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현대의 아르스 모리엔디

by 이호창

제16장: 현대의 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

- 마지막 존엄의 기술


제1절: 의료의 한계, 삶의 의료화와 빼앗긴 죽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가벼운 두통에도 약을 찾고, 나이가 들며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변화마저 ‘질병’으로 여기며 병원으로 향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평범한 삶과 몸이 점차 전문가의 관리 대상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 (Ivan Illich, 1926-2002)가 그의 저서 『의료의 한계, Medical Nemesis』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던 ‘삶의 의료화 (medicalization of life)’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일리치는 현대 의학이 인간 존재의 모든 국면을 의학적 문제로 재정의하는 과정을 깊이 비판했습니다. 그는 의학을 ‘네메시스 (Nemesis)’에 비유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과도한 오만에 대해 복수하는 여신의 이름입니다. 현대 의학이 인류의 건강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로 출발했지만, 그 힘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일리치는 이 의학적 네메시스가 세 가지의 뚜렷한 얼굴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임상적 네메시스 (clinical iatrogenesis)’로서, 의학적 치료 자체가 도리어 해악을 낳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의사의 과잉 진단이나 부작용이 심각한 약물, 불필요한 수술이 환자에게 없던 병을 새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가벼운 감기 증상에 항생제를 남용하면 결국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더 강력한 균이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의 몸이 지닌 자연치유력을 신뢰하는 대신, 전문가의 개입에만 의존하게 되며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둘째는 ‘사회적 네메시스 (social iatrogenesis)’로서, 의학이 사회 전체를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상을 비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구매해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제약 회사와 거대한 병원 시스템은 이익을 추구하며, 출산이나 노화, 심지어 슬픔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마저도 의학적 관리가 필요한 ‘질병’의 범주로 끌어들입니다. 임신은 ‘고위험 상태’로, 노년의 자연스러운 기력 쇠퇴는 ‘노인성 질환’으로 이름 붙여집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힘을 잃고, 거대한 의료 산업의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셋째는 가장 근원적인 ‘문화적 네메시스 (cultural iatrogenesis)’로서, 의학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인류의 문화적 지혜를 파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과거의 수많은 문화 속에서, 고통은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로 여겨졌고 죽음은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맞이하는 숭고한 통과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은 이 모든 것을 ‘치료 가능한 문제’ 혹은 ‘피해야 할 실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기 환자가 병원의 차가운 기계들에 의존하여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마지막 여정에서 인간적인 존엄과 영적인 성찰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집니다. 일리치는 이로 인해 우리가 고통을 통해 배우고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 내면의 힘, 즉 ‘자기 치유’의 능력을 상실했다고 경고합니다.


일리치의 이러한 날카로운 진단은 의학계를 넘어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뜨거운 찬반 논쟁을 낳았습니다.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은, 예방 접종과 항생제의 발견이 수많은 생명을 구했듯이 현대 의학이 인류의 평균 수명을 비약적으로 연장시키고 삶의 질을 개선한 위대한 성과를 그가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환자의 실제적인 아픔을 외면하는 비인간적인 낭만주의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일리치의 경고는 결코 의학 자체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비판은 현대 의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성찰하고, 기술의 발전 속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얼굴을 되찾도록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의학 윤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환자의 자율성 (autonomy) 존중과 설명의무 (informed consent) 제도는, 의사가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환자를 치료의 주체로 바로 세우려는 노력입니다. 이는 일리치가 지적했던 자율성의 상실을 바로잡으려는 제도적인 응답입니다.


일리치의 우려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도 아름다운 응답은 바로 호스피스 운동과 완화 의료 (palliative care)의 발전입니다. 특히 죽음의 의료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 운동의 철학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둔 환자가 병원의 기계에 매달려 고통받는 대신, 가족과 공동체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맞이하도록 돕습니다. 이는 죽음을 의료 시스템의 손에서 다시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품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숭고한 시도입니다.


