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교한 관료 체계로 세워진 명계를 지나, 우리의 여정은 이제 바다를 건너 일본의 신화가 태어난 섬들로 향합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후 세계는, 이전의 그 어떤 명계와도 다른, 서늘하고도 비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곳은 죄를 심판하는 법정도, 영혼을 정화하는 연옥도, 영웅을 위한 낙원도 아닌, 오직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와 그로 인한 부정함 (穢れ, kegare, 케가레)만이 존재하는 원초적인 어둠의 공간입니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 『고사기, Kojiki』와 『일본서기, Nihon Shoki』가 전하는 창세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이 명계, 즉 요미노쿠니 (黄泉国)의 문턱에서 벌어진 한 신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일본 정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천상의 다리 위에 서서 창으로 혼돈의 바다를 휘저어 일본 열도를 낳은 위대한 창조신 부부, 이자나기 (Izanagi)와 이자나미 (Izanami)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을 낳으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비극은 불의 신 카구츠치 (Kagutsuchi)가 태어나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을 낳는 과정에서 끔찍한 화상을 입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여 저 어두운 황천국, 요미노쿠니로 떠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이자나기의 슬픔은 너무나도 깊어, 그는 마침내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해 산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금기의 땅으로 직접 내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여정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Orpheus)가 에우리디케 (Eurydice)를 찾아 떠났던 길과 닮아있지만, 그 결말은 훨씬 더 냉혹하고 절망적입니다. 어둡고 축축한 길을 따라 마침내 요미노쿠니의 입구에 도착한 이자나기는, 육중한 문 저편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아내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는 애타게 부르짖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그대와 내가 만들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소. 부디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이자나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와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저는 이미 황천국의 음식을 먹어버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황천국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명계의 법칙에 완전히 귀속되었음을 의미하는, 전 세계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존재론적으로 수용했음을 의미하며, 더 이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가역적인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자나미는 남편의 간절한 청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황천의 신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한번 상의해 보겠다며 한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결코 자신의 모습을 엿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나긴 기다림에 지친 이자나기는 결국 약속을 어기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꽂고 있던 빗의 굵은 살 하나를 부러뜨려 불을 붙여, 어둠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지상에서 가장 끔찍한 광경과 마주합니다. 한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의 아내, 이자나미의 몸은 구더기가 들끓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고, 그 몸에서는 여덟 종류의 뇌신 (雷神)들이 태어나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속성, 즉 생명의 소멸이 낳는 ‘부정함’과의 정면 대면이었습니다. 신토 (神道)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정결함 (清め, kiyome, 키요메)의 관점에서, 썩어가는 시체는 가장 부정한 것이었으며, 이자나기는 그 끔찍한 현실 앞에서 경악하여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킨 것에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이자나미는, 황천의 추악한 여인들과 뇌신들, 그리고 1,500명의 군사를 보내 그를 뒤쫓게 합니다. 이자나기는 머리 장식과 빗을 던져 포도와 죽순으로 바꾸어 시간을 벌고, 마지막에는 요미노쿠니와 이승의 경계인 요모츠히라사카 (黄泉比良坂)에 열려 있던 복숭아 세 개를 던져 추격자들을 물리칩니다.
마침내 이승으로 탈출한 이자나기는, 두 세계의 경계를 누구도 넘지 못할 거대한 바위, 치가에시노오오카미 (千引の石)로 막아버립니다. 바위 저편에서 이자나미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여, 당신이 이처럼 나에게 수치를 주었으니, 나는 당신의 나라 사람들을 하루에 천 명씩 죽일 것입니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그대가 그리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오백 개의 산실 (産室)을 세우리라.”
이 마지막 대화는 삶과 죽음의 영원한 대립과 순환을 선언하는, 장엄하고도 비정한 이별의 의식입니다. 이로써 삶과 죽음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왕국으로 완전히 분리되었고, 인간은 매일 천 명씩 죽고 천오백 명씩 태어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학교’에서 이자나기 신화는 우리에게 ‘경계의 신성함’과 ‘수용의 부재’에 대해 가르칩니다. 이 이야기에는 죽음을 통해 영혼이 성장하거나 정화되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의 끔찍한 현실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친 산 자의 공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자나기는 죽음의 부정함을 정화하기 위해 강물에 들어가 목욕재계 (禊, misogi, 미소기)를 하고, 그 과정에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Amaterasu)와 달의 신 츠쿠요미 (Tsukuyomi), 그리고 폭풍의 신 스사노오 (Susanoo)라는 위대한 신들을 낳습니다. 이는 부정한 것을 씻어냄으로써 새로운 신성함이 탄생한다는, 신토의 핵심적인 정화 사상을 보여줍니다.
