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의 영혼들이 광활한 대지 위에서 그들의 운명을 찾았다면, 인도의 현자들은 히말라야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갠지스 강의 물결 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육신이 나인가? 이 생각과 감정이 나인가?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참된 나’는 무엇인가?” 이 근원적인 자기 탐구야말로, 힌두교 (Hinduism)라는 거대한 정신적 우주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이곳에서 죽음 너머의 여정은, 낯선 명계를 탐험하는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을 발견하고 마침내 우주의 근원과 하나가 되는 장엄한 내면의 순례길입니다.
이 위대한 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두 개의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는 우주적 실재의 기둥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적 실재의 기둥입니다. 힌두 철학, 특히 우파니샤드 (Upanishad) 사상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 즉 모든 존재가 비롯되었고 또 모든 존재가 돌아갈 하나의 근원을 브라흐만 (Brahman, 브라흐만)이라고 부릅니다.
브라흐만은 옥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브라흐만은 형체도, 이름도, 속성도 없는, 언어와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모든 개별적인 파도들의 근원이 되는 거대한 바다와 같고, 우주라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고요한 스크린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 즉 신들과 인간, 동물과 식물, 심지어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이 브라흐만이라는 단 하나의 실재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브라흐만은 이 우주의 유일한 실체이며, 그 본질은 ‘존재 (Sat), 의식 (Chit), 환희 (Ananda)’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우주적 실재의 맞은편에,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개인적 실재의 핵심, 즉 개별적인 영혼 또는 ‘참된 나’를 아트만 (Ātman)이라고 부릅니다. 아트만은 우리가 보통 ‘나’라고 생각하는 육체나 마음, 감정, 기억의 집합체인 에고 (ego)와는 다릅니다. 아트만은 그 모든 일시적인 껍질들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순수한 의식의 불꽃입니다.
힌두교의 현자들은 이 두 개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브라흐만이 거대한 불이라면, 수많은 아트만들은 그 불에서 튄 작은 불꽃들과 같습니다. 불꽃은 잠시 불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불과 똑같이 뜨겁고 빛나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브라흐만이 하늘의 태양이라면, 아트만은 지상의 수많은 물그릇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물그릇 (개인의 육체와 마음)은 저마다 모양이 다르고 그 안의 물은 흔들리지만, 그 안에 비친 태양의 본질은 모두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비유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진실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힌두 철학의 가장 위대한 선언이자, 모든 영적 여정의 목적지가 되는 깨달음입니다. 바로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며, 완벽하게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이라 부르며, 고대 경전 우파니샤드는 이 진리를 “타트 트밤 아시 (Tat Tvam Asi,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장엄한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그것’, 즉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이, 바로 ‘너’, 즉 그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아 아트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번뇌, 그리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 즉 아비드야 (avidyā)에 있습니다. 우리 안의 아트만은 자신이 본래 저 거대한 바다와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물그릇 안에 비친 작은 태양의 그림자’라는 일시적이고 제한된 존재로 착각합니다. 이 착각 속에서 ‘나’라는 에고가 생겨나고, ‘내 것’이라는 집착이 생겨나며, 늙고 병들어 죽는 육신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끝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힌두교에서 영혼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범아일여’의 진리를 완벽하게 깨달음으로써, 더 이상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절대적인 자유의 상태, 즉 목샤 (Moksha, 해탈)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목샤는 아트만이라는 작은 불꽃이 마침내 자신이 본래의 거대한 불이었음을 깨닫고 그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물그릇 속 태양의 그림자가 물그릇이 깨어짐과 동시에 본래의 태양빛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영혼이라는 환상이 사라지고,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완전히 합일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순례의 종착역입니다.
