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의 여정은 거대한 산맥과 정글, 그리고 뜨거운 태양이 지배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명으로 향합니다. 그중에서도 멕시코의 고원, 테스코코 (Texcoco) 호수 위에 거대한 피라미드의 도시를 세웠던 아즈텍 (Aztec)인들의 세계는, 피와 꽃이 뒤섞인 강렬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우주관은 평화로운 창조가 아닌, 신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자기희생의 역사였습니다. 이전의 네 개의 태양 (세상)이 차례로 창조되고 파괴되었으며, 우리가 사는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 또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극적 예감 속에서, 그들은 세상의 유지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 즉 인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를 신들에게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가혹하고 순환적인 우주 속에서, 그들이 상상했던 죽음 너머의 여정 또한 평온한 안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지독하게 험난하고도 고통스러운 하나의 ‘과업’이었습니다. 아즈텍인들에게 영혼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최소 세 가지의 영적인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머리에는 이성적 사고와 운명을 담은 토날리 (tonalli)가, 심장에는 생명력과 기억, 인격의 중심이 되는 테요리아 (teyolía)가, 그리고 간에는 열정과 용기를 담은 이히요틀 (ihíyotl)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세 영혼은 각기 다른 길을 떠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심장에 깃들었던 테요리아, 즉 한 사람의 본질적인 자아 (自我)가 떠나야 했던 가장 보편적인 여정이 바로, 북쪽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아홉 겹의 지하 세계, 믹틀란 (Mictlan)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믹틀란은 선악에 따라 가는 심판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오직 ‘어떻게 죽었는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아즈텍 세계관의 냉정한 질서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은 용사의 영혼이나, 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자의 영혼은 동쪽 하늘, 태양신 토나티우 (Tonatiuh)의 궁전으로 올라가 4년 동안 태양과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은 여인은 서쪽 하늘에서 태양을 맞이하는 여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물에 빠져 죽거나, 벼락에 맞아 죽거나, 혹은 특정 피부병으로 죽은 이들은 비의 신 틀랄록 (Tlaloc)이 다스리는 영원한 여름의 낙원, 틀랄로칸 (Tlalocan)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 즉 병으로 죽거나 늙어서 자연사한 모든 이들의 영혼은 예외 없이 저 어둡고 추운 믹틀란으로의 여정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이 여정은 꼬박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그 길에는 영혼이 지상에서 지녔던 모든 것을 하나씩 벗어 던지게 만드는 아홉 개의 끔찍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지나가는 물의 장소’, 아파노우아얀 (Apanohuayan)이라 불리는 넓고 거센 강이었습니다. 이 강은 너무나도 깊고 물살이 세서, 영혼의 힘만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영혼에게는 단 하나의 조력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생전 자신이 기르던 개, 특히 털 없는 개 품종인 쇼로이츠퀸틀리 (Xoloitzcuintli)의 영혼이었습니다. 이 개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볼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에, 아즈텍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곁에 붉은 실을 목에 건 개 한 마리를 함께 묻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망자의 영혼이 강둑에 도착하면, 충성스러운 개의 영혼이 나타나 주인을 자신의 등에 태우고 거센 물살을 헤엄쳐 강 저편으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었습니다. 만약 생전에 개를 학대했던 영혼이라면, 그의 개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는 이 첫 번째 관문에서부터 영원히 강둑을 헤매야만 했습니다.
강을 건넌 영혼은 두 번째 관문, ‘산들이 서로 부딪히는 곳’, 테페메 모남익티아 (Tepeme Monamictia)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는 두 개의 거대한 산이 끊임없이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며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영혼은 두 산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여, 으스러지지 않고 무사히 그 사이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겪었던 모든 우유부단함과 공포를 떨쳐내고, 결단력과 용기를 시험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세 번째 관문은 흑요석으로 이루어진 산, 이즈테페틀 (Iztepetl)이었습니다. 이 산의 능선은 날카롭게 날이 선 흑요석 칼날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영혼은 이 칼날 능선을 맨몸으로 기어오르거나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영혼은 지상에서 지녔던 육체에 대한 마지막 집착과 쾌락의 기억을 흘려보냅니다.
고통의 산을 넘으면, 네 번째 관문인 ‘여덟 개의 얼음 언덕’, 세우엘로얀 (Cehueloyan)이 나타납니다. 이곳에는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영원히 불어오고, 여덟 개의 황량한 언덕은 날카로운 돌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동안, 영혼은 살아생전 느꼈던 모든 온기와 애정, 따뜻했던 기억들을 바람에 실려 보내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추위와 대면해야 했습니다.
