 위험하고 무서울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여기는 모든 것이 살아있어! 골짜기는 안전했지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나는 더 이상 네모난 종이 인형처럼 살고 싶지 않아!”
루미니짜가 용기를 내어 외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잿빛 속삭임의 목소리가 안개가 걷히듯 스르르 옅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 두려움은 더 이상 루미니짜의 주인이 아니었어요.
루미니짜는 더 이상 울지 않았어요. 아이는 젖은 뺨을 닦고, 커다란 나무의 움푹 파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어요. 숲은 여전히 어둡고 낯설었지만, 이제 루미니짜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손안에 쥔 동그란 조약돌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기로 결심한 마음이 함께하고 있었으니까요.
잿빛 속삭임과의 첫 번째 싸움에서, 루미니짜는 이긴 거예요. 아이는 조약돌을 가슴에 꼭 품은 채,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8장: ‘정상’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벽
숲속에서의 시간은 루미니짜를 조금씩 바꾸어 놓았어요.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떤 열매가 달콤하고 어떤 버섯을 피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루미니짜는 자기 자신의 느낌을 믿는 법을 배우고 있었어요. 마음이 편안할 때는 안전하다는 신호이고, 어딘가 불안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신호라는 것을요.
그렇게 며칠을 더 걸었을 때, 루미니짜는 숲속 깊은 곳에서 아주 이상한 풍경과 마주쳤어요. 울창하고 제멋대로인 나무들 사이에, 갑자기 모든 것이 네모반듯하게 정리된 작은 공터가 나타난 거예요. 공터의 나무들은 어설픈 솜씨로나마 네모 모양으로 가지치기 되어 있었고, 땅바닥의 풀들은 모두 똑같은 길이로 잘려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조잡하지만 분명한 네모 모양의 오두막 몇 채가 서 있었지요.
그것은 마치 네모네모 골짜기를 아주 작게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어요.
루미니짜가 조심스럽게 공터로 다가가자, 오두막에서 사람들이 나왔어요. 그들은 루미니짜처럼 네모 안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과 몸짓은 이상할 정도로 뻣뻣하고 네모스러웠답니다.
“너는… 골짜기에서 왔구나?”
그들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물었어요. 그의 눈에는 반가움보다 경계심이 더 가득해 보였어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네 걸음걸이가 아직 너무 자유롭구나. 우리처럼 반듯하지 않아.”
루미니짜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 역시 오래전, 네모네모 골짜기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루미니짜는 너무나 기뻤어요. 드디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 거예요!
“정말요? 그럼 아저씨들도 아는군요! 세상이 온통 네모가 아니라는 걸요! 동그라미도 있고, 세모도 있고, 그림자도 있고요!”
루미니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어요.
“얘야, 그건 위험한 생각이다.”
아저씨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리가 골짜기를 나온 것은 그곳이 너무 답답해서였지, 네모의 질서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란다. 잿빛 속삭임이 말했잖니. 세상은 혼란스럽고 위험한 곳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 숲속에 우리만의 새로운 골짜기, 더 완벽하고 안전한 네모 세상을 만들고 있는 거란다.”
루미니짜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들은 스스로의 발로 답답한 세상에서 걸어 나왔으면서, 왜 다시 똑같은 모양의 또 다른 감옥같은 세상을 자기 손으로 짓고 있는 걸까요?
루미니짜는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며 그들의 삶을 지켜보았어요. 그들은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행동했어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둥근 모양의 돌멩이를 주워 오면 깜짝 놀라 빼앗아 버렸고, 누군가 무심코 콧노래를 구불구불하게 부르면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적했지요.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의 행동이 ‘정상적인 네모’의 규격에서 벗어나지 않는지를 확인했어요. 그들 주변에는 회색 담장은 없었지만, 루미니짜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정상’이라는 이름의 훨씬 더 높고 단단한 투명한 벽을 느낄 수 있었어요. 잿빛 속삭임은 더 이상 필요 없었어요. 그들 각자가 서로에게 잿빛 속삭임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요.
“루미니짜,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지 않으렴?”
아저씨가 루미니짜에게 제안했어요.
“혼자 숲을 헤매는 건 위험해. 이곳은 안전하단다. 우리가 너의 삐뚤어진 생각들을 바로잡아 줄게.”
그 제안은 달콤했어요. 혼자인 것은 외로웠으니까요. 하지만 루미니짜는 그들의 불안하고 경직된 얼굴을 보았어요. 그들은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두려움에 쫓기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루미니짜는 깨달았어요. 진짜 감옥은 네모난 담장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두려움이라는 것을요.
루미니짜는 고개를 저었어요.
“고맙지만, 괜찮아요. 아저씨들의 네모 세상은 저에게 너무 좁아요. 저는 세상에 있는 다른 모양들을 모두 만나보고 싶어요.”
사람들은 루미니짜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았어요. 그들의 눈에는 루미니짜가 안전한 집을 마다하고 다시 위험한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어리석고 병든 아이로 보일 뿐이었지요.
루미니짜는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울창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이제 루미니짜의 마음속에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속의 골짜기에서 벗어나는 거야.’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보이지 않는 벽, ‘정상’이라는 이름의 벽을 스스로 허무는 데 있다는 것을요.
루미니짜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장소를 찾는 모험을 넘어, 자기 자신만의 진짜 세상을 만들어가는 위대한 탐험이 되었습니다.
9장: 골짜기 너머, 금지된 숲으로의 첫걸음
스스로 또 다른 네모 세상을 만든 사람들의 공터를 뒤로하고, 루미니짜는 다시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제 아이의 마음속에 외로움은 없었습니다. 대신, 아주 조용하고도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그것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외로움이 아니라,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다는 고요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루미니짜는 두 갈래로 나뉘는 길 앞에 섰습니다.
한쪽 길은 다른 짐승들이 다녔는지 흙이 다져져 비교적 평탄해 보였습니다. 잿빛 속삭임이라면, 그리고 공터의 사람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했을 ‘안전한’ 길이었지요.
다른 한쪽 길은 길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용처럼 꿈틀대고, 이름 모를 덩굴들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 너머는 어둡고 신비로운 안개에 휩싸여 있었지요. 그곳은 골짜기의 어른들이 늘 이야기하던, 진짜 ‘금지된 숲’의 입구처럼 보였습니다.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마지막 남은 두려움의 그림자가 속삭였습니다.
‘안전한 길로 가야 해. 저쪽은 너무 위험해 보여.’
하지만 루미니짜는 그 목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평탄한 길에서 느껴지는 지루한 익숙함 대신, 미지의 숲이 내뿜는 살아있는 생명력에 온 마음이 끌렸습니다. 아이가 골짜기를 떠나온 이유는 단지 안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세상을 만나고, 진짜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루미니짜는 망설임 없이, 금지된 숲을 향해 자신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것은 골짜기에서 도망치던 두려움의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온전한 자기 자신의 의지로 내딛는 탐험가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숲은 루미니짜의 용기에 화답하듯,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가린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숲의 바닥에는 수만 가지 모양의 빛과 그림자가 환상적인 춤을 추었습니다. 공기 중에는 축축한 흙냄새와 톡 쏘는 솔잎 향기,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의 달콤한 향기가 뒤섞여, 맡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경쾌한 소리, 벌들이 윙윙거리는 나른한 소리, 그리고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내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이 모든 소리들이 모여 루미니짜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여기는 모든 것이 살아있단다.’하고 속삭이는 듯했지요.
루미니짜는 구불구불 흐르는 시냇가에 앉았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의 반듯한 수로와는 달리, 시냇물은 동그란 조약돌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제멋대로 노래하고 춤추며 흘러갔습니다. 루미니짜는 조심스럽게 손을 담가 보았습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물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순간, 루미니짜는 자신이 시냇물과, 조약돌과, 그리고 이 숲 전체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이상하고도 따뜻한 느낌에 휩싸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어요. 루미니짜의 눈앞에, 작은 보석 같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나비의 날개는 깊은 바다를 닮은 파란색이었고, 그 위에는 신비로운 은빛 소용돌이무늬가 그려져 있었지요. 루미니짜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자, 나비는 가볍게 날갯짓을 하더니 공중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가지 않고, 마치 루미니짜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맴돌다가, 다시 숲의 더 깊은 곳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호기심이 피어났습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걸까?’
루미니짜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골짜기에서 도망치던 작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미지의 세상이 보내는 신호를 따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용감한 여행자였습니다.
파란 나비는 앞서가며 길을 안내했고, 루미니짜는 그 뒤를 따랐습니다. 금지된 숲은 더 이상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무한한 신비로 가득 찬 루미니짜의 진짜 세상이었습니다.
제3부: 유혹하는 진실들의 숲
10장: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비밀의 샘물’
파란 나비를 따라 걷는 루미니짜의 여정은 하루 이틀이 지나며 숲의 더 깊은 곳으로 이어졌어요. 숲은 알면 알수록 더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어떤 나무는 수백 개의 가지를 뻗어 있었고, 어떤 꽃은 셀 수 없이 많은 잎을 가지고 있었지요. 세상은 루미니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거대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아이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작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저 새는 왜 저쪽으로 날아갈까? 이 시냇물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왜 저 나무는 휘어져 자랐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 무엇 하나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의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던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지요.
바로 그때, 루미니짜를 이끌던 파란 나비가 이끼 낀 바위들 사이, 덩굴로 가려진 작은 동굴 입구로 쏙 사라졌습니다. 루미니짜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덩굴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동굴 안은 어둡지 않았어요. 그 중심에 있는 작은 샘물에서 은은한 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샘물은 놀라울 정도로 맑고 고요해서,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듯했습니다.
루미니짜가 샘물가로 다가가자, 물의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부드럽고 지혜로운 목소리가 아이의 마음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왔습니다.
“어서 오렴, 길 잃은 작은 아이야. 너는 혼란스럽구나. 답을 찾고 있구나.”
