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적 탐구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길을 모색해 왔습니다. 어떤 길은 육체를 욕망의 근원으로 보고 엄격한 금욕과 고행을 통해 그것을 억제하려 했으며, 또 다른 길은 날카로운 지성의 힘으로 세계의 본질을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의 정신사에는 이 두 가지 길과는 전혀 다른, 제3의 길이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왔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감각, 그리고 이 세계 자체를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신성한 도구로 여기는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우리는 탄트라 (Tantra)라고 부릅니다. 서기 수세기에 걸쳐 인도 대륙 전역에서 비밀스럽게, 때로는 대담하게 전개된 이 운동은 정통 브라만교의 권위와 불교의 출가주의적 이상 모두에 도전하며,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에너지를 변용시켜 신성 (神性)에 이르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탄트라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힌두교와 불교는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이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 결과 힌두 탄트라와 불교 금강승 (Vajrayāna)이라는, 놀랍도록 닮았으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위대한 영적 체계가 탄생했습니다.
탄트라의 세계관은 하나의 심오한 통찰, 즉 소우주 (microcosm)로서의 인간과 대우주 (macrocosm)로서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비이원론적 (non-dualistic) 직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는 거대한 힘의 역동성이 우리의 몸 안에도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이 몸을 떠나 저 멀리 있는 천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육체 안에서 우주적 에너지를 깨우고 그것과 합일함으로써 성취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육체를 부정하고 감각적 쾌락을 죄악시하던 기존의 많은 종교적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탄트라는 억압된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더욱 강력하게 속박한다고 보았습니다. 독 (毒)을 사용하여 다른 독을 치료하는 ‘이독제독 (以毒制毒)’의 원리처럼, 탄트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 심지어 성적인 에너지까지도 회피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정화하고 승화시켜 깨달음의 동력으로 삼는 과감한 수행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비밀스러운 지식과 기술은 스승인 구루 (guru)로부터 자격을 갖춘 제자에게만 은밀하게 전수되었으며, 만트라 (mantra, 진언), 만달라 (maṇḍala, 우주의 상징적 도상), 무드라 (mudrā, 손 모양), 그리고 복잡한 시각화 명상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수행을 그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힌두 탄트라는 이러한 우주적 에너지를 여성적 원리인 샤크티 (Śakti)로 인격화했습니다. 샤크티는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우주의 힘 그 자체이며, 남성적 원리인 시바 (Śiva)는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절대적 고요함을 상징합니다. 이 세계는 시바와 샤크티의 영원한 사랑의 유희 (līlā)이며, 개별 인간의 존재는 이 두 신성한 원리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입니다. 힌두 탄트라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몸 가장 낮은 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근원적인 샤크티 에너지, 즉 쿤달리니 (kuṇḍalinī)를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요가와 명상, 그리고 다양한 의례를 통해 이 쿤달리니를 척추를 따라 존재하는 에너지 중심점인 차크라 (cakra)들을 차례로 통과시켜, 마침내 정수리에 있는 최상의 차크라에서 순수한 의식인 시바와 결합시킵니다. 이 합일의 순간, 수행자는 더 이상 분리된 개아 (個我)가 아니라 시바-샤크티의 신성한 합일 그 자체가 되며, 무한한 지복 (ānanda) 속에서 해탈 (Mokṣa)을 성취합니다. 이 길에서 세계는 더 이상 환영 (māyā)이 아니라, 여신 샤크티의 신성한 몸 그 자체로 숭배됩니다.
