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장: 붓다의 길: 아트만과 아나트만의 대화

by 이호창

제2-16장: 붓다의 길: 아트만과 아나트만의 대화



2-16.1. 고통의 문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인간의 실존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왜 우리는 고통받는가? 힌두 사상의 현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브라만 (Brahman)’이라는 우주적 실재와 ‘아트만 (Ātman)’이라는 영원한 자아의 개념을 탐구했다면,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또 다른 위대한 영혼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샤카 (Śākya) 족의 왕자 싯다르타 고타마 (Siddhārtha Gautama)는 왕궁의 안락한 삶 속에서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불타고 있는 거대한 집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이 불을 끌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왕자의 지위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났습니다. 수년간의 극심한 고행 끝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그는, 마침내 양 극단을 버린 중도 (中道)의 길 위에서, 보리수나무 아래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이 트는 새벽, 그는 이 우주적 고통의 근본 원인과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깨달은 자’, 즉 붓다 (Buddha)입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자, 이후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교라는 거대한 종교의 초석이 된 가르침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Catvāri-ārya-satyāni)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논증 이전에, 인류라는 환자를 위한 위대한 의사의 냉철하고도 자비로운 진단서와도 같습니다.


고 (苦)의 진리 (Duḥkha-ārya-satya)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 (苦)의 진리 (Duḥkha-ārya-satya), 즉 “삶은 고통이다”라는 선언입니다. 힌두 사상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두카 (duḥkha)’라는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 고통의 문제를 훨씬 더 체계적이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단지 불행한 사건들로 인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조건 자체에 깊이 내재된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통을 세 가지의 다른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고통 그 자체로서의 고통 (duḥkha- duḥkhat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통’이라고 부르는 모든 명백한 괴로움입니다. 태어남의 고통, 늙음의 고통, 병듦의 고통, 그리고 죽음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愛別離苦, 애별리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怨憎會苦, 원증회고),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求不得苦, 구부득고).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보편적인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통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사실은 고통의 또 다른 얼굴임을 꿰뚫어 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차원의 고통, 즉 변화로 인한 고통 (vipariṇāma-duḥkhatā)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감각, 행복한 순간,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변합니다 (anitya, 無常). 즐거운 감각은 언젠가 사라지고, 행복한 순간은 과거의 추억이 되며, 사랑하는 관계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바로 그 즐거움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에 집착했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모든 조건 지어진 즐거움은, 그 안에 이미 상실의 고통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과도 같아서, 핥는 순간의 달콤함 뒤에는 반드시 혀를 베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처럼 모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야말로, 행복마저도 고통으로 변질시키는 두 번째 차원의 괴로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차원의 고통은 가장 미세하고도 심오한 것으로, 형성된 것 자체로서의 고통 (saṃskāra-duḥkhat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상태에 있을 때조차,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불리는 이 존재는, 힌두 사상에서 말하는 영원불변하는 실체인 아트만 (Ātman)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다섯 가지의 요소들이 잠시 모여 이루어진 복합체, 즉 오온 (pañca-skandha)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바로 물질적인 몸 (rūpa), 감각적 느낌 (vedanā), 지각 작용 (saṃjñā), 의지적 형성 작용 (saṃskāra), 그리고 분별 의식 (vijñāna)입니다. ‘나’는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의 일시적인 흐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나’의 존재 자체가 다른 원인과 조건들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나 미세한 불안과 불만족이 잠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진단한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병, 즉 고 (苦)의 진리입니다.


고의 원인에 대한 진리 (Samudāya- ārya-satya)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원인에 대한 진리 (Samudāya- ārya-satya)입니다. 위대한 의사는 병의 증상을 진단한 뒤, 반드시 그 병의 뿌리를 찾아냅니다. 붓다는 이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바로 ‘트리슈나 (tṛṣṇā)’, 즉 ‘갈애 (渴愛)’ 또는 ‘목마름’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욕망, 채워도 채워도 결코 만족을 모르는 존재론적 갈증입니다. 붓다는 이 갈애를 다시 세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kāma-tṛṣṇā)입니다. 이것은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더 즐겁고, 더 유쾌하며, 더 자극적인 감각적 경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두 번째는 존재에 대한 갈애 (bhava-tṛṣṇā)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며, 더 나은 존재, 더 중요한 존재, 더 인정받는 존재가 되려는 모든 종류의 야망과 집착을 포함합니다.