다섯 번째 관문은 ‘깃발이 펄럭이는 곳’, 판쿠에탈라칼로얀 (Pancuetlacaloyan)입니다. 이곳은 앞선 시련들처럼 물리적인 고통을 주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한 심리적 공포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사막과도 같은 이곳에서, 영혼은 모든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박쥐 떼의 공격을 받으며 하염없이 헤매야 했습니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모든 목표와 방향성을 내려놓고, 완전한 무 (無)의 상태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길고 긴 방황 끝에 도착한 여섯 번째 관문은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는 곳’, 테미미날로얀 (Temiminaloyan)입니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영혼을 향해 수많은 화살을 날렸습니다. 이 화살들은 지상에서 미처 청산하지 못한 채무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기억, 혹은 풀지 못한 죄책감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혼은 이 화살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마지막 남은 업보의 흔적을 씻어내야 했습니다.
화살의 비를 뚫고 나아가면, 일곱 번째 관문인 ‘심장을 먹히는 곳’, 테요로쿠알로얀 (Teyolocualoyan)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굶주린 재규어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영혼의 가슴을 갈라 그 심장, 즉 테요리아를 꺼내어 먹어치웠습니다. 심장이 기억과 인격의 중심이었음을 기억할 때, 이 행위는 ‘나’라는 개별적 존재의 마지막 핵심마저도 해체되는, 가장 결정적인 소멸의 단계임을 의미합니다.
이제 거의 빈 껍데기만 남은 영혼은 여덟 번째 관문, ‘아홉 개의 물을 건너는 곳’, 아파나우이아 (Apanhuiayo)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영혼은 아홉 개의 검은 강물을 차례로 건너며, 마지막 남은 의식의 찌꺼기마저 씻어내고 완전한 망각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 4년의 길고 긴 세월이 흘러, 이 모든 시련을 통과하고 완전히 정화된 영혼은 마지막 아홉 번째 관문, ‘아홉 겹의 죽음의 장소’, 치쿠나믹틀란 (Chicunamictlan)에 도달합니다. 안개와 어둠으로 가득 찬 이곳의 가장 깊은 곳, 뼈로 만들어진 옥좌에 죽음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Mictlantecuhtli)와 그의 아내 믹테카시우아틀 (Mictecacihuatl)이 앉아 있습니다. 해골의 얼굴에 간을 드러낸 채 앉아있는 죽음의 군주 앞에서, 영혼은 마침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영원한 안식, 즉 완전한 소멸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믹틀란의 여정은 구원이나 부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존재를 해체하는 법’을 배우는 거대한 실험실에 가깝습니다. 이 여정의 목적은 영혼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 ‘나’라고 불렸던 기억, 감정, 육체, 인격과 같은 모든 것을 한 겹 한 겹 벗어 던지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믹틀란은 보상도 형벌도 없는, 모든 개별적 존재가 겪어야만 하는 우주적 엔트로피의 과정이었습니다. 아즈텍인들에게 죽음은 구원이 아니라, 4년간의 처절한 투쟁 끝에 얻는, 고요하고도 완전한 망각이었던 셈입니다.
제2절: 마야의 시발바(Xibalba),
영웅 쌍둥이와 죽음의 신들의 대결
아즈텍의 영혼이 4년간의 고독한 여정을 통해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해체해 나갔다면, 그들의 이웃이었던 마야인들의 명계는 속임수와 시험, 그리고 신들을 향한 대담한 도전이 펼쳐지는 거대한 경기장과도 같았습니다. 그 지하 세계의 이름은 시발바 (Xibalba), 즉 ‘공포의 장소’입니다. 키체 (K'iche') 마야인들의 창세 신화 『포폴 부, Popol Vuh』는, 이 어둠의 왕국을 지배하는 죽음의 신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구기 (球技) 시합을 벌였던 위대한 영웅 쌍둥이, 후나푸 (Hunahpú, 후나푸)와 스발란케 (Xbalanqué, 스발란케)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노래합니다.
이 장대한 드라마의 서막은 영웅들의 아버지 세대에서 열립니다. 최초의 쌍둥이 형제인 훈 훈아푸와 부쿠 훈아푸는 뛰어난 구기 선수였습니다. 그들이 고무공을 땅에 튀기며 내는 요란한 소리는 대지를 뒤흔들어, 마침내 지하 세계 시발바의 군주들인 훈 카메 (‘하나 죽음’)와 부쿠 카메 (‘일곱 죽음’)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분노한 죽음의 신들은 올빼미 전령들을 보내, 무례한 형제를 자신들의 왕국으로 소환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제는 이 부름에 순순히 응하여 시발바로 향하는 험난한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음의 신들이 파 놓은 교활한 함정에 차례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강과 고름이 흐르는 강을 건너고, 마침내 시발바의 회의장에 도착하여 옥좌에 앉아 있는 신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들은 진짜 신이 아니라 교묘하게 조각된 나무 인형이었습니다. 진짜 신들은 뒤에 숨어서 어리석은 형제를 비웃었습니다.