목소리는 너무나 따뜻하고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듯해서, 루미니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비밀의 샘물’이란다. 내 물을 한 모금 마시면, 너를 괴롭히던 모든 질문이 사라질 것이다. 너는 이 숲의 모든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거대한 비밀의 이야기를 한눈에 꿰뚫어 보게 될 것이야.”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약속. 그것은 혼란에 지쳐있던 루미니짜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샘물을 떠서, 딱 한 모금 마셨습니다.
순간, 루미니짜의 머릿속으로 수만 개의 빛나는 실타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어제 무심코 보았던 다람쥐는 그냥 도토리를 줍던 게 아니었어요. 그 다람쥐가 그 도토리를 바로 그 자리에 숨겼기 때문에, 몇 년 뒤 그곳에서 새로운 참나무가 자라나게 될 것이었고, 그 나무는 언젠가 집을 잃은 딱따구리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줄 운명이었던 겁니다. 무심코 발밑을 스치던 바람은, 사실 저 멀리 산 너머에 있는 민들레 꽃씨를 실어 나르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요.
숲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새의 지저귐, 나뭇잎의 떨림, 벌레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계획의 일부가 되어,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혼란은 사라지고 완벽한 질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루미니짜는 더 이상 숲속을 헤매는 작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마치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발아래의 숲 전체를 내려다보는 현명한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길이 손바닥처럼 훤히 보였고, 어디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내일은 어떤 잎이 떨어질지까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차가운 확신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그것은 짜릿하고 강력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황홀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되자, 세상의 모든 신비와 설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루미니짜는 다시 파란 나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비가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눈에 나비는 그저, 자신을 이 샘물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전령’으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길가에 핀 예쁜 들꽃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대신 ‘이 꽃은 어떤 곤충을 유인하여 꿀을 주고 씨앗을 퍼뜨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비밀의 연결고리만 먼저 떠올랐습니다.
모든 비밀을 풀어버린 탐정의 쓸쓸함이 밀려왔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함께 춤추고 노래할 친구가 아니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 거대한 책 한 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루미니짜는 이미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다 읽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되자, 당황스럽게도 세상은 모든 순수한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계획의 부품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아름다운 꽃도, 그저 즐거워서 노래하는 새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이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조숙하고 피곤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깨달았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가 모든 것을 ‘모양’의 감옥에 가두었다면, 이 비밀의 샘물은 모든 것을 ‘의미’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것을요.
이것 또한 또 다른 종류의 감옥일 뿐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조용히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은은한 빛이 자기를 붙잡으려 했지만, 루미니짜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책의 모든 비밀을 혼자 미리 다 알고 있는 외로운 독자가 되는 것보다,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다음 장에 무엇이 나올지 두근거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는 길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파란 나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나비는 비밀스러운 전령이 아닌, 그저 아름다운 파란 나비로 보였습니다. 나비는 루미니짜의 어깨에 잠시 앉았다가, 마치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듯,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루미니짜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이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지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거짓말뿐만 아니라, 세상을 단 하나의 이야기로 묶으려는 ‘완벽한 진실’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요. 세상의 어떤 질문들은, 정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품고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11장: ‘나만 아는 진실’이라는 달콤한 독
비밀의 샘물을 뒤로 한 루미니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을 단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맞추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자, 숲은 다시 경이롭고 살아있는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지요.
그렇게 며칠을 더 걸었을까, 루미니짜는 멀리서 들려오는 유쾌한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에 다다르자, 아이의 눈앞에는 햇살이 가득한 아름다운 골짜기가 나타났어요. 그곳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모여 신나게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깜짝 놀라게도, 그 동물들은 모두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답니다!
루미니짜가 다가가자, 그들 중 가장 눈빛이 반짝이는 여우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안녕, 작은 여행자. 여기까지 오다니, 너는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우리는 ‘깨어난 이들’이란다. 너도 혹시… 진실을 보았니?”
루미니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우와 동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루미니짜를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루미니짜가 네모네모 골짜기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쯧쯧, 불쌍한 것들. 그들은 아직도 잠들어 있구나.”
여우가 교활하면서도 연민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본 동그라미나 색깔은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란다. 이 숲, 아니 이 세상의 진짜 비밀을 알려줄까?”
여우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다, 저 산 너머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거인’이 꾸는 꿈이란다. 우리는 그 꿈속의 등장인물일 뿐이지. 저기 떠 있는 해는 거인의 감은 눈꺼풀이고, 천둥소리는 거인의 코 고는 소리야. 오직 우리, ‘깨어난 이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단다.”
루미니짜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전부 꿈이라니! 동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모든 것이 정말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거인의 꿈이라는 생각은, 숲의 모든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단번에 설명해 주는 명쾌한 열쇠 같았지요.
루미니짜는 ‘깨어난 이들’의 공동체에 머물렀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은 모르는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루미니짜를 우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동물들을 ‘잠든 이들’이라고 부르며 가엾게 여겼습니다. 다람쥐가 열심히 도토리를 모으는 것을 보고는 “저런, 꿈속에서 겨울을 준비하느라 애쓰는군” 하고 웃었고, 비를 피하려는 토끼를 보고는 “거인이 꾸는 슬픈 꿈에 젖고 있구나” 하고 혀를 찼습니다.
‘나만 아는 진실’. 그것은 달콤한 꿀과도 같았습니다. 루미니짜는 자신이 더 이상 길 잃은 작은 아이가 아니라,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진, 선택받은 소수가 된 것만 같아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달콤함 속에는 아주 미세한 독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작은 아기 사슴 한 마리가 길을 잃고 울면서 그들의 골짜기로 들어왔습니다. 루미니짜는 깜짝 놀라 아기 사슴에게 달려가려 했습니다.
“얘야, 괜찮니? 엄마는 어디 계셔?”
바로 그때, 여우가 루미니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습니다.
“루미니짜, 그냥 두렴. 저건 진짜 슬픔이 아니야. 거인이 꾸는 꿈속의 슬픈 장면일 뿐이지. 우리가 저 꿈에 끼어들어 봐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단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은 슬프게 우는 아기 사슴을 그저 무대 위의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연민이 있었지만, 그 연민은 차갑고 무기력했습니다.
루미니짜는 그 순간, 얼어붙은 듯 멈춰 섰습니다. 아기 사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짜였습니다. 겁에 질려 떠는 작은 몸의 떨림도 진짜였습니다.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도와주고 싶다’는 뜨거운 감정 또한 진짜였습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깨어난 이들’의 모습은 더 이상 지혜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안다는 이유로, 바로 눈앞의 작은 생명이 겪는 진짜 고통에 눈을 감아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깨어남’이란,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차갑게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깨달았습니다. ‘나만 아는 진실’이라는 꿀은, 사실 마음을 단단하게 굳혀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독이라는 것을요.
루미니짜는 여우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고, 울고 있는 아기 사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몸을 꼭 안아주며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함께 있어 줄게.”
그리고 여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꿈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아기 사슴의 두려움은 진짜예요. 그리고… 이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 내 마음도 진짜예요. 저는 그런 진실을 외면하는 깨어남은 원하지 않아요.”
루미니짜는 아기 사슴을 도와 함께 엄마를 찾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혼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깨어난 이들의 골짜기는 더 이상 유쾌하고 지혜로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연민을 잃어버린 영혼들이 모여 사는, 또 다른 종류의 외로운 섬일 뿐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이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더 깊이 느끼는 지혜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12장. 나의 불행을 탓할 대상을 찾아주는 ‘메아리 동굴’
‘깨어난 이들’의 골짜기를 떠난 루미니짜의 여정은 고되고 외로웠습니다. 숲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혼자서 길을 찾고, 먹을 것을 구하고, 밤의 추위를 견뎌내는 일은 날이 갈수록 힘에 부쳤습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다시 작은 의심의 가시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왜 이렇게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걸까? 어쩌면 나는 이 숲에서 살아남을 만큼 강하지 못한 아이인지도 몰라.’
스스로를 탓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워질 무렵, 루미니짜는 커다란 동굴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안에서는 이상하고 장엄한 노랫소리 같은 것이 낮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요. 비를 피할 곳이 필요했던 아이는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동굴 내부는 거대하고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루미니짜처럼 길을 잃은 듯한 여행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굴의 가장 깊숙한 안쪽 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가 다가가자, 그들 중 한 명이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길이 너무 험해서 발을 다쳤어….”
그러자 동굴 전체가 거대한 목소리로 웅장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뾰족한 돌멩이들 탓이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악한 돌멩이들을 저주하라!”
다른 한 명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열매를 찾지 못해 배가 고파….”
동굴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욕심 많은 나무들 탓이다! 우리에게 열매를 숨기는 이기적인 나무들을 미워하라!”
루미니짜는 그제야 이곳이 ‘메아리 동굴’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메아리는 단순히 말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굴은 사람들의 모든 슬픔과 실패를 듣고, 그 모든 것을 탓할 수 있는 명확한 ‘적’을 찾아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아리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뜨거운 분노와 이상한 활기가 피어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동의 ‘적’을 향해 한목소리로 분노하며 이상한 유대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미워할 대상이 생기자, 그들의 고통은 훨씬 견디기 쉬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한 여행자가 루미니짜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너도 괴로운 일이 있구나, 아이야. 이 동굴에게 너의 슬픔을 말해보렴. 동굴은 너를 아프게 한 진짜 원흉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거란다.”
루미니짜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자기 비난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아이는 저도 모르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두려움을 나직이 고백했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 약하고 겁이 많아서… 이 숲을 혼자 여행하는 게 너무 무서워요.”
그 순간, 동굴은 천둥과도 같은 소리로 루미니짜에게 외쳤습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를 약하게 만든 네모네모 골짜기 탓이다! 너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준 잿빛 속삭임 탓이다! 그들은 너의 날개를 꺾은 원수들이다! 그들을 미워하라! 그들을 원망하라!”
루미니짜의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래, 내 잘못이 아니었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책임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골짜기를 향한 뜨거운 분노가 용암처럼 차올랐습니다. 너무나 후련하고,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 어떤 슬픔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적’을 향한 분노만이 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루미니짜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그 분노의 외침에 동참하려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 아주 작은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골짜기를 떠나오던 마지막 밤, 자신을 걱정하며 안아주던 엄마와 아빠의 슬픈 얼굴.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잿빛 속삭임에 맞서 “아니야!”라고 외쳤던, 자기 자신의 용감했던 목소리.