바로 이러한 탄트라 운동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대승불교의 정교한 철학적 토양과 만났을 때, 불교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흐름인 금강승, 즉 ‘금강석 수레’가 탄생했습니다. 금강승은 기존의 대승불교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긴 시간 (수많은 겁, kalpa)이 걸린다고 본 것과 달리, 이 한 번의 생 안에서, 바로 이 육신을 가지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금강승은 탄트라의 다양한 수행 기법들을 대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만트라의 신비로운 음성, 만달라의 장엄한 시각적 세계,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부처의 몸으로, 자신의 말을 부처의 말씀으로,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변용시키는 복잡하고 정교한 시각화 수행, 즉 ‘본존 요가 (Deity Yoga)’는 금강승 수행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금강승 수행자는 더 이상 고통의 원인인 번뇌를 멀리하고 제거하려고만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번뇌 자체가 본래 공 (空)하며, 그 본질은 곧 지혜의 에너지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그 번뇌의 에너지를 직접 지혜의 불꽃으로 변용시키는 길을 걷습니다. 이는 마치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힌두 탄트라와 불교 금강승은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거대한 나무처럼, 수많은 공통된 가지와 잎사귀를 공유합니다. 두 전통 모두 구루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경전 지식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의 직접적인 전수를 중시합니다. 둘 다 인간의 몸 안에 미세한 에너지 통로 (nāḍī)와 중심점 (cakra)이 존재한다고 보는 ‘미세신 (subtle body)’의 생리학을 공유하며, 이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을 중요한 수행으로 삼습니다. 또한 두 전통은 만물의 이원적 대립, 즉 주관과 객관, 윤회와 열반, 현상과 본질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비이원론적 세계관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삼습니다. 힌두 탄트라의 시바-샤크티의 합일이라는 상징과, 금강승에서 지혜 (prajñā, 여성 원리)와 방편 (upāya, 남성 원리)의 합일을 상징하는 남녀 합일상 (yab-yum)의 도상은, 그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현상 세계의 이원성을 초월하려는 동일한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길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목적지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섭니다. 이것이 바로 두 전통의 만남과 분리를 가르는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힌두 탄트라의 최종 목적지는 ‘합일’입니다. 개별적 자아 (jīva)가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한 힘 (샤크티)을 깨워,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 시바, 혹은 브라만 (Brahman)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트만 (Ātman)’이라는 영원하고 실체적인 자아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으며, 해탈이란 이 아트만이 자신의 본래 모습인 브라만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그 속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긍정적이고 존재론적인 충만의 회복입니다. 즉, ‘궁극적 실재는 존재한다’는 위대한 긍정 위에서 모든 수행이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불교 금강승의 최종 목적지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깨달음’입니다. 금강승은 대승불교의 철학, 특히 나가르주나 (Nāgārjuna)의 공 (Śūnyatā) 사상 위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따라서 금강승에서 사용하는 모든 화려한 신들의 모습, 즉 본존 (yidam)들은 힌두교의 신들처럼 외부에 실재하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 마음의 본성인 공과 자비가 형상으로 드러난 방편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 되었다고 시각화하지만, 이는 실체적인 신과 합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고정된 자아 관념을 해체하고,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와 다르지 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기술입니다. 금강승의 길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영원한 아트만이 아니라, 그 아트만조차도 포함한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는 공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금강승의 깨달음은 힌두 탄트라처럼 어떤 절대적 존재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에 대한 모든 집착과 개념적 분별이 사라진 완전한 자유와 지혜 (prajñā)의 실현입니다.
