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명계들이 신들의 변덕이나 철학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여정은 거대한 제국의 질서정연한 관료 체계가 그대로 지하 세계에 투영된, 지극히 조직적이고도 엄격한 중국의 명계로 들어섭니다. 이곳은 불교의 업(業)과 윤회 사상, 도교의 우주론, 그리고 현세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지극히 독창적인 영혼의 사법 체계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땅의 감옥, 디유 (Diyu, 地獄, 지옥)입니다.
디유는 단일한 공간이 아니라, 망자의 영혼이 다음 생으로 나아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열 개의 거대한 법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법정들을 다스리는 존재는 흉포한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지상의 황제가 임명한 판관처럼 위엄 있고 냉철한 열 명의 왕, 즉 시왕 (十王)입니다. 이 시왕의 개념은 불교 경전에서 유래하였으나, 중국의 토착 신앙과 결합되면서 각각의 왕이 특정 기일 (죽은 후 7일, 14일, 3·7일 등)에 맞추어 망자를 심판하는, 지극히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했습니다.
망자가 숨을 거두면, 그 영혼은 흑백의 옷을 입은 한 쌍의 저승사자, 흑백무상 (黑白無常)이나, 소의 머리를 한 우두 (牛頭)와 말의 얼굴을 한 마면 (馬面)에 의해 이 첫 번째 법정으로 인도됩니다. 살아생전 그 어떤 권세와 부귀를 누렸더라도, 이 저승사자들의 쇠사슬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디유의 문턱을 넘는 순간, 지상의 모든 계급과 신분은 무효가 되고, 오직 한 생애의 행적만이 영혼의 유일한 이력서가 됩니다.
열 개의 법정을 차례로 지나가는 동안, 각각의 시왕은 망자의 죄업을 남김없이 심판합니다. 이 심판 과정에는 그 어떤 속임수나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정에는 업경대 (業鏡臺)라 불리는 신비한 ‘업의 거울’이 놓여 있어, 망자가 지상에서 저질렀던 모든 행위, 심지어 마음속으로 품었던 은밀한 생각까지도 하나하나 생생하게 비추어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자신의 과거를 부인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이, 가장 정직한 증인인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만 합니다. 시왕들은 이 거울에 비친 내용과, 저승의 서기들이 꼼꼼하게 기록해 온 장부를 대조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판결을 내립니다.
각각의 법정에는, 특정 죄업에 해당하는 수많은 작은 지옥들이 부속되어 있습니다. 만약 망자가 거짓말로 타인을 해쳤다면, 그의 혀를 길게 뽑는 발설지옥 (拔舌地獄)에서 형벌을 받고, 탐욕으로 타인의 재물을 훔쳤다면, 끓는 기름 솥에 던져지는 유과지옥 (油鍋地獄)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 형벌들은 단순히 잔인한 고통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본질을, 가장 혹독하고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체험하게 하여 영혼에 새겨진 업의 흔적을 지워내는, 일종의 정화(淨化) 과정입니다. 칼날이 솟은 산을 오르게 하는 도산지옥 (刀山地獄)의 고통을 통해, 망자는 자신이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의 아픔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열 명의 왕 중 가장 유명하고도 두려운 존재는, 제5 법정을 다스리는 염라왕 (閻羅王)입니다. 본래 인도 신화의 죽음의 신이었던 야마 (Yama)에서 유래한 이 위대한 왕은, 디유 전체의 질서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판관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법정에서 모든 거짓과 위선은 남김없이 벗겨지고, 영혼은 가장 근본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심판대 위에 서게 됩니다.