만약 이 모든 것이 그저 골짜기 ‘탓’이라면, 나를 사랑했던 부모님의 마음은 무엇이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발로 여기까지 걸어온 나의 용기와 나의 선택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루미니짜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주 달콤한 위로이지만, 그 위로는 결국 나 자신의 힘과 용기마저도 부정해 버린다는 것을요. 아이는 동굴 속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들은 분노 속에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각자의 미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동굴의 메아리가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에게 말했습니다.
‘골짜기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그 상처를 탓하며 주저앉아 있는 건 내 힘을 포기하는 거야. 나의 두려움은 내가 마주해야 할 나의 몫이고, 나의 용기는 내가 찾아야 할 나의 보물이야.’
루미니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분노로 가득 찬 메아리 동굴을 걸어 나왔습니다. 동굴 밖의 숲 공기는 훨씬 더 맑고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길을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루미니짜는 이제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기꺼이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13장: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그림자 늑대들
메아리 동굴을 빠져나온 루미니짜는 더 이상 자신의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비록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묘하게 단단해진 것을 느꼈지요.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동시에, 아이에게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된 것 같은 이상한 자유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숲속을 걷던 어느 날, 루미니짜는 숲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나무줄기마다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지요. 그리고 곧, 아이는 그들을 만났습니다.
잿빛 털에, 밤하늘의 별처럼 차가운 눈을 가진 늑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루미니짜의 앞뒤를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은 제멋대로인 숲의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했습니다.
루미니짜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지만, 늑대들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늑대가 앞으로 나서며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작은 아이.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그들’ 편이냐?”
‘우리’와 ‘그들’이라니. 루미니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길을 잃었어요.”
“이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없다.”
우두머리 늑대가 으르렁거렸습니다.
“오직 두 개의 길만이 있을 뿐. ‘우리’ 늑대들의 길이냐, 아니면 저 ‘뒤틀린 나무’들의 길이냐.”
늑대는 코끝으로 숲의 어둡고 음침한 한쪽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의 나무들은 정말로 기괴한 모양으로 가지가 뒤틀려 있었고,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저것들이 바로 이 숲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저 뒤틀린 나무들은 땅의 양분을 훔치고 맑은 시냇물을 더럽히지. 숲에 병이 돌고 사냥감이 줄어드는 것은 모두 저 사악한 나무들 때문이다. 우리는 저 어둠에 맞서 싸우는 ‘숲의 수호자’, 그림자 늑대들이다.”
루미니짜는 깜짝 놀랐습니다. ‘뒤틀린 나무들 탓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습니다. 바로 메아리 동굴의 목소리였습니다. 동굴이 속삭여준 ‘적’을, 이 늑대들은 평생의 원수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두머리 늑대는 루미니짜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너는 혼자로구나. 우리 무리에 들어오너라. 우리와 함께 저 사악한 나무들과 싸우자. 그러면 너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혼자 밤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에게는 따뜻한 잠자리와 든든한 가족이 생길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에 루미니짜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아이는 늑대 무리와 함께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서로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냥한 먹이는 가장 약한 늑대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고, 밤이 되면 서로의 몸에 기대어 추위를 이겨냈지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의 유대감은 아주 강하고 뜨거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그들’을 향한 차가운 증오를 땔감으로 삼아 타오르는 불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뒤틀린 나무들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어린 늑대들에게는 나무들을 향해 증오를 퍼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뒤틀린 나무 숲 쪽에서 날아온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그들의 영역에 앉았습니다. 늑대들은 즉시 파랑새를 둘러싸고 “저놈은 적의 첩자다!”라고 외치며 맹렬하게 짖어댔습니다. 겁에 질린 파랑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고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늑대들은 마치 큰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루미니짜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아이는 우두머리 늑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저 새가 정말로 나쁜 일을 했나요? 뒤틀린 나무들이 정말로 우리를 해치려고 하나요? 직접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 순간, 무리의 따뜻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우두머리 늑대의 눈이 차갑게 빛났습니다.
“너는 지금 적을 두둔하는 것이냐? ‘우리’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를 배신하는 것이다.”
루미니짜는 깨달았습니다. 이곳의 따뜻함은 ‘조건부’라는 것을요. 그들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증오까지도 함께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고, 의심은 곧 배신이었습니다.
이곳은 메아리 동굴보다 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동굴은 그저 분노를 되돌려줄 뿐이었지만, 이 늑대들은 그 분노를 먹고 살아가는 진짜 군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늑대들이 뒤틀린 나무 숲을 향한 증오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었을 때, 루미니짜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곳, 바로 뒤틀린 나무 숲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겠어. 저들이 정말로 악마인지, 아니면… 그냥 우리와 다른 모양을 가진 나무일 뿐인지.’
루미니짜는 이제 다른 사람이 정해준 ‘우리’와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기를 거부했습니다. 아이는 기꺼이 그 경계선을 넘어,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들’의 세계로 직접 걸어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내디딜 수 있는 가장 용감하고도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4장: 길 잃은 루미니짜와 별똥별의 노래
그림자 늑대들의 영역을 벗어난 루미니짜는 마침내 ‘뒤틀린 나무들의 숲’에 발을 들였습니다. 늑대들의 말처럼, 숲은 어둡고 음산했습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거대한 나무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듯 가지를 비틀고 있었고, 그 그늘 아래에는 축축한 이끼와 이름 모를 버섯들이 기이한 빛을 내뿜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루미니짜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용기를 내어 한 걸음 한 걸음,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숲은 사악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요.
나무들은 사악해서 뒤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거친 비바람과 싸우고, 서로에게 햇빛을 나누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으며 살아남은 흔적이었습니다. 나무껍질 하나하나에는 루미니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숲은 단지 늙고, 지혜로웠을 뿐이었습니다. 늑대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생명력이 두려워, 스스로 ‘악마’라는 이름을 붙여 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 루미니짜의 배고픔과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뒤틀린 나무 숲은 마치 거대한 미로와도 같아서, 루미니짜는 곧 방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가져온 빵은 이미 오래전에 다 떨어졌고, 며칠 동안 열매 하나 찾지 못해 기운이 없었지요.
아이는 거대한 나무뿌리에 지쳐 쓰러지듯 주저앉았습니다. 문득, 자신이 거쳐온 모든 곳들이 떠올랐습니다.
안전했지만 숨 막혔던 네모네모 골짜기.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지만 신비를 앗아갔던 비밀의 샘물.
따뜻했지만 연민이 없었던 깨어난 이들의 골짜기.
그리고 강력한 소속감을 주었지만 증오에 갇혀 있던 그림자 늑대들의 무리.
루미니짜는 그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모든 거짓된 정답과 위험한 안식처를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칠흑 같은 어둠과 지독한 허기, 그리고 세상에 정말로 자기편은 아무도 없다는 뼛속 시린 외로움뿐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루미니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들자, 캄캄했던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눈부신 빛의 꼬리가 길게 그려졌습니다. 별똥별이었습니다. 루미니짜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빛보다도 밝고, 빠르고, 아름다운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별똥별은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빛이 스쳐 지나간 밤하늘의 길 위로, 마치 수정으로 만든 작은 종이 부딪히는 듯한,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가사도 없는 순수한 멜로디였습니다. 하지만 그 노래는 루미니짜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노래는 말했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노래는 말했습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중이란다.’
노래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렴. 이 우주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사랑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단다.’
루미니짜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굶주림도, 피곤함도, 외로움도 모두 잊었습니다. 아이의 온 영혼이 그 신비로운 별똥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노래는 아이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 정답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별똥별은 저 멀리, 숲 너머의 작은 산등성이 뒤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영롱한 노랫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마치 루미니짜를 부르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계속해서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루미니짜의 마음속에 새로운 나침반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 헤매지 않았습니다. 벅찬 가슴을 안고, 별똥별의 노래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여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기다리는 미지의 부름을 향해,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순례자였습니다. 유혹하는 진실들의 숲은 이제 아이의 등 뒤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의 진짜 여정은, 이제 막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제4부: 마음 할머니의 천 가지 모양 숲
15장: 안경 없이 살아가는 할머니와의 만남
별똥별의 노래는 루미니짜의 마음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등불이 되어 길을 비춰주었습니다. 아이가 그 신비로운 멜로디를 따라 걷자, 주변의 숲도 서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럽게 뒤틀린 나무들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활기찬 나무들이 나타났지요. 어떤 나무는 하늘을 향해 춤을 추듯 가지를 뻗었고, 어떤 나무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또 어떤 나무는 이웃 나무와 다정하게 가지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천 가지 모양 숲’이었습니다. 뾰족한 소나무와 동그란 도토리나무, 별 모양의 단풍잎과 심장 모양의 풀잎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정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노랫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들려오는 숲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 루미니짜는 작은 햇살 공터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아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의 집 한 채가 서 있었습니다.
그 집은 네모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땅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른 커다란 버섯처럼, 온통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동그란 흙집이었습니다. 구불구불한 굴뚝에서는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집 주변의 텃밭에는 온갖 모양과 색깔의 꽃과 채소들이 제멋대로지만 활기차게 자라고 있었지요.
루미니짜가 넋을 잃고 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둥근 나무 문이 조용히 열리며 한 할머니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깊고 다정한 주름이 가득했고, 길게 땋은 은빛 머리카락에는 작은 들꽃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루미니짜를 놀라게 한 것은, 할머니의 얼굴에 그 어떤 안경도 씌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맨눈으로, 꾸밈없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눈빛은 마치 숲 전체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처럼 깊었고, 루미니짜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별똥별의 노래를 따라왔구나, 작은 순례자.”
할머니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루미니짜의 마음을 이끌던 그 멜로디처럼, 맑고도 따뜻했습니다.
“어서 들어오렴.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루미니짜는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 안은 바깥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따스했습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고, 벽에는 소라 껍데기, 하트 모양 조약돌, 새의 깃털 같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습니다. 무엇 하나 네모난 것이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조화로웠습니다.
