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태양 숭배와 엄격한 도덕률이 지배하던 세계를 지나, 우리의 영혼은 이제 안개와 이성이 뒤섞인 새로운 풍경,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상상했던 지하왕국으로 들어섭니다. 이곳은 이집트의 두아트 (Duat)처럼 명확한 구원의 길이 약속된 곳도, 메소포타미아의 이르칼라 (Irkalla)처럼 모든 이에게 공평한 절망이 기다리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명계, 즉 하데스 (Hades)는 그들의 철학처럼 질서정연하게 구획되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하고도 서글픈 그림자의 왕국이었습니다. 이 왕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영혼의 상태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강이 흐릅니다. 슬픔의 강 아케론 (Acheron), 비탄의 강 코키투스 (Cocytus), 맹세의 강 스틱스 (Styx), 불의 강 플레게톤 (Phlegethon), 그리고 망각의 강 레테 (Lethe). 이 강들을 건넌 영혼은, 자신이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영원한 거처로 향하게 됩니다.
먼저, 소수의 선택받은 영혼을 위한 축복의 땅, 엘리시온 (Elysion)의 풍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축복받은 자들의 들판’이라 불리는 이곳은, 세상의 서쪽 끝, 오케아노스 (Oceanos) 강의 물결이 닿는 곳에 위치한 낙원입니다. 이곳에는 겨울의 한기도, 여름의 폭염도 없이 언제나 부드러운 서풍 제피로스 (Zephyrus)만이 감미로운 향기를 실어 나릅니다. 대지는 저절로 꿀처럼 달콤한 열매를 맺고, 황금빛 꽃들이 만발한 초원에서는 영웅들의 영혼이 슬픔도 고통도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처럼 말을 달리거나, 리라를 연주하고, 시를 읊으며 고귀한 여가를 즐깁니다. 이곳은 신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위대한 영웅이나, 지극히 의로운 삶을 살아 신들의 총애를 받은 자, 혹은 엘레우시스 (Eleusis) 비교(秘敎)와 같은 신비주의 의식을 통해 구원의 비밀을 전수받은 입문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영광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빛나는 낙원의 정반대편, 하데스 왕국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늘이 땅에서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더 깊은 나락, 타르타로스 (Tartarus)가 존재합니다. 그곳은 청동으로 된 성벽이 삼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불의 강 플레게톤 (Phlegethon)이 용암처럼 들끓으며 흐르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이곳은 본래 올림포스 신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티탄 (Titan) 신족을 가두는 우주적인 감옥이었지만, 동시에 신들의 질서를 기만하고 거역한 인간들의 영혼이 영원한 고통을 겪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형벌은 죄에 대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귀결이라는 점에서 그 서늘한 합리성이 돋보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요리하여 신들의 전지전능함을 시험했던 탄탈로스 (Tantalus)는, 영원히 목전의 음식과 물을 탐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굶주림과 갈증의 형벌을 받습니다. 이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이 그 자체로 형벌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형이상학적 응보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인간의 교활함과 오만이 빚어낸 가장 유명한 비극의 주인공, 코린토스 (Corinth)의 왕 시시포스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로웠지만, 그 지혜를 신들을 속이고 운명을 거스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하고, 심지어 죽음의 신 타나토스 (Thanatos)마저도 쇠사슬로 묶어버려, 한동안 지상에 그 누구도 죽지 않는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나중에 명계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 (Persephone)를 속여, 자신의 아내가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지 않았다는 핑계로 잠시 지상으로 돌아갈 허락을 얻어냅니다. 그러나 지상의 태양 빛을 다시 맛본 그는, 약속을 어기고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신들을 조롱했습니다.
그가 타르타로스에서 받은 형벌은 바로 이 모든 기만의 행위에 대한 완벽한 철학적 답변이었습니다. 그는 정상에 닿으면 반드시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거대한 바위를, 영원히 산꼭대기를 향해 밀어 올려야만 합니다. 이 형벌의 본질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 행위의 ‘무의미함’에 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신들의 질서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의 노동이 완벽하게 무의미해지는 형벌을 영원히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헛된 노동은, 신들을 향한 그의 헛된 기만에 대한 서늘하고도 논리적인 거울상입니다.