결국 형제는 죽음의 신들에게 패배하여 희생제물로 바쳐지고, 훈 훈아푸의 머리는 잘려 과일이 열리지 않는 앙상한 나무에 걸립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나, 나무에서는 수많은 조롱박 열매가 열렸고, 그의 머리 또한 그 열매들 중 하나처럼 보였습니다. 이 나무는 시발바의 모든 이에게 접근이 금지된 신성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시발바가 얼마나 교활하고 위험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서곡이었습니다.
생명은 그러나, 가장 절망적인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싹트는 법입니다. 시발바 군주 중 하나의 딸이었던 처녀 이시키크 (‘피의 달’)는 이 금지된 나무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이끌려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녀가 나무에 다가가자,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훈 훈아푸의 해골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침을 뱉었고, 이 침은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켰습니다. 바로 다음 세대의 영웅, 후나푸와 스발란케 쌍둥이였습니다. 임신 사실이 발각되어 희생될 위기에 처한 이시키크는 지상으로 탈출하여, 훈 훈아푸의 어머니 밑에서 두 아들을 낳고 기릅니다.
두 영웅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역시나 뛰어난 구기 선수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들이 내는 공놀이 소리는 다시 한번 시발바의 군주들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소환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쌍둥이는 아버지와 삼촌의 비극적인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의 여정은 순진한 응답이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와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발바로 내려가면서, 아버지가 빠졌던 모든 함정을 지혜롭게 피해 갑니다. 아버지 세대가 순진하게 죽음의 신들의 부름에 응하여 모든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면, 후나푸와 스발란케는 이미 아버지의 비극을 통해 교훈을 얻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시발바의 지형과 죽음의 신들의 교활함을 미리 파악하고, 한 수 앞서 나가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함정은 피와 고름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불쾌하고 위험한 강을 어떻게든 건너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웅 쌍둥이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중공(中空) 갈대 피리를 이용했습니다. 이 갈대 피리를 신발처럼 발에 신고, 마치 강 위를 미끄러지듯이 가볍게 건너갔습니다.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니, 강물에 닿으면 오염되고 고통받는다는 죽음의 신들의 함정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 맞서는 대신, 지혜와 창의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어려움을 회피하는 그들의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강을 건넌 뒤, 그들을 기다린 것은 두 번째 함정, 바로 시발바 회의장의 교묘한 속임수였습니다. 죽음의 신들은 자신들의 옥좌 옆에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인형들을 놓아두고, 진짜 자신들은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세대는 이 나무 인형들을 진짜 신으로 착각하고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가, 진짜 신들의 비웃음을 사며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쌍둥이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 함정을 미리 꿰뚫어 보고, 나무 인형들을 향해 일부러 “이 나무 조각들은 너무나 더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구나!”라고 비웃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신들이 분노하여 뛰쳐나왔고, 이로써 쌍둥이는 진짜 죽음의 신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겉모습에 속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죽음의 신들의 진짜 이름을 미리 알아낸 방법입니다. 회의장에서 신들의 정체를 파악한 뒤에도, 그들은 신들 하나하나의 고유한 이름을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신화와 비슷하게, 마야 신화에서도 이름을 아는 것은 곧 그 존재에 대한 힘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쌍둥이는 자신들의 전령으로 모기 한 마리를 미리 보내, 회의장에 모여 있던 죽음의 신들을 하나씩 쏘게 했습니다. 모기가 신들을 물면, 신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누가 물렸는지 확인했습니다. “아, 훈 카메가 물렸는가!” “아니, 부쿠 카메가 물렸어!” 이처럼 쌍둥이는 모기라는 작은 생명체를 이용한 기발한 방법으로, 죽음의 신들조차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인 ‘이름’을 스스로 누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적의 정보를 미리 파획하고, 상대의 약점을 역이용하는 영리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모든 함정을 비웃듯이 피해가고, 심지어 신들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알아낸 새로운 쌍둥이의 등장에, 죽음의 신들은 처음부터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어리석은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시발바의 불패 신화가 위협받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이 새로운 영웅들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뒤흔들 위협적인 도전자였던 것입니다.
