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죽음의 공포와 마주했을 때, 어떤 문화는 그 앞에서 겸허히 운명을 수용했고, 어떤 문화는 불멸을 향한 치열한 투쟁을 선택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후자의 가장 위대한 예시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위험하고도 신성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하는 길은 복잡한 미로와 같아서, 그 길을 밝혀줄 지도와 위험을 물리칠 무기 없이는 결코 안전하게 건널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여정을 위해, 이집트인들이 수천 년에 걸쳐 발전시키고 완성한 것이 인류 최초의 사후 세계 안내서, 바로 『이집트 사자의 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라는 이름은 사실 19세기 서구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며, 본래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신성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낮으로 나아가는 책 (Pert em Hru)’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본래의 이름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진정한 목적과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의 어두운 세계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태양신 라 (Ra)가 매일 밤 지하 세계의 어둠을 통과하여 아침에 찬란하게 부활하듯이, 자신들의 영혼 또한 죽음이라는 밤의 시간을 무사히 통과하여, 마침내 영원한 ‘낮의 세계로 나아가 (coming forth by day)’ 빛나는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사자의 서』는 바로 이 위험한 밤의 항해를 위한 필수적인 지도이자, 주문서이며, 비밀 암호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단일한 경전이 아니라, 망자의 신분과 재력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작되는 주문들의 모음집이었습니다. 각각의 ‘장 (chapter)’은 사실 독립적인 주문 (spell)으로, 망자가 사후 세계 두아트 (Duat)의 여정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위험에 대처하고, 필요한 능력을 얻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두아트는 단순히 죽은 자들이 머무는 지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밤의 열두 시간을 상징하는 열두 개의 구역으로 나뉜, 불타는 호수와 칼날의 강, 그리고 끔찍한 괴물들이 지키는 수많은 관문으로 가득 찬 위험한 우주적 공간이었습니다.
『사자의 서』에 담긴 주문들은 지극히 실용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심장을 망자로부터 떼어놓지 않게 하는 주문’은, 사후 세계의 심판 과정에서 자신의 심장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망자가 두 번째로 죽지 않게 하는 주문’은, 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영원히 소멸되는 ‘두 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악어나 뱀과 같은 위험한 존재들을 물리치는 주문, 신성한 매나 제비, 혹은 연꽃으로 변신하여 위험을 피하는 주문, 그리고 사후 세계에서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입을 열어주는 주문 등, 영혼의 여정에 필요한 모든 상황에 대비한 마법적인 지식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앎 (knowing)’, 즉 비밀스러운 지식이었습니다. 두아트의 각 관문은 뱀의 머리를 하거나 칼을 든, 무시무시한 형상의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문지기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정확히 불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망자는 『사자의 서』에 적힌 대로, “나는 너의 이름을 안다! 너의 이름은 이러이러하니, 나를 위해 문을 열어라!”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사자의 서』는 바로 이 모든 관문의 문지기들과 그곳에 도사리는 악마들의 이름이 적힌, 영혼을 위한 비밀 통행증이었던 셈입니다.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고 마침내 여정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영혼은 오시리스 신이 주관하는 ‘두 진리의 전당’에서 최후의 심판, 즉 ‘심장 무게 달기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이때 망자는 42명의 신적인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이 살아생전 저지르지 않은 죄악들을 열거하는 ‘부정 고백 (Negative Confession)’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자의 서』의 제125장에는 이 부정 고백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망자가 심판대 앞에서 막힘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전의 제물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살아생전 마아트 (Ma'at)라 불리는 우주적 진리와 정의, 조화의 원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았는지가 사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참된 목소리 (maa kheru)’의 소유자로 인정받은 영혼은, 마침내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신 오시리스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경전들은 종종 ‘망자 아무개’를 ‘오시리스 아무개’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험을 통과한 영혼이 신적인 존재로 변성 (變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신이 된 영혼, 즉 빛나는 영 아크(Akh)는, 마침내 두아트의 모든 어둠을 벗어나 ‘낮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는 갈대의 들판이라 불리는 낙원에서 영원한 풍요를 누리거나, 위대한 태양신 라 (Ra)의 배에 동승하여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우주의 순환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자의 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스러운 경전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가장 큰 위기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쟁취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하고도 강력한 마법적 기술 (technology)의 설명서였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여정을 위한 신성한 지도이자, 강력한 무기이며, 최후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전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죽음 너머의 세계가 위험하지만, 올바른 지식과 주문, 그리고 윤리적인 삶을 통해 충분히 항해하고 정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파피루스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은, 어둠의 강을 건너 영원한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도 간절한 불멸에의 염원이 담긴 기도라 하겠습니다.