결국 힌두교가 제시하는 영혼의 여정은,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드는 길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를 초월하여, 삶과 죽음 모두를 아우르는 영원한 실재를 ‘나’의 본질로서 깨닫는 과정입니다. 죽음은 이 기나긴 여정 속에서 낡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하나의 과정일 뿐, 결코 우리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을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여정은 무언가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내는 장엄한 ‘회상 (回想)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절: 카르마(Karma)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우주적 네트워크
우리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 (Ātman)이 본래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 (Brahman)과 하나라면, 어찌하여 우리는 이 진리를 잊은 채, 고통으로 가득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인도의 현자들은 이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공정하고도 냉엄한 하나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카르마 (Karma, 業)입니다.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 동사 ‘크리 (kri)’, 즉 ‘행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그 문자적인 의미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 속에서 카르마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우주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옥좌에 앉은 신이 선악을 판단하여 상과 벌을 내리는 도덕적 심판의 개념이 아닙니다. 카르마는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그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고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에 더 가깝습니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화상을 입듯이, 특정한 행위는 그에 합당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말하는 ‘행위’는 단순히 몸으로 짓는 물리적인 행동 (身業, 신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내뱉는 모든 말 (口業, 구업)과, 심지어 마음속으로 품는 모든 생각과 의도 (意業, 의업)까지도 하나의 카르마가 되어 보이지 않는 우주적 네트워크에 기록됩니다. 오히려 많은 가르침에서는, 행위의 동기가 되는 의도야말로 카르마의 힘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는 선한 결과의 씨앗 (福業, 복업)을 심고,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는 고통스러운 결과의 씨앗 (惡業, 악업)을 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면서 짓는 모든 카르마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거대한 잠재적 에너지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이 카르마의 총합은, 마치 은행 계좌처럼, 우리가 과거의 수많은 생애를 거치며 쌓아온 모든 행위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기록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삶의 모든 조건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날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날지, 건강한 몸을 가질지 병약한 몸을 가질지, 심지어는 우리의 성격과 재능, 우리가 맺게 되는 인간관계까지도 모두 과거에 내가 심었던 카르마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숙명론이나 운명론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현재가 과거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새로운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운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르마의 법칙은 우리를 과거에 속박하는 쇠사슬인 동시에, 우리에게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희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 카르마의 법칙은 영혼이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도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육신은 소멸하지만, 그 육신을 입고 평생 동안 지었던 카르마의 총합은 아트만과 함께 다음 생으로 고스란히 이전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카르마의 힘이, 영혼을 삼사라 (Saṃsāra)라 불리는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어두는 직접적인 동력이 됩니다.
영혼은 죽음 이후, 자신이 평생 동안 지은 카르마의 질과 양에 따라 다음 생의 거처를 배정받습니다. 선한 카르마를 많이 쌓은 영혼은 신들의 세계인 천상 (天上)이나 풍요로운 인간 세상에 태어나 그 과보를 누리지만, 악한 카르마를 많이 쌓은 영혼은 고통스러운 지옥이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귀, 혹은 어리석은 축생의 몸을 받아 태어나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상의 행복도, 지옥의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과거의 카르마를 모두 소진하고 나면, 영혼은 다시 새로운 카르마를 따라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카르마의 법칙은 단순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 안에는 복잡하고 심오한 우주적, 심리적,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카르마의 인과율은 단일한 생애를 훌쩍 뛰어넘어, 수많은 과거 생애들을 관통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행운이나 불행은 아주 먼 과거의 행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으며, 지금의 사소한 선택이 먼 미래의 운명을 결정짓는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부조리처럼 보이는 많은 현상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조차 이 거대한 시간의 관점 속에서는 저마다의 이유를 품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인과율의 가장 중심에는 외부의 강제가 아닌, ‘나’라는 존재가 가진 의지 (cetanā)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배후에 어떤 의도가 있었느냐에 따라 카르마의 질은 완전히 달라지기에,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과 마음가짐의 결과가 됩니다. 이러한 의도의 반복은 단순히 외부 세계의 결과를 낳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내면의 성향 자체를 빚어냅니다. 선한 카르마는 우리 영혼을 더 너그럽고 자비롭게 만들며, 악한 카르마는 우리를 더 탐욕스럽고 분노에 차게 만드는 심리적 습관을 형성합니다. 이 깊은 기질이야말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각인 (印刻)이 되어,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르마의 법칙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과 명확히 구분됩니다. 과거의 카르마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지만, 현재의 내가 짓는 카르마가 미래의 나를 만듭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결과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새로운 씨앗을 심을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카르마는 우리를 과거에 묶는 굴레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미래를 창조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카르마의 법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깊은 통찰은, 우리 삶의 모든 조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부당한 형벌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내가 직접 심었던 씨앗의 열매일 뿐입니다. 이 서늘한 진실은, 자신의 불행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던 모든 변명을 거두어들이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성숙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이 법칙은 모든 존재가 보이지 않는 인과의 그물로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가 언젠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에게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아는 자는, 결코 함부로 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카르마에 대한 이해는, 모든 생명체를 향한 자비심과 윤리적인 삶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행위와 결과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해탈 (Moksha)은 단순히 선한 카르마를 쌓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한 카르마조차도 ‘선한 결과’라는 또 다른 속박을 낳아 우리를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해탈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 모든 행위를 ‘나’라는 주체 의식 없이, 그 어떤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카르마 요가 (Karma Yoga)’의 경지에서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카르마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함으로써 그 법칙의 주인이 되는 길입니다.