이처럼 타르타로스의 풍경은, 그리스인들이 죽음 너머의 세계마저도 자신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모든 사건에 합리적인 원인과 결과를 부여하고자 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찬란한 축복과 끔찍한 형벌은, 모두 소수의 예외적인 영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들의 사랑을 받지도, 신들을 향해 끔찍한 죄를 짓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영혼들이 도착하는 곳은, 빛도 어둠도 아닌 영원한 황혼의 땅, 바로 잿빛 아스포델 (asphodel) 꽃이 끝없이 피어있는 희미한 초원이었습니다.
이곳은 엘리시온처럼 축복받은 곳도, 타르타로스처럼 고통스러운 곳도 아닌, 보상도 형벌도 없는 영원한 권태와 무기력만이 존재하는 중립적인 공간입니다. 생전에 특출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영혼들은 이곳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박쥐처럼 끼룩거리며 의미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어쩌면 그리스인들은 대부분의 삶이란 영웅적이거나 사악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는 통찰을 사후 세계에 투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의 명계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질서’와 ‘결과’라는 뚜렷한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곳의 법칙은 선과 악에 대한 종교적 계율이라기보다는, 한 존재의 삶의 방식이 빚어내는 논리적인 결과에 가깝습니다. 영웅적인 삶은 영웅적인 안식을, 평범한 삶은 평범한 망각을, 그리고 신성을 모독한 삶은 영원한 고통을 낳는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서늘한 인과율이 이 그림자의 왕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데스의 지형도는, 혼돈처럼 보이는 죽음의 세계마저도 자신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분류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위대한 정신이 그려낸 영혼의 지도라 하겠습니다.
제2절: 카론(Charon)과 케르베로스(Cerberus),
명계의 문턱을 지키는 자들
하데스 (Hades)라는 거대한 왕국의 음울한 지형도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왕국의 문턱, 즉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가르는 서늘한 경계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문턱에는 문지기가 있듯이, 이 비정한 왕국의 입구 또한 두 명의 불멸하는 파수꾼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사건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전환의 과정을 통제하는 우주적 법칙의 대리인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뱃사공 카론 (Charon)과 수문장 케르베로스 (Cerberus)입니다.
망자의 영혼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은 슬픔의 강 아케론 (Acheron)의 축축하고 음산한 강둑입니다. 그곳에는 지상에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묻히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강 건너편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강둑에서, 남루하고 지저분한 옷을 걸친 늙은 뱃사공 카론이 삐걱거리는 작은 배 위에서 묵묵히 망자들을 기다립니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날카롭고, 성정은 까다롭고 무뚝뚝하여 그 어떤 애원이나 슬픔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의 세계가 지닌 비정함과 무심함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명계의 첫 번째 행정관입니다.
카론의 배에 오르는 데에는 단 하나의,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뱃삯으로 은화 한 닢, 즉 오볼로스 (obolos)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이 뱃삯을 낼 수 있도록 그 입 안에 작은 동전 하나를 넣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오볼로스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망자가 지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으며, 살아남은 이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합당한 장례를 치렀다는 마지막 증표였습니다. 즉, 죽음 너머의 세계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은, 살아생전 쌓았던 부나 권력이 아니라, 이승의 관계 속에서 맺었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는지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동전 한 닢은 살아생전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지에 대한 공동체의 마지막 증언과도 같았습니다. 평생에 걸쳐 주변에 덕을 베풀고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슬퍼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정성껏 보살펴 줄 것입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기꺼이 그의 입에 동전을 넣어주며, 그가 저승의 강을 무사히 건너기를 함께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 동전은 그가 남긴 따뜻한 공동체의 기억이 빚어낸 마지막 선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살아생전 이기적이고 포악하여 모든 이에게 상처만 주었던 사람의 주검 곁에는 아무도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차가운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 누구도 그의 입에 동전을 넣어주며 애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카론에게 지불하는 뱃삯은, 지상의 부가 아닌, 관계의 부유함이었던 셈입니다.
이 뱃삯을 내지 못하는 영혼, 즉 제대로 묻히지 못한 영혼들은 카론의 배에 오를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강둑을 따라 1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하염없이 헤매야만 하며, 그 기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있는 자비가 베풀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질서와 장례 의식이 한 개인의 영혼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산 자들을 향한 엄숙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카론은 이처럼 지상의 의례가 명계의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두 세계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입니다.