제2절: 『티벳 사자의 서』, 바르도 (Bardo)의 빛과 환영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무수한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고원의 춥고 메마른 땅에서 탄생한 한 권의 책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의식의 여행이며, 심지어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합니다. 바로 『티벳 사자의 서』입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풀면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을 통해 얻는 위대한 해탈'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이 책이 담고 있는 철학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직접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스승이나 가족이 죽은 자의 귀에 대고 49일 동안 읽어주는 음성 안내서입니다. 마치 GPS가 운전자에게 길을 알려주듯, 『바르도 퇴돌』은 죽음 이후의 미지 세계를 헤매는 영혼에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서구에서 이 책을 『티벳 사자의 서』라고 부른 이유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책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가 외부 세계의 구체적인 지리와 괴물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마법 주문들을 다룬다면, 『바르도 퇴돌』은 죽음 이후 펼쳐지는 모든 경험이 망자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집트의 책이 객관적인 사후세계의 지도책이라면, 티벳의 책은 주관적인 의식의 항해도입니다.
'바르도 (Bardo)'라는 말은 티벳어로 '사이' 또는 '중간'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만이 아닙니다. 티벳 불교의 관점에서 우리의 전체 존재는 무수한 바르도들의 연속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바르도이고, 잠들어 꿈을 꾸는 순간도 바르도이며, 명상에 잠겨 있는 순간도 바르도입니다. 모든 변화와 전환의 순간이 바로 바르도인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바르도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까지, 영혼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바르도를 차례로 경험하게 됩니다. 각각의 바르도는 독특한 성격과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바르도 퇴돌』은 이 세 개의 여정을 통과하는 영혼을 위한 세심한 안내서입니다.
첫 번째 바르도는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라고 불립니다. 이는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로, 말 그대로 숨이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경험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몇 분 또는 몇 시간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의식의 차원에서는 가장 깊고 강력한 경험이 펼쳐지는 시간입니다.
육체를 구성하던 네 가지 기본 요소인 지 (地), 수 (水), 화 (火), 풍 (風)이 차례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먼저 땅의 기운이 물의 기운으로 녹아들면서 몸이 무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집니다. 물의 기운이 불의 기운으로 흡수되면서 입과 코가 마르고 체온이 떨어집니다. 불의 기운이 바람의 기운으로 합쳐지면서 소화력이 사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기운이 의식 속으로 녹아들면서 모든 외부 감각이 사라집니다.