제3절: 삼사라(Saṃsāra), 고통의 바다와 끝없는 탄생의 수레바퀴
우리의 참된 자아 아트만 (Ātman)이 본래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 (Brahman)과 하나이며, 카르마 (Karma)의 법칙이 모든 행위의 결과를 공정하게 돌려준다면, 이 우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세상은 기쁨보다 고통이 많아 보이고, 찰나의 행복은 이내 슬픔으로 변하며, 우리는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끊임없이 불안에 떱니다. 인도의 현자들은 바로 이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 즉 영혼이 자신의 본질을 잊은 채 태어남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거대한 순환의 장 (場)을 삼사라 (Saṃsāra)라고 불렀습니다.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함께 흐르다’ 혹은 ‘유전 (流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 (reincarnation)의 개념을 넘어, 그 과정 전체가 근본적으로 고통 (duḥkha, 두카)의 성질을 띤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삼사라는 우리가 탈출해야 할 거대한 감옥이자, 헤엄쳐 건너야 할 끝없는 고통의 바다 (苦海)이며, 멈추지 않고 영원히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습니다.
무엇이 이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돌리는 것입니까? 그 동력은 바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카르마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행위의 원인이 되는 끝없는 인과의 사슬을 만들어냅니다.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이 자신이 평생 동안 쌓아온 카르마의 에너지에 이끌려,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그 힘에 합당한 새로운 몸과 환경을 찾아 다시 태어납니다. 이 과정은 그 어떤 신의 의지나 심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동적이고 필연적인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카르마보다 더 근원적인 동력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지 (avidyā, 아비드야)입니다. 무지란, 자신이 본래 영원하고 완전한 아트만이라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육체와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는 근본적인 무명을 의미합니다. 이 무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快, 쾌)’과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 (不快)’으로 나누고, 즐거운 것에는 집착 (rāga, 라가)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밀어내려는 혐오 (dveṣa, 드웨샤)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 집착과 혐오라는 두 가지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카르마를 짓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무지와 욕망, 그리고 카르마라는 세 개의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삼사라의 수레바퀴 안에는, 영혼이 태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삶, 즉 다양한 존재의 영역이 펼쳐져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의 전통은 이 영역들을 크게 여섯 가지, 즉 육도 (六道)로 분류합니다. 이 여섯 영역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지닌 카르마의 상태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각기 다른 심리적 현실이자 존재의 차원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상 (天上, Deva-loka)이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 생에 지극한 선업 (善業)을 쌓은 영혼들이 태어나는 곳으로,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고통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상의 신 (데바)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긴 수명을 누리며 감각적인 쾌락과 행복에 젖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곳은 결코 영원한 안식처가 아닙니다. 그들의 행복은 과거에 쌓았던 선한 카르마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유효한, 일시적인 보상에 불과합니다. 선한 카르마의 힘이 모두 소진되면, 그들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여 자신의 남은 카르마에 따라 더 낮은 세계로 추락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오히려 극심한 쾌락 속에서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마음을 내기 어렵기에, 천상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최적의 장소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천상 바로 아래에는 아수라 (阿修羅, Asura-loka)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수라들은 천상의 신들과 거의 동등한 힘과 복을 누리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기와 질투, 분노와 경쟁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천상의 신들이 누리는 행복을 질투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지만, 결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과 고통을 반복합니다. 이곳은 힘은 있으나 지혜가 부족하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간 (人間, Manuṣya-loka)의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쾌락과 고통이 뒤섞여 있으며,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은 육도 윤회 속에서 가장 귀하고 얻기 어려운 기회로 여겨집니다. 천상의 신들은 쾌락에 빠져 진리를 잊기 쉽고, 아래 세계의 중생들은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기 어렵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고통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자유의지를 통해 선과 악을 선택하며, 마침내 이 모든 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해탈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계 아래로는 고통이 지배하는 세 개의 악처 (惡處)가 있습니다.