본격적인 시험은 시발바의 악명 높은 여섯 개의 ‘고문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어둠의 집’에서 그들은 횃불과 담배를 밤새도록 피우라는 명령을 받지만, 앵무새의 붉은 꼬리깃을 횃불의 불꽃처럼 보이게 하고, 반딧불이를 담뱃불처럼 보이게 하여 땔감을 조금도 쓰지 않고 아침을 맞이합니다. 두 번째 ‘칼날의 집’에서는 스스로 움직이는 칼날들에게 “너희의 임무는 모든 동물의 살을 베는 것”이라 말하며 설득하여 위기를 넘깁니다. ‘추위의 집’, ‘재규어의 집’, ‘불의 집’ 또한 그들은 온갖 지혜와 마법으로 무사히 통과합니다.
가장 큰 위기는 마지막 ‘박쥐의 집’에서 찾아왔습니다. 그곳에는 사람을 참수하는 식인 박쥐 카마소츠가 살고 있었습니다. 쌍둥이는 자신들의 갈대 피리 속에 몸을 숨겨 밤을 보냈지만, 동이 틀 무렵 상황을 살피기 위해 후나푸가 머리를 내미는 순간, 카마소츠가 그의 머리를 날카롭게 베어버리고 맙니다. 스발란케는 형의 머리 없는 몸을 끌어안고 절망하지만, 곧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는 거북이 한 마리를 가져와 형의 목 위에 올려놓고 주문을 외워, 거북이 등껍질을 완벽한 머리의 형태로 바꾸어 놓습니다.
다음 날 아침, 죽음의 신들은 후나푸의 진짜 머리를 공으로 사용하여 구기 시합을 열지만, 스발란케가 토끼 한 마리를 이용해 신들의 주의를 분산시킨 틈을 타, 형의 진짜 머리를 되찾아오고 조롱박으로 만든 가짜 머리를 대신 놓아둡니다. 마침내 완전한 몸을 되찾은 쌍둥이는, 죽음의 신들을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 계략을 준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될 운명임을 예언하는 척하며, 자신들이 죽으면 뼈를 가루 내어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예언대로 그들은 죽음의 신들에게 패배하여 거대한 화로 속으로 던져집니다. 신들은 그들의 뼈를 빻아 강물에 뿌리며 완전한 승리를 자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영웅들이 계획한, 죽음을 이용한 가장 위대한 속임수였습니다. 닷새 뒤, 그들은 강물 속에서 물고기 인간으로 부활했고, 얼마 뒤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시발바를 떠도는 가난한 마술사 행세를 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내는 놀라운 마술을 선보이며 시발바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마침내 그 소문은 훈 카메와 부쿠 카메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죽음의 신들은 쌍둥이를 궁전으로 불러 마술을 보여달라고 명합니다. 쌍둥이는 먼저 서로를 희생제물로 바쳤다가 다시 살려내는 기적을 보여줍니다. 이 놀라운 광경에 완전히 매료된 시발바의 군주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영광스러운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바로 그 순간, 쌍둥이는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며, 두 군주를 희생 제단 위에 눕혀 그들의 심장을 꺼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과는 달리, 두 신을 다시는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시발바의 가장 강력한 폭군은 사라졌고, 남은 죽음의 신들은 영웅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합니다. 쌍둥이는 아버지 훈 훈아푸의 영혼을 구원하여 하늘에 모시고, 마침내 자신들도 하늘로 올라가 각각 해와 달이 되어 세상을 영원히 비추게 됩니다. 그들의 희생과 부활, 그리고 지혜로운 승리를 통해, 세상에는 비로소 낮과 밤의 질서가 생겨나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마야인들이 들려주는 시발바의 이야기는, 죽음이 단지 피하거나 수용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지혜와 용기, 그리고 때로는 속임수를 통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할 하나의 거대한 도전임을 보여줍니다. 죽음의 가장 깊은 어둠, 그 ‘공포의 장소’에서 비로소 가장 찬란한 빛인 해와 달이 태어났다는 이 위대한 서사시는, 절망의 심연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희망이 탄생한다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도 강력한 믿음의 노래라 하겠습니다.