디유 (지옥의 일종)의 법정은 우리에게 ‘우주적 인과율의 절대성’을 가르칩니다. 이 세계는 모든 행위에 결과가 따르는, 지극히 공정하고도 엄격한 도덕적 질서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선행도 잊히지 않으며, 그 어떤 악행도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거대한 인과응보의 시스템이 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디유의 끔찍한 형벌이 결코 ‘영원한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지옥 (Hell)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종의 ‘연옥 (Purgatorio, 푸르가토리오)’과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고통의 목적은 징벌이 아니라 정화에 있으며, 형벌의 기간은 죄의 무게에 따라 정해져 있을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업을 씻어낸 영혼은 마침내 이 고통의 공간을 벗어나, 다음 단계, 즉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곳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결국 디유는 그 모든 공포스러운 묘사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윤회라는 거대한 순환 시스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공간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다음 생이라는 새로운 교실에 들어가기 전, 지난 학기 동안의 잘못을 모두 청산하고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지독하게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보충 학습의 장소인 셈입니다. 이처럼 철저한 정의와 순환의 희망이 공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국적 명계가 지닌 독특하고도 심오한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제2절: 염라왕 (閻羅王)의 심판, 생전의 업보를 비추는 거울
디유 (Diyu)의 열 개 법정 중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심장부, 그곳에 모든 망령이 두려움 속에 고개를 조아리는 위대한 왕의 옥좌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염라왕 (Yanluo Wang, 閻羅王)입니다. 비록 그는 열 명의 왕 (시왕, 十王) 중 다섯 번째 법정을 다스리는 판관이지만, 그의 이름은 디유 전체의 공포와 권위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법정은 모든 위선이 벗겨지고, 한 영혼의 전 생애가 낱낱이 드러나는 마지막 진실의 무대입니다.
염라왕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인도 신화 속 죽음의 신이자 인류 최초의 죽은 자인 야마 (Yama)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신이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신화적 권능을 지닌 신의 모습 대신, 지상의 황제가 임명한 강직하고 위엄 있는 사법 관료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의 법정은 신의 변덕이나 자비가 아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명백한 증거와 엄격한 법률에 따라 운영되는 거대한 관아(官衙)와도 같았습니다. 이는 우주의 질서마저도 잘 짜인 관료 체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믿었던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죽음 너머까지 확장된 결과입니다.
망자의 영혼이 염라왕의 법정 앞에 끌려 나오면, 변호나 자기변명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한가운데에는 모든 진실을 비추는 신비한 거울, 바로 업경대 (業鏡臺)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닙니다. 그 차가운 표면 위로, 망자가 살아생전 겪었던 모든 순간이, 숨겨왔던 모든 욕망과 은밀한 악행이, 그리고 남몰래 베풀었던 작은 선행까지도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남김없이 펼쳐집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영혼은 자신의 삶 전체를 가장 정직한 관객이 되어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이 업경대 앞에서 모든 거짓은 의미를 잃습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자신의 죄를 숨기고 명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이 거울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기록된 동기까지도 남김없이 비추어냅니다. 타인의 눈물 뒤에 숨어있던 자신의 이기심, 미소 뒤에 감추었던 질투, 의로운 말 뒤에 숨어있던 명예욕까지, 영혼은 스스로가 만든 가장 완벽한 증거 앞에서 발가벗겨집니다. 이것은 실로 끔찍한 자기 대면의 순간입니다. 외부의 심판관이 죄를 묻기 이전에, 영혼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진실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염라왕은 그저 묵묵히 거울에 비친 내용을 지켜볼 뿐입니다. 그의 곁에서는 저승의 서기들이, 거울의 내용과 자신들이 기록해 온 ‘생사부(生死簿)’의 내용을 꼼꼼히 대조하며 죄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이처럼 디유의 심판은 증거(거울)와 기록(장부)을 교차 검증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체계적인 사법 절차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주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는 서늘한 믿음을 반영합니다.
모든 증거가 확인되면, 염라왕은 마침내 판결을 내립니다. 그의 판결은 망자의 죄업에 정확히 상응하는 형벌을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 형벌들은 앞선 절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해당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고안되어 있습니다. 염라왕의 심판은 복수가 아니라, 균형을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우주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염라왕의 법정과 업경대는 ‘카르마(Karma)의 불가피성’이라는 근본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든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신에 대한 믿음이나 은총을 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먼저 묻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진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 선택에 달려있다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결국 업경대 앞에 선 영혼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실존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거울 앞에서 우리의 다음 생을 조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염라왕의 심판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삶, 그것이야말로 중국적 명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심오하고도 실천적인 지혜라 하겠습니다.