이 해체 과정이 완료되면, 망자의 의식은 평생 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감각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근원의 정광명 (Primordial Clear Light)'이라고 불리는 눈부신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밝으며, 무한한 사랑과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빛은 외부에서 오는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의식의 본래 모습이며, 동시에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법신 (法身, Dharmakāya)의 현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순간 망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망자가 살아생전 깊은 수행을 통해 이 빛의 본질을 미리 체험하고 이해했다면, 그는 이 순간에 "아, 이것이 바로 나의 본래 마음이구나!"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자연스럽게 그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해탈의 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엄청난 빛 앞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합니다. 평생을 작고 제한된 자아와 동일시해서 살아온 의식에게, 이 무한하고 경계 없는 빛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굴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한낮의 태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혼들은 이 빛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바로 이들을 위해 두 번째 바르도가 시작됩니다. '초니드 바르도 (Chönyid Bardo)', 즉 '실재를 경험하는' 바르도입니다. 근원의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절했던 영혼이 며칠 뒤 다시 의식을 되찾으면서, 이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 펼쳐집니다. 이 바르도는 상징적으로 14일 동안 지속되며, 그 동안 망자는 자신이 평생 동안 마음속에 쌓아온 모든 카르마의 흔적들을 생생한 환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7일 동안은 '평화의 신들 (Peaceful Deities)'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자비와 지혜, 평화와 사랑의 화신들로,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맞이하려 합니다. 첫째 날에는 푸른 빛을 발하는 비로자나 부처가 나타나 망자를 법계체성지 (法界體性智)의 세계로 이끌려 합니다. 둘째 날에는 흰 빛의 아촉 부처가 대원경지 (大圓鏡智)를 상징하며 다가옵니다. 셋째 날에는 노란 빛의 보생 부처가 평등성지 (平等性智)를 가져오고, 넷째 날에는 붉은 빛의 아미타 부처가 묘관찰지 (妙觀察智)를 선사하려 합니다. 다섯째 날에는 녹색 빛의 불공성취 부처가 성소작지 (成所作智)를 베풀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각의 찬란한 지혜의 빛과 함께 항상 여섯 개의 희미하고 부드러우며 유혹적인 빛들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희미한 빛들은 천도, 아수라도, 인간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의 여섯 가지 윤회계를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영혼들은 눈부신 지혜의 빛보다는 이 익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어두운 빛에 이끌리게 됩니다.
『바르도 퇴돌』은 바로 이 순간 망자의 귓가에서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저 눈부신 지혜의 빛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니, 그들을 알아보고 그 빛 속으로 녹아들라! 저 희미하고 안락해 보이는 어둠의 빛에 현혹되지 말라! 그 빛은 그대를 다시 고통의 윤회 속으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자신의 카르마적 습성 때문에 진짜 해탈의 기회를 놓치고 익숙한 어둠을 선택하게 됩니다.
평화의 신들을 통한 해탈의 기회를 놓친 채 7일이 지나면, 이제 망자의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형상화되기 시작합니다. 분노와 증오, 탐욕과 어리석음, 오만과 질투 같은 어두운 카르마들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 7일 동안 망자의 눈앞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와 팔을 가지고, 불길에 휩싸인 채 피를 마시며 해골을 목에 걸고 있는 끔찍한 형상의 '진노의 신들 (Wrathful Deities)'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번개와 함께 나타납니다.
이들의 모습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마들보다도 더 끔찍합니다. 헤루카 (Heruka)라고 불리는 주요 진노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세 개의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 곧게 선 머리카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갖가지 무기들이 들려 있고, 발아래에는 각종 동물과 신들을 밟고 서 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배우자인 다키니 (Dakini)들도 함께 나타나는데, 이들 역시 못지않게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이 이 순간에도 망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정말 놀랍습니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도망치지 말라! 이 무서운 존재들은 지옥에서 온 악마가 아니다. 이들은 그대가 첫 번째 주간에 알아보지 못했던 바로 그 평화의 신들이, 그대의 공포심과 카르마적 장애 때문에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치 하나의 달이 물결치는 호수에는 일그러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니, 그 본질이 공 (空)함을 꿰뚫어 보라!"
이것이야말로 『바르도 퇴돌』의 가장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천국과 지옥, 자비로운 부처와 무서운 악마는 모두 우리 마음 밖에 실재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실제로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일 뿐인 것처럼,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모든 환상들은 우리 자신의 카르마와 마음의 습성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영사에 불과합니다.