루미니짜는 네모네모 골짜기를 떠나온 후 처음으로,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아주 길고 험난한 여행 끝에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이에게 따뜻한 수프와 갓 구운 빵을 내어주었습니다. 루미니짜가 허겁지겁 수프를 다 비울 때까지, 할머니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주는, 충만한 침묵이었습니다.
마침내, 루미니짜는 자기 안의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와 잿빛 속삭임, 깨진 안경과 동그란 빗방울, 그리고 숲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유혹들과 외로웠던 밤들에 대해서요.
할머니는 이야기 내내 단 한 번도 루미니짜의 말을 끊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온 존재로 듣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가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때, 할머니는 아이의 작은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말했습니다.
“오, 아가야. 너는 길을 잃었던 게 아니었구나. 너는 단 한 순간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단다. 너는 줄곧, 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너만의 나침반을 용감하게 따라오고 있었던 게야.”
마음의 나침반. 그 말을 듣는 순간, 루미니짜는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안경 없이 세상을 보는 이 할머니의 맑은 눈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것이 바로 진짜 ‘보는 것’이구나. 무언가를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것.
루미니짜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존재를 마침내 만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필요했던 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새로운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자기 내면의 나침반을 읽는 법을 가르쳐 줄, 지혜로운 안내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날 밤, 루미니짜는 벽난로 옆 작은 흔들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아주 오랜만에 깊고 평화로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별똥별의 노래는 아이를 마침내 집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바로 따뜻한 이해와 지혜가 있는 존재의 품이었습니다.
16장: 생각의 관찰자 되기
다음 날 아침, 루미니짜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둥근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따스했고, 공기는 향긋한 풀 내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아이는 쫓기지 않는 편안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루미니짜는 할머니가 있는 툇마루로 나갔습니다. 할머니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숲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는 할머니 곁에 조용히 다가가 앉았습니다.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 질문들이 맴돌고 있었지요.
“할머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어디로 가야 진짜 세상을 찾을 수 있나요? 다시는 속지 않으려면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아이는 새로운 규칙, 새로운 정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할머니는 대답 대신, 루미니짜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습니다.
“아가야,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네 안의 세상을 여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우리,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나 해볼까? ‘마음 하늘 구름 보기’ 놀이란다.”
할머니는 루미니짜를 툇마루의 푹신한 방석 위에 앉히고는, 편안하게 눈을 감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자, 이제 아무것도 하려고 애쓰지 말아보렴. 그저 가만히 앉아, 네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는 거야. 네 마음은 아주 커다랗고 텅 빈 파란 하늘이라고 상상해 보렴.”
루미니짜는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은 파란 하늘이 아니라,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찬 시끄러운 시장 같았습니다. ‘어젯밤 잠은 잘 잤나?’, ‘오늘 아침 수프 정말 맛있었는데.’, ‘네모네모 골짜기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았습니다. 아이는 생각을 멈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생각들은 더 시끄럽게 떠들어댔습니다.
“할머니, 잘 안돼요. 제 마음은 하늘이 아니라 온통 구름투성이예요!”
루미니짜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속삭였습니다.
“괜찮단다, 아가야. 그게 아주 정상이란다. 중요한 건 구름을 없애는 게 아니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습니다.
“너는 구름이 아니란다. 너는 그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는, 거대한 하늘이란다. 자, 이제부터 마음에 구름이 떠오르면, 화내거나 쫓아내려 하지 말고, 그저 다정하게 인사만 해주렴. ‘아, 걱정 구름이 왔구나. 안녕.’, ‘아, 심심한 구름이 왔구나. 어서 와.’ 그렇게 인사하고는, 가만히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루미니짜는 다시 눈을 감고 할머니의 말대로 해보았습니다. 곧 ‘나는 잘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운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루미니짜는 그 생각을 따라가는 대신,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두려움 구름아, 안녕.’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두려움은 이전처럼 아이의 마음을 꽉 붙들지 못하고, 정말 하늘의 구름처럼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뒤에는 숲속에서 먹었던 산딸기의 달콤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기쁜 구름아, 안녕.’ 그 기억 역시 잠시 머물다, 부드럽게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구름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보내기를 몇 번 반복했을 때, 루미니짜는 처음으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아주 짧고 고요한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텅 빈 파란 하늘의 순간. 그곳에는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오직 깊고 충만한 평화만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루미니짜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생각들이 아니구나. 나는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감정 덩어리도 아니구나. 나는 이 모든 것이 피어났다가 사라져 가는 것을 그저 조용히,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채로 바라보는, 저 고요한 하늘이었구나!
루미니짜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전과 똑같았지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음 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네 내면의 나침반을 찾을 준비가 되었구나, 루미니짜. 시끄러운 구름들은 네모네모 골짜기에서도 오고, 숲속의 두려움에서도 온단다. 하지만 저 고요한 하늘, 그곳이 바로 너의 진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지. 그 고요함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때, 너는 더 이상 외부의 어떤 목소리에도 길을 잃지 않게 될 거란다.”
루미니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질문을 잠재우고 진짜 답을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장소를,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17장: 가슴이 보내는 신호
며칠이 지나, 루미니짜는 ‘마음 하늘 구름 보기’ 놀이에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이제 아이는 걱정 구름이나 슬픔 구름이 떠올라도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않고, 고요한 하늘의 자리에서 그 구름들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음 할머니가 루미니짜에게 작은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루미니짜, 오늘 점심에는 맛있는 버섯 수프를 끓여 먹자꾸나. 네가 숲에 가서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좀 따오겠니?”
루미니짜는 신이 나서 숲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막상 숲에 들어서자, 아이는 곧 막막해졌습니다. 숲에는 수만 가지 종류의 버섯들이 있었고, 어떤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독버섯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모네모 골짜기의 ‘네모 도감’ 책에는 오직 ‘네모 버섯’ 한 종류만 나와 있었을 뿐이니까요.
한참을 헤매던 루미니짜는 마침내 아주 익숙하게 생긴 버섯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버섯들은 놀랍게도, 골짜기의 책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갓이 완벽한 네모 모양이었습니다!
‘아, 다행이다! 이건 내가 아는 버섯이야.’
루미니짜의 머릿속에서 아주 명쾌하고 합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 버섯을 따야 해.’
루미니짜가 반가운 마음에 네모 버섯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가슴 한구석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든 것입니다. 마치 작은 돌멩이가 명치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느낌. 그것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몸의 신호였습니다.
아이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바로 그때, 아이의 눈에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에 피어난 다른 버섯이 보였습니다. 그 버섯은 루미니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그랗고 소박한 모양이었습니다. 색깔도 수수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버섯을 보고 있자니, 쿵 하고 내려앉았던 가슴이 다시 편안해지고, 어깨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미니짜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에 빠졌습니다.
머리는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저 동그란 버섯은 위험해! 네가 모르는 모양이잖아! 안전하고 익숙한 네모 버섯을 골라야 해!’
하지만 가슴은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저 네모 버섯은 어딘가 불편해. 이 동그란 버섯이 더 편안하게 느껴져.’
머리의 목소리와 가슴의 목소리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아이는 잠시 눈을 감고, 얼마 전 할머니와 했던 ‘구름 보기’ 놀이를 떠올렸습니다. 머릿속의 시끄러운 생각들을 그저 구름처럼 흘려보내고, 고요한 하늘의 자리에 머물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네모 버섯을 생각할 때의 미세한 답답함. 동그란 버섯을 생각할 때의 부드러운 편안함.
루미니짜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논리적 이유도 없었지만, 자신의 가슴이 보내는 신호를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는 익숙한 네모 버섯을 지나쳐, 낯설지만 편안한 동그란 버섯을 조심스럽게 따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루미니짜는 혹시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바구니를 내밀자, 할머니는 안을 들여다보고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 아가야. ‘햇살 동그리’를 따왔구나! 아주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버섯이지. 너는 머리가 아니라, 네 가슴으로 고르는 법을 배웠구나.”
루미니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럼 저 네모 버섯은요?”
“그건 ‘어리석은 네모’라는 독버섯이란다.”
할머니의 말에 루미니짜는 얼굴이 하얘졌습니다.
“그 버섯은 착한 버섯인 척 똑같이 네모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아주 차가운 독을 품고 있지. 하지만 너의 몸은 그 차가움을 느낀 게야. 네 머리는 속아도, 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할머니는 루미니짜의 작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루미니짜, 네 마음속 시끄러운 생각들은 골짜기의 규칙을 기억하는 ‘머리의 목소리’란다. 하지만 네 가슴이 보내는 이 조용하고 깊은 느낌, 그것이 바로 네 몸의 지혜이자, 네 영혼의 진짜 목소리란다. 앞으로 길을 잃거든, 언제나 이 가슴의 신호를 믿으렴. 그것이 너의 가장 정직한 나침반이 되어줄 게다.”
루미니짜는 손안에 든 동그란 버섯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아이는 이제 세상을 여행하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지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책에 쓰인 지식이나 머릿속의 논리가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살아있는 지혜의 지도였습니다.
18장: 꿈과 상징의 언어
마음 할머니의 집에서 지내면서, 루미니짜는 밤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꿈들이 매일 밤 아이를 찾아왔기 때문이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꿈의 내용은 희미하게만 남아,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맴돌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루미니짜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할머니, 제가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꿔요.”
“호오, 어떤 꿈인데 그러니?”
“저는 아주 작은 네모 새가 되어, 네모난 새장 안에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장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답니다. 새장 밖으로는 아름답고 구불구불한 강이 흐르고, 그 강물 소리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아요. 저는 그 강으로 너무너무 날아가고 싶은데… 날개가 네모 모양이라서, 저 동그란 바람 속에서 날 수 있을지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 결국,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망설이기만 하다가 꿈에서 깨어나요.”
루미니짜의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습니다. 할머니는 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대신, 루미니짜에게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그렇구나. 참 신비로운 꿈이구나. 아가야, 꿈은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사는 또 다른 내가, 우리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란다. 그 편지는 우리가 매일 쓰는 말과는 조금 다른, 아주 특별한 그림 언어로 쓰여 있지. 우리, 그 편지를 함께 읽어볼까?”