제3절: 망각의 강, 맹파 (孟婆)의 차를 마시고 다시 태어나다
염라왕 (閻羅王)의 서늘한 시선과 업경대 (業鏡臺)의 정직한 빛을 지나, 마침내 모든 형벌을 감내하고 정화된 영혼은 새로운 탄생을 향한 마지막 문턱에 섭니다. 그곳에는 거대한 윤회의 수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고, 그 앞으로는 한번 건너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 즉 망천 (忘川)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 위에는 모든 영혼이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애처로운 이름의 다리, 나하교 (奈何橋)가 놓여 있습니다. 이 다리의 끝에서, 한 늙은 여신이 다음 세상으로 떠날 영혼들을 위해 아주 특별한 차를 끓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맹파 (孟婆)입니다. 그녀는 명계의 다른 신들처럼 위엄 있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영혼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온, 지혜로우면서도 슬픈 눈빛을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녀의 임무는 단 하나, 이제 곧 새로운 육신을 받아 지상으로 돌아갈 영혼들에게,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디유 (Diyu)의 강물과 연못에서 자라난 약초들을 모아, 이 세상의 모든 맛—달고, 쓰고, 맵고, 시고, 짠 맛—이 뒤섞인 오미(五味)의 탕약을 끓여냅니다. 이것이 바로 마시는 순간 전생의 모든 기억과 명계에서의 모든 고통을 잊게 만든다는 ‘맹파탕 (孟婆湯)’, 즉 망각의 차입니다.
모든 영혼은 예외 없이 이 차를 마셔야만 합니다. 만약 어떤 영혼이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집착 때문에 차 마시기를 거부한다면, 그녀의 발밑에 있는 갈고리가 그의 발을 꿰고, 날카로운 구리 관이 그의 목구멍으로 억지로 탕약을 밀어 넣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망각은 선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자, 명계의 엄격한 법칙입니다.
이 강제적인 망각의 과정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잔인한 처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깊은 자비와 실용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이전 생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생에서 지극히 사랑했던 가족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새로운 인연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전생의 원수를 향한 증오심은, 아무 이유 없이 새로운 관계를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디유의 끔찍한 지옥들에서 겪었던 그 고통의 기억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모든 의지와 용기를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맹파의 차는 영혼의 기억을 지우는 독(毒)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아무런 편견 없이 순수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업보(業報)라는 무거운 짐은 남겨두되, 그 업보에 얽힌 감정의 굴레로부터 영혼을 해방시켜주는, 우주적인 자비의 장치인 것입니다. 영혼은 이제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를 묻는 대신, 주어진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과제를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남겨진 업보를 묵묵히 풀어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플라톤 (Plato)의 레테 (Lethe) 강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지혜로운 철학자는 망각의 강물을 ‘적당히’ 마심으로써, 진리에 대한 희미한 기억(Anamnesis, 아남네시스)의 씨앗을 간직한 채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민간 신앙 속에서, 맹파의 차는 모든 영혼에게 동등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작용합니다. 여기서는 철학적 지혜의 유무보다, 모든 영혼이 공평한 조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동체적 질서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합니다.
망각의 차를 마시고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영혼은, 텅 빈 무(無)의 상태가 되어 나하교를 건넙니다. 다리 건너편에서는 거대한 ‘육도윤회의 수레바퀴 (六道輪迴)’가 천천히 돌고 있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지상에서 쌓은 마지막 업의 결과에 따라,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라는 여섯 갈래의 길 중 하나로 이끌려, 마침내 새로운 육신을 얻어 태어납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길고 긴 삶의 여정이, 이전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맹파는 우리가 이 장에서 만난 신들 중 가장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그녀는 기억과 정체성을 지우는 망각의 여신이지만, 그녀의 행위가 없다면 그 어떤 새로운 시작도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씁쓸한 차 한 잔은, 윤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계속해서 순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자비의 묘약입니다. 그 탕약의 맛 속에는, 하나의 삶을 끝내고 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존재의 근원적인 법칙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제4절: 손오공의 생사부, 죽음의 질서를 거부한 신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명계의 엄격한 법칙과 질서, 그 거대한 관료 체계의 톱니바퀴를 맨몸으로 부수고 역류한, 전무후무한 존재가 있습니다. 왕후장상 (王侯將相)은 물론, 그 어떤 영웅호걸이라도 저승사자의 부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만 했던 디유 (Diyu)의 철칙을, 오직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정면으로 거부했던 존재. 그는 바로 천지의 기운으로 태어난 돌 원숭이이자, 도(道)를 깨쳐 불사의 능력을 넘보았던 제천대성 (齊天大聖) 손오공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순응과 정화로 대표되는 명계의 질서에 ‘저항’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던져 넣습니다.