슬픔의 강을 건너 마침내 명계의 문 앞에 다다르면, 영혼은 두 번째 파수꾼이자 비교할 수 없는 공포의 현신인 케르베로스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머리가 셋 달린 거대한 지옥의 사냥개로, 등에서는 수많은 뱀들이 꿈틀거리고, 꼬리마저도 살아있는 독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명계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 누구도 감히 그 앞을 함부로 지나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케르베로스의 임무는 이중적입니다. 그는 허락받지 않은 산 자가 명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한번 들어온 죽은 자가 결코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상태의 절대적인 불가역성을 상징합니다. 카론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이 죽음으로의 ‘과정’이라면, 케르베로스의 앞을 지나는 것은 죽음이라는 ‘상태’로 완전히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세 개의 목구멍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을 삼켜버리는 듯하며,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영혼은 더 이상 지상의 존재가 아닌, 하데스 왕국의 영원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몇몇 위대한 영웅과 시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 무시무시한 수문장을 통과했습니다. 영웅 헤라클레스 (Heracles)는 그의 열두 번째 과업으로서, 오직 자신의 초인적인 힘만으로 케르베로스를 제압하여 산 채로 지상에 끌고 나옴으로써 죽음의 공포 그 자체를 정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설적인 시인 오르페우스 (Orpheus)는 무력이 아닌, 그의 리라 연주와 슬픈 노래, 즉 예술의 힘으로 이 흉포한 야수를 잠재웠습니다. 이는 가장 거친 본능마저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로마의 영웅 아이네이아스 (Aeneas)는 예언자 시빌라 (Sibyl)의 가르침에 따라, 꿀과 약물을 섞어 만든 케이크를 던져주어 케르베로스를 잠재웁니다. 이는 지혜와 계략, 그리고 신성한 의례의 힘을 통해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카론과 케르베로스의 존재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카론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함을, 즉 ‘관계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케르베로스는 우리가 존재의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할 힘, 혹은 지혜, 혹은 예술적 영감을 지녀야 함을, 즉 ‘내면의 힘’을 요구합니다.
이 두 명의 파수꾼은 하데스라는 ‘이성의 지하왕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감정 없는 관료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지키는 법칙 덕분에 삶과 죽음의 경계는 혼탁해지지 않고 명확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망자의 영혼이 새로운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서늘하고도 엄숙한 통과 의례의 집행관인 것입니다.
제3절: 엘리시온 (Elysian Fields)과 아스포델 초원,
영혼의 차등적 운명
카론 (Charon)의 배를 타고 슬픔의 강을 건너고 케르베로스 (Cerberus)의 흉포한 시선을 통과한 영혼은, 마침내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곳에는 제우스 (Zeus)의 아들들이자 명계의 세 명의 위대한 판관, 즉 미노스 (Minos), 라다만투스 (Rhadamanthus), 아이아코스 (Aeacus)가 앉아 망자의 전 생애를 심판합니다. 이곳에서 그리스인들의 이성적 정신은, 죽음 이후의 운명이 모든 이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하나의 혁명적인 사상을 도입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지녔던 무게와 색채에 따라, 그 영혼이 거할 영원한 집이 결정된다는 ‘차등적 운명’의 개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질서정연한 분류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죽음이라는 혼돈에 부여하고자 했던 합리성의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혼, 즉 살아생전 영웅적이지도 지독하게 사악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잿빛의 광활한 들판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이 바로 아스포델 (asphodel)이라 불리는, 유령 같은 창백한 꽃들이 끝없이 피어있는 ‘아스포델 초원 (Asphodel Meadows)’입니다. 이곳의 풍경은 끔찍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無)의 슬픔을 자아냅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뜨지 않아 영원한 황혼이 내려앉아 있고, 공기 중에는 그 어떤 소리나 향기도 없이 오직 침묵만이 감돕니다.
이곳의 영혼들은 더 이상 지상에서의 생생한 기억이나 뜨거운 열정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혹은 동굴 속의 박쥐처럼 의미 없이 끼룩거리며 희미한 들판을 부유할 뿐입니다. 그들은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없는 공허한 그림자, 즉 스키아 (skia) 혹은 에이돌론 (eidolon)이 되어버립니다. 호메로스 (Homeros)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Odysseia』에서, 영웅 오디세우스 (Odysseus)가 명계로 내려가 만난 아킬레우스 (Achilles)의 모습은 이 아스포델 초원의 비극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망령은, 명계의 왕이 된 자신의 처지를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오디세우스에게 이렇게 탄식합니다.