할머니는 루미니짜를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눈을 감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말했습니다.
“자, 네가 그 작은 네모 새라고 상상해보렴. 지금 기분이 어떻니?”
루미니짜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습니다. “무서워요… 하지만… 조금 설레기도 해요. 그리고… 아주 슬퍼요.”
“그렇구나. 그럼 이번에는, 네가 새장의 문을 활짝 열어준 그 새장에게 말을 걸어보렴. ‘새장아, 너는 왜 문이 열려있는데도 나를 붙잡고 있니?’ 하고 말이야.”
루미니짜는 할머니의 말에 따라 마음속으로 새장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주 이상하게도, 새장의 대답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새장은… ‘내가 너를 붙잡는 게 아니야.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너 자신이란다.’ 하고 대답하는 것 같아요.”
할머니의 눈이 지혜롭게 빛났습니다.
“그럼, 너를 부르는 저 아름다운 강은 뭐라고 노래하고 있니? 그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렴.”
루미니짜는 다시 눈을 감고, 꿈속의 강물 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어느새 맑은 멜로디가 되어, 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강은 노래해요… ‘이리 오렴, 작은 새야. 너는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단다. 너의 날개는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날기 위한 것이란다. 너의 모양이 어떻든, 바람은 너를 안아줄 거란다…’”
그 말을 스스로 내뱉는 순간, 루미니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이는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꿈속의 네모 새는 바로 골짜기를 떠나온 자기 자신이었고, 문이 열린 새장은 바로 ‘안전함’이라는 이름의 익숙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토록 아름답게 자신을 부르던 강물은, 바로 루미니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자유롭고 연결된 진짜 세상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루미니짜를 새장 안에 가두었던 것은 굳게 닫힌 문이 아니라, 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자신의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을 닦아주며 루미니짜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보렴, 루미니짜.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은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단다. 꿈은 바로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비로운 거울이지. 네 꿈은 네가 겁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이제 날아오를 준비가 다 되었다고, 그러니 너 자신의 날개를 믿어보라고, 그렇게 용기를 주고 있는 거란다.”
그날 밤, 루미니짜는 다시 그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작은 네모 새는 여전히 문이 열린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강물은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새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작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새장의 횃대 끝으로 총총 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네모난 날개를 시험하듯 몇 번 퍼덕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새는 창공을 향해 힘껏 몸을 날렸습니다.
루미니짜는 바로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심장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한 벅찬 환희가 여전히 생생하게 넘실거리고 있었으니까요.
19장: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마음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루미니짜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생각 구름들을 그저 바라볼 줄 알게 되었고, 머리의 논리적인 목소리보다 가슴이 보내는 조용한 신호를 더 신뢰하게 되었으며, 꿈이 들려주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게 되었지요.
루미니짜는 이제 제법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숲의 동물들이 다툴 때면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화해시켜 주었고, 어떤 풀이 약이 되고 어떤 열매에 독이 있는지도 척척 알아맞혔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이제 숲의 모든 비밀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더 이상 길을 잃거나 속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맑은 날 밤, 할머니와 루미니짜는 집 앞 풀밭에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검은 하늘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지요.
“참 아름답구나.”
할머니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그러게요. 꼭 하늘에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 같아요.”
루미니짜가 아는 체하며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때, 할머니가 루미니짜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아가야, 그런데 저 별들은 왜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걸까? 저 별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루미니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려 했습니다. 아이는 그동안 배운 모든 지혜를 총동원했습니다.
먼저, 머리로 대답하려 했습니다. ‘음… 별은 원래 밤에 뜨는 거니까… 그냥 제 할 일을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너무나 뻔하고 시시한 대답 같았습니다.
다음엔, 가슴으로 느껴보려 했습니다. ‘저 별들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져요.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기 위해 빛나는 걸 거예요.’ 조금 나았지만,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꿈의 언어로 상상해보려 했습니다. ‘어쩌면 저 별들은, 잠든 세상이 꾸는 아름다운 꿈 조각들인지도 몰라요!’ 제법 근사한 대답이었지만, 그것 역시 진짜 정답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처음으로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그 어떤 지혜도, 이 거대하고 단순한 질문 앞에서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끙끙거리며 더 그럴듯한 대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모른다’고 말하면, 할머니가 자신에게 실망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루미니짜는 마침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할머니…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이는 할머니의 꾸중을 기다리며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루미니짜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꾸중이 아니라, 할머니의 아주 기쁘고 환한 웃음소리였습니다.
“하하하! 그래, 바로 그거란다!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 아가야! ‘모르겠다’라니,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위대한 대답이란다!”
루미니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할머니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루미니짜, 네가 떠나온 네모네모 골짜기는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세상이었지. 네가 만났던 비밀의 샘물은 단 하나의 정답으로 모든 질문을 막아버렸고, 그림자 늑대들은 자신들의 앎을 의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단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밤하늘처럼 깊어졌습니다.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순간,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버린단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다른 세상에 귀 기울일 수도 없게 되지. 그건 아주 편안하지만, 가장 작은 감옥이란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순간, 마법이 일어난단다. 너의 마음이 저 밤하늘처럼 활짝 열리고, 세상의 모든 신비와 지혜가 너에게로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게야. ‘모른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모든 진짜 배움이 시작되는 위대한 출발점이란다.”
“진정한 지혜는 머릿속에 정답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가슴속에 무한한 질문을 품고, 그 신비로움 속에서 살아갈 용기를 갖는 것이란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루미니짜는 다시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 ‘왜?’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별들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그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머릿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루미니짜는 자신의 내면의 나침반이 가진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나침반은 세상의 모든 길을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언제나 열린 마음과 질문하는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등불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속, 마지막 남은 두려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한 호기심과 경이감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20장: 모든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
루미니짜가 마음 할머니의 집에 머문 지도 계절이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동안 아이는 자신의 마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법을 배웠고, 가슴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를 믿는 법을 배웠으며, 꿈이 들려주는 비밀스러운 편지를 읽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속에서 진정한 앎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어느덧 숲에 첫눈이 내리던 날 밤, 할머니는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루미니짜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아가야, 너는 이제 네 안의 나침반을 거의 다 찾았구나. 이제 마지막으로 단 한 곳만 더 여행하면 된단다.”
“어디인가요, 할머니? 제가 가야 할 곳이 또 있나요?”
“그럼. 하지만 그곳은 발로 가는 곳이 아니란다. 오직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이지. 바로, 네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이란다.”
할머니는 루미니짜를 다시 고요한 명상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은 마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지 말아보렴. 구름 너머, 그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텅 비고 변치 않는 하늘 그 자체를 느껴보는 거란다.”
루미니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일상의 소란스러운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내일은 눈이 더 많이 올까?’, ‘저녁에 먹은 군고구마가 참 맛있었지.’ 루미니짜는 이제 그 구름들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한 겹 더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자신이 지금껏 쓰고 살아왔던 수많은 ‘가면’들을 만났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에서 썼던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의 가면, 숲을 처음 헤맬 때 썼던 ‘용감한 탐험가’의 가면,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 썼던 ‘지혜를 구하는 성실한 학생’의 가면까지. 루미니짜는 그 모든 것이 진짜 자신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잠시 입었던 옷과 같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그 모든 가면들에게도 조용히 고마움을 전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 아이의 아픔과 두려움이 숨어 있었습니다. 혼자라는 외로움, 틀렸다고 손가락질받던 슬픔, 잿빛 속삭임이 심어놓은 공포. 예전 같았으면 그 어두운 감정들에 휩쓸려 허우적거렸을 테지만, 이제 루미니짜는 달랐습니다. 아이는 그 모든 어두운 감정들을 그저, 비를 머금은 먹구름처럼, 판단 없이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먹구름은 더 이상 아이를 집어삼키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 뒤 맑게 개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생각의 구름과 역할의 가면, 그리고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완벽한 고요와 침묵만이 남았습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순간 두려워졌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기억도 없는 이곳에, 과연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
바로 그 텅 빈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아주 작고 따뜻한 빛 하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모양도, 이름도, 소리도 없는 순수한 빛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온 빛이 아니라, 루미니짜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의 핵에서부터 스스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빛 속에 머무는 순간, 루미니짜는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라고 믿었던 루미니짜라는 수 많은 모습의 아이는 마치 거대한 바다 위에 잠시 일어난 작은 파도 하나와 같았다는 것을요. 파도는 생겨나서, 잠시 춤을 추고, 이내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파도가 아니었구나.
나는 그 모든 파도를 낳고, 품어주며, 영원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저 거대한 바다 그 자체였구나!
이 눈부신 깨달음 속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던 마지막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루미니짜는 더 이상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바로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마음 할머니였고, 창밖에서 춤추는 눈송이였으며, 저 멀리 밤하늘을 지키는 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네모네모 골짜기에서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을 사람들의 마음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으로 느껴졌습니다.
루미니짜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전과 같았지만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모든 것이 신성한 빛으로 충만했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는 루미니짜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기쁨의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가 담긴 말을, 아이의 영혼에 마지막 선물처럼 건네주었습니다.
“그래, 아가야. 네가 바로 그것이란다.”
이제 루미니짜의 여정은 끝났습니다. 동시에, 진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길을 찾는 외로운 여행자가 아니라, 자신이 곧 길이었음을 깨달은 존재로서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나아갈 시간이었습니다.
제5부: 용기의 색깔들
21장: 골짜기로 돌아온 작은 등불
마음 할머니와의 이별은 슬프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떠나는 루미니짜를 꼭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아가야, 너는 이제 네 안의 나침반을 찾았으니, 세상 어디를 가든 길을 잃지 않을 게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렴. 골짜기로 돌아가거든, 사람들의 안경을 억지로 부수려고 하지 말아라.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뿐이란다. 그저, 네가 안경 없이 얼마나 행복하게 세상을 보는지를 조용히 보여주렴. 너의 삶이 곧, 너의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될 게다.”