손오공은 화과산 (花果山)의 아름다운 수렴동 (水簾洞)에서 원숭이들의 왕으로 군림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득 늙은 원숭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에 깊은 시름에 빠집니다. 이 실존적 각성은 그를 불로장생의 술법을 찾아 떠나는 긴 구도의 여정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그는 수보리조사 (須菩提祖師)라는 위대한 신선을 만나 72가지 변신술과 근두운 (筋斗雲)을 타는 법 등 엄청난 도술을 익히게 됩니다. 이제 자신은 삼계 (三界)를 벗어나 오행 (五行) 가운데 있지 않으니, 더 이상 염라왕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치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잠이 든 그의 앞에 두 명의 저승사자가 나타나, 쇠사슬로 그의 혼을 묶어 명계로 끌고 갑니다. 다른 영혼들이 공포에 떨며 순순히 끌려가는 것과 달리, 손오공의 영혼은 분노와 의혹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 손오공은 이미 도를 닦아 생사를 초월한 몸이거늘, 어찌하여 감히 나를 잡으러 왔느냐!”
그의 저항은 단순한 발버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성취한 경지에 대한 확신이자, 명계의 관료 체계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명계의 입구에 도착한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귓속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무기, 여의금고봉 (如意金箍棒)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두 저승사자는 그의 무기에 맞아 한 줌의 고깃덩이가 되어버리고, 손오공은 성문과 관문을 닥치는 대로 부수며 염라왕의 법정으로 직접 쳐들어갑니다. 이전 절에서 우리가 보았던, 모든 영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시왕 (十王)과 그들의 수많은 귀졸(鬼卒)들은, 이 전대미문의 침입자 앞에서 혼비백산하여 옥좌 아래에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심판자와 피심판자의 위치가 완전히 역전된 것입니다.
손오공은 시왕들을 호령하여 모든 생명의 이름과 수명이 기록된 장부, 즉 생사부 (生死簿)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원숭이 족보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아래에 ‘천수를 누리고 죽을 운명’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본래 정해진 수명이 없거늘, 여기에 내 이름을 적어놓다니!”
그는 붓을 빼앗아 들고는, 자신의 이름 위에 먹물을 거칠게 칠하여 지워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 즉 화과산의 모든 원숭이들의 이름까지 찾아내어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버립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불멸의 추구를 넘어, 자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존재를 죽음의 운명에서 함께 해방시키려는, 지극히 대승적인 자비심의 발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손오공의 행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죽음이라는 우주적 질서는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거부될 수 있는가? 디유의 관료 체계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에 기반을 둔, 피할 수 없는 카르마 (Karma)의 법칙을 상징한다면, 손오공은 자신의 몸을 우주와 같이 단련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창조하려는 도교적 신선 (神仙) 사상의 궁극적인 화신입니다. 그의 명계 소동은, 이 두 거대한 사상 체계가 충돌하는 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위는 명백히 우주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엄청난 반역이었습니다. 생사부의 기록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정해진 운명의 실을 끊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옥황상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그가 천상의 군대에 쫓기고 마침내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오행산 (五行山) 아래 갇히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는 개인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더 큰 우주적 질서, 즉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상징되는 거대한 법칙에서는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손오공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죽음을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인간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의 영원한 열망을 상징합니다. 그는 길가메쉬 (Gilgamesh)처럼 필멸을 끌어안지도, 다른 영혼들처럼 심판에 순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정해진 죽음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불멸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손오공의 이야기는, 진정한 불멸이란 단순히 죽음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그의 진정한 구원은, 오행산 아래에서의 오랜 속죄의 시간을 거쳐, 삼장법사를 도와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자신의 힘을 중생 구제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집ü니다. 그의 저항은 비록 미숙하고 오만했지만, 그것은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 즉 대승보살도 (大乘菩薩道)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인 성장통이었던 셈입니다.
