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숲과 대지의 영혼 - 북유럽과 루마니아의 저편

by 이호창

제4장: 숲과 대지의 영혼 - 북유럽과 루마니아의 저편



제1절: 헬헤임 (Helheim)과 발할라 (Valhalla),

북유럽 죽음의 두 갈래 길



그리스와 로마의 이성이 세운 질서정연한 지하왕국을 뒤로하고, 우리의 여정은 이제 북쪽의 차가운 바다와 안개 낀 피오르드 (fjord)가 빚어낸, 거칠고도 장엄한 영혼의 풍경으로 들어섭니다.


북유럽인들이 상상했던 사후 세계는, 남쪽의 철학자들이 구축한 윤리적 인과율이나 복잡한 법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혹독한 자연과의 끊임없는 투쟁,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종말, 즉 라그나로크 (Ragnarök)라는 거대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예감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운명은, 생전에 얼마나 선했는가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 즉 전쟁터가 아닌 자신의 침상에서 병이나 늙음으로 평온한 죽음, 이른바 ‘짚 위에서의 죽음 (straw-death)’을 맞이한 이들의 영혼이 향하는 곳은, 안개와 추위로 가득한 어둠의 왕국, 헬헤임 (Helheim)입니다. 이곳은 세상의 뿌리 아래, 북쪽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인 안개의 세계 니플헤임 (Niflheim)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다스리는 자는 교활한 신 로키 (Loki)의 딸이자, 그 모습의 절반은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썩어가는 시체인 여신 헬 (Hel)입니다.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녀의 왕국이 지닌 본질, 즉 삶의 온기가 모두 사라진, 그저 존재가 지속될 뿐인 공허한 상태를 그대로 상징합니다.


헬헤임은 기독교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오히려 그리스 신화의 아스포델 (asphodel) 초원과 그 분위기가 유사하지만, 훨씬 더 춥고, 축축하며, 음울한 공간입니다. 망자들은 비참이라는 뜻의 엘류드니르 (Éljúðnir)라 불리는 거대한 홀에서, 굶주림이라는 이름의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고, 칼이라는 이름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에 절망적인 이름이 붙어있는 이곳은, 어떤 희망이나 기쁨도 없이 그저 현세의 삶을 희미하게 모방하는, 지독한 권태와 무기력이 지배하는 그림자의 세계입니다. 이곳에 떨어진 영혼은 그 누구도, 심지어 신이라 할지라도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대적인 법칙이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북유럽의 전사들에게는 이 무기력한 헬헤임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명예롭게 죽은 전사의 영혼, 즉 에인헤랴르 (Einherjar)는 주신(主神) 오딘 (Odin)이 보낸 여전사들, 발키리 (Valkyrie)의 인도를 받아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드 (Asgard)에 있는 영광의 전당, 발할라 (Valhalla)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전사자의 절반은 사랑과 풍요의 여신 프레이야 (Freyja)의 영토인 폴크방 (Fólkvangr)으로 간다고도 전해지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전사의 낙원은 단연 발할라였습니다.