힌두 탄트라와 불교 금강승은 인간의 욕망과 육체라는 거친 에너지를 영적으로 변용시키기 위해 동일한 ‘기술 (technology)’을 공유했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여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 (goal)’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힌두 탄트라는 그 기술을 사용하여 ‘존재 (Being)’의 대양과 합일하고자 했고, 불교 금강승은 그 기술을 사용하여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포함한 모든 관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하나는 자아의 궁극적인 실현을 통해 신성과의 합일을 꿈꾸었고, 다른 하나는 자아 없음 (anātman)의 철저한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통의 소멸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위대한 두 길의 만남과 분리는, 인간의 영성이 얼마나 다양하고도 깊은 방식으로 궁극의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와 감각적 쾌락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열정과 에너지가 파괴의 힘이 아니라 위대한 깨달음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2-17.2. 보리심과 자비: 박티와의 비교
영적인 길의 정상에 이르는 등반로는 단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길은 지성의 날카로운 칼로 무지의 덩굴을 베어내며 나아가는 지혜 (jñāna)의 길이고, 또 다른 길은 육체와 마음을 다스리는 고도의 수행 (yoga)을 통해 정상을 향합니다. 그러나 인도의 정신사에는 이들과 나란히 흐르는 또 하나의 거대하고도 뜨거운 강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이나 의지만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사랑과 헌신이라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감정의 힘으로 건너려는 마음의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인간의 가슴은 더 이상 번뇌의 근원지가 아니라 신성 (神性)을 만나는 가장 성스러운 제단이 됩니다. 대승불교와 금강승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비 (karuṇā)와 보리심 (bodhicitta)의 이상, 그리고 힌두교의 광대한 영적 스펙트럼 속에서 가장 넓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박티 (bhakti)의 길은 바로 이 마음의 길을 대표하는 두 개의 봉우리입니다. 두 길은 모두 차가운 관념의 세계를 넘어,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혹은 신적인 실재에 대한 뜨거운 관계 속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지만, 그 사랑이 향하는 궁극적인 방향과 철학적인 토대에서는 서로 다른 우주를 그리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여정은 한 명의 위대한 인물, 즉 보살 (bodhisattva)의 서원 (誓願)에서 시작됩니다. 보살은 ‘깨달음 (bodhi)을 구하는 존재 (sattva)’를 의미하지만, 그의 구도 (求道)는 결코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의 초기 불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이 모든 번뇌를 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너간 아라한 (arhat)이었다면, 보살은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이 고통의 바다 (saṃsāra) 속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기꺼이 열반 (Nirvāṇa)의 안락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미루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겠다고 맹세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위대하고도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서원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동력이 바로 자비와 보리심입니다.
자비는 단순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강렬하고도 적극적인 열망입니다. 이 자비심의 뿌리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 (pratītyasamutpāda)의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에 있습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나’라는 존재 역시 무수한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잠시 나타난 현상임을 깨달을 때,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옆집에 불이 났을 때 그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살에게 모든 중생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집니다. 자비는 이러한 비분리적인 통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음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을 완성시키는 것은 자비를 넘어선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은 ‘깨달음을 향한 마음’으로 번역되지만, 그 안에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측면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자비심에 찬 서원이며, 둘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완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 즉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임을 아는 지혜 (prajñā)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자신이 먼저 수영하는 법을 완벽하게 배워야 하듯이, 보살은 중생 구원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발심 (發心)합니다. 따라서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개의 날개가 하나로 합쳐져, 자신과 타인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날아오르는 대승불교의 가장 숭고한 정신입니다. 이 보리심을 일으킨 순간, 평범한 중생은 비로소 보살의 반열에 오르며,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오직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 됩니다.
힌두교의 박티 전통 또한 이와 비견될 만한 뜨거운 감정의 길을 제시하지만, 그 사랑의 방향은 수평적인 중생이 아니라 수직적인 신 (神)을 향합니다. 박티는 ‘참여하다’, ‘헌신하다’, ‘사랑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인격적인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해탈 (Mokṣa)에 이르는 길을 의미합니다. 베다의 복잡한 제사 의식이나 우파니샤드의 난해한 철학적 사유가 소수의 지식인 계층에게만 열려 있었다면, 박티의 길은 신분이나 성별, 학식에 관계없이 오직 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장 대중적인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ītā)에서 크리슈나 (Krishna) 신이 아르주나 (Arjuna)에게 “나뭇잎 하나, 꽃 한 송이, 과일 하나, 물 한 모금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바치는 자의 그 순수한 공물 (供物)을 나는 기쁘게 받는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이 박티의 길에 대한 위대한 찬가입니다.