“죽음에 대해 나를 위로하려 들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디세우스여.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농부의 품팔이꾼이 될지언정, 이 모든 죽은 자들의 왕이 되기는 원치 않소.”
이 한마디는 그리스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비관을 그 어떤 철학서보다도 더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어떤 영광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감각과 의식, 그리고 태양 아래에서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는 가장 큰 상실이었습니다. 아스포델 초원은 바로 이 ‘상실’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끝없는 권태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잿빛 들판 저 너머, 세상의 서쪽 끝에는 선택받은 소수의 영혼을 위한 낙원이 존재합니다. 그곳이 바로 ‘엘리시온 (Elysion)’, 즉 ‘축복받은 자들의 들판’입니다. 이곳은 아스포델 초원의 음울함과는 정반대의 풍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서풍 제피로스 (Zephyrus)가 언제나 감미로운 향기를 실어 나르고, 대지는 저절로 꿀처럼 달콤한 열매를 맺으며, 태양은 결코 지는 법이 없습니다. 황금빛 꽃들이 만발한 초원에서는 영웅들의 영혼이 지상에서처럼 운동 경기를 하거나, 리라를 연주하고, 영원한 연회를 즐깁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웅들, 신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 그리고 지극히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곳에 올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전승에서는 크로노스 (Cronus)가 이곳을 다스린다고도 하며, 이곳의 영혼들은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화와 행복 속에서 영원한 삶을 누립니다. 엘리시온은 그리스인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죽음 너머까지 연장된, 그들의 현세주의적 가치관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꿈의 공간이었습니다.
아스포델 초원과 엘리시온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에게 삶의 ‘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체계는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색채와 무게를 지녔는가에 따라 그 영혼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심판처럼 엄격한 도덕법에 근거하기보다는,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통해 얼마나 영웅적인 탁월함 (aretē, 아레테)을 성취하고 영원한 명성 (kleos, 클레오스)을 얻었는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듯합니다.
그리스인들의 명계는,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이성적 질서가 죽음 너머까지 확장된 세계였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영혼이 마땅히 가야 할 자신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대부분의 영혼에게 약속한 것은 축복이 아닌, 영원한 상실과 권태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이 땅 위의 삶, 단 한 번뿐인 이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의 순간을 사랑하고 찬미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스포델 초원을 하염없이 떠도는 저 수많은 그림자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 선물인지를 침묵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제4절: 플라톤의 에르 (Er) 신화, 윤회와 선택의 철학적 풍경
그리스인들이 상상했던 그림자 가득한 명계의 풍경 속으로, 이제 한 위대한 철학자의 이성 (Logos, 로고스)이 빛을 던집니다. 전통적인 신화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운명과 신들의 변덕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그렸다면, 철학자 플라톤 (Plato)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국가, Politeia』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르 (Er)의 신화’를 통해, 그곳을 철저히 윤리적인 인과법과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이 지배하는 이성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그의 장대한 철학적 논증을 완성하는, 영혼을 위한 하나의 성스러운 지도입니다.
이야기는 팜필리아 (Pamphylia) 출신의 용감한 전사, 에르의 증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다른 망자들과 함께 저승으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본 모든 것을 기록하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관찰자였습니다. 그의 여정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영적인 여행’ 혹은 ‘탈혼 (ecstasis)’의 원형과도 같으며, 그의 목격담은 철학적 진리에 신화적 권위와 생생함을 불어넣습니다.
에르가 도착한 곳은 하늘과 땅으로 통하는 네 개의 문이 있는 신비로운 초원이었습니다. 의로운 영혼들은 하늘의 문으로 올라가 천 년 동안의 축복을 누리고, 불의한 영혼들은 땅의 문으로 내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열 배에 달하는 고통을 천 년 동안 겪은 뒤, 다시 이 초원으로 모여듭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다음 생을 선택하기 위한 우주적 드라마의 관객이자 주인공이 됩니다.