제3절: 잉카의 우쿠 파차 (Uku Pacha), 지하 세계와 조상 숭배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고원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잉카인들에게, 죽음은 지하 세계로의 머나먼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형태를 바꾸어,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와 영원히 교감하는 조상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의 우주관은 하늘의 세계 하난 파차 (Hanan Pacha),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세계 카이 파차 (Kay Pacha), 그리고 내면의 세계이자 죽은 자들의 땅인 우쿠 파차 (Uku Pacha)라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쿠 파차는 땅 아래 혹은 산의 내부에 있는 세계로, 물과 같은 생명의 근원들이 솟아나는 장소이자,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어둡고 절망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지상의 세계 카이 파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잉카인들에게 조상은 결코 사라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힘을 지닌 ‘우아카 (huaca)’가 되어,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잉카의 독특한 장례 문화, 즉 황제나 귀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는 전통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미라들은 ‘말키 (mallki)’라 불렸으며, 죽은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심지어는 중요한 축제나 의례 때마다 가마에 실려 나와 산 자들의 잔치에 ‘참석’하기까지 했습니다. 살아있는 황제는 중요한 국정을 결정할 때, 이 조상 미라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잉카인들에게 죽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를 넘어 공동체를 지켜보는 더 높은 존재가 되는 영광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 또한 우쿠 파차로 가서, 그곳에서 씨앗이 싹트듯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대지 (Pachamama, 파차마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거대한 순환의 한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잉카의 사후 세계관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공동체의 영속성과 자연과의 조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극히 대지 중심적인 지혜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잉카의 우주관은 수직적인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지만, 이들은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난 파차는 콘도르가 상징하는 하늘의 세계이자 신들의 거처였습니다. 태양신 인티 (Inti), 창조신 비라코차 (Viracocha)와 같은 주요 신들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카이 파차는 푸마가 상징하는 지상의 세계로, 인간과 동물, 식물이 살아가는 현실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쿠 파차는 뱀이 상징하는 내면 혹은 지하의 세계였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듯이, 우쿠 파차는 죽음과 동시에 재생의 힘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세 세계는 무지개나 거대한 세계수 (世界樹)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인간, 특히 샤먼이나 황제는 이 통로를 통해 다른 세계와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영혼은 이 세 세계 중 하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아즈텍처럼 죽음의 유형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지만, 잉카에서는 살아생전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삶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잉카 사회는 “도둑질하지 말라 (Ama sua), 거짓말하지 말라 (Ama llulla), 게으르지 말라 (Ama quella)”는 세 가지의 간단하고도 절대적인 윤리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규범을 충실히 지킨 황족이나 귀족, 그리고 평민 중에서도 덕망 높은 삶을 산 사람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따뜻하고 빛나는 하늘의 세계, 하난 파차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그곳은 태양신 인티의 온기로 가득 찬 낙원이었습니다. 영혼들은 그곳에서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겼지만, 더 이상 노동의 고통이나 추위, 굶주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현세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잉카인들의 가치관이 사후 세계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입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반면, 세 가지 규범을 어기며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은 어둡고 추운 내면의 세계, 우쿠 파차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기독교의 지옥처럼 불길이 타오르는 고통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잉카인들이 상상했던 최악의 형벌은, 끝없는 추위와 어둠 속에서 영원히 돌멩이만 먹으며 살아야 하는, 지독한 권태와 결핍의 상태였습니다. 이는 풍요로운 수확과 따뜻한 공동체 생활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농경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된 형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잉카 사후관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영혼이 어디로 가든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직선적인 시간이 아닌, 순환적인 시간의 개념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쿠 파차로 간 영혼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의 정화 기간이 끝나면 언젠가는 다시 씨앗처럼 카이 파차, 즉 지상의 세계로 돌아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기회를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은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하나의 긴 순환 과정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잉카의 독특한 장례 문화, 즉 황제나 귀족의 시신을 미라 (malquis, 말키)로 만들어 보존하는 전통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시신의 부패를 막고, 미라를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보존했습니다. 이 미라들은 ‘죽은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이자, 신과 인간을 잇는 가장 강력한 우아카 (huaca), 즉 신성한 존재로 숭배받았습니다.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Cusco)의 코리칸차 (Coricancha, 태양의 신전)에는 역대 황제들의 미라가 황금 옥좌에 앉혀져, 마치 살아있는 황제들이 회의를 하는 것처럼 나란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이 조상 미라들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충실한 하인들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음식이 바쳐졌고, 시녀들은 파리채를 흔들어 먼지를 쫓았습니다. 심지어는 중요한 축제나 의례 때마다 가마에 실려 나와 광장을 행진하고, 산 자들의 잔치에 ‘참석’하기까지 했습니다. 살아있는 황제는 전쟁이나 가뭄과 같은 중요한 국정을 결정할 때, 반드시 이 조상 미라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샤먼은 미라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들의 침묵 속에서 조상의 뜻을 읽어내어 황제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처럼 잉카인들에게 죽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를 넘어 공동체를 지켜보는 더 높은 존재가 되는 영광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조상 미라는 단순한 시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 즉 아일유 (ayllu)라 불리는 씨족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보살피는 살아있는 수호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비옥함과 가축의 번성,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졌습니다. 따라서 후손들은 조상 미라를 정성껏 보살피고 주기적으로 제사를 올림으로써, 조상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두 세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잉카의 사후 세계관은 개인의 영혼이 겪는 내세의 여정보다는,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상호적인 관계에 그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죽음은 한 개인의 서사를 끝내는 마침표가 아니라, 그를 공동체의 역사라는 더 큰 서사 속에 영원히 편입시키는 쉼표와도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소멸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잊히는 것, 즉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잉카의 우쿠 파차는 공포의 지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돌아가는 대지 (Pachamama, 파차마마)의 자궁이자, 조상들의 지혜가 잠들어 있는 거대한 기억의 저장고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던 지혜로운 문명이었습니다.