만약 망자가 이 진실을 깨닫고 모든 환영 앞에서 두려움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그 순간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서운 진노존들을 보고도 "이것들은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구나. 그 본질은 비어있고 실체가 없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순간 모든 환영은 사라지고 의식은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에 압도되어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 합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악마들이 정말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믿고, 어디든 피할 곳을 찾으려 합니다. 바로 이런 망자들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바르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바르도는 '시드파 바르도 (Sidpa Bardo)'입니다. 이는 '다시 태어남을 구하는' 바르도로, 이전의 모든 해탈 기회를 놓친 영혼이 다시 육체를 얻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단계입니다. 이 바르도에서 망자는 미세한 의식체의 형태로 존재하며, 생각만으로도 어디든지 순식간에 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망자는 깊은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는 살아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지만, 그들과 소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은 들을 수 없고, 아무리 만지려 해도 손이 그냥 통과해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망자는 자신이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시에 안정적인 육체에 대한 갈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때 망자의 앞에는 카르마의 심판이 펼쳐집니다. 염라대왕 야마 (Yama)가 나타나 거울을 들고 망자가 평생 지은 모든 선악의 행위를 비춰줍니다. 이 거울에는 망자가 한 번이라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한 모든 것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선한 행위는 흰 돌로, 악한 행위는 검은 돌로 세어지며, 이에 따라 다음 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은 여기서도 놀라운 비밀을 알려줍니다. 이 무서운 염라대왕과 그의 심판 역시 실제로는 외부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망자 자신의 양심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카르마의 과보는 외부의 어떤 신이나 악마가 내리는 처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기 처벌에 불과합니다.
심판이 끝나면 육도 윤회의 여섯 세계가 각각 다른 색깔의 빛으로 망자 앞에 펼쳐집니다. 하얀 빛의 천상계는 자만심이 강한 영혼을 유혹하고, 붉은 빛의 아수라계는 질투심이 많은 영혼을 끌어당깁니다. 파란 빛의 인간계는 욕망이 강한 영혼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노란 빛의 축생계는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합니다. 연기가 자욱한 아귀계는 탐욕스러운 영혼을, 검은 빛의 지옥계는 분노가 많은 영혼을 각각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망자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카르마적 성향에 따라 특정한 세계의 빛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미래의 부모가 될 남녀의 결합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약 남성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끼며, 여성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그 반대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런 강렬한 감정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시 한번 기나긴 윤회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은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환경의 자궁을 선택할 수 있는지, 나아가 자궁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해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만약 정말로 자궁에 들어가야만 한다면, 적어도 법을 들을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하라. 부모의 얼굴이 자비롭고 지혜로워 보이는 곳을 택하라. 그러나 가능하다면 이 모든 환상이 마야 (Maya)임을 기억하고, 더 이상 윤회에 빠지지 말라."
이처럼 『바르도 퇴돌』은 죽음의 순간부터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49일간의 전체 여정을 통해, 영혼에게 수없이 많은 해탈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첫 번째 바르도에서 근원의 빛을 알아차리면 즉시 해탈할 수 있고, 두 번째 바르도에서 평화의 신들이나 진노의 신들을 자신의 마음의 투영임을 깨달으면 그때도 해탈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바르도에서도 모든 심판과 환상이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인식하면 여전히 해탈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처럼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 이후의 모든 경험을 '마음의 투영 (mind projection)'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죽음이 외부의 객관적인 환경이나 신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경험이 아니라, 오롯이 망자 자신의 마음 상태와 살아생전 쌓아온 업 (karma)에 따라 능동적이고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망자의 영적 수행 수준과 마음가짐, 그리고 업보적 습관에 따라, 동일한 바르도의 풍경도 누군가에게는 찬란한 해탈의 기회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환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끊임없이 '환영임을 알아차리라 (recognize as illusion)'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 심리학, 특히 분석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의 이론과도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과 그 속에 잠재된 원형 (archetypes)의 개념은 『바르도 퇴돌』의 신들과 악마들이 우리의 의식을 넘어선 깊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발현되는 보편적인 심리적 상징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살아생전 미처 직면하지 못하고 억압했던 그림자 (shadow) 같은 내면의 어두운 측면들이 죽음 이후에 가장 생생한 형태로 나타나 우리를 시험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명계의 신들이 바로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원초적인 힘과 감정들이 형상화된 것이며, 이를 '마음의 투영'으로 인식하는 것은 내면의 통합을 이루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도 퇴돌』은 단순한 사후세계 안내서를 넘어, 의식과 현실의 본질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심리학적 탐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 통찰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심지어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결국 의식이 만들어내는 꿈과 같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해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과도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양자물리학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식의 개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경과학은 뇌가 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경험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르도 퇴돌』이 1,200년 전에 직관적으로 파악했던 진실을, 현대 과학이 실험과 이론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의 가치는 단순히 현대 과학과 유사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을 인생 최대의 두려움이 아니라 최대의 기회로 바라보는 혁명적인 관점 전환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을 잃는 순간이지만, 『바르도 퇴돌』에서 죽음은 평생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 본성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바르도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 경험하는 현실과 꿈속에서 경험하는 환상, 그리고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바르도의 환영들은 모두 같은 의식의 다른 상태일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바르도를 잘 통과하려면,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부터 모든 경험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이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과 즐거움,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이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는 상대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르도 퇴돌』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줍니다. 