박티의 길을 걷는 수행자, 즉 박타 (bhakta)는 신을 저 멀리 있는 두려운 심판자나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신을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연인으로, 자애로운 부모로, 혹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기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을 노래하고 (kīrtana), 신의 형상 앞에서 경배하며 (pūjā), 신의 이야기를 듣고 암송하며 (śravaṇa),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신에게 바치는 봉헌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헌신 속에서 박타의 에고 (ahaṃkāra)는 점차 녹아내리고, 그의 마음은 오직 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박티의 길에서 구원은 단순히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신과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박타들은 완전한 합일을 통해 자신의 개별성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설탕이 되어 설탕의 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보다는, 미묘한 분리 속에서 영원히 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맛보는 기쁨을 누리기를 갈망합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보리심과 힌두교의 박티는 모두 ‘나’라는 좁은 감옥을 부수고 더 넓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깊은 유사성을 가집니다. 두 길 모두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이타적인 사랑으로 변용시키는 것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보살이 자신의 안락과 해탈마저도 중생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듯이, 박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신의 발아래 바칩니다. 또한, 진정한 박티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심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신이 모든 존재의 심장 속에 내재한다고 믿는 박타에게, 타인을 섬기는 것은 곧 신을 섬기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길이 서 있는 철학적 토대와 그들이 바라보는 궁극적인 지평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그 사랑이 향하는 ‘대상’에 있습니다. 박티의 사랑은 명확하게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을 향합니다. 그 관계는 본질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구원자와 구원받는 자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이 길은 ‘신은 존재한다’는 유신론적 (theistic) 세계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보리심이 향하는 대상은 신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고통받고 행복을 원하는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입니다. 그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들 사이의 수평적인 연대감입니다. 이 길은 불교의 근본적인 무신론적 (non-theistic) 토대, 즉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인격신을 상정하지 않는 세계관 위에서 펼쳐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에서도 드러납니다. 박티의 목표는 사랑하는 신과의 ‘관계 속에서의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와 나’라는 사랑의 이중주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세계입니다. 반면에 보리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중생을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열반의 경지는 ‘너’와 ‘나’라는 분별은 물론,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심지어 ‘윤회’와 ‘열반’이라는 분별마저도 사라진, 모든 개념적 사유를 넘어선 공 (空)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보살의 자비는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가 이 분별없는 지혜를 깨닫도록 돕기 위한 ‘방편 (upāya)’입니다. 그는 중생들이 스스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는 뱃사공과도 같으며, 그들이 모두 피안에 도달했을 때 뱃사공의 역할 또한 그 의미를 다하게 됩니다.
결국 박티와 보리심은 인류의 영성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두 개의 서사시와 같습니다. 하나는 신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노래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생명을 향한 장엄한 연대의 선언입니다. 박티가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절대적인 귀의 (歸依)를 통해 자아를 버린다면, 보리심은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무한한 헌신을 통해 자아를 넘어섭니다. 두 길 모두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구원은 고립된 자아의 만족 속에서가 아니라, 나를 넘어선 더 큰 존재와의 깊고 뜨거운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월적인 신이든, 고통받는 이웃이든, 그 대상을 향해 나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던지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나’라는 가장 견고한 감옥의 문을 열고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17.3. 본존 요가와 이슈타 데바타
인간의 의식은 추상적인 개념만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살아있는 상징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두 영적 전통인 힌두 탄트라와 불교 금강승은 바로 이러한 인간 마음의 속성을 꿰뚫어 보고, 신성 (神性)의 이미지를 영적 수행의 핵심 도구로 사용하는, 지극히 정교하고도 강력한 심리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수행자가 특정한 신의 형상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 신의 본질과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 수행법은 두 전통에서 모두 발견됩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이슈타 데바타 (Iṣṭa-devatā)’ 즉 ‘선택된 신’에 대한 수행으로, 불교 금강승에서는 ‘본존 요가 (Deity Yoga)’ 혹은 ‘이담 (yi dam)’ 수행으로 부릅니다. 두 길은 신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평범한 자아의식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마치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그 이미지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수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려는가에 있어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우주를 향해 걸어갑니다.