발할라는 ‘살해된 자들의 전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것이 전투와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그 지붕은 금빛 방패로 덮여 있고, 서까래는 거대한 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40개의 거대한 문이 있어 세상의 마지막 날, 수많은 전사들이 일제히 출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에인헤랴르들의 삶은 영원한 축제와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저녁이 되면 모두 상처 하나 없이 부활하여 다시 연회장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베어내도 매일 저녁 되살아나는 신비한 멧돼지 새흐림니르 (Sæhrímnir)의 고기와, 세상의 나무 이그드라실 (Yggdrasil) 꼭대기에서 영원히 꿀술(mead)을 만들어내는 염소 헤이드룬 (Heiðrún)의 젖을 마음껏 마시며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엘리시온 (Elysion)이 약속하는 평화로운 휴식과는 전혀 다른, 전사 문화가 상상할 수 있었던 최고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북유럽적 낙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과 마주하게 됩니다. 발할라는 단순히 용맹한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명확한 ‘목적’을 지닌 훈련소이자 거대한 병영이었습니다. 오딘이 발키리를 보내 용감한 전사들을 모으는 이유는, 언젠가 다가올 세상의 종말, 라그나로크에서 신들의 편에 서서 거인들과 괴물들에 맞서 싸울 최후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헬헤임과 발할라로 나뉘는 이 두 갈래의 길은, 한 사람의 죽음이 거대한 우주적 투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북유럽의 세계관은 ‘영웅적 비관주의(heroic pessimism)’라 불리는 독특한 정서를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들조차도 라그나로크라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불길과 어둠에 휩싸일 것이라는 비극적 예감 속에서도, 그들이 추구했던 최고의 가치는 승리가 아닌, 패배할 운명 앞에서 보여주는 용기와 명예였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삶은 개인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거대한 소멸 앞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숭고한 의무의 연장이었습니다. 헬헤임으로 가는 것이 무의미한 소멸이라면, 발할라로 가는 것은 의미 있는 소멸을 향한 장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가르는 북유럽의 두 갈래 길은, 한 개인의 죽음을 우주 전체의 운명과 연결시킨, 비장미 넘치는 세계관의 위대한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제2절: 오딘 (Odin)의 지혜, 죽음의 신비를 엿본 주신(主神)


북유럽 신화의 판테온(pantheon) 정상에 앉아 있는 주신(主神) 오딘 (Odin)은, 올림포스 (Olympus)의 옥좌에 앉아 세계를 호령하는 제우스 (Zeus)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법과 시, 전쟁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자, 동시에 지혜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는 영원한 구도자였습니다. 그의 지혜는 평온한 명상 속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극한의 고통과 자기희생을 통해, 죽음의 심연 바로 그 문턱에서 쟁취해 낸 것이었습니다. 오딘의 이야기는, 지혜가 어떻게 죽음과 운명에 대한 통찰과 필연적으로 결부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서사입니다.


오딘의 첫 번째 위대한 희생은, 그의 외눈에 담겨 있습니다. 태초에,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기억이 흘러드는 ‘미미르의 샘 (Mímisbrunnr)’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Yggdrasil)의 뿌리 아래 거인 미미르 (Mímir)가 지키고 있는 이 샘물을 단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지혜에 대한 갈증에 불타던 오딘은 마침내 그 샘을 찾아가 미미르에게 물을 청합니다. 그러나 미미르는 그 대가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딘의 눈 하나를 요구합니다. 오딘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 샘물에 바치고, 그 대가로 심연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는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물리적인 시력의 절반을 포기하는 대신, 존재의 내면과 운명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외모를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지혜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진정한 앎이란 세속적인 감각의 일부를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모든 신비주의 전통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신화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의 구도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겪었던 가장 끔찍하고도 숭고한 시련은, 바로 룬 문자 (runes)의 비밀을 얻기 위한 자기희생의 의식이었습니다. 고대의 시가(詩歌) 모음집인 『고 에다 Poetic Edda』의 「하바말, Hávamál」에서, 오딘은 스스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바람 부는 나무에 매달려 있었음을 안다, 아흐레 밤낮을 꼬박, 창에 찔린 채,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 바친 채, 그 누구도 모르는 저 나무의 뿌리 위에.”