일리치의 사상은 우리에게 의학 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과 죽음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혜의 목소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제2절: 죽음의 의료화, 삶의 과정에서 임상적 사건으로



인류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죽음은 삶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부이자 공동체의 일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질병이나 노쇠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집의 침상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음은 비록 슬픈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 완성되고, 그의 영혼이 공동체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서 다음 세계로 인도되는, 성스럽고도 의미 있는 통과 의례였습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삶의 유한성을 자연스럽게 배웠고, 공동체는 함께 슬픔을 나누며 죽음을 삶의 순환 과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미지의 사건이기 이전에, 모두가 언젠가는 겪어야 할 친숙한 삶의 마지막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의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을 둘러싼 이 모든 풍경은 근본적으로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항생제의 발견, 수술 기술의 발전, 생명 유지 장치의 등장은 인류에게 수많은 질병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강력한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진보는 동시에,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의학이 정복해야 할 ‘질병’이자, 피해야 할 ‘실패’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삶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처리해야 할 하나의 ‘임상적 사건 (clinical event)’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의료화 (Medicalization of Death)’입니다.


죽음의 의료화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통해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죽음의 장소가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병원의 중환자실이나 요양 시설의 낯선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 공간의 변화는 단순한 장소의 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따뜻한 온기와 익숙한 기억으로 가득 찼던 죽음의 공간은, 이제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기계음,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낯선 의료진들로 채워집니다. 죽음은 더 이상 가족과 공동체가 주관하는 성스러운 의례가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의료 절차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대신, 환자의 몸에는 수많은 튜브와 전선이 연결되고, 모니터의 깜박이는 숫자들이 그의 생명을 대변하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의 장소가 비인격적인 의료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죽음은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통제권이 개인과 가족에게서 의료 전문가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죽음을 앞둔 이의 마지막 소망과 영적인 평안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최우선적인 목표는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됩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기보다는, 혈압과 맥박, 산소 포화도와 같은 생체 신호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환자 자신과 가족의 의사는 종종 ‘의학적 판단’이라는 이름 아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죽어가는 과정은 첨단 의료 기술이 지배하는 영역이 됩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준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의료 처치를 받는 객체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왜곡시켰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자연스러운 완성이 아니라, 의학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적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 만능주의 (technological imperative)’라는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를 낳았습니다. 즉, 어떤 기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환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와 상관없이, 일단 사용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의사와 가족 모두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기 환자에게도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하며,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연명 치료는, 바로 이 기술 만능주의의 비극적인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죽어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연장할 뿐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평온한 과정이 아니라, 기계와 약물에 의존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패배하는 처절한 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음의 의료화가 낳은 가장 깊은 상처는, 바로 죽음의 의미 상실과 인간 소외입니다. 병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정리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할 소중한 시간을 박탈당하기 쉽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영적인 성찰과 관계의 완성이 아닌, 기계적인 처치와 육체적 고통으로 채워집니다. 그는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단지 꺼져가는 생명 신호의 집합체로 취급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사회적 죽음’이 의료 시스템 안에서 제도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을 일상에서 격리시키고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가두어 둠으로써, 현대 사회는 죽음에 대한 집단적인 망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어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지 않으며, 죽음은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추상적인 사건이나 드라마 속의 극적인 장치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죽음과의 단절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더욱 증폭시킵니다. 친숙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낳기 마련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지혜와 전통적인 의례의 힘은 약화되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 홀로 이 거대한 미지의 공포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20세기의 의학은 인류의 평균 수명을 극적으로 연장시키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잘 사는 법’만큼이나 중요한 ‘잘 죽는 법 (Ars Moriendi)’에 대한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음의 의료화는 삶의 마지막 과정을 비인간화하고, 그 의미를 축소시켰으며,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죽음을 다시 삶의 일부로 되돌려놓고, 죽어가는 이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절에서 우리가 탐험하게 될 호스피스 운동과 완화 의료의 철학입니다. 죽음이 삶의 과정에서 임상적 사건으로 전락한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다시 우리의 삶과 영혼의 이야기 속으로 되찾아올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제3절: 호스피스 운동, 마지막 순간까지의 삶을 긍정하다



죽음의 의료화가 만들어낸 차가운 병실과 소외된 임종의 풍경 속에서, 인류는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는가?’라는 기술적인 질문에 몰두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을 망각한 것입니다. 죽음이 정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면서, 죽어가는 과정은 패배와 실패의 기록이 되었고,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처럼 비인간화된 죽음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저항 속에서, 20세기 중반, 하나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스피스 운동 (Hospice Movement)입니다.