힌두교의 광대한 신들의 판테온 속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하나의 특정한 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슈타 데바타’, 즉 자신의 개인적인 수호신이자 가장 사랑하는 신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파괴와 변용의 신인 시바 (Śiva)가, 다른 이에게는 사랑과 자비의 신인 비슈누 (Viṣṇu)나 크리슈나 (Krishna)가, 또 다른 이에게는 우주적 어머니의 힘을 상징하는 여신 두르가 (Durgā)나 칼리 (Kālī)가 이슈타 데바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은 지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깊은 감정적, 영적인 끌림에 의한 것입니다. 힌두 사상에서 이 수많은 신들은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의 다양한 얼굴이자 속성들입니다. 형상도 이름도 없는 절대적인 브라만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기에, 자비롭게도 다양한 인격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슈타 데바타는 추상적인 절대자로 나아가는 가장 개인적이고도 효과적인 문 (門)이 됩니다.
이슈타 데바타 수행의 핵심은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심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수행자는 매일 제단을 마련하여 자신이 선택한 신의 형상이나 그림을 모시고, 꽃과 향, 음식을 바치는 푸자 (pūjā) 의식을 행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과 관련된 만트라 (mantra)를 끊임없이 암송하며, 그 신의 성스러운 이름과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명상 속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이슈타 데바타의 모습을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떠올리고, 그 신의 위대한 힘과 자비, 지혜와 같은 신성한 성품들을 깊이 묵상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 즉 박티 (bhakti)의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깊은 관계 속에서, 수행자와 신 사이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집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삶 전체를 신의 발아래 바치며, 자신 안에서 신의 현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과의 완전한 ‘합일’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개별적인 자아, 즉 지바 (jīva)가 사실은 자신이 숭배해 온 신의 본질과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인 아트만 (Ātman)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슈타 데바타는 이 위대한 합일의 여정을 이끌어주는 자비로운 안내자이자, 그 여정의 최종 목적지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신은 마음의 상징이 아니라, 수행자 외부에 실재하며 그를 구원하는 은총의 화신입니다.
불교 금강승 (티벳 밀교)의 본존 요가 역시 신적인 형상을 명상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힌두교의 이슈타 데바타 수행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금강승의 수행자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 자신에게 인연이 있는 하나의 본존 (yi dam)을 정합니다. 그 모습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 (Avalokiteśvara),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 (Mañjuśrī), 혹은 분노의 형상을 통해 장애를 부수는 지혜의 힘을 상징하는 다양한 수호존들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탕카 (thangka)라는 불화 (佛畫)에 그려진 본존의 모습을 세밀하게 공부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의궤 (儀軌, sādhana)에 따라 명상을 진행합니다. 그는 본존의 만트라를 염송하고, 본존이 머무는 정토 (淨土)인 만달라 (maṇḍala)를 시각화하며, 마침내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본존으로 변용되는 것을 관상합니다. 이 ‘생기차제 (生起次第, generation stage)’라고 불리는 과정 속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평범한 몸과 말, 그리고 마음을 본존의 신성한 몸 (身), 말씀 (口), 그리고 마음 (意)으로 완전히 대체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외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본존 요가의 철학적 기반과 궁극적인 목표는 이슈타 데바타 수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금강승의 본존이 힌두교의 신처럼 수행자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존은 우리 마음의 본래적인 잠재력, 즉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성품 (佛性, Buddha-nature)이 인격적인 형상으로 드러난 ‘상징’이자 ‘방편 (upāya)’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신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본래부터 잠재된 자비심이 완전하게 개발되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본존 요가는 외부의 신과 합일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완전한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훈련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 (Śūnyat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존의 화려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형상 (rūpa)’이지만, 그 형상의 본질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본존으로 변용되는 체험을 통해, ‘나’라는 평범한 자아의식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이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본존의 신성한 형상을 체험함으로써, 공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니라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역동적인 것임을 체득합니다. 결국 본존 요가의 목표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본존이라는 존재 모두가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 속에서 모든 집착과 분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원만차제 (圓滿次第, completion stage)’라는 더 높은 단계의 수행에서, 수행자는 자신이 시각화했던 본존의 형상마저도 다시 빛으로 녹여 공 속으로 사라지게 합니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신의 형상도, ‘나’라는 의식도 아닌, 모든 분별이 사라진 마음의 본래 모습,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공과 지혜의 불이 (不二)’입니다.