이것은 인류의 신화 속에서 가장 강력한 샤머니즘(shamanism)적 통과 의례의 기록 중 하나입니다. 오딘은 세계의 중심축인 위그드라실 나무에 스스로를 매달아, 9라는 신성한 숫자의 시간 동안 죽음과 삶의 경계에 머무릅니다. 그는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아무런 음식도 물도 마시지 않으며,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됩니다. 이 극한의 고통과 탈아(脫我)의 상태 속에서, 그의 의식은 죽음의 심연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그는 비명과 함께 땅에 떨어진 룬 문자의 비밀을 ‘집어 올립니다(up nam)’.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룬 문자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의지와 희생을 통해 ‘쟁취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혜와 마법의 힘은 외부의 신이 내려주는 자비로운 선물이 아니라, 구도자 스스로가 죽음과 대면하여 그 심연에서 빼앗아 와야 하는 전리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딘은 이 의례적 죽음을 통해, 우주의 모든 비밀과 법칙, 운명을 상징하는 룬 문자의 주인이 되었고, 비로소 시와 마법을 다스리는 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오딘의 지혜는 과거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미래, 즉 라그나로크 (Ragnarök)의 운명을 알기 위해서라면 죽은 자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발두르 (Baldr)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악몽을 꾸자, 그는 자신의 여덟 개 다리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 (Sleipnir)를 타고 곧장 헬헤임 (Helheim)의 문턱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혀있던 고대의 위대한 여예언자, 볼바 (völva)의 무덤을 찾아내, 죽은 자를 깨우는 강력한 마법으로 그녀의 망령을 불러냅니다. 그는 마지못해 일어난 예언자의 망령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 마침내 발두르의 죽음과 라그나로크의 비극적인 전개를 모두 알아내고야 맙니다.


이와 같은 오딘의 이야기는, 지혜가 평화가 아닌 고통을 대가로 한다는 서늘한 진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그 지혜는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신들과 세계의 파멸이라는 끔찍한 미래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게 된, 가장 고뇌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그가 발할라 (Valhalla)에 용맹한 전사들을 모으는 이유도, 이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오딘은 죽음을 극복하려 했던 길가메쉬 (Gilgamesh)와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는 죽음을 없애는 대신,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정해진 운명과 당당히 마주 서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영웅적 비관주의’에 있습니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게 된 이 지혜의 신은, 어쩌면 세상의 비극을 가장 깊이 이해했기에 가장 위대한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3절: 헤르모드 (Hermóðr)의 슬픔,

발두르 (Baldr)를 되찾기 위한 여정


북유럽 신화의 세계에 최초의 겨울이 찾아온 것은, 빛의 신 발두르 (Baldr)가 스러진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아스가르드 (Asgard)의 모든 존재로부터 사랑받았던 가장 아름답고 선한 신,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들의 시대가 종말로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징후였으며,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우주적 상처였습니다. 교활한 신 로키 (Loki)의 계략에 빠져, 맹인 신 회두르 (Höðr)가 던진 겨우살이 가지에 맞아 쓰러진 그의 죽음 앞에, 신들은 할 말을 잃고 오직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 깊은 슬픔 속에서, 신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단 하나의 희망에 매달리기로 합니다. 바로 명계의 여왕 헬 (Hel)과 담판하여, 발두르를 다시 산 자들의 세계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위해 선택된 자는 주신 오딘 (Odin)의 아들이자 ‘용맹한 자’로 불리는 헤르모드 (Hermóðr)였습니다. 그는 신들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 빠른 신이었습니다. 오딘은 이 여정을 위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말, 슬레이프니르 (Sleipnir)를 그에게 내어줍니다. 세상의 모든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이 신비한 말의 등에 올라탄 헤르모드는, 신들의 비통한 염원을 짊어진 채, 어둡고 깊은 북쪽의 길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아흐레의 밤낮을 빛 한 점 없는 깊은 계곡들을 통과하며 달렸고, 마침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가르는 걀라르브루 (Gjallarbrú)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황금으로 빛나는 이 다리는 거인 처녀 모두구드르 (Móðguðr)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헤르모드를 보고는, 살아있는 자의 낯선 모습에 놀라 그의 이름과 목적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제는 다섯 무리의 망자들이 이 다리를 건넜지만, 그들의 발소리를 모두 합친 것보다 그대 한 사람의 말발굽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구나.” 그녀는 헤르모드가 망자가 아님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발두르를 되찾으러 간다는 그의 비장한 목적을 듣고는 그가 헬헤임 (Helheim)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마침내 헤르모드는 헬헤임의 거대한 성문 앞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죽은 자들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슬레이프니르의 박차를 가했고,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신마(神馬)는 하늘 높이 뛰어올라 그 어떤 장애물도 없는 듯 가뿐하게 성벽을 넘어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명계의 여왕 헬의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연회장의 풍경은 차갑고 음울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형제 발두르는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는 헬의 왕국이 무질서한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그 나름의 위계와 질서를 갖춘 엄연한 하나의 왕국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헤르모드는 여왕 헬에게 다가가, 신들의 슬픔과 온 세상이 발두르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전하며 그의 귀환을 간청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호소를 들은 헬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그의 청을 시험해 보기로 합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 즉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포함한 아홉 세계의 모든 존재가 발두르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면, 그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발두르는 영원히 헬헤임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발두르의 상실이 진정으로 우주적인 슬픔인지를 시험하는, 지극히 공정하면서도 냉혹한 조건이었습니다.