호스피스라는 말의 어원은 ‘손님’을 뜻하는 라틴어 ‘호스페스 (hospes)’에서 유래했으며, 중세 시대에 성지를 향해 가던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가던 휴식처를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가 현대적인 의미로 재탄생한 것은, 영국의 의사이자 간호사, 그리고 사회복지사였던 시슬리 손더스 (Cicely Saunders)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죽음을 앞둔 수많은 말기 환자들을 돌보면서, 현대 의학이 그들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깊은 한계를 느꼈습니다. 의학은 질병의 ‘치료’에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지만,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겪는 복합적인 고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손더스 여사는 환자들이 겪는 고통이 단순히 육체적인 통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이를 ‘총체적 고통 (Total Pain)’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습니다. 총체적 고통이란, 육체적인 통증 (physical pain)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미래를 잃어버리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고통 (mental anguish),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사회적인 고통 (social distress), 그리고 삶의 의미와 죽음의 본질에 대해 묻는 영적인 고통 (spiritual suffering)이 모두 뒤섞여 있는 전인격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현대 의학은 이 중 오직 육체적인 통증에만 집중했을 뿐, 한 인간을 무너뜨리는 나머지 차원의 고통들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그녀는 1967년 런던에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호스피스 기관인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 (St. Christopher's Hospice)를 설립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죽음을 앞둔 이들이 남은 생을 가능한 한 편안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쉼터’이자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였습니다.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의 설립은,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의 전환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철학은 죽음의 의료화가 내세웠던 모든 가치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첫째, 호스피스는 치료 (cure)에서 돌봄 (care)으로 목표를 전환합니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강요하는 대신, 남은 시간 동안의 삶의 질을 최대한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습니다. ‘삶에 날들을 더하는 것 (adding days to life)’이 아니라, ‘날들에 삶을 더하는 것 (adding life to days)’이 호스피스의 핵심적인 모토입니다.


둘째, 호스피스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긍정합니다. 죽음은 의학의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삶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따라서 호스피스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거나 (안락사), 무의미하게 연장하려 (연명 치료)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죽음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순간까지, 환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평온하게 그 과정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셋째, 호스피스는 돌봄의 단위를 환자 개인에서 환자와 그 가족 전체로 확장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가족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호스피스는 환자뿐만 아니라, 그를 돌보며 함께 고통받는 가족들에게도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지지를 제공합니다. 또한, 환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겨진 유가족들이 겪는 비탄과 슬픔을 돌보는 사별 가족 돌봄 (bereavement care) 프로그램을 통해, 죽음이 남긴 상처가 건강하게 아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러한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호스피스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심리 상담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다학제적 팀 (interdisciplinary team)을 통해 환자를 돌봅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의 육체적인 통증과 불편한 증상들을 적극적으로 조절하여 최대한의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사회복지사는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성직자나 영적 돌봄 제공자는 환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죽음의 의미를 찾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따뜻한 말벗이 되어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산책을 돕는 등, 환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적인 유대감을 잃지 않도록 돕습니다. 이 모든 팀원들은 환자의 ‘총체적 고통’을 다각도에서 감싸 안는 하나의 거대한 지지망이 됩니다.


호스피스 돌봄의 중심에는 언제나 환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이 있습니다. 환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의료진은 환자와 가족에게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의 과정에 대해 정직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이 원하는 돌봄의 방식과 장소(병원, 가정, 혹은 독립된 호스피스 시설)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준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스피스가 지키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의료화가 앗아갔던 죽음의 인간적인 얼굴을 되찾아주었고,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용서, 화해와 성숙이 이루어지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호스피스는 중세 시대에 잊혔던 ‘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 즉 ‘잘 죽는 기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위대한 시도입니다.