세 번째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vibhava-tṛṣṇā)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이며, 심지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허무주의적인 소멸의 욕망까지도 포함합니다.


이 세 가지 갈애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카르마 (karma, 불교에서는 업)를 짓게 만들고, 그 카르마의 힘에 이끌려 끝없는 삼사라 (saṃsāra)의 바다를 표류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 갈애 자체보다 더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맹목적으로 갈애하는가? 그 근저에는 바로 무지 (avidyā), 즉 이 세계와 나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무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힌두 사상, 특히 샹카라의 베단타에서 무지가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것이었다면, 불교에서 무지는 이와는 정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 (anitya, 덧없음), 고 (duḥkha, 고통스러움), 그리고 무아 (anātman, 실체 없음)라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진실, 즉 삼법인 (三法印)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덧없는 것들 속에서 영원한 만족을 찾으려 하고,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들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 하며, 무엇보다도 실체 없는 ‘나 (오온의 집합)’를 영원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 즉 아트만으로 착각합니다. 바로 이 ‘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 깊고도 완고한 착각이야말로, 모든 이기적인 갈애와 집착이 자라나는 비옥한 토양입니다.


고의 소멸에 대한 진리 (Nirodha-ārya- satya)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소멸에 대한 진리 (Nirodha-ārya- satya)입니다. 만약 고통의 원인이 갈애와 무지라면, 그 원인을 완전히 뿌리 뽑음으로써 고통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입니다. 이 고통의 완전한 소멸의 상태를 니르바나 (Nirvāṇa), 즉 ‘열반 (涅槃)’이라고 부릅니다. ‘니르바나’는 문자적으로 ‘(불꽃이) 불어서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꺼지는 불꽃은 바로 탐욕 (rāga), 증오 (dveṣa), 그리고 어리석음 (moha)이라는 세 가지의 독, 즉 삼독 (三毒)의 불꽃입니다. 이 세 가지 독의 불꽃이 완전히 꺼졌을 때, 모든 고통의 원인인 갈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평화와 고요, 그리고 자유를 성취하게 됩니다. 이것은 힌두교의 모크샤 (Mokṣa)와 마찬가지로 윤회의 사슬을 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힌두교의 모크샤가 종종 영원한 자아 (아트만)가 궁극적 실재 (브라만)와 합일하는, 긍정적이고 충만한 상태로 묘사되는 반면, 초기 불교의 열반은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소멸된 상태, 즉 언어나 개념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평정의 상태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모든 이원적 대립을 넘어선 궁극의 경지입니다.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 (Mārga- ārya-satya)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 (Mārga- ārya-satya)입니다. 위대한 의사는 마침내 환자를 위한 구체적인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열반이라는 궁극의 목표에 이르는 실천적인 길, 그것이 바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Ārya-aṣṭāṅgika-mārga), 즉 팔정도 (八正道)입니다. 이 여덟 가지 길은 어느 하나를 먼저 닦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수레를 끄는 여덟 개의 바큇살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닦아나가야 하는 통합적인 수행 체계입니다. 이 여덟 가지 길은 다시 세 가지의 훈련, 즉 계 (戒, Śīla), 정 (定, Samādhi), 혜 (慧, Prajñā)라는 삼학 (三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 (Prajñā)의 훈련은 올바른 견해 (samyag-dṛṣṭi, 正見)와 올바른 사유 (samyak-saṃkalpa, 正思惟)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탐욕과 증오,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올바른 의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둘째, 도덕적 실천 (Śīla)의 훈련은 올바른 말 (samyag-vāc, 正語), 올바른 행위 (samyak-karmānta, 正業), 그리고 올바른 생활 (samyag-ājīva, 正命)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거짓말, 험담, 욕설을 피하고, 살생, 도둑질, 음행을 피하며,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직한 직업을 통해 생계를 꾸리는, 구체적인 윤리적 삶의 실천입니다.


셋째, 정신 집중 (Samādhi)의 훈련은 올바른 노력 (samyag-vyāyāma, 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 (samyak-smṛti, 正念), 그리고 올바른 집중 (samyak-samādhi, 正定)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게으름을 버리고 꾸준히 수행에 정진하며, 자신의 몸과 느낌, 마음과 법 (法)의 현상을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마침내 마음이 모든 산만함에서 벗어나 깊은 고요와 통찰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명상 수행입니다. 이처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단순한 철학적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 (苦, 고), 그 병의 원인에 대한 규명 (集, 집),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 (滅, 멸), 그리고 마침내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처방전 (道, 도)을 제시하는, 인류를 위한 가장 위대하고도 자비로운 의사의 가르침입니다.