희망을 품고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헤르모드는 이 소식을 전했고, 신들은 즉시 아홉 세계 곳곳으로 전령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는 듯했습니다. 인간과 신들은 물론, 거인과 난쟁이, 심지어는 바위와 나무, 쇠붙이마저도 사랑스러운 빛의 신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온 세상이 거대한 하나의 슬픔으로 잠기는 듯했습니다. 모든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며 전령들이 돌아오던 길에, 그들은 어느 동굴에서 퇵크 (Þökk)라는 이름의 늙은 여거인과 마주칩니다. 전령들은 그녀에게도 발두르를 위해 울어줄 것을 청했지만,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습니다.


“퇵크는 마른 눈물로 발두르의 장작더미를 위해 울 것이다. 산 자든 죽은 자든, 늙은 칼의 아들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헬이 가진 것을 그대로 갖게 하라.”


단 한 방울의 눈물, 단 한 존재의 거부.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습니다. 헬의 조건은 깨어졌고, 발두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여거인이 사실은 모든 비극의 원흉인 로키가 변신한 모습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헤르모드의 슬픈 여정은, 그리스 영웅들의 성공적인 명계 탐험과는 전혀 다른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임무는 개인의 실수나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용기와 신의(信義)를 다하여 모든 과업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단 하나의 악의적인 존재가 품은 순수한 증오 앞에서 무력하게 좌절되었습니다.


이것은 북유럽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영웅적 비관주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때로 세상의 비극은 아무리 모두가 힘을 합쳐 선한 의지를 발휘하더라도, 단 하나의 완고한 악의에 의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헤르모드의 이야기는 운명의 불가항력적인 힘과, 희망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의 영웅성은 발두르를 되찾아오는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희망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심연까지 다녀왔다는 그 행위 자체에 있습니다. 그는 결국 슬픔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그의 여정은 다가올 라그나로크의 운명 앞에서 신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장하고도 숭고한 예고편이 되었습니다.