에르는 그곳에서 우주의 중심을 관통하며 회전하는 거대한 ‘필연의 여신 아난케 (Ananke)의 축 (Spindle of Necessity)’을 목격합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이 우주축의 주위에는 운명의 여신들 (Moirai, 모이라이)이 옥좌에 앉아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과거의 여신 라케시스 (Lachesis)는, 영혼들에게 다음 생의 선택 순서를 결정할 제비와 온갖 종류의 삶의 견본들을 던져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어서 현재의 여신 클로토 (Clotho)가, 각 영혼이 선택한 운명의 실을 잣고 돌리며 그것을 확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의 여신 아트로포스 (Atropos)가, 한번 잣아진 실을 가차 없이 잘라내어, 그 누구도 자신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장엄한 우주의 무대 위에서, 한 예언자가 영혼들을 향해 외칩니다. 이것은 에르 신화의 심장이자, 플라톤 철학의 정수가 담긴 선언입니다.
“너희의 수호신(daimon, 다이몬)이 너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너희의 수호신을 선택할 것이다. 덕 (arete, 아레테)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각자가 덕을 존중하거나 무시하는 만큼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가지게 될 뿐이다. 책임은 선택하는 자에게 있으며, 신은 책임이 없다 (aitia helomenou, theos d' anaitios).”
이 한마디는 인간을 신들의 꼭두각시에서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주체로 끌어올린, 서양 정신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거나 비참한 것은, 신의 변덕이나 운명의 장난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영혼이 과거 어느 시점에 내렸던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여신 라케시스가 던져준 삶의 견본들에는 온갖 종류의 삶이 있었습니다. 참주의 삶, 부자의 삶, 가난한 예술가의 삶, 짐승의 삶까지 무한히 다양했습니다. 영혼들은 제비를 뽑은 순서대로 나아가 자신이 살고 싶은 다음 생을 선택합니다. 바로 이 선택의 순간에, 각 영혼의 지혜와 어리석음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제비를 가장 먼저 뽑은 한 영혼은, 전생에 오직 습관에 따라 덕을 행했을 뿐 철학적 지혜가 없었기에, 겉보기에 화려하고 권력 있는 참주의 삶을 성급하게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삶의 이면에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어야 하는 끔찍한 운명이 숨겨져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반면, 마지막 순서로 선택하게 된 오디세우스 (Odysseus)의 영혼은, 전생의 온갖 고난과 명예욕에 지쳐 있었기에, 모든 야망에서 벗어난 한 평범한 시민의 소박한 삶을 기쁘게 선택합니다.
이 선택의 드라마는 플라톤의 핵심적인 주장을 보여줍니다.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지 선량한 의지나 습관만으로는 부족하며,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삶인지 분별할 수 있는 철학적 지혜(philosophia, 필로소피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다음 생의 행복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은, 이 지상의 삶 동안 영혼을 훈련하고 진리를 탐구하여,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조화를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뿐입니다.
모든 영혼이 자신의 다음 생을 선택하고 운명의 실이 감기면, 그들은 ‘망각의 평원’으로 인도되어 ‘무심의 강’ 레테 (Lethe)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 물을 마시면 과거의 모든 기억, 즉 천상에서의 축복과 지하에서의 고통,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지혜로운 자는 적당량의 물만을 마셔 진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씨앗을 남겨두지만, 어리석은 자는 탐욕스럽게 물을 마셔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기억의 상실은 우리가 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플라톤의 에르 신화는 전통적인 명계의 개념에 한 차원 높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이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 선택의 질은 오직 우리의 지혜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윤회는 무의미한 순환이 아니라, 매 생애를 통해 영혼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지혜를 길러, 마침내 이 탄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하나의 장엄한 성장 과정이 됩니다. 플라톤은 이 ‘있을 법한 이야기 (eikos muthos)’를 통해, 우리에게 정의로운 삶과 철학적 탐구만이 영원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5절: 시빌라 (Sibyl)의 안내,
아이네이아스 (Aeneas)의 로마 건국 예언