힌두교의 이슈타 데바타 수행과 불교 금강승의 본존 요가는 ‘신성과의 만남’이라는 동일한 문을 통과하지만, 그 문 너머에서 발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입니다. 힌두교의 수행자는 그 문을 통해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 (Being)’의 바다로 들어가, ‘아트만’이라는 자신의 참된 본질이 ‘브라만’이라는 우주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충만한 합일을 경험합니다. 이 길에서 신은 실재하며, 그와의 사랑의 관계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반면에 금강승의 수행자는 그 문을 통해 ‘나’와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부터 실체가 없었다는 ‘공 (Emptiness)’의 광대한 허공을 발견합니다. 이 길에서 본존은 마음의 잠재력을 깨우기 위한 자비로운 환영이자 정교한 도구이며, 그 도구에 대한 집착마저도 종국에는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는 ‘긍정의 길’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껴안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부정의 길’을 통해 모든 실체에 대한 관념을 해체하려 합니다. 이 두 개의 심오한 길은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상징과 이미지를 사용하여 스스로의 감옥을 부수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두 편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7.4. 죽음의 기술: 바르도 퇴돌과 우파니샤드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주하는 가장 불가해하고도 절대적인 사건은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필연적인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이며, 인류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이 궁극적인 소멸의 공포 앞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전통이 삶의 윤리와 사후 세계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면, 인도의 두 위대한 영적 흐름, 즉 힌두교의 심오한 지혜가 담긴 우파니샤드 (Upaniṣad)와 티벳 불교 금강승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인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죽음을 단순히 삶의 끝이 아니라, 의식의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자 일생일대의 영적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 그 지형도를 그렸으며, 임종의 순간과 그 이후의 여정에서 의식을 어떻게 항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죽음의 기술 (ars moriendi)’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아의 귀환’을 말하는 우파니샤드의 지도와 ‘자아 없음의 깨달음’을 말하는 바르도 퇴돌의 지도는, 같은 여행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에게 죽음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들의 세계관 중심에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절대적 실체, 즉 아트만 (Ātman)이 존재합니다. 이 아트만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나’이며, 육체와 마음은 단지 이 아트만이 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머무는 집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죽음 기술은 임종의 순간에 대한 기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본질이 이 육체가 아니라 영원한 아트만임을 깨닫는 것에 그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삶 전체가 죽음을 위한 가장 위대한 준비 과정인 셈입니다. 우파니샤드는 ‘사람은 죽을 때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평생 물질적 쾌락과 세속적 욕망에 집착하며 살아온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와 관련된 생각에 사로잡혀 다시 욕망의 세계로 윤회하게 됩니다. 반면에 평생을 자신의 참된 본질을 탐구하며 살아온 수행자는, 죽음의 순간에 모든 감각기관의 활동이 내면으로 철수하고 의식이 심장부로 모여들 때,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의식을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에게로 집중합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 죽음 이후 아트만은 과거의 모든 행위와 생각의 잠재적 인상, 즉 카르마 (karma)의 짐을 짊어진 채 미세신 (subtle body)의 형태로 육체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 카르마의 무게에 따라 달의 길 (pitṛyāna)이나 신들의 길 (devayāna)을 통해 다음 생의 거처로 인도됩니다. 이것은 여전히 윤회의 바퀴를 굴러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내가 바로 브라만이다 (Aham Brahmāsmi)’라는 위대한 진리를 체득한 현자에게 죽음은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그의 생명 에너지 (prāṇa)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 그 이름과 형태를 잃고 바다 자체가 되듯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브라만 속으로 녹아들어 갑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존재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목적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죽음 기술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위한 안내서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삶의 기술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지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에 반해, ‘티벳 사자의 서 (Tibetan Book of the Dead)’로 널리 알려진 바르도 퇴돌은 죽음 이후의 의식 상태에 대한 놀랍도록 생생하고도 체계적인 안내서입니다. ‘바르도’는 ‘사이 상태’, 즉 중간 상태를 의미하며, 바르도 퇴돌은 ‘들음으로써 중간 상태에서 해탈에 이르는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의 근간에는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의식이 육체를 떠난 후 새로운 육체를 받기 전까지 약 49일간 일련의 극적인 중간 상태를 경험한다는 독특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강승의 수행자들은 살아있는 동안 이 바르도의 과정에 대해 명확하게 배우고, 명상 속에서 죽음의 과정을 예행연습함으로써 실제 죽음의 순간을 위대한 깨달음의 기회로 준비합니다. 바르도 퇴돌은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나 막 숨을 거둔 사람의 곁에서 스승이나 도반이 읽어주는, 사후 세계의 여행자를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북입니다.