루미니짜는 할머니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자신이 처음 걸어왔던 숲길을 되짚어 나아갔습니다. 다시 만난 숲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늑대들은 더 이상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고, 뒤틀린 나무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루미니짜의 눈에, 그 모든 것은 그저 각자의 이유와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아이는 네모네모 골짜기를 둘러싼 회색 담장 앞, 자신이 처음 빠져나왔던 작은 틈 앞에 다시 섰습니다. 틈새 너머로 보이는 골짜기는 예전과 똑같이 반듯하고, 질서정연하며,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습니다.
예전에 이 풍경을 보았을 때, 루미니짜의 마음을 채웠던 것은 답답함과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주 깊고, 아릿한 연민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보았습니다. 저 완벽한 질서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깊은 두려움을. 저 똑같은 표정들 아래 감추어진 각자의 외로움을. 저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잿빛 속삭임이 만들어낸 ‘안전’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너무나 오랫동안 갇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가여운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루미니짜는 조용히 담장 틈을 지나, 다시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맨눈으로 마주한 골짜기의 풍경은 모든 것이 날카롭고 뻣뻣해서 눈이 시릴 정도였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이제 그 모든 것을 담고도 남을 만큼, 고요하고 넓은 하늘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 저기 봐! 루미니짜다!”
길모퉁이를 돌자, 놀고 있던 아이 하나가 루미니짜를 발견하고 손가락질하며 외쳤습니다.
“안경이 없어! 안경을 쓰지 않았어!”
그 외침에 골짜기의 모든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습니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루미니짜를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다름’이라는 병이 더 심해져서 돌아온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 금기를 어긴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계심.
“쯧쯧, 가엾어라. 숲의 혼돈에 완전히 물들어 버렸구나.”
“저 아이의 눈을 봐. 세상의 어지러운 것들이 그대로 들어가고 있잖아.”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잿빛 속삭임이 회오리바람처럼 강하게 불어왔습니다.
“보아라! 약속을 어기고 밖으로 나간 자의 최후를! 저 아이는 병들었다! 가까이 가지 마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루미니짜의 부모님이 아이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루미니짜, 내 아가! 돌아왔구나! 얼마나 무서웠니! 괜찮다, 이제 모든 게 괜찮아. 어서, 어서 새 안경을 쓰자. 그러면 다시 안전해질 거야.”
엄마는 품속에서 새 네모 안경을 꺼내, 루미니짜의 얼굴에 씌워주려 했습니다.
예전의 루미니짜였다면, 그 순간 울음을 터뜨리거나 반항하며 소리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루미니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엄마의 손을,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안경을 씌우려는 엄마의 손을 가만히, 아래로 내렸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저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이제, 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요.”
그 목소리에는 반항심이나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확신과, 부모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두려워하는 눈빛을 향해, 마음 할머니를 닮은, 아주 맑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잿빛 속삭임은 여전히 골짜기를 맴돌고, 사람들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미니짜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저, 잿빛으로 가득 찬 그림자 없는 골짜기 한가운데에,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등불’이 되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그 등불은 어둠을 꾸짖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빛을 고요히, 그리고 꾸준히 비출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빛 속에서, 몇몇 아이들은 난생 처음으로, 루미니짜의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자유’라는 이름의 눈부신 색깔이었습니다.
22장: 안경을 벗기지 않고 세상 보여주기
골짜기로 돌아온 루미니짜의 하루는 조용한 저항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잿빛 속삭임의 목소리에 대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네모 안경을 벗기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음 할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또 다른 폭력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루미니짜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네모난 길을 따라 반듯하게 걸을 때, 루미니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의 궤적을 따라 춤을 추듯 걷거나, 시냇물의 구불구불한 흐름을 따라 강가를 거닐었습니다. 어른들은 혀를 차며 “저런, 생각이 온통 구부러졌구나” 하고 수군거렸지만, 루미니짜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하루 중 오랜 시간을, 골짜기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보냈습니다. 네모난 보도블록 틈새를 뚫고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 거미가 정교하게 쳐놓은 동그란 거미줄, 그리고 아침 햇살이 비칠 때마다 아주 잠깐씩 생겨나는 자신의 길고 부드러운 그림자. 그 모든 것이 루미니짜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미니짜는 골짜기 가장자리, 모두가 외면하는 회색 담벼락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바구니에 모아온 자신만의 물감들을 꺼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붉은 흙과 으깬 산딸기로 만든 빨간색, 민들레 꽃잎으로 만든 노란색, 그리고 숲의 이끼로 만든 초록색 물감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커다란 회색 담벼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네모가 아닌 동그란 해를 그렸습니다. 그 햇살은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온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반듯한 수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노래하며 흐르는 구불구불한 강을 그렸고, 강가에는 온갖 모양의 동물들이 모여 즐겁게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루미니짜가 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네모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다른 표정, 다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모두 다정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는, 각자의 모양을 따라 부드럽게 춤을 추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그 그림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저건 혼란일 뿐이야. 위험한 그림이야.”
잿빛 속삭임은 더욱더 강하게 경고했습니다.
“저 그림을 보면 너희의 생각도 전염될 것이다. 저것은 ‘다름’이라는 병균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습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멀리서 루미니짜의 그림을 훔쳐보았습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가득했습니다.
그때, ‘레오’라는 작은 아이가 용기를 내어 루미니짜에게 다가왔습니다. 레오는 그림 속에서 노랗고 동그랗게 웃고 있는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누나, 이건 뭐야? 해는 네모난 잿빛이잖아.”
루미니짜는 레오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네 안경이 틀렸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주었지요.
“응, 이건 내 마음의 눈에 보이는 해야. 레오, 너의 마음속 해는 어떤 모양이야?”
루미니짜는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레오에게 스스로의 마음에 질문을 던지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아이는 루미니짜의 그림을 한번 보고, 자신의 네모 안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의 네모난 해를 한번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자신의 안경을 살짝 들어 올려 맨눈으로 하늘을 엿보았습니다.
순간, 레오의 눈에 부드럽고 찬란한 빛을 내뿜는, 거대하고 둥근 진짜 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앗!”
레오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안경을 다시 고쳐 썼습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무서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워서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레오는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서서 친구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이제 지울 수 없는 비밀 하나가 생겼습니다. 루미니짜 누나가 그린 세상이, 어쩌면 진짜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비밀 말입니다.
루미니짜는 다시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외로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조용하고 작은 창조의 행위는, 그 어떤 커다란 외침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잿빛 세상에 던져진 작은 색깔 조약돌이었고, 단단하게 굳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하지만 분명한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23장: 루미니짜의 동그라미 그림과 노래
루미니짜의 그림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잿빛 담벼락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세상으로 열린, 살아있는 창문이 되었지요. 아이는 매일같이 담벼락에 새로운 색깔과 모양들을 더해갔습니다. 동그란 달팽이, 뾰족한 가시를 가진 밤송이, 나선 모양의 덩굴, 그리고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까지.
어른들은 여전히 그 그림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담벼락 근처를 지날 때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아이들에게 ‘위험한 장소’이니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잿빛 속삭임 역시 쉴 새 없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지요.
“혼돈이 너희를 유혹하고 있다!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저 그림을 보지 마라!”
하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그 어떤 경고보다 강했습니다. 레오를 시작으로, 골짜기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씩 담벼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아이들에게 가장 신나고 비밀스러운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루미니짜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냈습니다.
“누나, 그림자는 어떤 느낌이야? 만져져?”
“강은 왜 구부러져? 똑바로 흐르는 게 더 빠르지 않아?”
루미니짜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는 네모네모 골짜기의, 시작과 끝이 똑같은 단조로운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루미니짜의 노래는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다가 폭포수처럼 힘차게 솟아오르기도 하고, 산들바람처럼 다정하게 속삭이다가 천둥처럼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노래 속에는 숲에서 만났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별똥별이 들려주었던 희망의 멜로디, 뒤틀린 나무가 견뎌낸 시간의 무게, 그리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할머니의 지혜까지. 아이들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살아있는 감정이 담긴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넋을 잃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손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루미니짜처럼 동그란 조약돌을 주워 와 수줍게 내밀었고, 어떤 아이는 무지갯빛 깃털을 가져와 그림 옆에 고이 놓아두었습니다. 담벼락 앞은 이제 골짜기에서는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모양들로 가득한 비밀의 제단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린 어른들은 마침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담벼락 앞에 반듯한 네모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세워, 아이들이 더 이상 그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제 됐어. 저 위험한 그림은 보이지 않을 거야.”
어른들은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울타리는 그림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울타리 틈새로 그림을 훔쳐보며, 자신들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즐거움에 더 깊이 빠져들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울타리 틈새로 그림을 엿보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른들이 세워놓은 반듯한 울타리가, 땅 위에 길고 뾰족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게 뭐야?”
아이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잿빛 속삭임이 그토록 무섭고 위험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그림자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 비친 그림자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저, 세상이 평평하지 않고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용기를 내어 그림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그림자 위에서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곧 모든 아이들이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고 술래잡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루미니짜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 속 아이들도 모두 자신만의 그림자를 가지고 즐겁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땅 위의 진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쨍’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것은 네모 안경이 만들어낸 거짓 세상에 금이 가는 소리였습니다.
루미니짜의 동그라미 그림과 노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용기의 색깔들’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이제 곧, 잿빛으로 가득했던 골짜기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할 것이었습니다.
24장: 비웃음 속에서 피어나는 연민의 행동
아이들이 그림자와 놀던 일이 있은 이후, 네모네모 골짜기의 분위기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은 이제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변해갔지요. 그 모든 혼란의 원인이 바로 루미니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미니짜가 길을 지날 때면, 어른들은 보란 듯이 등을 돌리거나 헛기침을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이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저기 봐, 삐뚤어진 세상을 보는 아이야.”
“우리의 평화를 망치러 돌아왔어.”
“저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들까지 물들고 있잖아.”
그 비웃음과 차가운 시선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루미니짜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예전처럼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할머니와의 시간을 통해, 루미니짜는 이제 그들의 말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어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깊고 슬픈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오후, 골짜기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네모반듯하게만 불던 골짜기의 바람과는 달리, 그날의 바람은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며 숲의 노래를 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광장 한쪽에 쌓여 있던, 겨울을 나기 위해 반듯하게 재단된 네모 장작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무너진 장작더미에 다리가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아이들이 담벼락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세우자고 가장 앞장섰던 ‘곧은 자 아저씨’였습니다.