2-16.2. 붓다의 길과 베단타의 길



“나는 누구인가?” 이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인도의 위대한 두 영적 전통은 마치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도 놀랍도록 닮아 있는 심오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힌두 사상의 정수인 우파니샤드 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사상가 샹카라 (Śaṅkara)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의 가장 깊은 본질 속에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우주적 실재 그 자체와 결코 다르지 않은 절대적 자아, 즉 아트만 (Ātman)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동일한 인도의 정신적 토양 위에서, 붓다 (Buddha)는 완전히 상반된 선언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실체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사상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선언인 아나트만 (anātman), 즉 무아 (無我)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붓다의 이 통찰은 수세기가 흐른 뒤, 대승불교의 위대한 철학자 나가르주나 (Nāgārjuna)에 의해 모든 존재의 본질이 공 (空, Śūnyatā)하다는 사상으로 정교하게 발전했습니다. ‘궁극적 자아’와 ‘자아 없음’, 그리고 ‘절대적 실재’와 ‘궁극적 공’이라는 이 두 개의 상반된 대답은, 이후 2,500년 동안 이어진 힌두교와 불교 사이의 모든 철학적 논쟁의 근원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가장 심오한 두 개의 창 (窓)이 되었습니다.


붓다의 길은 철저히 경험적인 땅 위에서 시작됩니다. 그가 ‘자아는 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적인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해부하고 분석한 결과, 그 어디에서도 영원불변하는 ‘나’라는 실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한 위대한 의사의 진단서와도 같았습니다. 그의 방식은 형이상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철저히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것이 당신의 몸입니까? 그러나 이 몸 (rūpa)은 끊임없이 변하고, 늙고, 병들며, 결국에는 썩어 사라집니다. 만약 이 몸이 진짜 ‘나’라면, 나는 내 몸에게 ‘늙지 말라’, ‘병들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의 느낌이나 감정 (vedanā)입니까? 그러나 느낌 역시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혹은 무덤덤했다가 하며, 구름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들은 나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나 지각 (saṃjñā)입니까? 혹은 당신의 의지나 욕망 (saṃskāra)입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당신의 의식 (vijñāna)입니까? 그러나 이것들 역시 잠시도 쉬지 않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흐름일 뿐,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주인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 (pañca-skandha), 즉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붓다의 분석입니다. ‘나’라고 불리는 존재는 결국 이 다섯 가지의 심리적, 물리적 요소들이 일시적으로 모여 상호 의존하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 (process)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부품들이 모여 ‘수레’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바퀴나 차축, 멍에를 아무리 분해해 보아도 그 속에서 ‘수레’라는 영원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사입니다. 붓다가 무아 (anātman)를 가르친 이유는, 이처럼 실체 없는 ‘나’라는 환영에 대한 우리의 깊고도 완고한 집착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인 갈애 (tṛṣṇā)가 자라나는 뿌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것’을 만들려 하고, ‘나’를 즐겁게 하는 것에 애착하며, ‘나’를 위협하는 것을 증오합니다. 이 ‘나’라는 환영의 성채가 무너질 때, 비로소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두려움의 군대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붓다의 무아 사상은 나가르주나 (용수)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확장되어, 우주 만물의 보편적인 원리인 공 (空)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통찰을 ‘나’라는 존재를 넘어 모든 현상 세계로 확장시켰습니다. 그가 보기에, 실체 없음은 단지 인간 존재에만 국한된 특성이 아니었습니다. 책상은 나무와 못,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장인의 노력이라는 여러 조건이 모여 잠시 책상으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책상다움’이라는 고유한 성질, 즉 자성 (自性, svabhāva)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책상에 불변하는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책상이어야 하며 결코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상은 언젠가 닳아서 사라지거나 장작으로 쓰여 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잠시 존재하는 현상일 뿐,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원리이며,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무자성 (無自性)이자 공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허무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고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의존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실상을 가리키는, 가장 심오한 긍정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공 사상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는 종종 ‘나’라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직업, 사회적 지위, 소유물, 그리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 역시 수많은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고,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직장은 언제든 잃을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라고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은 이러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할 때, 우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집착이 만들어내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허무주의적인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유동적인 본질을 긍정하고 매 순간을 더욱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은 불교의 길과 정면으로 마주치면서도, 놀랍도록 깊은 차원에서 공명합니다. 샹카라가 붓다와 나가르주나의 분석을 들었다면, 그는 아마도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깨달은 자들이여. 당신들이 말한 모든 것이 옳다. 몸은 내가 아니며,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그리고 개별적인 의식도 내가 아니다. 당신들이 분석한 그 오온의 무더기 속 그 어디에도, 그리고 당신들이 공하다고 말한 그 현상 세계의 그 어떤 것 속에도 참된 자아,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샹카라의 위대한 부정의 논법, 즉 ‘네티, 네티 (neti, 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탐구 방식은 바로 불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분석의 과정처럼 보입니다. 샹카라 역시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모든 경험적, 심리적 요소들을 하나씩 부정해 나감으로써 참된 자아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 부정의 끝에서 시작됩니다. 붓다와 나가르주나는 그 부정의 끝에서, 더 이상 파고들 ‘무엇’이 남아있지 않음을 보고 침묵했습니다. 영원한 자아나 절대적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고통의 소멸이라는 실천적인 목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독화살의 비유’에서처럼 불필요한 사변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샹카라는 바로 그 모든 것이 부정된 자리에, 그 모든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순수한 주시자, 즉 ‘증인 (Sākṣin)’이 남아 있음을 선언합니다. 몸이 변하는 것을 아는 자,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짐을 아는 자, 생각이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붓다가 ‘나’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없다고 분석했던 그 오온의 모든 활동은, 바로 이 순수한 앎의 빛, 즉 아트만의 빛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아트만은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의식의 공간’ 그 자체입니다.