이러한 호스피스 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희망적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끝내는 사건일지 모르지만, 그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가장 숭고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는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을, 기술의 지배가 아닌 인간의 사랑과 존엄으로 채우기 위한, 우리 시대의 가장 따뜻하고도 지혜로운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제4절: 완화 의료의 철학, 통증 없는 평온한 마무리


호스피스 운동이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을 위한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했다면, 그 운동의 중심에 있던 깊은 통찰, 즉 ‘총체적 고통 (Total Pain)’을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은 점차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질병의 진단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환자는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현대 의학의 가장 인간적인 응답이 바로 완화 의료 (Palliative Care)의 철학입니다.


완화 의료는 종종 호스피스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일찍 시작될 수 있는 돌봄의 접근 방식입니다. 호스피스가 주로 임종이 임박한 (일반적으로 6개월 이내)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완화 의료는 암, 심부전, 만성 폐쇄성 폐질환, 신경계 질환 등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을 진단받은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질병의 단계와 상관없이, 그리고 치료와 동시에 제공될 수 있습니다. 완화 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질병의 완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함으로써, 환자와 그 가족이 가능한 최상의 삶의 질 (Quality of Life)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완화 의료의 철학은 ‘총체적 고통’이라는 개념 위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질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증상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완화 의료는 네 가지 차원의 고통을 동시에 다루는 전인격적인 접근을 취합니다.


첫째는 육체적 고통의 완화입니다. 통증은 질병이 주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파괴적인 고통입니다. 완화 의료에서 통증 관리는 단순한 진통제 처방을 넘어, 과학이자 예술의 경지에 이릅니다. 전문가는 통증의 원인과 종류, 강도를 면밀히 평가하고, 환자 개개인에게 맞는 가장 효과적인 약물과 방법을 사용하여 통증을 적극적으로 조절합니다. 여기서 목표는 단순히 통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의식을 명료하게 유지하고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찾는 것입니다. 또한, 통증 외에도 호흡 곤란, 메스꺼움, 피로, 식욕 부진 등 환자를 괴롭히는 모든 신체적 증상들을 세심하게 관리하여, 환자가 육체적인 편안함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둘째는 심리적·정서적 고통의 완화입니다. 심각한 질병의 진단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죽음에 대한 공포, 신체 변화로 인한 자존감 상실, 그리고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 등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동반합니다. 완화 의료팀은 상담과 지지를 통해 환자와 가족이 이러한 불안과 우울,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안전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내면의 힘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셋째는 사회적 고통의 완화입니다. 질병은 종종 환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킵니다. 직장을 잃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며, 가족 내에서의 역할도 변하게 됩니다. 완화 의료는 환자가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가족 간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환자가 마지막까지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버지, 아내, 친구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고통의 완화입니다. 질병과 죽음은 우리에게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완화 의료는 환자가 이러한 영적인 질문들과 씨름하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신념 체계 안에서 평화를 찾고,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며, 삶의 마지막 여정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영적인 지지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완화 의료는 질병이라는 ‘점’이 아닌,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환자의 ‘삶 전체’를 돌보는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중심에는 열린 소통 (open communication)이 있습니다. 완화 의료팀은 환자와 가족이 자신의 상태와 앞으로의 예후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치료와 돌봄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사전 돌봄 계획 (advance care planning)’을 통해, 만약 환자가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어떤 종류의 연명 치료를 원하거나 원치 않는지를 미리 논의하고 문서화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환자를 수동적인 치료의 대상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의 방식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로 바로 세웁니다.


완화 의료는 또한 희망을 재정의합니다. 치료 중심의 의학에서 희망이란 오직 ‘완치’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치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완화 의료는 희망이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완치에 대한 희망은, 통증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랑하는 손주의 졸업식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랫동안 소원했던 가족과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리고 마침내 고통 없이 평온하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완화 의료는 이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될 수 있는 현실적인 희망의 근거를 찾아주고 지지합니다.