죽음을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 과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게 줄어듭니다. 물론 육체적 고통이나 사별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는 많이 완화됩니다.
현대인들이 『바르도 퇴돌』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지혜는 마음챙김의 중요성입니다. 이 책은 바르도에서 해탈하는 핵심이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신이든 진노의 신이든, 그것이 자기 마음의 투영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해탈이 가능합니다. 이는 현재 서구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마음챙김 명상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르도 퇴돌』의 또 다른 현대적 의의는 죽음을 개인의 고립된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돌보아야 할 과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서 가족과 스승이 49일 동안 끊임없이 읽어주어야 하는 텍스트입니다. 즉, 죽음을 혼자 맞이하는 고독한 여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함께 완성해나가는 영적 여정으로 봅니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점점 더 의료진에게 맡겨지고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의 관점에서 보면,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첨단 의료기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와 지혜로운 안내입니다. 물론 의료적 처치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차원의 돌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도 퇴돌』은 현대의 호스피스나 완화의료 분야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의 정지가 아니라 의식의 전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것과 함께 정신적, 영적 차원의 평안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바르도 퇴돌』이 현대인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는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든 죽음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가 수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전해져 온 이유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근본적인 지혜, 즉 모든 현실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통찰과,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해탈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에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앞에서, 이 책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가장 위대한 기회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바르도의 빛과 환영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본래 본성을 찾을 수 있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제3절: 의식의 유지, 죽음의 순간에 깨어있기 위한 훈련
우리가 앞서 탐험한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외부의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거대한 환영의 무대임을 밝혔습니다. 이 혁명적인 통찰은 죽음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주할 명계의 신들과 악마, 찬란한 빛과 끔찍한 어둠이 모두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죽음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더 이상 외부의 심판관이나 신의 자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순간에 망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의 상태 그 자체가 됩니다.
이것은 죽음이 단순히 숨이 멎고 육체의 기능이 정지하는 수동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혼이 치러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능동적인 시험이라는 의미입니다. 의식이 혼란과 공포, 그리고 평생 동안 쌓아온 카르마적 습관에 휩쓸려 버린다면, 그 영혼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끔찍한 환영 속에서 길을 잃고 윤회의 더 낮은 세계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의 중심을 잃지 않고, 맑고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영혼은 모든 환영의 본질이 공 (空)함을 꿰뚫어 보고, 마침내 해탈의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위대한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하면 깨어있을 수 있을까? 고대의 위대한 영적 전통들, 특히 이집트와 티벳의 지혜는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사자의 서’는 단순히 죽음 이후를 위한 안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순간을 준비하고, 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평생에 걸친 훈련 지침서였던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방식은 지식과 의례를 통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자의 서』에 담긴 수많은 주문과 신들의 이름, 그리고 관문의 비밀 암호들을 파피루스에 기록하여 망자와 함께 묻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단순히 부적을 챙겨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부유한 이집트인은 살아생전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그 벽에 『사자의 서』의 내용들을 꼼꼼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드나들며 이 신성한 문자들을 읽고, 암송하고, 명상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 예행연습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죽음 이후에 자신이 걷게 될 두아트의 지리를 익히고, 마주치게 될 문지기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웠으며,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해야 할 부정 고백의 내용을 반복하여 연습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사후 세계의 지도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육체가 소멸하고 의식이 혼란에 빠지는 바로 그 순간, 평생에 걸쳐 훈련했던 이 신성한 지식이 잠재의식 속에서 떠올라, 영혼이 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문의 암송은, 혼돈 속에서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가장 강력한 닻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집트인들은 죽음의 순간을 위해, 지식이라는 갑옷을 입고 주문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는 방식으로 의식을 훈련했습니다.