“으악!”
아저씨의 고통스러운 비명에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제멋대로 무너져 내린 장작더미의 모습은 너무나 ‘네모답지 않은’ 혼돈의 풍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멀찍이 서서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잿빛 속삭임마저도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모든 비웃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루미니짜가 움직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그토록 미워했던 아저씨에 대한 미움이나, ‘그것 보라’는 고소함 따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이의 눈에는 오직,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한 사람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곧은 자 아저씨에게 달려갔습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아이는 작은 손으로 무거운 장작을 밀어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미니짜는 뒤를 돌아보며, 겁에 질려 웅성거리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여러분! 어서요! 아저씨가 다쳤어요! 우리 힘을 합쳐야 해요!”
그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오직 도와야 한다는 맑고 단단한 마음만이 담겨 있었습니다. 루미니짜의 용기에, 레오가 가장 먼저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용기를 내어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힘을 합쳐 작은 장작들을 하나씩 치워나갔습니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숨을 죽였습니다. 자신들이 ‘병들었다’고 손가락질하던 바로 그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이끌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조그맣고 이타적인 모습 앞에서, 어른들의 마음속을 채웠던 단단한 편견과 두려움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침내 한 어른이 침묵을 깨고 장작더미로 달려들었고, 곧 모든 어른들이 힘을 합쳐 가장 무거운 통나무를 들어 올렸습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곧은 자 아저씨는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아저씨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루미니짜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루미니짜를 향한 경멸이 없었습니다. 대신, 이해할 수 없다는 깊은 혼란과, 미안함, 그리고 아주 작은 고마움의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숲에서 가져온 부드러운 이끼로 아저씨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습니다.
어떤 가르침도, 어떤 논쟁도 아니었습니다. 비웃음 속에서 피어난 단 하나의 따뜻한 행동. 그 연민의 행동이야말로, 골짜기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가장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그날, 골짜기 사람들은 처음으로 네모반듯한 대형이 아닌, 어그러지고 불완전하지만 서로를 돕기 위한 둥근 원을 만들었습니다.
25장: 잿빛 속삭임과의 마지막 대화
곧은 자 아저씨를 구한 사건 이후, 네모네모 골짜기에는 조용하지만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루미니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이와 아이가 그린 담벼락의 그림을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지요. 아이들은 이제 대놓고 루미니짜의 노래를 흥얼거렸고, 자신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신기한 듯 발을 구르기도 했습니다.
완벽했던 네모의 질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골짜기의 불안이 가장 짙게 깔린 그 밤, 루미니짜는 다시 담벼락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의 등 뒤에서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공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희미한 잿빛 안개가 모여들어, 점차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잿빛 속삭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목소리로만 존재했던 그 힘이,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마침내 루미니짜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루미니짜…”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깊은 슬픔과 원망, 그리고 절박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아라. 너는 이 완벽한 질서를 망가뜨렸다. 사람들은 이제 혼란스러워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다. 이것이 네가 원했던 세상이더냐?”
잿빛 속삭임은 위협하는 대신, 애원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평화를 주었다. 정답을 줌으로써 선택의 고통을 없애주었고,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들어 외로움을 없애주었지. 나는 그들을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단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을 파괴하려 하는 것이냐.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렴.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네모의 질서로 돌아와다오.”
루미니짜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 앞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잿빛 형체를 마주 보았습니다. 마음 할머니와의 시간을 통해, 루미니짜는 이제 모든 것의 겉모습 너머, 그 본질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에 비친 잿빛 속삭임은 사악한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골짜기 사람들이 마음속에 쌓아온 ‘두려움’ 그 자체의 모습이었습니다. 변화가 두려워서,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버거워서 꽁꽁 뭉쳐버린, 거대하고 슬픈 두려움의 영혼이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분노 대신, 아주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아이는 잿빛 속삭임을 향해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은 나쁜 존재가 아니었군요. 당신은… 그냥, 아주 많이 무서웠던 거군요.”
그 말에 잿빛 형체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루미니짜는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를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이 준 안전은 새장 속의 안전이었어요. 새장 안의 새는 폭풍우를 피할 수는 있지만, 하늘을 나는 법은 영원히 배울 수 없어요.”
“당신은 ‘다름’이 병이라고 가르쳤지만, 그건 틀렸어요. ‘다름’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당신은 그림자를 두려워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림자가 있어야 우리는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는 걸요.”
루미니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보호가 필요 없어요. 우리는 넘어지고 다칠지도 몰라요.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르죠.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음속에 자신만의 나침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만… 그만하거라!”
잿빛 속삭임이 고통스럽게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힘을 잃고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힘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믿을 때만 유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루미니짜는 잿빛 속삭임의 진짜 얼굴, 즉 두려움을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 심지어는 가엾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루미니짜는 마지막으로, 마치 겁에 질린 아이를 달래듯 말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두려워하는 대신 용기를 내기로 선택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잿빛 형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안개가 걷히듯, 바람에 사라지듯, 골짜기를 수백 년간 지배해왔던 거대한 두려움은 마침내 힘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너희들끼리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그것이 잿빛 속삭임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명령이 아닌,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희미한 메아리였습니다.
루미니짜는 사라진 허공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서로를 일으켜주면 돼요.”
잿빛 속삭임이 사라지자, 골짜기를 짓누르던 무겁고 답답한 공기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졌습니다. 멀리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시원하고 자유로운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습니다.
마지막 싸움은 끝났습니다. 칼과 방패가 아닌, 이해와 연민으로 거둔 조용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네모네모 골짜기에는, 새로운 새벽이 밝아올 준비가 되었습니다.
제6부: 새로운 새벽, 천 가지 모양 골짜기
26장: 첫 번째 균열, 두 번째 균열
다음 날 아침, 네모네모 골짜기는 아주 낯선 고요함 속에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언제나 머릿속을 맴돌며 ‘일어나라’, ‘반듯하게 걸어라’ 하고 명령하던 잿빛 속삭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아무런 지시도 없는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불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변화는 아이들에게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레오는 아침을 먹자마자 시냇가로 달려갔습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아이는 어젯밤 루미니짜의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내 보았습니다. ‘네 마음은 무엇을 보고 있니?’
레오는 흐르는 시냇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습니다. 물결에 일렁이는 얼굴 위로, 답답한 네모 안경이 보였습니다. 아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안경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레오는 보았습니다. 물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을. 동그란 눈동자, 부드러운 곡선의 뺨, 그리고 놀라움에 동그래진 입 모양까지. 레오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이 네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동그란 파문이 되어 시냇물 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이 골짜기에 생긴 ‘첫 번째 균열’이었습니다.
레오의 웃음소리는 전염병처럼 다른 아이들에게로 퍼져나갔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안경을 살짝 벗어보거나, 틈새로 세상을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있는 동그란 손톱을 발견하고 신기해했고, 어떤 아이는 하늘의 해가 사실은 눈부신 원 모양이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물론, 갑자기 마주한 어지러운 세상이 무서워 황급히 안경을 다시 고쳐 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안경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수많은 새로운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잿빛 속삭임이 사라진 지금, 아이들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변화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다리를 다친 곧은 자 아저씨는 자신의 네모난 방 안에서 꼼짝없이 누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날 오후, 자신을 구해 주었던 루미니짜의 작은 얼굴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끌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을 구해준 그 맑은 눈빛.
아저씨는 평생을 바쳐 지켜온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반듯함’과 ‘질서’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혼돈의 순간, 자신을 구해준 것은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네모 안경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것은 골짜기에서 가장 두껍고, 가장 완고하며, 가장 반듯한 안경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자신의 눈이자, 자부심이자,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안경. 아저씨는 안경을 통해 자신의 굳은살 박인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안경이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저씨는 옆에 있던 작은 망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경알 한가운데를, 아주 가볍게, ‘톡’ 하고 내리쳤습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안경알에 거미줄처럼 아름다운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골짜기에 생긴, 가장 깊고도 중요한 ‘두 번째 균열’이었습니다.
아저씨는 금이 간 안경을 다시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안경의 균열 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의 하얀 벽 위에 자그마한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일곱 빛깔의 곡선.
곧은 자 아저씨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아주 희미하게 열리고, 거칠고 주름진 뺨 위로 아주 동그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골짜기를 지탱하던 가장 단단한 기둥이, 스스로의 의지로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27장: 길 잃은 어른들
잿빛 속삭임이 사라진 다음 날 아침, 네모네모 골짜기에는 아주 이상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평화로운 고요함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길로 걸어야 할지, 심지어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조차 알려주는 목소리가 사라져 버린, 길 잃은 자들의 막막한 침묵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그들을 재촉하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못해 식탁에 앉았지만, 무슨 빵을 먹어야 할지 몰라 서로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낯선 자유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몇몇 어른들은 낡은 규칙을 되살리려 애썼습니다.
“모두들! 오늘은 화요일이니 마땅히 ‘직선으로 걷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 아저씨가 광장에서 목청을 높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잿빛 속삭임이 가졌던 힘이 실려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못해 광장으로 나와 줄을 섰지만, 그들의 대열은 예전처럼 완벽한 직선이 아니라 어딘가 삐뚤빼뚤했습니다.
어른들이 이처럼 불안한 질서를 간신히 흉내 내고 있는 동안, 골짜기의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소리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이들의 웃음소리였습니다.
레오와 아이들은 더 이상 광장의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냇가에 모여, 동그란 조약돌을 물 위로 던지는 ‘물수제비’ 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동그란 돌멩이가 물 위를 통통 튕겨나가며 만들어내는 동그란 파문들.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또 다른 아이들은 담벼락 아래 모여, 이제는 제법 길어진 자신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잿빛 속삭임이 그토록 위험하다고 경고했던 ‘혼돈’과 ‘어지러움’이,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억지로 걷던 직선의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저 웃음소리. 저렇게 순수하고 자유로운 웃음소리를, 자신들은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자신들의 아이가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울이 되어, 어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비추었습니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은 지혜롭고 질서 있는 어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즐겁게 웃는 법마저 잊어버린, 겁 많고 불쌍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똑같은 질문이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전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즐거움을 모른 채 살아왔던 걸까?