샹카라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실재로서 브라만 (Brahman)을 제시합니다. 브라만은 순수한 존재 (Sat)이자, 순수한 의식 (Cit)이며, 무한한 희열 (Ānanda) 그 자체입니다. 이 브라만만이 유일한 진실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채로운 현상 세계는 마야 (māyā), 즉 신비로운 환영의 힘에 의해 나타난 현상과 같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공포에 떠는 것처럼, 우리는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 위에 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덧씌워보고 그것을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 슬픔, 만남과 이별, 이 모든 것은 밧줄 위에 나타난 뱀의 형상처럼 실체가 없는 환영입니다. 뱀이라는 환영은 밧줄이라는 실재 없이는 나타날 수 없듯이, 이 현상 세계 또한 브라만이라는 유일한 실재에 의존하여 잠시 나타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불교가 현상 세계 ‘안’에서 아트만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을 때, 샹카라는 아트만은 바로 그 현상 세계 ‘너머’에, 혹은 그 모든 것을 비추는 ‘배경’으로서 존재한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수레의 부품들 속에서 수레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샹카라는 그 모든 부품들을 보고 ‘이것은 수레다’라고 인식하는 그 ‘인식의 주체’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는 그들의 구원론, 즉 열반 (Nirvāṇa)과 해탈 (Mokṣa)의 개념에서도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낳습니다. 불교에서 열반은 탐욕, 증오,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환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고통의 원인이 소멸된 절대적인 평화와 고요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반면에, 샹카라의 해탈은 ‘내가 바로 브라만이다 (Aham Brahmāsmi)’라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명 (avidyā), 즉 무지라는 구름이 걷히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태양, 즉 아트만이 스스로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언어가 주로 심리적이고 실천적이며, 부정적인 표현 (‘꺼짐’)을 통해 그 궁극의 상태를 암시한다면, 베단타의 언어는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이며, 긍정적인 표현 (‘충만함’)을 통해 그 상태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하고도 깊은 유사성 때문에, 샹카라는 그의 평생에 걸쳐 라이벌 힌두 학파들로부터 ‘위장 불교도 (pracchanna-bauddha)’라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샹카라가 말하는 ‘속성이 없는 니르구나 브라만 (nirguṇa-brahman)’은 나가르주나가 말한 ‘공’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이 현상 세계를 ‘마야’라고 부르며 궁극적인 실재성을 부정한 것은, 불교가 이 세계를 덧없고 실체 없는 것으로 본 관점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샹카라 자신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단호히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불교, 특히 나가르주나의 중관 (中觀) 사상이 모든 것을 부정하여 결국 허무주의 (śūnyavāda)에 빠진다고 비판했습니다. 샹카라에게 마야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그 실재를 가리는 환영일 뿐이며, 그 환영이 걷혔을 때 드러나는 브라만이라는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실체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불교의 부정이 최종적인 진술이라면, 샹카라의 부정은 더 높은 긍정을 위한 예비 단계였던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에게는 밧줄도, 뱀도 모두 다른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잠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고유한 실체를 갖지 않는 ‘관계론적 공’이지만, 샹카라에게 뱀은 환영이지만 밧줄, 즉 브라만은 절대적 실재로서 존재합니다.