반면, 티벳 불교의 훈련 방식은 훨씬 더 내면적이고 심리학적입니다. 그들의 훈련은 외부의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성을 직접 꿰뚫어 보는 수행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중심에는 명상 (meditation)이 있습니다. 티벳의 수행자는 평생에 걸쳐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을 관찰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거나 따라가지 않고, 단지 구름이 하늘을 스쳐 지나가듯 고요히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실체가 없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그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순수한 의식의 공간이 있음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훈련은 죽음의 순간을 위한 결정적인 준비가 됩니다. 초니드 바르도에서 끔찍한 진노의 신들이 나타났을 때, 훈련되지 않은 의식은 그 형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공포에 휩싸이고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훈련을 해온 수행자는, 그 무서운 형상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그 환영을 외부의 실체로 착각하지 않고, 마치 명상 중에 나타나는 잡념을 바라보듯이,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투영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 ‘알아차림 (recognition)’이야말로, 티벳의 수행자가 연마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더 나아가, 티벳 불교에는 죽음의 순간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고급 수행법들이 존재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포와 (Phowa), 즉 ‘의식 전이 (transference of consciousness)’의 수행입니다. 수행자는 살아있을 때부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의식이 육체의 정수리에 있는 출구를 통해 빠져나가, 정토 (淨土)의 아미타 부처와 같은 깨달은 존재의 심장 속으로 합일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시각화하고 훈련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그는 죽음의 순간이 닥쳤을 때, 육체가 해체되는 고통과 혼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의식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대신, 죽음을 해탈을 위한 도약의 순간으로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집트와 티벳의 방식은 겉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그 근본적인 목표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거대한 혼돈의 폭풍 속에서, ‘깨어있는 의식’이라는 작은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지식과 주문이라는 방풍벽을 세워 그 촛불을 지키려 했고, 티벳인들은 명상을 통해 촛불 자체가 바람의 본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폭풍과 하나가 되려 했습니다.
이 고대의 지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비록 그들처럼 정교한 의례나 수행 체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또한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준비하고 의식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기적으로 성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명상이나 마음 챙김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모든 행위가 바로 현대적인 의미의 ‘죽음을 위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삶의 마지막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유일한 과목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의식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고대의 영혼의 지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진실은, 죽음의 순간에 경험하게 될 세계의 모습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평온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닦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위한 가장 확실한 준비이자,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충만하게 만드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제4절: 해탈의 기회, '어머니 빛'과 '아들 빛'의 만남
『티벳 사자의 서』가 죽음 이후의 바르도 (Bardo)에서 펼쳐지는 모든 현상이 우리 마음의 투영임을 가르치고, 죽음의 순간에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해탈 (解脫, Liberation)이라는 목표 때문입니다. 육도 윤회 (Samsara)라는 고통스러운 순환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지혜를 얻는 것, 이것이 티벳 불교의 모든 가르침과 수행이 지향하는 정점입니다. 그리고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이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이고도 위대한 기회라고 강조합니다.