제4절: 북미 원주민의 '위대한 영 (Great Spirit)'과 영혼의 땅
광활한 북미 대륙의 원주민 문화를 하나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수백 개의 언어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그들의 영적 세계는, 마치 거대한 숲을 이루는 나무들처럼 저마다의 독특한 모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깊이 흐르는 몇 가지 공통된 강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강물의 이름은 바로 순환하는 시간, 모든 존재의 상호 연결성, 그리고 만물에 스며 있는 신성한 힘에 대한 깊은 경외심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중심에는, 서구의 인격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의 절대자가 존재합니다. 라코타 (Lakota) 부족이 와칸 탕카 (Wakan Tanka, 위대한 신비)라 부르고, 알공킨 (Algonquian) 부족이 마니투 (Manitou)라 칭했던 이 존재는, 흔히 ‘위대한 영 (Great Spirit)’으로 번역됩니다. 위대한 영은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가 아닙니다. 그는 바위와 강, 나무와 동물,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까지 스며 있는 거룩하고도 불가해한 힘 그 자체입니다. 그는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창조물 전체이며, 세상은 그의 몸이자 그의 생각의 발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촘촘하게 얽혀 있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합니다. 인간과 늑대, 독수리와 버펄로는 모두 위대한 영의 자녀로서 평등한 형제입니다. 이러한 깊은 유대감과 상호 연결성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직선이 아니라 원 (圓)이었습니다.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계절이 순환하듯, 인간의 삶 또한 탄생과 성장, 죽음, 그리고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이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단지 존재의 형태를 바꾸어 이 거대한 원 위를 계속해서 여행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북미 원주민 부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부족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흔히 ‘영혼의 땅’ 혹은 서구인들에 의해 ‘행복한 사냥터 (Happy Hunting Ground)’라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기독교의 천국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추위와 굶주림, 질병과 전쟁이 없었고, 풍요로운 들판에는 살찐 들소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었으며, 맑은 강에는 물고기가 가득했습니다.
이 평화로운 땅에 도달하기 위한 영혼의 여정은, 때로 몇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부족들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영혼들이 걸어가는 ‘영혼의 길 (Spirit Path)’ 혹은 ‘유령의 길( Ghost Road)’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길의 어딘가에는 커다란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거나, 혹은 두 세계를 가르는 거센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영혼은 이 다리를 건너거나 강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길목을 지키는 수호령이 나타나 영혼의 자격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다리가 영혼의 무게에 따라 흔들리는데, 살아생전 덕을 쌓고 용감했던 영혼은 가볍게 건너지만, 비겁하고 악한 삶을 살았던 영혼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의 혼돈 속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죄를 세는 엄격한 심판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조상들의 세계에 합류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살아남은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은, 이 여정을 떠나는 영혼을 돕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망자가 머나먼 길을 가는 데 지치지 않도록, 그의 발에 가장 좋은 새 모카신을 신겨주었습니다. 또한, 영혼의 땅에 도착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의 활과 화살, 담뱃대와 같은 소중한 물건들을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장례는 슬픈 이별의 의식이자, 사랑하는 이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공동체의 마지막 배려였던 것입니다.
영혼의 땅에 무사히 도착한 영혼은, 먼저 세상을 떠났던 모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위대한 조상들과 재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북미 원주민들이 죽음 너머에서 그렸던 가장 큰 기쁨이자 위안이었습니다. 죽음은 고독한 소멸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공동체와의 완전한 재결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영혼들은 더 이상 늙거나 병들지 않는 몸으로, 지상에서 즐겼던 모든 활동을 계속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또한, 죽은 조상들은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후손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꿈이나 동물의 형상을 통해 지혜와 조언을 건네는 수호령이 되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는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이처럼 끊임없이 서로 교감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북미 원주민들의 사후 세계관은, 그들이 발 딛고 살아갔던 대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늘 위의 추상적인 낙원을 꿈꾸는 대신, 자신들이 사랑했던 이 땅이 정화된 형태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습니다. 죽음은 무서운 단절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결국에는 시작되었던 곳, 즉 위대한 영의 신성한 숨결과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엄하고도 자연스러운 귀향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비극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그물로 이어진 모든 존재와의 유대감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5절: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자, 샤먼과 죽음의 여정
우리는 앞선 여정에서 북미 대륙의 영혼이 은하수 길을 따라 위대한 영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엄한 풍경을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모든 영혼에게 언제나 평탄하고 안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영혼이 길을 잃고 헤매거나, 악한 영들에게 붙잡히거나, 혹은 이승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한 영혼의 평화로운 완성을 위해, 두 세계의 경계에 서서 죽음의 여정을 직접 관장하는 영적인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바로 샤먼( Shaman)입니다.