제4절: 루마니아의 잘목시스 (Zalmoxis),

죽음을 통해 불멸에 이르는 다치아의 신



북유럽의 신들이 라그나로크 (Ragnarök)라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운명 앞에서 투쟁하는 비장한 영웅들이었다면, 카르파티아 (Carpathian) 산맥과 다뉴브 (Danube) 강 유역의 고대 다치아 (Dacia)인들이 숭배했던 신은 죽음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을 불멸로 향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로 삼았던 신비로운 존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잘목시스 (Zalmoxis)이며,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게타이 (Getae) 부족은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us)의 기록 속에서 ‘불멸을 추구하는 자들 (athanatizontes, 아타나티존테스)’이라는 경이로운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의 사후관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그 어떤 세계와도 다른, 독특하고도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 Historiai』에서 이 불가사의한 신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는 그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하는, 합리주의적 시선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잘목시스는 본래 인간이었으며, 위대한 철학자 피타고라스 (Pythagoras)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는 스승 곁에서 천문학과 영혼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배운 뒤, 고향인 트라키아 (Thrace)로 돌아와 동족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혼은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하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그곳에 숨어들어 3년 동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믿으며 슬퍼했지만, 4년째 되던 해에 그가 홀연히 다시 나타나자, 그를 죽음에서 부활한 신으로 여기고 그의 가르침을 맹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은 이 이야기에 의구심을 표하며, 잘목시스가 피타고라스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인물, 혹은 본래 다치아인들이 섬기던 토착신일 가능성을 함께 제시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화의 표면을 넘어 더 깊은 상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와 같은 종교사학자들이 통찰했듯이, 잘목시스가 지하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은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전 세계의 신화와 신비주의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입문 (initiation)의 원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하 은둔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겪어야만 하는 의례적 죽음이자, 대지(大地)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곧 명계 하강, 즉 카타바시스 (Katabasis)의 한 형태입니다. 잘목시스는 스스로 죽음의 상태를 체험하고, 그 어둠의 심연을 통과함으로써 죽음의 비밀을 깨닫고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길을 다녀와 ‘증명’해 보인 위대한 스승이자 샤먼-왕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성으로 분석하는 대신, 그것을 불멸에 이르는 하나의 신비적 기술로 변모시켰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게타이 부족의 독특하고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의례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5년에 한 번씩 제비를 뽑아 가장 용감하고 현명한 자를 선택하여, 그를 잘목시스에게 보내는 사자(使者)로 삼았습니다. 사자를 보내는 방식은, 다른 이들이 창을 위로 향하게 들고 서 있으면, 선택된 자를 그 창끝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창에 찔려 즉시 숨을 거두면, 이는 신이 그들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길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즉시 죽지 않으면, 그는 불경한 자로 간주되어 비난받고 다른 사자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 의식은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끔찍한 인신공양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믿음 체계 안에서는 가장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소통의 방식이었습니다. 사자로 선택된 이는 ‘죽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신에게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육체적 소멸은, 부족 공동체의 염원을 싣고 불멸의 신과 직접 대면하기 위한, 가장 빠른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그들이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아니,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얼마나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하고 행복한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잘목시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매우 급진적인 교훈을 줍니다. 죽음은 오류도, 형벌도, 비극도, 슬픔도 아니며, 단지 ‘귀향’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에는 업보에 따른 윤회의 고리도, 죄를 심판하는 엄격한 법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영혼이 마침내 도달하게 될 영원한 축복의 땅만이 약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토록 확고하고 단순한 믿음은, 다치아인들을 전장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삶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목시스의 신화는 숲과 대지의 정령들과 교감하며 살아갔던 고대 유럽인들의 영성이, 어떻게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실존적 공포를 숭고한 희망으로 변성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복잡한 지도를 그려주는 대신, 그저 그 세계로 가는 길을 몸소 열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오직 빛과 기쁨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약속을 남겼습니다.









제5절: 미오리짜 (Miorița)의 목동,

죽음을 우주적 혼례로 변성시킨 연금술사



진리의 빛은 때로 장엄한 경전이나 심오한 철학서가 아닌, 이름 없는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한 편의 소박한 노래 속에서 더욱 순수하게 빛나기도 합니다. 루마니아의 민족 서사시로 불리는 민요 『미오리짜, Miorița』, 즉 ‘어린 양’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 노래는 겉으로는 질투와 배신, 그리고 죽음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속적인 가치를 완전히 초월하여 죽음마저도 신성한 축제로 변성 (transmutation)시키는 한 위대한 영혼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미오리짜’의 이름 없는 목동은, 어떤 스승이나 교리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연과의 깊은 합일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인 진리를 체득한, 유럽의 정신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홀로 깨닫는 자’의 원형입니다.