첫째는 축생 (畜生, Tiryagyoni-loka)의 세계로, 어리석음과 무지의 카르마로 인해 동물의 몸을 받아 태어난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존재에게 잡아먹히거나 사역당하는 등 끊임없는 공포와 고통에 시달립니다.
둘째는 아귀 (餓鬼, Preta-loka)의 세계입니다. 생전에 탐욕과 인색함이 극심했던 영혼들이 태어나는 이곳의 존재들은, 거대한 배와 바늘구멍 같은 목을 가지고 있어, 끝없는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곳에는 지옥 (地獄, Naraka-loka)이 있습니다. 극심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는 등 무거운 악업을 지은 영혼들이 태어나는 이곳은, 불타는 고통과 얼어붙는 고통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끔찍한 형벌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고통마저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악업을 모두 소진한 영혼은 언젠가 지옥을 벗어나지만, 다시 다른 몸을 받아 삼사라의 여정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삼사라는 잠시의 행복과 기나긴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끝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바다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무상 (無常, anitya)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젊음과 건강도, 재물과 명예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무상한 것들에 집착하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통 (duḥkha)을 겪게 됩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나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기에, 그 본질은 무아 (無我, anātman)입니다. 무상, 고, 무아. 이것이야말로 삼사라의 세계를 규정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속성이자, 우리가 벗어나야 할 감옥의 세 개의 벽입니다.
결국 삼사라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깊은 절망과 함께 위대한 희망을 동시에 전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지와 욕망,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쌓아온 카르마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서늘한 선언인 동시에, 바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이 고통의 바퀴를 멈추고 영원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삼사라는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이지만, 바로 그 감옥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지혜의 지도를 손에 넣게 됩니다.
제4절: 무아(無我, anātman), '나'라는 환상과 존재의 연속성
우리는 앞서 힌두교의 현자들이 ‘참된 나’인 아트만 (Ātman)을 발견하고, 그것이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 (Brahman)과 하나임을 깨닫는 장엄한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행위의 결과를 촘촘히 엮어내는 카르마 (Karma)의 법칙이 어떻게 영혼을 삼사라 (Saṃsāra)라는 끝없는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에 묶어두는지를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인도의 정신사, 나아가 인류의 영적 역사에 가장 거대한 파문을 던진 한 위대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붓다 (Buddha)의 가르침입니다.
붓다는 당대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영원하고 불변하는 자아’, 즉 아트만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떤 곳에서도 영원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사상이자, 다른 모든 인도 사상과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가르침인 무아 (無我, anātman)입니다.
무아는 단순히 ‘내가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존재가, 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조건과 원인들이 잠시 모여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통찰입니다. 붓다는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를 다섯 가지의 무더기, 즉 오온 (五蘊, pañca-skandha)으로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색 (色, rūpa)으로, 우리의 육체와 감각 기관, 그리고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물질적인 세계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수 (受, vedanā)로,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때 일어나는 모든 느낌,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셋째는 상 (想, saṃjñā)으로, 받아들인 느낌에 대해 마음속으로 개념과 이미지를 떠올리고 분별하는 인식 작용입니다.