요미노쿠니의 이야기는, 죽음이 지닌 근원적인 공포와 부정함을 직시하되, 결코 그것과 섞여서는 안 된다는 서늘한 가르침을 남깁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으며, 산 자의 의무는 죽음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부지런히 생명을 낳고 정결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이 비극적인 신화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제2절: 황천국의 음식, 죽음의 세계에 속박되는 법칙
앞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요미노쿠니 (黄泉国)의 문턱까지 내려갔던 창조신 이자나기 (Izanagi)의 비극적인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모든 슬픔과 공포의 중심에는, 어둠 속에서 들려왔던 이자나미 (Izanami)의 한마디, “저는 이미 황천국의 음식을 먹어버렸습니다”라는 체념 어린 고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신화와 민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죽음의 세계가 지닌 돌이킬 수 없는 법칙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도 원형적인 선언입니다.
‘명계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영혼이 더 이상 이승의 방문객이 아니라 저승의 완전한 거주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계약 체결과도 같습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외부의 물질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 내 살과 피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동화(assimilation) 작용입니다. 따라서 황천국의 음식을 먹는 순간, 이자나미의 영혼과 육신은 더 이상 지상의 존재가 아니라, 요미노쿠니의 흙과 물, 그리고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그 본질 자체가 변성(變性)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녀가 썩어가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은,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죽음의 세계에 속한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징표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세계에 한번 귀속된 자는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는 냉혹한 법칙은, 그리스 신화 속 페르세포네 (Persephone)의 이야기에서 더욱 서정적인 비극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Demeter)의 사랑스러운 딸이었던 페르세포네는, 명계의 왕 하데스 (Hades)에게 납치되어 그의 신부가 됩니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의 슬픔이 너무나도 깊어, 지상의 모든 곡식과 열매는 자라나기를 멈추고 세상은 영원한 겨울에 휩싸입니다. 마침내 제우스 (Zeus)가 중재에 나서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명계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이미, 하데스가 건넨 석류 몇 알을 먹은 뒤였습니다. 이 작은 행위 하나가 그녀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으며, 일 년의 일부(주로 겨울에 해당하는 3분의 1 혹은 절반)는 명계의 여왕으로서 하데스와 함께 보내고, 나머지 기간에만 지상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 머무는 동안 대지는 슬픔에 잠겨 겨울이 되고, 그녀가 지상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봄이 찾아와 만물이 소생하게 됩니다.
이자나미의 이야기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동일한 법칙을 공유하지만, 그 결과는 각 문화의 세계관을 반영하며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일본 신화에서 이자나미가 황천국의 음식을 먹은 결과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버리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단절’이었습니다. 이는 정(淨)과 부정(不淨)을 엄격히 구분하고, 두 세계가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는 신토 (神道)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반면,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가 석류를 먹은 결과는 죽음과 삶, 겨울과 봄이 영원히 순환하는 ‘주기적인 연결’이었습니다. 이는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며 그 안에서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황천국의 음식’이라는 상징은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귀속’이라는 엄중한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영혼이 새로운 차원, 즉 죽음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그곳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그 일부가 되는 상징적인 행위가 바로 그곳의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새로운 나라로 이주한 사람이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그 나라의 법과 질서에 따라야 하는 구성원이 됩니다.