제5절: 도교의 가르침, 자연의 순리(道)로서의 죽음
우리가 지금까지 여행해 온 디유 (Diyu, 지옥의 일종)의 복잡한 법정과 엄격한 심판의 세계를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그 모든 인위적인 구조물이 녹아내리는 고요하고 깊은 자연의 품으로 들어섭니다. 불교적 명계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도덕적 책임을 물었다면, 중국 정신의 또 다른 위대한 기둥인 도교 (Taoism)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심판관도, 형벌도, 심지어는 구원이라는 개념마저도 희미해집니다. 오직 거대하고 말없는 자연의 흐름, 즉 도 (道)가 있을 뿐이며, 죽음은 그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화로운 하나의 과정이 됩니다.
도교 사상의 정수가 담긴 노자 (老子)의 『도덕경』은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길게 논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야말로 도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도 (道)는 이름 붙일 수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 없는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이자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이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삶과 죽음은 서로를 적대하는 두 개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들숨과 날숨처럼, 하나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서로를 낳고 완성하는 자연스러운 두 가지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는 태어남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하지만, 도에게는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가치 판단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초구).”라는 『도덕경』의 구절은, 자연의 질서가 인간적인 선악이나 애증의 감정을 초월해 있음을 서늘하게 일깨워줍니다.
따라서 도를 체득한 성인 (聖人)은 삶에 집착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거대한 파도 위에 몸을 맡긴 뱃사공처럼, 도의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뿐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개별적인 형태로 잠시 세상에 나왔던 기 (氣)와 생명력이 다시 그 근원인 도로 돌아가는 ‘복귀 (復歸)’의 과정입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 다음 해 봄의 새싹을 위한 거름이 되듯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고요한 준비 단계인 것입니다. 이 거대한 순환을 이해하는 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닌 평화로운 안식이 됩니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을 더욱 생생하고도 극적인 이야기로 풀어낸 이는 장자 (莊子)입니다. 그의 책 『장자』에는 죽음을 마주하는 도인의 태도가 여러 우화를 통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의 친구 혜시 (惠施)가 조문을 하러 그의 집에 찾아왔을 때, 장자는 슬피 우는 대신,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책망하자, 장자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나라고 어찌 처음부터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아내는 본래 생명이 없었고, 형체도 없었으며, 기 (氣)조차 없었네. 그 막연함 속에서 변화가 생겨 기가 있게 되었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으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있게 되었지. 그리고 이제 또다시 변화하여 죽음으로 돌아간 것일세.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녀는 지금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데, 내가 그 곁에서 목 놓아 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천명 (天命)을 모르는 처사라 생각하여 울음을 그쳤다네.”
이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우주적 통찰입니까. 그는 아내의 죽음을 개인적인 상실로 보지 않고, 우주적 변화의 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슬픔의 부정이 아니라, 더 큰 앎을 통해 슬픔을 초월한 자의 평온한 기쁨이었습니다. 장자는 또한 ‘거대한 흙덩이 (大塊)’라는 비유를 통해 삶과 죽음을 설명합니다. 이 거대한 흙덩이, 즉 도 (道)가 우리에게 육신을 주어 삶의 수고로움을 겪게 하고, 늙음의 편안함을 주며, 마침내 죽음의 안식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선 (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같은 이유로 죽음 또한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도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위(無爲)’라는 가장 깊이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저항하거나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온전히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손오공이 명계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도교의 현자는 그 질서 자체를 거대한 도의 춤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함께 춤을 춥니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선행과 악행을 기록하는 장부도, 죄를 심판하는 거울도 필요 없습니다. 궁극적인 과제는, 영혼이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이 본래 거대한 도의 일부였음을 깨닫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도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방울의 물이 마침내 드넓은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방울은 자신의 개별적인 형태를 잃어버리지만,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더 큰 전체와의 합일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나’라는 분리된 의식의 고통도, 생사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평화와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온전히 끌어안는 것, 이것이야말로 도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위안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