넷째는 행 (行, saṃskāra)으로, 인식 작용에 따라 일어나는 분노, 탐욕, 의지와 같은 모든 능동적인 심리 활동이자 카르마를 형성하는 의지 작용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식 (識, vijñāna)으로, 이 모든 정신 활동의 바탕이 되는 순수한 의식, 즉 ‘알아차리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잠시 화합하여 흐르는 강물과 같은 과정일 뿐입니다. 육체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하며, 느낌과 생각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사라집니다. 그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나’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고정불변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영원한 영혼인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카르마를 짓고, 무엇이 그 결과를 받으며, 무엇이 삼사라의 세계를 윤회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비유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꽃을 옮겨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초의 불꽃은 첫 번째 초의 불꽃과 똑같은 불꽃입니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불꽃입니까?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첫 번째 불꽃이라는 원인이 있었기에 두 번째 불꽃이라는 결과가 생겨났지만, 두 불꽃은 결코 동일한 실체가 아닙니다. 이처럼 윤회하는 것은 고정된 ‘영혼’이 아니라, 한 생애 동안 쌓아온 카르마의 에너지와 그로 인해 형성된 심리적인 경향성의 흐름입니다. 한 생의 마지막 순간의 의식 (識)이 다음 생의 첫 순간의 의식을 조건 짓는, 끊어지지 않는 인과의 연속성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것은 거대한 강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갠지스 강과 오늘의 갠지스 강을 같은 강이라고 부르지만, 그 강을 이루는 물방울은 단 하나도 어제와 같지 않습니다. 강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정에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 또한, 오온 (五蘊)이라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카르마의 힘에 의해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 ‘나’라는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무상하고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찾으려는 우리의 깊은 갈망과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 육신이 ‘나’라고 집착하고, 이 느낌과 생각이 ‘나의 것’이라고 집착합니다. 바로 이 ‘나’라는 환상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있기에 ‘나의 것’이라는 소유욕이 생기고, ‘나’를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일어나며, ‘나’의 영원한 행복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라는 착각은 우리를 삼사라의 수레바퀴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는 가장 강력한 족쇄가 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해탈, 즉 열반 (Nirvana, 니르바나)은 힌두교의 목샤 (Moksha)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목샤가 개별적 자아인 아트만이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이라면, 열반은 ‘합일할 나’라는 실체 자체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고 있던 욕망과 집착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더 이상 카르마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않기에 윤회의 수레바퀴가 마침내 멈추어선 고요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열반은 영혼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아라는 환상’의 소멸입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모든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가장 혁명적인 지혜입니다.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된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때 ‘나’의 고통은 ‘너’의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며, 이 깊은 통찰 속에서 모든 생명체를 향한 무한한 자비 (karuṇā)의 마음이 저절로 피어납니다. ‘나’를 비울 때, 비로소 온 우주가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라는 환상을 넘어 존재의 연속성을 꿰뚫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 (彼岸)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붓다는 가르쳤습니다.
제5절: 육도(六道) 윤회,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가지 삶의 형태
불변의 자아 (아트만)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이 카르마의 힘에 의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면, 그 흐름이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불교의 세계관은 삼사라 (Saṃsāra)라는 고통의 바다가 결코 단조로운 풍경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는 영혼이 과거에 지은 카르마의 질과 양에 따라 태어나게 되는 여섯 가지의 뚜렷이 다른 세계, 즉 육도 (六道, Ṣaḍgati)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세계는 단순히 죽음 이후에 가는 장소를 넘어, 우리 마음의 상태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각각의 세계는 특정한 심리적 상태가 극대화되어 발현된 존재의 영역이며, 이 모든 영역은 예외 없이 무상하고 불완전하며, 궁극적으로는 고통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혼은 이 여섯 개의 길을 영원히 오르내리며, 자신이 지은 카르마의 결과를 남김없이 체험하게 됩니다.
여섯 갈래의 길은 크게 세 개의 선한 세계 (삼선도, 三善道)와 세 개의 악한 세계 (삼악도, 三惡道)로 나뉩니다.
삼선도는 상대적으로 안락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세계로 다음과 같습니다.
천상도 (天上道, Deva-gati):
여섯 개의 세계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신들의 영역입니다. 이곳에 태어나는 영혼들은 과거 생에 자비심과 보시 등 지극한 선업(善業)을 쌓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긴 수명을 누리며, 아름다운 외모와 감미로운 음악,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감각적인 쾌락과 깊은 명상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결코 영원한 구원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들의 행복은 과거에 쌓았던 선한 카르마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유효한, 일시적인 보상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큰 행복과 쾌락은 영혼을 나태하게 만들고, 고통의 실상과 무상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선한 카르마의 힘이 다하면, 신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죽음을 앞둔 신에게는 다섯 가지 쇠락의 징조가 나타나는데, 몸의 광채가 사라지고, 입던 옷이 더러워지며, 땀이 나고 악취가 풍기며, 자신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무르기 싫어하는 등의 현상입니다. 이때 신들은 자신이 누렸던 모든 행복이 끝났으며, 이제 더 낮은 세계로 추락해야 함을 예감하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아수라도 (阿修羅道, Asura-gati):
아수라는 천상의 신들과 거의 동등한 힘과 능력을 지녔지만, 그 마음이 시기와 질투, 분노와 교만으로 가득 찬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천상의 신들이 누리는 행복을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들과 전쟁을 벌입니다. 아수라의 세계는 힘은 있으나 지혜가 부족하고, 끝없는 경쟁과 다툼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투쟁의 영역입니다. 생전에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자신의 공덕을 뽐내며 타인을 깎아내리기 좋아했던 카르마가 바로 이 세계로 이끈다고 합니다.