완화 의료의 철학은, 죽음의 의료화가 잃어버렸던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다시 의료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으려는 현대판 ‘아르스 모리엔디’의 가장 실천적인 형태입니다. 그것은 죽음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의 목표를 ‘생명의 연장’에서 ‘의미 있는 삶의 완성’으로 바꾸는 지혜로운 전환입니다. 통증 없는 평온한 마무리는, 단지 육체적인 편안함을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존엄하게 마칠 수 있도록 돕는, 우리 시대의 가장 깊고도 자비로운 약속이라 하겠습니다.










제5절: 존엄한 죽음, 스스로 선택할 권리에 대한 성찰



호스피스와 완화 의료의 철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자율성 (autonomy)과 존엄성 (dignity)을 마지막 순간까지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이 존엄의 의미를 더욱 근본적으로 묻게 되는 새로운 윤리적 지평에 서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면서, ‘언제까지, 그리고 어떤 상태까지 살아있는 것이 진정으로 존엄한 삶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논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하고도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엄한 죽음 (death with dignity)’이라는 개념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엄한 죽음은 단순히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삶의 마지막 장을 스스로 마무리하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인격체로서의 존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스스로 마무리한다’는 지점에서, 우리는 깊은 윤리적, 철학적, 종교적 성찰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연명의료 중단 (withdrawal of life-sustaining treatment)’입니다. 이것은 흔히 오해되는 ‘안락사 (euthanasia)’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연명의료 중단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고 임종 과정에 들어선 환자에게, 단지 죽어가는 과정만을 무의미하게 연장시키는 의료 행위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를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인위적으로 방해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예를 들어, 말기 암으로 인해 더 이상 치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한 환자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평소에 “나는 기계에 의존해서 의미 없이 숨만 쉬고 싶지 않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심장이 멎었을 때, 의료진이 기계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한다면, 그의 생명 신호는 며칠, 혹은 몇 주간 더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그가 원했던 존엄한 삶의 마무리일까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가 미리 작성해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가족의 증언을 통해, 그의 존엄한 마무리를 존중해주기 위한 선택입니다. 이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적극적인 선택의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의사 조력 자살 (physician-assisted suicide)’과 ‘안락사 (euthanasia)’의 문제입니다. 이 두 개념은 종종 혼용되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의사 조력 자살은 의사가 환자의 요청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해주고, 환자 자신이 직접 그 약물을 복용하여 생을 마감하는 방식입니다. 최종적인 행위의 주체는 환자 자신입니다. 반면,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주사하는 등, 의사가 직접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선택을 옹호하는 이들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루게릭병 (ALS)과 같이 의식은 명료하지만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어 결국 완전히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숨 쉴 수도 없게 되는 질병을 앓는 환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즉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살아있는 채로 살아있는 관 속에 갇히게 될 그 상태를,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한 삶’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고통스러운 마지막 단계를 피하고, 스스로 선택한 시점에서 평온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개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조건적인 생명 연장만을 강요할 권리가 있는가? 이것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현재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일부 주 등에서는 엄격한 조건 하에 이러한 선택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은 대개 환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상태여야 하고, 여러 명의 의사로부터 동일한 진단을 받아야 하며, 환자 본인이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자발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제도가, 고통받는 개인에게 마지막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인도주의적인 제도의 확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매우 신중하고 무거운 반론이 존재합니다. 가장 큰 우려는 ‘미끄러운 경사길 (slippery slope)’의 위험입니다. 한번 허용의 문을 열면, 그 대상이 말기 환자에서 만성 질환자, 장애인, 심지어는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환자가 가족에게 부담이 된다는 생각에, 혹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의사와는 다른 선택을 하도록 내몰릴 위험도 존재합니다. 과연 모든 선택이 온전히 자발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신이 주신 것이므로, 그 시작과 끝을 인간이 임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의사의 역할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지, 생명을 단축시키는 데 조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 또한 중요한 반론의 근거가 됩니다. 또한, 현대의 완화 의료 기술이 발전하여 대부분의 육체적 고통은 효과적으로 조절될 수 있으며, 심리적, 영적인 고통 또한 적절한 돌봄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모든 노력이 충분히 이루어졌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엄한 죽음’과 ‘선택할 권리’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사회가 생명과 죽음, 그리고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 논의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절대적인 가치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두 개의 위대한 가치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로운 균형을 찾아 나갈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이 예민하고도 중요한 질문에 대해 사회적인 대화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 대화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앞둔 이들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더욱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만들기 위한 공동체의 책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성찰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더 자비롭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6절: 웰다잉 (Well-Dying),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기술