이 해탈의 기회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어머니 빛 (Mother Clear Light)'과 '아들 빛 (Son Clear Light)'의 만남입니다. 이 두 가지 빛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티벳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수행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 빛 (Mother Clear Light)’은 근원의 정광명 (Primordial Clear Light)을 지칭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치카이 바르도, 즉 죽음의 순간에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텅 비고 경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눈부신 우주의 궁극적 실재의 빛입니다. 이 빛은 모든 현상의 본성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의 의식이 감각과 생각, 개념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드러나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의식 그 자체입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이를 법신 (法身, Dharmakāya)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형상이 없는 절대적인 진리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 어머니 빛은 늘 존재해왔고, 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 우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깨달음의 근원적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무수한 번뇌와 무지, 그리고 감각적 경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 어머니 빛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마치 탁한 물과 같아서, 그 안에 비치는 달의 본연의 빛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육체가 해체되고 오감이 소멸하며 모든 개념적 사고와 자아 의식이 점차 사라지면서, 마음의 탁한 층들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이때, 일시적으로 모든 번뇌와 업보적 습관이 약해지면서, 마침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어머니 빛이 섬광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궁극적인 진리와 우리 자신의 가장 본연의 의식이 합쳐지는, 존재의 가장 심오한 순간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영혼들이 이 어머니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놓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압도적인 광휘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무의식 속으로 기절하듯 빠져듭니다. 혹은 이 빛을 외부의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고 경배하려 하다가, 그것이 자신과 분리된 대상이 아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무지와 업보적 습관이 그들을 다시 윤회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 빛 (Son Clear Light)’의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아들 빛은 살아생전 수행을 통해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경험하고 익숙해진 순수한 의식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관찰하고, 모든 생각과 감정의 본질이 공 (空)하며 실체가 없음을 통찰하는 훈련을 반복한 수행자는, 이미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어머니 빛과 동일한 성질의 빛, 즉 아들 빛을 미리 체험하게 됩니다.
명상 수행을 통해 얻는 이 아들 빛은 비록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어머니 빛만큼 강렬하고 완전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명상 중에 마음의 모든 활동이 잦아들었을 때 드러나는, 텅 비면서도 또렷한 알아차림의 상태, 즉 ‘마음의 본성 (nature of mind)’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 빛입니다. 마치 한 가닥의 실이 전체 옷감의 본질과 다르지 않듯이, 아들 빛은 어머니 빛의 한 단면이자 반영인 것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로 이 두 가지 빛의 만남을 강조합니다. 죽음의 순간, 어머니 빛이 섬광처럼 나타났을 때, 수행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미 익숙해진 아들 빛과 이 어머니 빛이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알아차려야 (recognize) 합니다.
“아들아! 지금 나타나는 이 눈부신 빛은 외부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의 마음의 본성이란다. 너는 이미 살아생전 수행을 통해 이 빛과 익숙해졌을 것이다. 이제 너의 아들 마음 (아들 빛)을 어머니 마음 (어머니 빛)과 결합시켜라!”
이 지침은 망자가 어머니 빛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것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임을 확신하게 함으로써, 의식이 자연스럽게 그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가도록 돕습니다.
이처럼 어머니 빛과 아들 빛이 합일되는 순간, 망자는 모든 번뇌와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됩니다. 그는 육도 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 법신 (Dharmakāya)의 경지에 도달하며, 고통 받는 중생들을 돕기 위해 다시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깨달은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티벳 사자의 서』가 제시하는 죽음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모든 티벳 불교 수행자들이 평생에 걸쳐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말하는 '어머니 빛'과 '아들 빛'의 만남은 단순히 사후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궁극적인 영적 성장과 해탈의 기회를 설명하는 심오한 지혜입니다. 어머니 빛은 우주적 진리이자 우리 의식의 본래 모습이며, 아들 빛은 살아생전 수행을 통해 익힌 내면의 깨어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이 둘이 죽음의 순간에 하나임을 알아차릴 때, 영혼은 윤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가르침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우리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계기로 전환시킵니다. 따라서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여 궁극적인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한,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자비롭고 심오한 안내서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