샤먼은 단순한 치료사나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육체로부터 분리하여 영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탈혼 (ecstasy)’의 기술을 터득한, 영혼의 지리학자이자 두 세계를 잇는 살아있는 다리였습니다. 공동체의 다른 이들에게 죽음 너머의 세계가 막연한 믿음의 영역이었다면, 샤먼에게 그곳은 수없이 오가며 직접 지도를 그리고, 그곳의 존재들과 소통하며 힘을 겨루었던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활동 무대였습니다.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세계관에서 샤먼의 역할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과정으로 바꾸어 놓는, 지극히 중요하고도 실천적인 것이었습니다.
샤먼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죽은 자의 영혼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영혼의 인도자 (psychopomp)’로서의 임무였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영혼은 익숙했던 육신과 지상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혼란과 공포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때 샤먼은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깊은 무아지경의 상태로 들어가, 자신의 영혼을 육체 밖으로 내보내 이제 막 길을 떠나는 망자의 영혼과 동행합니다. 그는 영혼에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고, 길 위에서 마주칠 위험들을 경고하며, 그 여정을 함께하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망자의 영혼과 함께 밤하늘의 ‘영혼의 길’을 걷고, 두 세계를 가르는 거센 강 앞에 다다르면 영적인 배를 띄워 함께 건넜습니다. 길목을 지키는 무서운 수호령이 나타나면, 샤먼은 자신의 수호령을 불러내어 맞서 싸우거나, 혹은 신성한 노래와 기도로 그들을 달래어 길을 열었습니다. 샤먼의 이러한 영적인 호위가 없다면, 연약한 영혼은 중간에 길을 잃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도는 외로운 유령이 되거나, 혹은 악한 영들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장례 의식의 중심에서 샤먼이 벌이는 영적인 여행은, 단순히 죽은 자를 추모하는 행위를 넘어, 그의 영혼이 무사히 조상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실제적인 구원 활동이었습니다.
샤먼은 또한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혼을 되찾아오는 ‘영혼의 치유자’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원주민 부족들은 심각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영혼의 상실 (soul loss)’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강한 충격이나 슬픔, 혹은 악한 주술로 인해 한 사람의 영혼 일부가 몸을 떠나,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영적인 세계, 특히 죽음의 세계 근처를 헤매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영혼이 온전하지 못하니, 육신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샤먼의 임무는, 우리가 앞서 다른 신화들 속에서 보았던 카타바시스 (Katabasis), 즉 산 자로서 직접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는 가장 위험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호령들의 도움을 받아 영혼의 길을 거슬러 내려가, 죽은 자들의 땅에서 길 잃은 환자의 영혼 조각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죽음의 세계를 다스리는 영들은 한번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영혼을 쉽게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샤먼은 그들과 담판을 벌이고, 때로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영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이 위험한 여정에서 샤먼 자신이 길을 잃거나 악한 영에게 패배한다면, 그는 다시는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환자의 영혼을 되찾아온 샤먼은, 그것을 다시 환자의 몸 안으로 불어넣어 줌으로써 비로소 치유의 과정을 완성합니다. 이처럼 샤먼의 모든 치유 행위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죽음의 영역에 도전하고 그 힘과 맞서는 영적인 전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샤먼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중재자로서, 두 세계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유대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공동체는 가뭄이나 전쟁, 혹은 질병과 같은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샤먼을 통해 먼저 세상을 떠난 위대한 조상들의 지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샤먼은 의식을 통해 조상의 영혼을 불러내어 자신의 몸에 실리게 하거나, 혹은 직접 영혼의 땅으로 찾아가 그들의 조언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조상들은 샤먼이라는 통로를 통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사냥감이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다가올 위험을 경고하고, 부족의 오랜 전통과 지혜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처럼 샤먼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잇는 거대한 소통의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동안 두 세계의 경계를 수없이 오갔던 위대한 샤먼 자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그에게 죽음은 미지의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수없이 다녀왔던 익숙한 고향으로의 마지막 귀향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영혼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처럼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수호령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영혼의 땅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다른 영혼들을 이끌고 보살피며, 여전히 살아있는 후손들을 위한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세계관에서 샤먼은, 죽음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과 용기, 그리고 영적인 힘을 통해 건널 수 있는 하나의 문턱임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탈혼 여행과 치유 의식, 그리고 조상과의 소통은, 사후 세계가 단지 막연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구체적인 현실임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샤먼의 존재를 통해,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길들이고, 그것을 삶의 지혜와 순환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6절: 삶과 죽음의 순환, 자연과 합일된 세계관
우리는 지금까지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빚어진 영혼의 여정들을 따라 걸어왔습니다. 아즈텍의 영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며 아홉 겹의 어둠 속으로 해체되어 가는 믹틀란의 길을 보았고, 마야의 영웅들이 지혜와 용기로 죽음의 신들을 제압하고 스스로 해와 달이 되어 떠오르는 시발바의 투쟁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잉카의 조상들이 미라가 되어 산 자들의 곁에 영원히 머무는 우쿠 파차의 풍경을 거닐었고, 북미의 영혼들이 은하수 길을 따라 위대한 영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엄한 귀향을 엿보았습니다.