결국, 붓다와 나가르주나의 길, 그리고 샹카라의 길은 하나의 동일한 진리의 산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르는 두 개의 길과도 같습니다. 불교의 길은 철저히 경험적인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나’와 ‘세계’라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해체하고 내려놓음으로써, 마침내 모든 짐을 벗어버린 정상의 가벼움을 향해 나아갑니다. 반면 샹카라의 길은 저 멀리 빛나는 정상, 즉 ‘너는 이미 정상에 있다’는 위대한 선언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정상에 있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환영과 구름들을 지성의 칼로 베어내며 자신의 본래 위치를 확인하는 길입니다. 하나는 ‘자아 없음 (anātman)’과 ‘만법의 공함 (sarva-dharma-śūnyatā)’을 통해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자아 (paramātman)’가 ‘절대적 실재 (Brahman)’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영원한 지복을 회복합니다. 그 두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즉 모든 언어와 개념, 그리고 ‘나’라는 분별심이 사라진 그 지고의 평화와 자유는, 과연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동일한 침묵의 바다를, 한쪽에서는 ‘꺼짐’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충만함’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수시로 변하는 세상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받으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불안해하는 현대인에게 두 위대한 전통은 묻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당신이 ‘나’라고 믿고 있는 그것은 과연 당신의 참된 모습인가?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헛된 집착을 내려놓고 존재의 흐름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16.3. 공(空) 사상의 심화



인도의 위대한 두 사상가, 나가르주나 (Nāgārjuna)와 샹카라 (Śaṅkara)가 펼쳐 보인 지혜의 길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보이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통찰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가집니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연기 (緣起) 사상을 심화시켜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실체 (자성, 自性)가 없는 공 (空)이라고 선언했고, 샹카라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 (Brahman)을 제외한 모든 현상 세계는 환영 (마야, Māy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두 개의 심오한 통찰은 모두, 변화하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고통의 근원임을 밝히고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도 철학사상 가장 치열하고도 생산적인 철학적 논쟁의 불꽃이 피어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샹카라와 그를 따르는 베단타 학파가 나가르주나의 중관 (中觀) 사상을 향해 제기했던 ‘허무주의 (śūnyavāda)’라는 강력한 비판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적인 허무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이 허무주의 논쟁의 깊이를 탐사하는 것은, 두 사상이 공유하는 유사성의 이면에 숨겨진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내고, ‘없음’의 의미를 둘러싼 인류 정신의 가장 깊은 고뇌를 엿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샹카라가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허무주의라고 비판했던 이유는 명료합니다. 샹카라의 철학 체계 전체는 ‘브라만’이라는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실재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그에게 ‘부정 (negation)’은 언제나 더 높은 ‘긍정 (affirmation)’을 위한 예비 단계였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환영이라고 부정하는 이유는, 그 환영 너머에 ‘밧줄’과도 같은 진짜 실재, 즉 브라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네티, 네티 (neti, neti)’의 과정은, 결국 ‘나는 브라만이다 (Aham Brahmāsmi)’라는 궁극적인 긍정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가르주나의 철학은 위험천만해 보였습니다. 나가르주나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이 자성이 없어 공하다고 말하면서, 그 공의 배후에 있는 어떤 긍정적인 실체도 상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샹카라가 보기에, 나가르주나는 뱀이라는 환영뿐만 아니라 밧줄이라는 실재마저도 공하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근거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하다면, 선과 악의 도덕적 구분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수행과 해탈의 길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샹카라에게,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은 결국 모든 가치와 의미를 해체하고 차가운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지극히 위험한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 자신과 그를 따르는 중관학파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이 ‘공’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반박했을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에게 공은 존재의 ‘결핍’이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은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었습니다. 공이란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서만 존재한다’는 연기의 법칙과 동의어입니다. 책상이 공하다는 것은 책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나무와 못, 장인의 노력이라는 여러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책상’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영원불변하는 ‘책상다움’이라는 고유한 실체 (자성)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샹카라가 주장하는 브라만과 같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아야 하며, 영원히 동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그러한 실체란 우리의 경험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없으며, 단지 우리의 언어와 개념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허구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허무주의의 비판에 맞서, 나가르주나는 ‘이체 (二諦)’, 즉 ‘두 가지 진리’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세속제 (世俗諦, saṃvṛti-satya)’, 즉 세속적인 차원의 관습적인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진제 (眞諦, paramārtha-satya)’, 즉 궁극적인 차원의 진리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책상과 의자, 선과 악, 원인과 결과, 그리고 고통과 해탈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관습적인 세계는 그 나름의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윤리적 실천과 수행의 길은 바로 이 세속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제가 세속제를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진제는 세속적인 현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올바로 설명해 줍니다.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연기를 보지 못하는 자는 공을 보지 못하고, 공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연기의 진리를 통해서만,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공 사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라는 양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 (中道)’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샹카라의 부정과 나가르주나의 부정은 그 목적과 깊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샹카라의 부정은 더 높은 긍정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는 현상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브라만의 실재성을 더욱 확고하게 긍정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길은 결국 ‘궁극적 실재는 존재한다’는 하나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입장’으로 귀결됩니다. 반면에, 나가르주나의 부정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의 변증법적인 논파술 (prasaṅga)은 상대방의 주장이 가진 내적인 모순을 드러내어 그 주장을 무너뜨릴 뿐, 자신의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존재론, 비존재론을 포함한 그 어떤 형이상학적 입장도 결국에는 언어와 개념이 만들어낸 희론 (prapañca)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올바른 입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입장에 대한 집착 자체를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완전한 평화, 즉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에게, 심지어 ‘공’이라는 개념 자체도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 같아서, 강을 건넌 뒤에는 버려야 할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공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가장 치료하기 힘든 병이라고 그는 경고했습니다.