이 법칙은 왜 그토록 많은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현상이 지닌 근원적인 비가역성에 대한 인류의 직관적인 통찰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한번 무기물로 돌아가면, 다시 이전과 같은 생명으로 되돌아오기는 불가능합니다. 신화는 이처럼 냉혹한 자연법칙에 ‘음식을 먹는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서사적인 의미와 질서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자나미가 먹은 황천국의 음식과 페르세포네가 맛본 석류 몇 알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영혼이 치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 세계와의 완전한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자신의 존재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침묵의 서약입니다. 이 서약을 통해 영혼은 비로소 죽음의 왕국에 자신의 자리를 얻게 되지만, 그 대가로 지상의 햇빛을 향해 열려 있던 문은 영원히 닫히게 됩니다.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음식’이라는 상징을 통해,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강의 깊이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3절: 신토(神道)의 정결함(穢れ), 죽음과 삶의 엄격한 분리
우리가 앞서 탐험한 요미노쿠니 (黄泉国)의 비극적인 풍경은, 단순한 신화적 상상력을 넘어, 일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원적인 열쇠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신토 (神道)의 독특하고도 확고한 시선입니다. 서양의 종교가 죽음을 죄(sin)의 결과로, 불교가 업(業)의 순환으로 이해했다면, 신토는 죽음을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형이상학적 해석 이전에, 하나의 즉각적이고도 위험한 상태, 즉 ‘부정함 (穢れ, kegare, 케가레)’ 그 자체로 인식했습니다. 이 ‘케가레’라는 개념이야말로, 삶과 죽음 사이에 거대한 바위를 세워두고 두 세계를 엄격하게 분리시킨 일본적 사후관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케가레’는 죄나 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활력 (気, ke, 케)이 마르고 (枯れ, kare, 카레) 시들어버린, 일종의 존재론적 오염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토의 세계관에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존재는 ‘무수비 (Musubi, 産霊)’라는 신비로운 힘으로 끊임없이 태어나고 생장합니다. 무수비는 만물을 낳고 기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연결하고 조화롭게 묶어주는 우주적인 생성의 작용 그 자체입니다. 이 생명력으로 충만한, 맑고 밝고 올바른 상태를 하레 (hare, 晴れ)라고 합니다. 신토의 모든 의례는 바로 이 ‘하레’의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 죽음은 이 무수비의 생성과 연결의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단절시키고, 모든 것을 부패와 소멸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케가레’의 원천입니다. 생명이란 충만하고 깨끗하며 활기찬 것이지만,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썩게 만드는, ‘하레’의 완전한 반대 상태인 것입니다.
이 부정함은 마치 전염병처럼, 죽은 자와 접촉한 산 자에게,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공간과 사물에까지 옮겨간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격리시켜야 할 위험한 오염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원형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창조신 이자나기의 명계 하강 신화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 이자나미 (Izanami)의 썩어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도망친 이유는, 단순한 미추 (美醜)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빚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부정함, 즉 ‘케가레’의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가 황천국의 추격을 피해 이승으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행위가 강물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는 ‘목욕재계 (禊, misogi, 미소기)’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죽음의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묻은 ‘케가레’를 씻어내고, 다시 생명의 질서, 즉 ‘하레’의 상태로 복귀하기 위한 필사적인 정화 (淨化) 의식이었습니다. 이자나기가 왼쪽 눈을 씻을 때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Amaterasu)가 태어나고, 오른쪽 눈을 씻을 때 달의 신 츠쿠요미 (Tsukuyomi)가 태어났으며, 코를 씻을 때 폭풍의 신 스사노오 (Susanoo)가 태어났다는 『고사기, 古事記』의 기록은, 바로 이 정화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신성 (神性)과 창조가 일어난다는 신토의 핵심 사상을 보여줍니다. 부정함을 씻어내는 행위, 즉 정결함 (清め, kiyome, 키요메)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신토의 가장 중심적인 종교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케가레’에 대한 관념은 일본인들의 삶과 죽음의 의례 곳곳에 구체적인 형태로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성한 신 (kami, 神)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신사 (神社)의 신관 (神官)은 장례식에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신사는 생명을 축복하고 기원하는 곳이기에, 죽음이라는 가장 큰 ‘케가레’가 그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금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완벽하게 분리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분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유족들은 집에 들어서기 전, 현관 앞에서 가족이 뿌려주는 소금을 맞습니다. 소금은 예로부터 부정을 없애고 악한 기운을 쫓는 강력한 정화의 힘을 지녔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행위는 장례식장에서 묻혀 온 죽음의 ‘케가레’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문밖에서 털어내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불제 (祓, harae, 하라에)’ 의식입니다.
이처럼 신토의 가르침은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이 남긴 ‘케가레’를 어떻게 정화하고 다시 삶의 질서로 복귀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토가 이처럼 현세의 정결함을 지키는 데 몰두했기에,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영혼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침묵을 지켰습니다. 신토의 관점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공동체를 지켜주는 조상신 (祖上神)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정화되지 못하면 재앙을 가져오는 원령 (怨霊)이 될 수도 있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에 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로 야스쿠니 신사 (靖国神社)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전통 신토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언뜻 보기에 야스쿠니 신사는 신토의 의례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과 목적은 생명력과 정화를 중시하는 전통 신토의 정신과는 크게 다릅니다.