어른들의 단단했던 확신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잿빛 속삭임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공허함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심어준 작은 희망이 만나 만들어낸, 아주 소중한 균열이었습니다. 이제 골짜기는, 새로운 변화의 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28장: 통일성이 아닌 조화 속의 아름다움
곧은 자 아저씨가 스스로 자신의 안경에 균열을 낸 사건은, 골짜기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문이 되었습니다. 가장 완고했던 기둥이 흔들리자, 다른 어른들도 더 이상 두려움의 벽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골짜기에는 어색하지만 설레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평생 자신의 일부였던 네모 안경을 벗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맨눈으로 세상을 마주한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제멋대로이며, 예측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황급히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자신의 네모난 집 안으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골짜기는 한동안 아주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네모난 집 벽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그렸고, 그 옆집 사람은 파란색 세모를 그렸습니다. 빵집 아저씨는 네모 빵 대신 울퉁불퉁한 별 모양 빵을 굽기 시작했고, 악사는 한 음으로만 연주하던 노래 대신 시끄럽지만 유쾌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지요.
완벽했던 질서는 사라지고, 서툴고 어지러운 자유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다툼이 생겨났습니다.
“당신 집의 저 붉은색은 너무 눈이 아프오! 우리 집의 차분한 파란색과 어울리지 않아!”
“별 모양 빵이라니, 저건 빵이 아니야! 근본 없는 모양이라고!”
사람들은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모든 것을 다시 예전처럼 똑같은 잿빛으로 돌려놓는 게 낫겠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그때, 루미니짜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아이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쓰던 물감 통을 들고 와, 싸우고 있는 두 아저씨 사이의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루미니짜는 먼저 강렬한 붉은색을 칠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차분한 파란색을 칠했습니다. 두 색깔은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 루미니짜는 두 색깔 사이에, 숲에서 가져온 이끼로 만든 부드러운 초록색을 칠했습니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강렬하던 붉은색은 초록색 옆에서 따뜻한 노을빛처럼 보였고, 차갑던 파란색은 깊은 숲속 호수처럼 보였습니다. 세 가지 색은 서로를 지우는 대신, 각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주며 하나의 멋진 그림이 되었습니다.
“보세요.”
루미니짜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색이 될 필요는 없어요. 각자의 색깔을 뽐내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존중해주면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는걸요.”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그 작은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골짜기 사람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지혜였습니다.
그날 이후, 골짜기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모양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서로의 모양이 더 아름답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집과 파란 집 사이에는 아름다운 초록색 정원이 생겨났습니다. 별 모양 빵과 네모 빵은 빵집 진열대 위에서 나란히 놓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선택의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골짜기의 악사는 이제 혼자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는 서툰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풍성한 합주를 만들어냈습니다.
골짜기는 더 이상 조용하고 반듯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시끌벅적하고, 알록달록하며, 때로는 실수투성이였지만, 그 어떤 때보다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골짜기를 ‘네모네모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웃으며, 자신들의 새로운 집을 ‘천 가지 모양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루미니짜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습니다. 아이는 골짜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맨 처음 용기의 색깔을 보여준 작은 등불로 남았습니다.
완벽한 질서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서로를 향한 따뜻한 존중과 이해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루미니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짜 세상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천 가지 모양 골짜기의 삶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험에는 어려움도 따랐습니다. 어느 날 밤, 거센 비가 내린 후 골짜기의 가장 큰 시냇물이 넘쳐, 밭으로 물을 대던 오래된 네모 수로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골짜기 아래쪽에 있는 밭들이 바짝바짝 말라가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은 광장에 모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잿빛 속삭임이 “모두 동쪽으로 가서 돌을 세 개씩 가져와라” 와 같은 명확한 지시를 내려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골짜기를 지배하는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불안해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계획을 세워야 해!”
“곧은 자 아저씨,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오!”
어떤 사람들은 익숙한 질서를 그리워하며 외쳤습니다. 몇몇은 루미니짜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새로운 지혜를 알려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지요.
하지만 루미니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것을 해결할 정답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믿어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손을 합치면, 분명 가장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루미니짜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평생 네모 빵만 굽던 빵집 아저씨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습니다.
“저는… 빵을 만들려고 매일 땅을 파봐서 아는데, 저쪽 땅은 물길을 내기에는 너무 무르고, 이쪽 땅은 단단해서 물이 잘 흐를 겁니다. 아마… 이렇게 구불구불하게 길을 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땅 위에 부드러운 곡선의 물길을 그려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힘센 나무꾼 아저씨가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길 위에 있는 나무뿌리들을 치우겠소!”
날렵한 아이들은 “우리는 작은 손으로 시냇가의 동그란 조약돌들을 날라 와서 물길 옆을 단단하게 만들게요!” 하고 외쳤습니다.
악사는 신나는 연주를 시작했고, 할머니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곧은 자 아저씨는 이제 굽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구불구불한 새 물길이 작은 언덕을 넘어갈 수 있도록, 튼튼하고 아름다운 아치형 다리를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골짜기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하나의 몸처럼,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은 네모네모 골짜기의 질서정연한 행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시끄럽게 다투기도 하고, 서툰 솜씨에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곳에는 웃음과 활기, 그리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믿음이 가득했습니다.
며칠 후, 골짜기에는 아름다운 곡선의 새로운 물길이 생겨났습니다. 그 물길은 억지로 땅을 거스르지 않고, 가장 자연스러운 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며 모든 밭을 골고루 적셔주었습니다. 예전의 네모 수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물길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물길 옆에 모여 자신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힘은 단 하나의 강력한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진정한 힘은, 빵 굽는 사람의 지혜와 나무꾼의 힘, 아이들의 작은 손길과 악사의 흥겨운 노래, 그리고 곧은 자 아저씨의 경험이 각자의 모양을 존중하며 하나로 어우러질 때 나온다는 것을요.
그들은 더 이상 지시를 내려줄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각자가 서로에게,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헌신하는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냇물은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강제 없는 협력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의 노래였습니다.
29장: 끝나지 않는 여정, 매일매일 새로운 모양을 찾아
그 후로 많은 계절이 흘렀습니다. 네모네모 골짜기는 이제 옛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골짜기는 이제 ‘천 가지 모양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 이름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났습니다.
어떤 집은 동그란 창문을 냈고, 어떤 집은 지붕을 뾰족한 세모 모양으로 얹었으며, 또 어떤 집은 아예 별 모양으로 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길들은 더 이상 반듯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는 대로, 시냇물처럼 자유롭게 구불거리며 온 마을을 즐겁게 이어주었지요.
골짜기에는 새로운 축제가 생겨났습니다. 바로 ‘모양 자랑 축제’였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해 동안 발견하거나 만들어낸 새로운 모양을 가지고 광장에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빵집 아저씨는 구름 모양 빵을 구워왔고, 악사는 바람 소리를 닮은 새로운 노래를 연주했으며, 곧은 자 아저씨는 이제 골짜기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어, 금이 간 자신의 네모 안경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다름’의 소중함에 대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골짜기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때로 다투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했으며,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정답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질문하고, 함께 길을 찾아 나섰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루미니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골짜기의 여왕이나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루미니짜는 여전히 루미니짜였습니다.
아이는 종종 숲과 골짜기의 경계에 있는 담벼락, 이제는 골짜기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된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기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모양들을 찾아내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정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아이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기 위해 루미니짜를 찾아왔습니다. 아이의 고요한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답을 찾을 용기를 주는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늦은 오후, 루미니짜가 그림 앞에 앉아 있을 때, 한 작은 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숲 쪽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반짝이는 새 네모 안경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 산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네모네모 골짜기에서 용기를 내어 도망쳐온 아이였습니다.
골짜기 사람들은 아이를 둘러쌌지만, 아무도 아이의 안경을 벗기려 하거나 자신들의 진실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따뜻한 빵과 수프를 내어주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채롭고 활기찬 삶의 모습을, 그저 조용히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이제 골짜기 사람 모두가 작은 등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루미니짜는 겁에 질린 아이의 곁에 다가가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자신의 첫 번째 보물이었던 동그랗고 매끄러운 조약돌을 꺼내 아이의 작은 손에 꼭 쥐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천 가지 모양 골짜기는 완성된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를, 살아 숨 쉬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멈추고, 대신 매일매일 더 자유롭고, 더 다정하며, 더 자기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영원한 여행자들이었습니다.
루미니짜의 여정도, 그리고 골짜기의 여정도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삶이라는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함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춤을 추어가는, 눈부시고도 끝나지 않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춤을 추기로 결심하는 모든 이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새벽은 언제나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네모네모 골짜기’가 하나씩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정해준 ‘네모 안경’을 쓰고, ‘정상’이라는 이름의 반듯한 길을 따라 걸어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나 자신의 진짜 모양과 색깔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라고,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고 속삭이는 ‘잿빛 속삭임’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동화는 바로 그 잿빛 속삭임에 용감하게 “아니야!”라고 외친 한 작은 아이, ‘루미니짜’의 이야기입니다. 루미니짜의 여정은 단순히 집을 떠나 숲을 헤매는 모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들려주는 정답 대신, 자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짜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위대한 내면의 탐험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겪는 수많은 마음의 혼란과 아픔을 보듬어주고 싶었습니다. 남들과 달라 외로웠던 마음, 정답을 강요하는 세상이 답답했던 마음,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 모든 순간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루미니짜가 숲속에서 만나는 ‘유혹하는 진실들’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편견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네모는 나쁘고 동그라미는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골짜기가 ‘천 가지 모양 골짜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이 이야기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똑같은 모양이 되는 획일적인 곳이 아닙니다. 네모와 동그라미, 세모와 별 모양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채 하나의 아름다운 숲을 이루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세상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루미니짜들이,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안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벗어 던질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만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모양과 색깔을 마음껏 피워내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당신의 모양은, 그 어떤 모양이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