이처럼 ‘허무주의 논쟁’은 두 위대한 사상가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서로 다른 처방전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샹카라는 우리에게 ‘당신은 유한하고 고통받는 이 존재가 아니라, 영원하고 지복으로 가득 찬 절대적 실재 그 자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무한히 확장시켜 모든 한계와 불안을 넘어서게 하려 했습니다. 그의 길은 ‘궁극적 자기 (paramātman)’를 발견하는 긍정의 길입니다. 반면에 나가르주나는 우리에게 ‘당신이 ‘나’라고 집착하는 그 어떤 것도, 그리고 이 세계의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의 근거를 해체하여 우리를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했습니다. 그의 길은 ‘자아 없음 (anātman)’을 철저히 깨닫는 부정의 길입니다. 하나는 꽉 찬 충만함 속에서, 다른 하나는 텅 빈 자유 속에서 구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두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즉 모든 언어와 개념, 그리고 ‘나’라는 분별심이 사라진 그 지고의 평화와 자유는, 과연 서로 다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동일한 침묵의 바다를, 한쪽에서는 ‘존재’로, 다른 한쪽에서는 ‘공’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16.4. 열반과 해탈: 꺼짐인가, 충만인가?



인간의 실존적 여정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이 고통의 바다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는가?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저마다의 언어와 비유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제시해왔습니다. 그 대답은 하나의 상태, 즉 모든 속박과 한계를 벗어난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를 가리킵니다. 인도의 정신사에서 이 궁극의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개의 이름이 바로 불교의 열반 (Nirvāṇa)과 힌두 베단타 철학의 해탈 (Mokṣa)입니다. 이 두 단어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구도자들의 가슴을 울린 희망의 이름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리키는 경지의 본질에 대한 깊고도 미묘한 철학적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궁극의 자유란 모든 욕망과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버린 고요한 ‘소멸’의 상태인가, 아니면 우주적 실재와 하나 되어 무한한 존재와 환희로 가득 찬 ‘충만’의 상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교리적인 차이를 넘어, 인간 존재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시선을 드러냅니다.