인간도 (人間道, Manuṣya-gati):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삶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적절히 뒤섞여 있으며, 그 어떤 영역보다도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육도 윤회 속에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은 가장 귀하고 얻기 어려운 기회로 여겨집니다. 천상의 신들은 쾌락에 빠져 진리를 잊기 쉽고, 아래의 삼악도 중생들은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기 어렵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고통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고, 자유의지를 통해 선과 악을 선택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여 마침내 이 모든 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삼악도는 고통이 지배하는 비참한 세계로 그려집니다.
축생도 (畜生道, Tiryagyoni-gati):
어리석음과 무지 (無知)의 카르마로 인해 동물의 몸을 받아 태어난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그들은 지혜가 부족하여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본능에 따라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으며 살아갑니다. 또한 인간에게 사육당하며 노동을 착취당하거나,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등, 평생을 공포와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합니다. 생전에 남에게 진 빚을 갚지 않거나, 올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어리석게 살아온 카르마가 이 세계로 이끈다고 합니다.
아귀도 (餓鬼道, Preta-gati):
생전에 지독한 탐욕과 인색함에 사로잡혀 살았던 영혼들이 태어나는 세계입니다. 아귀는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지만 배는 산처럼 부풀어 오른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불타는 듯한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지만, 음식을 발견해도 그것이 입에 닿는 순간 불길로 변해버려 결코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본질이, 그 자체로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계입니다.
지옥도 (地獄道, Naraka-gati):
여섯 개의 세계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의 영역입니다. 극심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살생을 저지르는 등 가장 무거운 악업을 지은 영혼들이 태어나는 이곳은, 그 악업의 에너지가 스스로 만들어낸 형벌의 공간입니다. 지옥에는 외부의 심판관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고통은 자기 자신이 지은 카르마가 거울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 결과일 뿐입니다. 지옥은 크게 뜨거운 고통을 겪는 팔열지옥 (八熱地獄)과 차가운 고통을 겪는 팔한지옥 (八寒地獄) 등으로 나뉘며, 그 고통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깁니다. 그러나 이 지옥의 고통마저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악업을 모두 소진한 영혼은 언젠가 지옥을 벗어나지만, 남은 카르마에 따라 다시 육도의 다른 세계를 유전 (流轉)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육도는, 무명 (無明)에 휩싸인 영혼이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여섯 가지 거대한 드라마의 무대입니다. 천상의 기쁨도 지옥의 고통도 모두 일시적인 연극의 한 장면에 불과하며, 그 어떤 배역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세계를 벗어나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를 멈추는 것, 즉 해탈 (解脫)이야말로 이 기나긴 여정의 유일한 출구이자 진정한 목표가 됩니다. 육도의 풍경은 우리에게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바로 그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오직 인간의 삶 속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주는, 서늘하고도 자비로운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제6절: 해탈(Moksha)과 열반(Nirvana), 윤회의 종착역
우리는 아트만 (Ātman)과 브라흐만 (Brahman)의 합일에 대한 힌두교의 가르침부터, 무아(無我)의 통찰을 통해 ‘나’라는 환상을 넘어서라는 불교의 메시지까지, 인도의 정신세계가 그려낸 영혼의 지도를 따라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가 결과를 낳아 영혼을 윤회 (Saṃsāra)의 수레바퀴에 묶어두는 카르마 (Karma)의 법칙과, 그 카르마의 힘에 이끌려 영혼이 태어나는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가지 세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이 모든 고통스러운 순환의 고리를 끊고 도달하는 궁극적인 목표, 즉 해탈 (Moksha)과 열반 (Nirvana)이라는 윤회의 종착역에 다다릅니다.