전통 신토가 자연과 생명의 순환, 공동체의 안녕과 조화라는 보편적 가치에 뿌리를 둔 종교라면, 야스쿠니 신사는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깊이 결합된,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시설입니다. 이곳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신 (kami, 神)으로 모신다고 하지만, 그 대상에는 국제 사회에서 A급 전범으로 단죄된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전통 신토에서 신이 되는 과정은 자연 발생적이거나 공동체의 오랜 추앙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합사 (合祀)는 국가가 특정 인물들의 죽음을 ‘순국’으로 규정하고 일방적으로 신의 반열에 올리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이는 죽음이 남기는 부정함 (케가레)을 정화하고 삶의 질서로 복귀하려는 신토 본래의 목적을 넘어, 특정 죽음을 미화하고 과거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즉, 야스쿠니 신사는 신토의 형식을 빌렸으나, 그 내용은 생명과 조화를 추구하는 전통 신토의 철학보다는 국가주의적 목적에 복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토라는 거대한 정신세계의 본질을 오해하는 중대한 오류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사후 세계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이 부재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영혼에는 하나의 커다란 공백이 남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남겨진 이들은 죽은 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신토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공백을 채우며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 바로 불교 (Buddhism)였습니다. 불교는 복잡하고 정교한 내세관과 윤회 사상, 그리고 망자를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체계적인 의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두 개의 다른 가르침을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 독특한 종교적 습합(習合)을 이루어냈습니다. 즉, 삶의 영역은 신토가, 죽음의 영역은 불교가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은 태어났을 때 신사에서 축복을 받고 (오미야마이리, お宮参り), 성인이 되었을 때나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신토의 의례를 따르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절에 가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신불습합 (神仏習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토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매우 독특한 삶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 목표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거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을 얼마나 깨끗하고 조화롭게 유지하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죽음은 이 삶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오염원이기에,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격리하고 정화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는 영혼의 성장을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다른 많은 영적 전통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입니다.
결국 신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지금, 여기 (中今, nakaima)’의 신성함입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부정함의 그림자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는 정화의 노력을 통해 생명의 충만함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조화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자나기 신이 자신의 몸을 씻어내자 그곳에서 가장 위대한 신들이 태어났듯이, 그들은 ‘케가레’를 정화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 생명의 가장 빛나는 가능성이 숨어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긋는 신토의 세계관은,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이 순간의 소중함과 그 안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결한 삶의 의무를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강렬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제4절: 바리공주,
효(孝)와 희생으로 명계를 길어 올린 무조신(巫祖神)
우리가 지금까지 여행해 온 수많은 명계의 영웅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한국의 서사무가 (敍事巫歌) 속에 등장하는 바리공주만큼 이타적이고, 능동적이며, 마침내 죽음의 질서 그 자체를 바꾸어 놓은 존재는 없었습니다. 오르페우스 (Orpheus)가 개인의 사랑을 위해 명계의 문을 열었다 실패했고, 길가메쉬( Gilgamesh)가 자신의 불멸을 위해 처절하게 방황했으며, 아이네이아스 (Aeneas)가 제국의 운명을 위해 지하 세계의 예언을 구했다면,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억울한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강을 건넜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한반도의 무속 (shamanism) 신앙의 기원이자, 유교적 ‘효(孝)’ 사상을 넘어선 ‘자비’의 화신이며, 버려진 여성이 어떻게 가장 위대한 신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한국적인 구원의 서사시입니다.
이야기는 깊은 단절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 시작됩니다. 먼 옛날,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연이어 여섯이 태어났습니다. 가부장적 왕국의 질서 속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향한 갈망은 집착이 되었고, 일곱 번째 아이만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태어난 아이는 또다시 딸이었습니다. 실망과 분노에 휩싸인 왕은 “이 아이를 버리라”는 무정한 명령을 내립니다. ‘버려진 공주’라는 뜻의 ‘바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이는, 옥으로 만든 함에 담겨 차가운 강물에 띄워집니다. 이것은 그녀의 삶이 축복이 아닌 저주 속에서, 환영이 아닌 배척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한 근원, 즉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거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한(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이한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옥함은 까마귀와 거북, 그리고 용의 보호를 받으며 흘러가다, 마침내 자비로운 석가세존의 손에 발견되고, 바리공주는 석가 부부 (혹은 다른 노부부)의 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자라납니다. 이처럼 인간 세상의 질서로부터는 버림받았으나, 우주와 자연의 신성한 존재들에게는 보호받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이미 평범한 운명을 넘어선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시간이 흘러 바리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녀를 버렸던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은 하늘의 벌을 받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불치병에 걸립니다. 그 어떤 명의나 약초도 소용이 없었고, 마침내 꿈에 나타난 신령은 단 하나의 처방을 알려줍니다. 서쪽 끝 저승 세계에 있다는 ‘생명수’와 ‘불사초’를 구해와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여섯 명의 공주들을 불러 모아, 자신들을 위해 저승길에 올라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공주들은 저승이라는 말에 겁을 먹고, 온갖 핑계를 대며 모두 거절합니다. 왕국의 모든 신하들 또한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의 순간, 한 신하가 과거에 버렸던 일곱 번째 공주의 존재를 떠올립니다. 왕은 뒤늦은 후회와 함께 바리공주를 찾아오게 합니다.