노래는 푸른 언덕을 배경으로 세 명의 목동이 양 떼를 이끌고 오는 평화로운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검은 질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다른 두 명의 목동이, 더 좋은 양 떼와 더 훌륭한 말과 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몰도바 (Moldova) 출신의 목동을 해가 질 무렵 죽이기로 공모한 것입니다. 이 갈등의 시작점은, 세속의 가장 저급한 욕망, 즉 타인의 것을 탐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의 살의는 오직 물질적인 부(富)에 대한 시기심이라는, 가장 어둡고도 비루한 동기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젊은 목동은 바로 이 세속적 가치관이 낳은 폭력의 희생자로 등장합니다.


이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목동이 기르던 신비한 어린 양, ‘미오리짜’가 입을 열어 주인에게 그의 동료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를 알려줍니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순수한 자연의 목소리를 통해 진실이 전달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이 이야기가 평범한 현실의 차원을 넘어섰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진정으로 경탄하게 하는 것은 이 예언을 들은 목동의 반응입니다. 그는 분노하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혹은 운명을 저주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지극히 평온하고도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영혼 안에서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집착을 떠나는 마음, 즉 출리심(出離心)이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생명과 재물에 어떠한 미련도, 집착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이 수용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가장 어둡고 비참한 현실을, 가장 눈부시고도 신성한 상징으로 완전히 재창조하는, 영적인 연금술사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미오리짜’에게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교회 묘지가 아닌 양들이 머무는 우리 (sheepfold) 근처에 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맡에는 너도밤나무, 뼈, 딱총나무로 만든 세 개의 피리를 놓아달라고 말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피리들이 저절로 소리를 내어, 자신의 양들이 슬퍼하지 않고 다시 모여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죽어서도 자신이 사랑했던 순수한 자연의 일부로 남겠다는, 존재론적 합일의 선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올 늙은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실은 ‘세상의 여왕’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했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의 결혼식은 평범한 인간의 결혼식이 아니라, 온 우주가 축복하는 ‘우주적 혼례 (cosmic wedding)’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결혼식에서, 태양과 달이 나의 양가 부모님이 되어주었고, 거대한 산들이 나의 사제들이었으며, 수억의 별들이 나의 웨딩 촛불이었다네.”


이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변성의 힘입니까. 그는 자신을 향한 살의라는 가장 추악한 현실을, 온 우주가 참여하는 가장 신성한 혼례라는 상징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의 살해자들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그의 성스러운 결혼식에 참여한 하객이 됩니다. 그는 폭력과 증오라는 현실을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자비와 화해, 그리고 우주적 사랑의 드라마로 승화시킵니다. 이것이야말로 연금술의 가장 심오한 목표, 즉 납과 같은 비천한 현실을 황금과 같은 신성한 실재로 바꾸는 작업의 완벽한 실현입니다.


또한,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 대한 미움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늙은 어머니가 받게 될 상처를 걱정하는 깊은 연민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진실 대신, 온 우주의 축복 속에 장엄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아름다운 거짓말을 통해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려 합니다. 진정한 지혜가 반드시 자비와 함께 온다는 진리를, 이 이름 없는 목동은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오리짜』의 목동은 어떤 교리나 수행 체계에도 의지하지 않았지만,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위대한 성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지혜는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양들과, 바람과, 별들과 소통하며 자연의 순환 속에서 체득한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세계와 하나가 되지 않는 자는, 죽어서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이기에, 죽음은 그에게 더 이상 두려운 끝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는 기쁜 귀향이자 축제일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진정한 깨달음이 때로는 가장 정교한 철학 체계가 아닌, 가장 소박하고 순수한 영혼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에 실려 들판을 지나는 그의 피리 소리는, 우리에게 침묵의 언어로 그 위대한 지혜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6절: 하늘의 관문과 영혼의 통행세, 루마니아의 기독교적 명계


미오리짜의 목동이 자신의 죽음을 대자연과의 장엄한 혼례로 승화시켰다면, 그의 후손들은 그 위에 기독교라는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덧씌워, 한층 더 정교하고도 구체적인 영혼의 여정을 그려냈습니다. 루마니아의 민속 신앙 속에 나타나는 사후 세계는, 고대 다치아 (Dacia)인들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 동방정교회의 교리와 만나 탄생한, 지극히 독창적인 영혼의 통관 절차와도 같습니다.