이 두 개념은 뿌리 깊은 윤회의 사상 위에 서 있지만, 그 근본적인 지향점과 방법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바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즉 영원한 자유와 평화의 상태라는 점입니다.
힌두교 철학에서 해탈 (Moksha)은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하나임을 깨닫는 궁극적인 경지를 의미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풀려남', '자유로워짐', '해방'을 뜻하는 모크샤는, 영혼이 더 이상 카르마의 속박을 받지 않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본래의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해탈은 단순히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초월하는 경험입니다. 힌두교는 우리 내면의 아트만이 본래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무지 (avidyā)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육체나 마음, 에고와 동일시하며 아트만의 본질을 잊어버립니다. 이 착각 속에서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가 생겨나고, ‘나의 것’이라는 집착과 욕망이 끊임없이 새로운 카르마를 짓게 하여 윤회 속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탈은 이러한 무지의 껍질을 벗겨내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궁극적인 지혜 (jñāna)의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 꿈속의 모든 환상이 실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꿈속에서 겪었던 고통과 즐거움, 태어남과 죽음의 드라마는 잠에서 깨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오직 깨어있는 본래의 자아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을 얻은 영혼은 더 이상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고,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갑니다. 이는 개별적인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작은 물방울이 거대한 바다와 하나가 되어 모든 개별성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다양합니다. 지혜의 길인 갸냐 요가 (Jnana Yoga)를 통해 명상과 탐구를 통해 진리를 깨닫거나, 헌신과 사랑의 길인 박티 요가 (Bhakti Yoga)를 통해 신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겨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거나, 행위의 길인 카르마 요가(Karma Yoga)를 통해 어떤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아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개별적인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초월한 우주적 의식과 합일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반 (Nirvana)은 힌두교의 해탈과 유사하게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그 과정과 궁극적인 상태에 대한 설명은 힌두교와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어 끄다',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하는 니르바나는, 욕망과 집착, 분노와 무지와 같은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버린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는 '영원한 자아'인 아트만 (Ātman)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 (無我, anātman) 사상을 근간으로 합니다. 즉,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오온 (五蘊)이라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지는 일시적인 흐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반은 '나'라는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라고 굳게 믿었던 그 환상, 즉 '자아에 대한 집착' 그 자체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경험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붓다는 살아있는 동안 깨달음을 얻어 '현세 열반'을 성취했습니다.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고 완전한 평화 속에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어떠한 존재 형태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무여열반 (無餘涅槃)'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이는 '남아있는 번뇌의 찌꺼기마저 사라진' 상태로, 모든 윤회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완전한 소멸이 아닌, 모든 한계와 속박을 초월한 절대적인 자유의 상태입니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주로 팔정도 (八正道)로 대표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라는 여덟 가지 수행을 통해 무지와 탐욕, 분노의 근원을 제거하고 지혜와 자비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이는 외부적인 의례나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노력과 성찰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진리를 깨닫는 철저히 자기 주도적인 수행의 길입니다.
해탈과 열반은 비록 개념적인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에게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고통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무지와 집착, 욕망과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더 많은 재물, 더 큰 명예, 더 좋은 관계, 더 아름다운 외모 등 끊임없이 외부의 대상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의 가르침은, 이러한 모든 외부적인 것들이 결국 무상하고 불완전하며,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우리를 끝없는 욕망의 수레바퀴에 묶어두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외부의 환경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무지를 지혜로 바꾸고, 욕망을 만족으로 바꾸며, 분노를 자비로 바꿀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동안에도 해탈과 열반과 같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이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일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우리의 본질적인 아트만은 소멸하지 않거나 (힌두교), 혹은 우리의 의식의 흐름은 카르마에 따라 다음 생으로 이어집니다 (불교).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두려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가입니다. 우리가 지금 짓는 카르마 하나하나가 미래의 우리를 빚어내고, 진리를 향한 지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궁극적인 해방으로 이끄는 길을 열기 때문입니다.
해탈과 열반은 막연한 이상향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지혜와 자비심을 기를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윤회의 종착역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고도 영원한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