마침내 부모 앞에 선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렸던 그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도 조금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부모의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기꺼이 가겠다고 맹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효심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존재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는, 성자 (聖者)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위대한 자비심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녀의 위대한 여정은 바로 이 ‘용서’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시작됩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버려짐’이라는 가장 깊은 한을 스스로 정화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리공주의 저승 여행은, 한 명의 샤먼이 탄생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입문 (initiation) 과정, 즉 카타바시스 (Katabasis)입니다. 그녀는 쇠로 만든 옷 세 벌과 지팡이 아홉 개가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걸어야 하는 머나먼 길을 떠납니다. 그녀의 앞에는 열두 개의 높은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며, 그 길은 온통 칼날과 바늘이 심어진 들판이었습니다. 그녀는 붉은 강과 검은 강, 즉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의 강들을 건너고, 수많은 굶주린 귀신들의 방해를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은, 샤먼이 되기 위해 겪는다는 극심한 고통의 ‘무병 (巫病)’을 상징하며, 그녀가 이 고통을 이겨낼 때마다 그녀의 영적인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수많은 고난 끝에 그녀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생명수를 지키는 거대한 무쇠 성이었습니다. 그 성의 주인은 ‘무장승’ 혹은 ‘동수자’라 불리는 명계의 수문장이었습니다. 그는 바리공주에게 생명수를 내어주는 대가로 세 가지의 노역을 요구합니다. 3년 동안 불을 때고, 3년 동안 물을 길으며, 3년 동안 밥을 짓는, 총 9년간의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바리공주는 부모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이 모든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9년의 세월이 흐른 뒤, 수문장은 마지막 대가를 요구합니다. 바로 자신과 혼인하여 아들 일곱을 낳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여정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자, 가장 신성한 통과 의례였습니다. 그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과 정체성을 온전히 바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녀는 깊은 고뇌 끝에 이 요구마저 받아들입니다. 이 ‘신성한 혼인 (hieros gamos, 히에로스 가모스)’은, 샤먼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신령 세계와의 합일을 상징합니다. 그녀는 이 혼인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경계를 넘어, 저승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일곱 아들을 낳은 그녀는, 마침내 약속대로 생명수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숨살이꽃’, ‘뼈살이꽃’, ‘살살이꽃’을 얻어, 아들들과 함께 이승으로의 귀환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녀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주한 것은, 이미 숨을 거둔 부모님의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그녀가 저승에서 보낸 기나긴 세월 동안, 부모님의 육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바리공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관 뚜껑을 열고, 뼈만 남은 부모님의 시신 위에 뼈살이꽃과 살살이꽃, 숨살이꽃을 차례로 얹고 생명수를 뿌립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나, 뼈와 살이 다시 돋아나고 마침내 부모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부활합니다.
