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우리 안의 결핍과 끝없는 바람

by 이호창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우리 안의 결핍과 끝없는 바람



우리는 종종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갖고 싶던 물건을 가져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도, 문득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듯한 이 느낌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한 근원적인 부족함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느낌을 '결핍(manque)'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감정을 넘어,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본질적으로 느끼는 빈자리, 즉 ‘본래의 나에게서 멀어진 듯한 원초적인 부족함’과 가깝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결핍감은 우리가 '말의 세계', 즉 그가 '상징계(Symbolic Order)'라 부른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태초에 아기는 어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됨의 상태, 즉 '실재계(Real)' 속에 머문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욕구가 즉각적으로 충족되며, '부족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함으로써 이 원초적 합일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배우는 순간, 그 말은 실제 엄마와의 즉각적인 연결을 대신하지만, 동시에 그 완전한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느끼게 만든다. 아이는 이제 울음만으로 바로바로 원하는 것을 얻던 때와 달리, 말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표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다림, 오해,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들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라는 단어는 실제 엄마 그 자체가 아니라 엄마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이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거리'가 생겼음을, 그리고 엄마가 자신의 일부가 아닌 분리된 타자임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 주지만, 동시에 그 언어로는 결코 완전히 포착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원초적 충만함과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 본래적 전체성의 상실, 이 메울 수 없는 틈이 라캉이 말하는 결핍의 핵심적인 기원이다. 이 결핍은 이후 인간의 모든 욕망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빈자리로 남게 된다.


그토록 갖고 싶어 비싼 돈을 주고 산 최신형 휴대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출시된 새 모델때문에 금새 지겨워 지거나, SNS에서 보이는 친구들의 행복한 모습에 괜히 내 삶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일상에서 나타나는 결핍감의 예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지만, 사실 그것은 잃어버린 처음의 완전함을 채우려는 끝없는 시도일 뿐, 마치 바닥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어른이 되어 회사에서 '김 대리', 집에서 '누구 엄마'처럼 정해진 역할에 맞춰 살아가면서 문득 느끼는 어색함이나 진짜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역시 이러한 결핍감의 또 다른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인간 존재의 바탕에 깔린 이 결핍과 그것을 채우려는 갈망은 라캉 이전부터 여러 신비주의 전통, 즉 에소테리즘(esotericism)에서도 다양하게 이야기되어 왔다.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이렇게 가르친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신성한 빛의 세계인 '플레로마(Pleroma, 그리스어: πλήρωμα, 충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우주적인 사건 때문에 어둡고 혼란스러운 물질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영혼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 채, 이 세상을 떠돌며 깊은 외로움과 부족함을 느낀다. 마치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나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일까?' 하고 고민하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영지주의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그노시스(Gnosis, 그리스어: γνῶσις, 영적인 깨달음 또는 지혜)'는 바로 이 잊어버린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고, 잃어버린 빛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마음을 뜻한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Kabbalah, 히브리어: קַבָּלָה)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특히 16세기에 발전한 루리아 카발라에서는 이런 창조 신화가 있다. 끝없는 신성인 '아인 소프(Ein Sof, 히브리어: אֵין סוֹף, 무한자)'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드러낼 때, 신성한 빛을 담으려고 만든 '그릇들(켈림, Kelim)'이 너무 강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셰비라트 하케림(Shevirat haKelim, 히브리어: שבירת הכלים, 그릇들의 깨짐)'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신성한 빛의 조각들(니초초트, Nitzotzot)이 물질세계 곳곳에 흩어져 갇히게 되고, 세상은 불완전하고 조각난 상태가 된다. 마치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 것처럼, 각각의 조각은 원래 전체 그림의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하며 다시 합쳐지기를 바란다. 카발라 수행자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티쿤 올람(Tikkun Olam, 히브리어: תיקון עולם, 세계의 복원 또는 치유)'은 이렇게 흩어진 신성의 빛 조각들을 다시 모으고 깨진 그릇들을 고쳐서, 처음의 조화롭고 하나 된 상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멀어진 친구와 화해하려고 애쓰거나,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할 때,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이 '티쿤 올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는데 마지막 한 조각이 맞지 않아 전체를 완성하지 못할 때 느끼는 아쉬움은 바로 이런 '깨어짐'과 '잃어버림'을 우리 삶에서 느끼는 순간이다.


고대 후기 철학인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그리스어: Πλωτῖνος)는 모든 것이 궁극적인 실제이자 완전한 하나인 '일자(The One, 그리스어: τὸ Ἕν)'로부터 흘러나왔다고 보았다. 이 '일자'에서 멀어질수록 존재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지만, 동시에 처음의 하나됨에서 멀어져 불완전해진다. 인간 영혼의 여정은 바로 이 근원인 '일자'로 돌아가려는(회귀, epistrophe, 그리스어: ἐπιστροφή) 과정이며, 그 과정은 깊은 마음속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마치 명절이 되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왠지 모를 그리움에 고향 가는 기차표를 끊는 것처럼,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원래 하나였던 상태, 완전한 합일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야콥 뵈메(Jakob Böhme)는 이런 마음을 '젠주흐트(Sehnsucht, 독일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는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선, 깊고도 때로는 고통스러운 열망을 의미한다. 뵈메는 신의 가장 깊은 본질인 '웅그룬트(Ungrund, 독일어, 근원 없는 근원 또는 심연)'를 모든 존재가 시작된 알 수 없는 깊이라고 보았다. 인간 영혼은 이 '웅그룬트'에서 나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역동적인 바람 속에 있으며, 이 바람은 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나 과학자의 끝없는 연구, 또는 평범한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힘의 바탕이 된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거대함과 나의 작음을 동시에 느끼면서, 알 수 없는 감동과 함께 무언가를 향한 막연한 그리움을 품을 때, 우리는 어쩌면 이 '젠주흐트'를 살짝 경험하는 것이다.


동양의 지혜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 Dukkha, 팔리어/산스크리트어)'는 단순한 몸의 아픔이나 마음의 괴로움을 넘어,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무상, 無常, Anicca),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다(무아, 無我, Anatta)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헛된 것에 집착하며(갈애, 渴愛, Tanha) 스스로 괴로움을 만든다. 힘들게 취직한 회사에서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될 때조차 문득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갈애'가 끝없이 반복되는 모습이다. 라캉이 말한 결핍과 욕망의 모습이 여기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라캉은 이 결핍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보고 그 구조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면, 불교는 명상과 지혜를 닦아 이러한 갈애와 그 근본 원인인 '무명(無明, Avidya, 근원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평화로운 상태, 즉 열반(Nirvana, 산스크리트어: निर्वाण, 또는 涅槃)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처럼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 여러 신비주의 전통의 가르침들은 서로 다른 말과 상징을 사용하지만, 결국에는 인간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한 어떤 근원적인 '없음' 또는 '잃어버림'의 느낌, 그리고 그것을 채우거나 되찾으려는 끊임없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이 근원적인 부족함이야말로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질문하게 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도록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메워지지 않는 틈과 그로 인한 간절한 바람 속에서 인간의 이야기, 예술, 그리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원초적인 결핍은 단순히 이겨내야 할 나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출발점이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뛰어넘도록 이끄는 신비로운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부족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 우리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깊고도 뜨거운 대답이 된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며 시작하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이 커다란 물음에 대한 우리 나름의 답을 써내려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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