루마니아인들은 고인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 창공을 넘어 하늘의 낙원인 라이 (Rai)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흔아홉 개에 달하는 하늘의 관문 (vămi)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각각의 관문에는 기독교의 성자들이 수호자로서 자리하고 있지만, 진짜 심판관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바메쉬 버즈두훌루이 (Vameşii Văzduhului)’, 즉 ‘창공의 세관원들’입니다. 이 영적인 세관원들은 영혼이 살아생전에 지은 죄를 하나씩, 마치 밀수품을 적발하듯 샅샅이 검사합니다. 죄 없는 영혼들은 성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음 관문으로 나아가지만, 죄를 지은 영혼은 이 ‘바메쉬 버즈두훌루이’에 의해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땅이나 지옥으로 내쳐집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세관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순결함과는 별개로, 이 관문들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행세’, 즉 저승 가는 노잣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죄가 없는 영혼일지라도 만약 노잣돈이 없어 이 하늘의 통관비를 내지 못하면, 그 영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상으로 돌아온 그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한 채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떠도는 존재, 즉 스트리고이 (strigoi)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민중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 믿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나의 신성한 의무를 부여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무사히 하늘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그들은 장례 때 망자에게 노잣돈을 충분히 챙겨주었습니다. 혹여 망자가 저승 여정에 노잣돈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동전을 망자의 입속에 정성껏 넣어주거나, 동전에 구멍을 뚫어 망자의 새끼손가락에 단단히 끼워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의 뱃사공 카론 (Charon)에게 주었던 동전 한 닢과 그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목적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관료주의적입니다. 그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가, 산 자들의 정성과 의례적 책임 없이는 결코 안전하게 통과할 수 없는 곳이라는 강력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아흔아홉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한 영혼은, 마침내 천상낙원 라이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 ‘푼테아 라이울루이 (Puntea Raiului)’, 즉 ‘낙원으로 가는 외나무다리’ 앞에 섭니다. 그 아슬아슬한 다리 아래로는 ‘이아드 (Iad)’, 즉 지옥의 입구가 검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습니다. 다리 위는 깊은 어둠에 싸여 있고 항상 광풍이 휘몰아치기에, 한순간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 위태로운 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순결한 영혼에게만 주어진다는 ‘빛의 날개’를 받는 것뿐입니다.


루마니아의 사후 세계관은 영혼이 궁극적인 안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겹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한 영혼의 마지막 여정은 세 가지 중요한 조건에 달려 있었습니다. 첫째는 살아생전의 도덕적 삶 (죄의 유무)이고, 둘째는 공동체와의 유대 및 의례적 책임 (노잣돈)이며, 마지막 셋째는 영혼 그 자체의 순결함 (빛의 날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온전히 갖춘 영혼만이 비로소 최종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글이 아닌 그림을 통해, 특히 루마니아 북동부 부코비나 (Bucovina) 지역 수도원들의 프레스코 벽화를 통해 강렬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 벽화들 속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부정한 자들은 대부분 루마니아를 침략했던 터키나 타타르인들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반면, 천국으로 향하는 순결한 영혼들은 전형적인 루마니아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교도의 위협에 맞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강력한 기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불멸을 믿었던 고대 다치아의 영혼은, 기독교의 옷을 입고 이처럼 굳건한 믿음의 성벽을 쌓아 올렸던 것입니다.