이처럼 제각기 다른 신화와 의례, 그리고 상징의 옷을 입고 있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모든 길의 끝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명들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내놓았던 공통된 대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겉모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심층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깊고 강인한 몇 가닥의 뿌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뿌리의 이름은 바로 자연과의 합일, 순환하는 시간, 그리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그물입니다.
이들의 영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그들의 신전이 돌로 지어지기 이전에, 이미 산과 강, 숲과 하늘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단순히 삶의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은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거대한 신적 존재이자, 모든 진리가 새겨져 있는 성스러운 경전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콘도르는 상위 세계의 전령이었고, 땅을 걷는 재규어는 지상의 힘을 상징했으며, 땅속을 기는 뱀은 죽음과 재생의 비밀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상상했던 사후 세계 또한, 이 땅의 풍경과 분리된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비의 신 틀랄록의 낙원 틀랄로칸은 옥수수와 꽃이 만발하는 풍요로운 땅이었고, 북미 원주민의 영혼의 땅은 들소가 뛰노는 이상적인 사냥터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에서 이 땅을 떠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 속으로 영원히 귀속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원을 그리며 순환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한 서구의 역사적 시간관념과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시간은 계절의 변화처럼, 그리고 해와 달의 운행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거대한 순환의 리듬이었습니다. 아즈텍의 우주가 다섯 번에 걸쳐 창조되고 파괴되기를 반복했다는 신화나, 마야의 영웅들이 스스로 해와 달이 되어 낮과 밤의 순환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세계관의 장엄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 속에서,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끝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은 단지 이 거대한 바퀴가 한 바퀴 돌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겨울의 혹독함이 있어야 봄의 새싹이 돋아나듯, 죽음의 소멸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자리를 마련해주는 신성한 희생이었습니다. 아즈텍인들이 바쳤던 피의 제물은, 이러한 우주적 순환의 톱니바퀴가 멈추지 않도록 인간이 지불해야 했던 가장 비장한 형태의 동력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의 세계관에는 ‘원죄’나 ‘절대악’과 같은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사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의 변덕이나 선악의 이분법적 심판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이 공동체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즈텍의 전사가 영광스러운 태양의 궁전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전사로서의 소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잉카의 영혼이 하늘의 낙원으로 갈 수 있었던 기준은,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사회적 규범을 지켰는가에 있었습니다. 북미 원주민의 영혼이 영혼의 길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는, 살아생전 용감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어야 했습니다. 마야의 영웅들이 죽음을 이겨낸 힘은 신앙의 깊이가 아닌, 지혜와 용기, 그리고 불굴의 의지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도덕률은 하늘에 계신 신의 명령이 아니라, 땅 위에서 공동체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인 지혜에 더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는 결코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는 얇고 투명한 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막을 통해 두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 교감하고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잉카의 조상 미라들이 산 자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국정을 논했던 모습은 이러한 믿음의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북미 원주민들이 꿈속에서 조상의 조언을 듣고, 그들을 위해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형태가 바뀌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조상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후손들을 보살피고, 후손들은 의례와 기도를 통해 조상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우주의 조화를 유지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명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죽음 너머의 이야기는, ‘소속감’과 ‘관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로 귀결됩니다. 이들의 세계관 속에서 개인은 결코 고독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씨족 공동체에, 자신이 발 딛고 선 대지에, 그리고 하늘의 별과 땅의 모든 생명을 잇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에 깊이 소속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이 모든 관계의 끈이 끊어지는 끔찍한 추방이 아니라, 단지 존재의 형태를 바꾸어 이 거대한 관계의 그물 속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소멸이 아닌, 장엄하고도 평화로운 귀향입니다.
개별적인 자아의 소멸을 두려워하며 영원한 개체로서의 삶을 갈망했던 다른 많은 문명들과 달리, 아메리카의 고대인들은 자신을 더 큰 전체의 일부로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더 큰 영원성 속으로 합류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