불교가 제시하는 열반의 길은 철저히 우리 내면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니르바나’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불어서 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끄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쉬지 않고 타오르는 세 가지 독의 불꽃, 즉 탐욕 (rāga), 증오 (dveṣa), 그리고 어리석음 (moha)입니다. 이 세 가지 독 (三毒)의 불꽃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인 갈애 (tṛṣṇā)를 일으키는 연료이며, 우리를 끝없는 윤회 (saṃsāra)의 수레바퀴에 묶어두는 사슬입니다. 따라서 열반은 이 연료를 모두 소진시켜, 더 이상 고통의 불꽃이 타오를 수 없게 된 완전한 평화와 소멸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을 얻거나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던 번뇌의 불을 끔으로써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적인 고요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반의 개념은 붓다가 깨달은 무아 (anātman)와 연기 (pratītyasamutpāda)의 진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열반이 결코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나 허무를 의미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부터 소멸될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단지 다섯 가지 요소 (五蘊, 오온)가 조건에 따라 잠시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흐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열반은 ‘나’의 소멸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깊은 착각, 즉 무명 (avidyā)의 소멸입니다. 이 착각이 사라질 때, 그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던 모든 집착과 갈애의 나무는 저절로 시들어 버립니다. 따라서 열반은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의 무상함과 실체 없음을 철저히 깨달음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가장 적극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성취입니다. 초기 경전에서 열반은 종종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부정적인 언어로 묘사됩니다. 이는 열반이 우리의 언어와 개념, 그리고 이원적인 사유 방식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모든 조건과 제약을 넘어선 절대적인 경지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힌두교, 특히 샹카라 (Śaṅkara)가 체계화한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ānta) 철학이 제시하는 해탈은 ‘충만’의 언어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크샤’는 ‘해방되다’, ‘풀려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아트만 (Ātman)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명 (avidyā)의 베일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현상 세계라는 환영 (māyā)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탈은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강물이 거대한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강물은 바다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 개별적인 이름과 형태를 잃어버리지만,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무한한 바다 그 자체가 되는 확장입니다.

이러한 해탈의 상태는 긍정적이고 존재론적인 언어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바로 ‘삿-칫-아난다 (Sat-Cit-Ānanda)’로서의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삿 (Sat)’은 더 이상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하고 순수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칫 (Cit)’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난다 (Ānanda)’는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기쁨과 환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해탈은 모든 것이 비어있는 공허의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존재와 의식과 환희가 조금의 틈도 없이 가득 차 있는 절대적인 충만의 상태입니다. 샹카라에게 구원은 없는 것을 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라는 구름이 걷혔을 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영원히 빛나고 있었던 아트만이라는 태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한계는 우리가 이 태양의 존재를 잊고, 구름의 그림자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길 앞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열반의 ‘꺼짐’과 해탈의 ‘충만’은 과연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목표인가?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우리의 언어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 전통 모두 궁극의 경지는 모든 이원적 분별이 사라진 자리이며, 말과 생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 (acintya)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꺼짐’이라는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붙잡고 개념화하려는 습성을 경계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충만’이나 ‘절대적 존재’와 같은 긍정적인 언어는 자칫 또 다른 집착의 대상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베단타 철학이 ‘충만’이라는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자칫 ‘꺼짐’이라는 말이 허무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고, 그 경지가 모든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공백이 아니라 존재의 완전한 실현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 두 길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번뇌의 불꽃이 ‘꺼진’ 절대적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내가 곧 우주적 실재라는 ‘충만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라는 개별적 존재에 대한 모든 집착과 욕망의 불꽃이 저절로 ‘꺼지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작은 등불이 꺼질 때, 비로소 온 세상을 비추는 영원의 빛이 드러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등불의 소멸이 곧 빛의 충만인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공 (Śūnyatā)’은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여 생생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단타의 ‘브라만’은 저 멀리 있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 그 자체입니다.

결국 열반과 해탈은 산의 서로 다른 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두 개의 길과 같습니다. 하나의 길은 우리가 짊어진 고통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모든 짐이 사라진 가벼움의 상태를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우리가 본래 산의 정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안개와 구름을 걷어내는 과정을 통해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그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즉 모든 분별과 대립이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의 풍경은 과연 서로 다른 모습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동일한 침묵의 바다를, 한쪽에서는 ‘꺼짐’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충만함’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대인의 삶은 끊임없는 경쟁과 소유, 그리고 자극의 추구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과도 같습니다. 이 불꽃 속에서 소진되어 가는 우리에게, 인도의 두 위대한 지혜는 잠시 멈추어 서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이 본래 무한한 빛의 바다였음을 깨닫는 길을 택할 것인가.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길의 끝에는 ‘나’라는 작은 감옥을 벗어난 진정한 자유가 기다리고 있음을 두 전통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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