제7절: 숲과 교감하는 영혼,

루마니아 민속에 나타난 자연주의적 사후관


우리가 지금까지 여행한 명계들이 신들의 엄격한 법률이나 이성의 질서로 구획된 거대한 ‘왕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모든 인위적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영혼이 다시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루마니아의 숲과 대지로 들어섭니다. 잘목시스 (Zalmoxis)의 신비로운 가르침과 미오리짜 (Miorița) 목동의 우주적인 노래가 태어난 이 땅의 민속 신앙 속에서, 죽음은 단절이나 심판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를 바꾸어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루마니아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는, 인간과 자연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믿음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숲은 단순히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신성한 존재이자, 이승과 저승을 잇는 거대한 성전 (聖殿)입니다. 삶이 힘겨울 때 숲으로 도망쳐 위안을 얻었듯이, 죽음을 맞이한 영혼 또한 숲으로 돌아가 그 일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나무, 특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전나무나 떡갈나무는 땅의 뿌리와 하늘의 가지를 잇는 우주수 (axis mundi), 즉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졌습니다. 영혼은 이 나무의 가지를 붙잡고 별들 사이를 거닐고, 그 뿌리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습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사후관이 가장 아름답고도 애틋하게 발현되는 의례가 바로, 젊은 나이에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처녀 총각을 위한 ‘장례-혼례’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이를 위해 가장 잘생긴 전나무 한 그루를 베어와, 마치 신랑이나 신부처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합니다. 이 ‘혼례의 전나무 (bradul de nuntă)’는 고인의 장례 행렬 가장 앞줄에 서서, 그의 마지막 길을 축복하고 안내합니다. 이것은 『미오리짜』의 목동이 자신의 죽음을 ‘우주적 혼례’로 변성시켰던 그 위대한 통찰이, 결코 한 시인의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루마니아 민중의 삶과 죽음에 깊이 뿌리내린 살아있는 철학임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삶의 실패나 비극적인 끝이 아닙니다. 만약 한 젊은이가 지상에서 짝을 찾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면, 그는 저세상에서 자연 그 자체와, 혹은 우주와 혼인하여 더 큰 사랑을 성취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애도의 자리가 아니라, 온 우주가 그의 신랑 혹은 신부가 되어주는 성스러운 혼례의 장이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영혼이 아니라, 숲과 강, 해와 달과 별들을 하객으로 맞이하는 우주적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또한 루마니아 민속에서 죽은 자는 산 자의 세계를 완전히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얇은 베일 저편에 머물며, 바람 소리를 통해, 나뭇잎의 속삭임을 통해, 혹은 꿈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과 계속해서 교감합니다. 이러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애틋한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바로, 다른 언어로는 온전히 번역하기 힘든 ‘도르 (dor)’라는 감정일 것입니다. ‘도르’는 그리움과 슬픔, 사랑과 기다림이 뒤섞인, 가슴 저미는 영혼의 갈망을 의미합니다. 산 자는 떠나간 이를 향한 ‘도르’를, 죽은 자는 남겨진 이를 향한 ‘도르’를 느끼며, 이 아련한 감정의 끈을 통해 두 세계는 영원히 연결됩니다. 이것은 다른 문화권의 유령에 대한 공포와는 전혀 다른,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서정적인 교감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북유럽과 루마니아라는 두 갈래의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북유럽의 영웅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 (라그나로크)에 맞서 투쟁하는 ‘비장미’를 보여주었다면, 루마니아의 영혼들은 죽음이라는 운명 자체를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으로 끌어안아, 그것을 아름다운 합일의 축제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잘목시스는 땅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불멸을 얻었고, 미오리짜의 목동은 자신의 무덤을 자연과 교감하는 악기들의 무대로 만들었으며, 민중들은 장례식을 우주적인 혼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영혼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하늘 위 어딘가에 있는 천상의 도시나, 땅 아래 어딘가에 있는 심판의 왕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거대한 자연 그 자체입니다. 죽음은 무서운 추방이 아니라, 잠시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형태로 소풍을 나왔던 영혼이 마침내 고향의 집, 즉 모든 존재의 어머니인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가장 평화로운 귀향입니다.


루마니아의 어느 외로운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전나무는, 그렇게 우주와 결혼한 한 영혼의 숭고한 기념비로서, 지금도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침묵의 기도가 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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