죽음마저도 되돌린 그녀의 위대한 공덕 앞에, 오구대왕은 나라의 절반을 떼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바리공주는 이 모든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거절합니다. 그녀의 여정은 개인적인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선언합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죽은 자들, 특히 억울하게 죽어 저승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는 영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신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대신,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스리는 자비의 여신, 즉 모든 무당들의 시조모신인 무조신 (巫祖神)이 됩니다. 그녀는 저승의 구조를 파괴하거나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곳에 ‘자비’라는 새로운 길을 내어, 공포의 공간을 구원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우리가 탐구해 온 모든 영웅 서사를 초월하는 가장 숭고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멸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타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녀의 효 (孝)는 유교적인 의무감을 넘어선, 원수마저 사랑하는 자비심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녀 이전까지 망자들은 그저 공포와 혼돈 속에서 저승으로 끌려갔지만, 그녀 이후의 영혼들은 비로소 그녀의 인도를 받아 위로와 안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바리공주는, 가장 낮은 곳으로 버려졌던 존재가, 가장 숭고한 희생을 통해, 가장 위대한 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국의 영혼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보살 (Bodhisattva, 菩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장 깊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 가장 찬란한 구원의 빛이 태어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조용한 울림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5절: 저승차사,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의 길 안내
바리공주가 억울한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화신이라면, 저승차사 (低勝差使)는 정해진 운명의 때가 된 영혼의 이름을 부르러 오는, 우주적 법칙의 냉엄한 집행관입니다. 그들의 등장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명계의 법률에 따라 처리되어야 할 하나의 ‘영혼’으로 전환되는, 서늘하고도 비정한 순간을 알립니다. 그들은 악의를 품은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관료 체계의 일부로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공무원과도 같습니다. 검은 도포에 갓을 쓴 그들의 모습은, 죽음의 집행이 신의 변덕이나 혼돈이 아닌, 하나의 질서정연한 ‘행정 절차’임을 상징합니다.
이들의 임무와 그 기원을 가장 깊이 있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제주도의 서사무가 「차사본풀이」입니다. 이 장대한 이야기는 저승차사의 시조가 본래 신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 영웅이었음을 밝히며, 명계의 질서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를 노래합니다. 이야기는 이승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시작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여인의 깊은 한(恨)이 저승의 질서마저 흔들자, 염라대왕은 문제의 원인이 된 인간들을 저승으로 잡아오라 명합니다. 그러나 저승의 그 어떤 존재도 산 자들의 세계로 가는 험난한 길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그들조차 넘을 수 없는 두려운 경계가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하던 염라대왕은 마침내 한 가지 묘책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저승의 법칙이 아닌 이승의 법칙을 역으로 이용하는, 지극히 역설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저승의 존재가 산 자의 세계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이승의 존재를 저승으로 불러와 임무를 맡기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즉시 명계의 모든 기록을 뒤져, 인간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용맹하며, 동시에 법과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강직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포도대장으로 일하며 그 위용을 떨치던 관리, 강림도령 (降臨道令)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의 사자들이 한밤중에 강림을 찾아왔으나, 그들은 곧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강림은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氣)가 뿜어져 나와, 어둠 속의 존재들이 감히 그의 몸에 손을 댈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자들이 그의 혼을 묶으려 하자, 강림은 잠결에도 이를 뿌리치며 저항했습니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앞에 선 기이한 존재들을 보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호통을 쳤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의 몸이다. 나의 주군은 오직 이 땅의 임금님이시니, 그분의 허락 없이는 누구의 명도 따를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저항이 아닌, 자신의 소임에 대한 투철한 책임감과 세계관의 선언이었습니다. 강림에게는 이승의 법도가 저승의 법도보다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강직함에 질린 사자들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보고를 들은 염라대왕은 노하기는커녕 깊이 감탄했습니다. 저토록 강직한 인물이야말로 자신의 대리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자신의 격을 낮추어, 정식으로 조선의 임금에게 ‘저승의 왕 염라가 귀국의 신하 강림을 잠시 빌려 쓰고자 하니, 공무 출장을 명하여 주십시오’라는 외교 문서를 보냈습니다. 두 세계의 왕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는 예를 갖춘 뒤에야, 비로소 강림은 저승으로 향하는 장엄하고도 험난한 여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강림이 겪는 저승으로의 여정은, 수많은 신화 속 영웅들이 겪었던 카타바시스 (Katabasis)의 가장 한국적인 변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산 자이기에 죽은 자들이 가는 길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혜를 발휘하여, 마침 한 노인의 장례 행렬을 발견하고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여꾼들의 구슬픈 노랫소리는 이정표가 되었고, 그들의 발걸음은 그를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망자들이 건너는 황천강 (黃泉江)에 도달하여 뱃사공에게 뱃삯을 요구받자, 가진 돈이 없음에 자신의 관복을 벗어 저당 잡히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길 위에서는 굶주린 수많은 원혼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용맹으로 그들을 모두 물리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염라대왕의 궁궐 앞에 당도한 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문지기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는 조선 국왕의 명을 받들어, 염라대왕을 모시러 온 사신이다. 길을 비키지 못할까!”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승의 왕 앞에서도 자신의 소임과 근본을 잊지 않는 당당함,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철저한 책임감에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그의 담대함과 기백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자신의 옥좌를 내어주며 판결이 어려운 사건들을 처리하게 했습니다. 강림은 그 자리에서 명쾌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 저승의 모든 관리들마저 탄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모든 공적과 인품을 확인한 염라대왕은, 마침내 그에게 본래의 임무, 즉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정해진 명 (命)이 다한 영혼들을 인도하는 저승차사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임명이 아닌,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신적 존재로 거듭나는 승격의 순간이었습니다. 강림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인간의 몸을 벗고 모든 저승차사들을 이끄는 위대한 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승차사는 본래 인간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인간 세상의 길과 지리, 그리고 인간의 슬픔과 저항, 그 애틋한 사정을 잘 아는, 가장 완벽한 두 세계의 중재자가 된 것입니다.