우리는 지금까지 죽음의 의료화가 낳은 비인간적인 풍경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호스피스 운동, 그리고 삶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치열한 윤리적 성찰을 따라왔습니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시대는 ‘잘 사는 법 (Well-being)’만큼이나 ‘잘 죽는 법 (Well-dying)’이 중요하다고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웰다잉은 단순히 고통 없이 죽는 ‘편안한 죽음’이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한 죽음’의 차원을 넘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남은 생을 의미 있게 정리하며, 평온하게 삶을 완성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능동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기술입니다.


과거 사회에서 ‘잘 죽는 법 (Ars Moriendi)’은 공동체의 전통과 종교적 의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병원이라는 격리된 공간으로 추방되고, 죽음에 대한 대화가 금기시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 기술을 다시 배우고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는 과제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웰다잉은 죽음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대신, 그것을 삶의 필연적인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과업을 주체적으로 수행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음을 재촉하거나 삶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직시함으로써, 남아있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게 사용하려는,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긍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웰다잉의 실천은 크게 네 가지 차원의 준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육체적 준비입니다. 이것은 완화 의료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불필요한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통증과 증상을 의료진에게 명확히 알리고,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함께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의 방식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어떤 연명치료를 원하거나 원치 않는지를 명확히 밝혀두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고,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과정을 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정서적 준비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음속에 엉켜있는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생애 회고 (Life Review)’는 이 과정의 핵심적인 실천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며, 기뻤던 순간과 슬펐던 순간, 성공과 실패, 사랑과 후회의 경험들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삶이 지녔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표현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남겨진 이들에게는 평생의 위로가 되고, 떠나는 이에게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평온을 얻게 하는 마지막 선물이 됩니다. 용서 또한 이 과정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타인을 용서하고, 동시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원망과 후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회적·관계적 준비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죽음 또한 관계의 정리와 완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나누며, 관계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겨진 이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남기지 않으려는 실질적인 준비도 포함됩니다. 자신의 유언을 명확히 작성하고, 재산을 정리하며, 장례 절차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미리 알려두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책임감 있게 마무리하는 성숙한 태도이자, 남겨진 가족들의 혼란과 갈등을 줄여주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자신의 소지품을 정리하고, 소중한 물건들을 누구에게 전해줄지 생각하는 과정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는 의미 있는 의례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준비입니다. 여기서 영성이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존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확립하며,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와 연결되려는 모든 시도를 포함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기도를 통해, 비종교적인 사람은 명상이나 자연과의 교감, 혹은 예술 활동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비록 유한했지만, 그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이 남긴 사랑과 영향력이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실존적 고독을 넘어, 자신을 더 큰 전체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환 속으로 평온하게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웰다잉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기술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임박해서야 급하게 시작하는 숙제가 아니라, 건강하고 활기찬 삶의 과정 속에서 꾸준히 성찰하고 준비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그것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고 열린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잘 사는 것 (Well-being)과 잘 죽는 것 (Well-dying)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매 순간을 충실히 살며, 관계를 소중히 가꾸어 온 사람만이, 자신의 마지막 장을 평온하고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웰다잉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책임지고 아름답게 완성하려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

keyword
이전 15화제15장: 죽음을 길들이는 의례 - 공동체의 연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