플라톤 (Plato)이 개인 영혼의 윤리적 선택을 비추는 거울로서 명계를 재창조했다면,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 (Virgil)는 그 지하왕국을 한 위대한 제국의 장엄한 미래가 예언되는 신성한 무대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d』에서 주인공 아이네이아스 (Aeneas)가 떠나는 명계 여행은, 오르페우스 (Orpheus)처럼 개인적인 사랑을 되찾기 위함도 아니요, 오디세우스 (Odysseus)처럼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길을 묻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여정은 로마의 정신을 관통하는 가장 숭고한 가치, 즉 피에타스 (pietas)라 불리는, 신과 조국과 가족을 향한 ‘경건한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불타는 트로이 (Troy)를 탈출하여,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라는 신들의 명령을 따라 기나긴 방랑을 계속하던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의 쿠마에 (Cumae) 땅에 도착하여 아폴론 (Apollo) 신의 신탁을 받는 여사제, 시빌라 (Sibyl)를 찾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조언을 구함과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 안키세스 (Anchises)의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뵙고 가르침을 얻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늙고 지혜로운 시빌라는 신이 들린 광적인 상태에서, 산 자가 명계로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경고하면서도 그에게 단 하나의 길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명계의 여왕 프로세르피나 (Proserpina)에게 바쳐진 신성한 ‘황금 가지 (Golden Bough)’를 찾아 꺾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숲 가장 깊숙한 곳,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이 황금 가지는, 운명이 허락한 자만이 꺾을 수 있는, 산 자를 위한 명계의 통행증이었습니다. 아이네이아스는 비둘기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황금 가지를 찾아 손에 넣음으로써, 그의 여정이 신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황금 가지는 그의 경건한 의무에 대한 신의 응답이자,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혀줄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시빌라의 안내와 황금 가지의 보호 아래, 아이네이아스는 마침내 하데스 (Hades)로 향하는 동굴로 들어섭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하는 명계의 풍경은 그가 깊이 존경했던 호메로스 (Homeros)의 세계관을 충실히 따릅니다. 슬픔과 비탄의 강들이 흐르고, 뱃사공 카론 (Charon)이 돈을 받지 않고는 배를 태워주지 않으며, 흉포한 수문장 케르베로스 (Cerberus)가 세 개의 머리로 짖어대며 길을 막아섭니다. 그러나 시빌라가 황금 가지를 보여주자, 모든 문턱의 저항은 힘을 잃고, 아이네이아스는 마침내 망자들의 땅으로 들어섭니다.
그의 여정이 이전의 영웅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는 아스포델 (asphodel) 초원의 공허한 그림자들 사이가 아닌, 축복받은 자들의 땅 엘리시온 (Elysion)의 빛나는 계곡에서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이 감동적인 재회는 아이네이아스의 개인적인 소망을 이루어주는 장면이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안키세스는 그곳에서 단순히 행복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레테 (Lethe) 강가에 모여, 다음 생애를 받아 지상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에게, 장차 로마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호령하게 될 위대한 영혼들의 장엄한 행렬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네이스』 제6권의 심장이자, 로마 제국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신화적으로 완성하는 ‘미래 영웅들의 파노라마’입니다. 안키세스의 손끝을 따라,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건국 시조 로물루스 (Romulus)부터 시작하여, 공화정을 이끌 위대한 가문들, 그리고 마침내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에 평화의 시대를 가져올 아우구스투스 황제 (Augustus Caesar)의 영혼까지, 로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한눈에 목격하게 됩니다.
이 경이로운 광경 앞에서, 안키세스는 아들에게, 그리고 로마 전체에 그들의 역사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언합니다. 이것은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의 시대를 향해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살아 숨 쉬는 듯한 청동상을 더 부드럽게 다듬어내고, 대리석에서 살아있는 얼굴을 깎아낼 것이다. … 그러나 로마인이여, 그대는 기억하라! 그대의 예술은 민족들을 힘으로 다스리는 것, 평화의 관습을 법으로 세우고, 패배한 자는 너그러이 용서하며, 오만한 자는 전쟁으로 굴복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니라.”
아이네이아스의 명계 여행은, 한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민족과 국가라는 거대한 운명과 결합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사후 세계 탐험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고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통과 의례였습니다.
그는 명계에 트로이의 패잔병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장차 펼쳐질 로마의 영광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모든 고난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시 태어납니다.