저승차사가 임무를 수행할 때 손에 들고 오는 것이 바로 적패지 (赤牌旨)라 불리는 붉은 글씨의 패입니다. 여기에는 영혼의 이름과 떠나야 할 시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명령서와도 같습니다. 그 어떤 부귀영화나 권력도 이 붉은 패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그들은 또한 영혼을 묶는 오랏줄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는 영혼이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이승에 머무를 수 없음을 상징하는, 법칙의 서늘한 구속력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냉엄한 법칙의 집행 과정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서에는 인간적인 교감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승차사를 위해 따로 차사상을 차려주는 풍습이 그것입니다. 밥 세 그릇과 나물 세 가지, 동전 세 닢과 짚신 세 켤레를 차려놓는 이 행위는, 운명을 바꾸려는 뇌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고 험한 길을 온 손님 (저승차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이제 곧 그들과 함께 더 멀고 험한 길을 떠나야 할 우리 가족(망자)을 부디 험하게 다루지 말아 달라는, 남은 자들의 간절한 정(情)의 표현입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조차, 관계와 예의를 통해 마지막 순간의 존엄과 평온을 찾으려는 지혜로운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저승차사는 한 영혼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러 오는 엄숙한 안내자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한 영혼의 기나긴 순례가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장엄한 전환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리공주의 따뜻한 자비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우주의 질서를 엄격히 유지함으로써 혼돈을 막는 ‘차가운 자비’를 베푸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이성과 감성, 질서와 자비의 두 축이 함께 어우러져, 한국의 명계는 비로소 그 완전하고도 깊이 있는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제6절: 한(恨)의 정화, 한국적 사후 세계관의 심층
모든 삶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저마다의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로 짜인 한 편의 서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완전한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는 가장 중요한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어떤 목소리는 세상의 소음에 묻혀 끝내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바로 이처럼, 온전히 완결되지 못한 삶, 제대로 들려지지 못한 목소리가 남기는 깊고 서늘한 영혼의 잔향을, 한국인들은 한 (Han, 恨)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은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슬픔이 시간과 함께 옅어지고 분노가 언젠가 사그라든다면, 한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응축되고 겹겹이 쌓여, 마침내 한 존재의 영혼 그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억압된 시간의 응고물이며,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영혼의 기(氣) 흐름을 가로막는 영적인 혈전(血栓)과도 같습니다. 한을 품은 영혼은 과거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어느 한순간에 영원히 갇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억울한 죽음의 순간, 배신의 아픔이 새겨진 순간, 혹은 차마 전하지 못한 사랑을 삼켜야 했던 그 순간에, 영혼의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 버립니다.
이처럼 한의 무게에 짓눌린 영혼은,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도 온전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두 세계 사이의 쓸쓸한 경계 지대를 떠도는 원혼 (冤魂)이 됩니다. 이 원혼의 존재는 한국적 사후 세계관이 지닌 가장 독특하고도 실존적인 특징입니다. 그들은 악의를 품은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호소는 때로 살아있는 가족의 꿈속에 나타나는 희미한 형상으로, 때로는 집안에 드리우는 까닭 모를 우환이나 질병으로, 혹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서늘한 기운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코 무차별적인 저주나 복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에게 보내는, 지극히 상징적이고도 절박한 ‘몸의 언어’입니다. 물에 빠져 죽은 조상의 한이 후손의 피부병으로 나타나거나, 가슴에 맺힌 한이 심장 질환으로 발현되는 것처럼, 원혼은 남겨진 가족의 육신을 빌려 자신의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근원을 살펴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의 몸은, 죽은 자의 목소리가 새겨지는 마지막 서판(書板)이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고통 앞에서, 저승의 질서를 집행하는 냉엄한 저승차사들은 때로 무력합니다. 그들은 정해진 명부(名簿)에 따라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행정관의 역할을 할 뿐, 영혼의 내면에 얽힌 복잡한 한의 매듭을 풀어줄 능력이나 권한이 없습니다. 저승차사에게 한 맺힌 영혼은, 서류가 미비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민원인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지, ‘치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과 질서의 세계가 해결하지 못하는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 시스템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속(巫俗)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중심에는 모든 한 맺힌 영혼의 어머니, 위대한 무조신(巫祖神) 바리공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 자신이 버림받는 가장 큰 한의 고통을 겪고, 그것을 자비와 희생으로 승화시켜 마침내 죽음의 세계에 새로운 길을 낸 구원자였기에, 그녀의 후예인 무당(巫堂)들은 이 한을 풀어내는 신성한 기술, 즉 한풀이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 한풀이가 가장 극적이고도 완전한 형태로 펼쳐지는 장(場)이 바로 굿 (gut)입니다.
굿, 특히 망자의 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씻김굿이나 오구굿은 단순한 제사 의례를 넘어, 죽은 자와 산 자, 신과 인간이 모두 참여하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망자의 영혼이며, 무당은 그의 대역을 맡은 배우이자, 그의 고통을 진단하는 의사이고,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이며, 마침내 그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굿이 시작되고 굿판의 시공간이 신성하게 정화되면, 무당은 춤과 노래를 통해 무아지경의 상태로 접어들어, 마침내 망자의 영혼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를 강신 (降神)이라 부르며, 이 순간 무당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그릇, 즉 성스러운 매개체가 됩니다. 무당의 목소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로 변하고, 그의 몸짓은 죽은 자의 습관을 재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생전 차마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었던 모든 말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를 공수 (神言)라 합니다.
“애미야, 내가 평생 그 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며 너희들을 키웠는데, 어찌 내 무덤가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내버려 두었느냐.”
“서방님, 제가 죽던 날 밤, 그토록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어찌하여 마지막 임종조차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처럼 무당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망자의 목소리는, 남겨진 가족들의 가장 아픈 기억과 죄책감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가족들은 망자의 살아생전 고통을 비로소 직접 듣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자신들의 서운함과 원망을 토해내며 망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눕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위로가 아닌, 상호적인 감정의 교류이며, 이 과정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엉켜 있던 모든 오해와 원망의 매듭이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말을 통한 정화가 끝나면, 상징적인 행위를 통한 정화가 이어집니다. 무당은 긴 무명천이나 삼베천을 양쪽에서 잡고 그 위를 가르는데, 이를 ‘길 닦음’이라 합니다. 이 천은 망자가 건너야 할 저승길인 동시에, 이승에 남은 모든 원한과 미련을 상징합니다. 무당이 이 천을 가르는 행위는, 막혀 있던 저승길을 열어주고, 동시에 망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한의 사슬을 끊어내는 강력한 주술적 행위입니다. 또한, 망자의 넋이 담긴 넋전을 맑은 물에 씻어주는 ‘씻김’의 의례를 통해, 영혼에 묻은 모든 더러움과 슬픔을 깨끗이 닦아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살아있는 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망자의 상처를 씻어주는 정화수(淨化水)가 되고, 그들의 용서는 망자를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굿판은 산 자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온전히 표현하고,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거대한 심리치료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한이 모두 풀리고 깨끗하게 씻겨진 영혼은, 더 이상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바리공주의 따뜻한 인도를 받아 저 평안한 극락세계로 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결국 한국의 영혼이 죽음 너머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천상의 복락이나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 위에서 겪었던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고통과 슬픔까지도 온전히 이해받고, 사랑받고, 마침내 용서받는 것. 즉, 한의 완전한 정화였습니다.
한국의 ‘한풀이’는, 죽음 이후의 운명이 개인의 도덕적 성취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심오한 가르침을 줍니다. 영혼의 구원은 결코 고독한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산 자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 아픔에 함께 울어주며, 마침내 그를 따뜻하게 떠나보내 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공동체의 연금술입니다. 한국의 사후 세계관은 이처럼 차가운 심판의 논리가 아닌, 뜨거운 공감과 화해의 논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의 졸업이, 남겨진 모든 이들의 따뜻한 눈물과 기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었던, 지극한 사랑의 철학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