베르길리우스에게 지하왕국은, 한 국가의 미래를 신성하게 보증하고, 그 백성들에게 역사적 사명감을 불어넣는 장엄한 예언의 공간이었습니다.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의 예언을 가슴에 품고 명계의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상실에 얽매인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로마라는 위대한 미래의 무게를 짊어지고, 그 예언을 지상의 현실로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제6절: 이성으로 본 사후세계, 합리적 질서 속의 그림자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이 빚어낸 지하왕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했습니다. 슬픔의 강을 건너고, 무시무시한 파수꾼들의 문턱을 넘어, 평범한 망령들이 떠도는 아스포델 (asphodel)의 잿빛 초원과 선택받은 영웅들이 머무는 엘리시온 (Elysion)의 빛나는 풍경을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플라톤 (Plato)의 이성을 통해 그곳이 영혼의 선택과 책임이 지배하는 윤리적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베르길리우스 (Virgil)의 서사시를 따라 한 제국의 위대한 운명이 예언되는 역사적 무대로 변모하는 모습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거대하고도 정교한 사후 세계의 풍경 전체가 인류의 영적 여정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그 찬란한 빛과 그 안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함께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이 ‘이성의 지하왕국’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성취는,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혼돈에 ‘이성 (Logos, 로고스)’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류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라는 점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이르칼라 (Irkalla)가 모든 이를 동일한 절망으로 쓸어 담는 무차별적인 공간이었다면, 하데스 (Hades)는 그와 달리 철저한 분류와 구획, 그리고 논리적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인 세계입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모든 죽음이 동등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그의 영혼은 영원한 형벌의 나락 타르타로스 (Tartarus), 끝없는 권태의 초원, 혹은 축복받은 낙원이라는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차등적 운명의 개념은, 개인의 삶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무게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특히 신들을 향해 끔찍한 죄를 지은 자들이 타르타로스에서 받는 형벌의 내용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점에서 그리스적 합리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채울 수 없는 탐욕은 영원한 굶주림으로, 무의미한 오만은 영원한 헛수고로 이어집니다. 사후 세계는 이처럼 지상에서의 삶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됩니다.
플라톤은 이 이성적 질서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그 중심에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이라는 눈부신 기둥을 세웁니다. 에르 (Er)의 신화 속에서, 우리의 운명은 더 이상 신들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매번의 환생 사이에서 우리 영혼이 스스로 내리는 선택의 결과가 됩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윤리적 성찰의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여기에 더하여, 개인의 선택을 넘어선 ‘역사적 사명’이라는 거대한 목적론을 부여합니다. 아이네이아스 (Aeneas)의 명계 하강은 한 제국의 탄생을 정당화하고, 개인의 고난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성적 질서를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킵니다.
그러나 이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합리성의 건축물 이면에는, 그것이 결코 떨쳐내지 못한 짙고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그림자의 첫 번째 이름은 바로 ‘다수의 절망’입니다. 이 정교한 시스템이 대부분의 평범한 영혼들에게 약속한 것은, 축복이 아닌 아스포델 초원의 영원한 권태였습니다. 기억도, 열정도, 의지도 없이 공허한 그림자가 되어 떠도는 삶. 그것은 고통은 아닐지언정, 결코 구원이라 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엘리시온의 문은 소수의 영웅과 신의 자손들에게만 열려있는, 너무나도 좁고 높은 문턱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림자는, 이 모든 질서의 근저에 깔린 ‘현세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깊은 비관’입니다. 명계의 왕이 되기보다는 지상의 가장 비천한 농부로 살고 싶다는 아킬레우스 (Achilles)의 절규는, 이 모든 합리적인 사후 세계의 구성을 공허한 위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진정한 ‘삶’이란, 이 태양 아래에서 감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것이 아무리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 진짜 삶의 희미하고 생기 없는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이성은 죽음의 공포를 질서 안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공포 자체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 그림자는 ‘망각의 필연성’이라는 역설입니다. 플라톤의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내린 위대한 선택과 진리에 대한 기억을 망각의 강 레테 (Lethe)에서 지워야만 합니다. 영혼이 성장하고 배우기 위한 교실이, 그 배움의 내용을 모두 잊어버려야만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는 구조인 셈입니다. 이는 이성으로 쌓아 올린 체계가 결국 비-이성적인 ‘망각’에 의존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깊은 아이러니를 드러냅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상상한 명계는, 인류가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죽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던 중요한 사유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성적 접근을 통해, 인류는 처음으로 죽음 너머의 세계에 논리적 인과율과 윤리적 책임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이러한 시도는 중요한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죽음을 설명하려 해도,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영역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즉, 합리적인 질서만으로는 죽음 앞에서 느끼는 슬픔이나 영원한 안식을 바라는 영혼의 간절한 소망에 온전한 답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구축한 아름다운 질서 속에는 여전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영혼은 그 그림자를 넘어설 새로운 빛, 즉 믿음과 신비, 그리고 은총의 세계를 향해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