바르도 퇴돌이 묘사하는 죽음의 여정은 크게 세 단계의 바로도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임종의 순간에 경험하는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입니다. 숨이 멎고 지수화풍 (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가 차례로 해체되면서, 의식은 모든 개념적 사유와 형상이 사라진 가장 근원적인 바탕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눈부시게 밝고 텅 비어 있으며 어떤 한계도 없는 ‘근원의 빛’, 즉 ‘자성 (自性)의 맑은 빛 (Clear Light)’이 나타납니다. 바르도 퇴돌은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본래 모습이며, 윤회와 열반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죽는 이가 살아생전의 수행을 통해 이 맑은 빛을 자신의 본성으로 알아볼 수만 있다면, 그는 그 즉시 모든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의 순간에 주어지는 가장 위대하고도 직접적인 해탈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생은 이 눈부신 빛의 광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무의식 속으로 기절하여 이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의식은 두 번째 단계인 ‘최니드 바르도 (Chönyid Bardo)’로 넘어가, 약 2주에 걸쳐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부신 빛과 함께 평화로운 모습의 불보살들이 나타나고, 뒤이어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인 모습의 분노존들이 나타납니다. 바르도 퇴돌은 이때 죽은 이의 의식을 향해 간절하게 외칩니다. “오,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가 보는 이 모든 평화롭고 분노한 신들의 모습은 그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대 자신의 마음, 그대 마음의 자비와 지혜의 에너지가 빛과 형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라!” 이 단계에서의 핵심 기술은, 이 모든 환영적인 체험이 내 마음의 투사임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에 끌려가거나 밀쳐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도 해탈하지 못하면, 의식은 카르마의 힘에 이끌려 마지막 단계인 ‘시드파 바르도 (Sidpa Bardo)’로 들어갑니다.
시드파 바르도는 다음 생을 찾아 헤매는 ‘생유 (中有)의 중간 상태’입니다. 이제 의식은 미세한 마음으로 된 몸 (mental body)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 업보에 따라 심판의 장면이나 다음 생의 부모가 될 이들의 성교 장면 등을 보게 됩니다. 강력한 욕망과 혐오의 감정에 휩쓸린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장면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 마침내 어머니의 자궁 문을 닫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바르도 퇴돌은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를 선택하여 유리한 조건에서 태어날 수 있는지, 혹은 자궁 문을 닫아 아예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윤회를 멈출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이처럼 우파니샤드와 바르도 퇴돌은 죽음이라는 궁극의 문턱에서 인간을 돕기 위한 심오한 지혜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철학적 기반과 지향점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파니샤드의 세계는 영원불변하는 ‘실체 (Substance)’의 철학입니다. 그 중심에는 아트만이라는 절대적 자아가 있으며, 죽음의 기술은 이 자아가 자신의 근원인 브라만으로 돌아가는 ‘합일’의 기술입니다. 반면에 바르도 퇴돌의 세계는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무실체 (No-Substance)’의 철학, 즉 공 (空) 사상에 기반합니다. 바르도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눈부신 신들의 모습도, 무시무시한 악마의 모습도, 심지어 ‘나’라고 하는 의식 자체도 고정된 실체 없이 마음이 투사해 낸 환영입니다. 따라서 그 기술은 어떤 실체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내 마음의 투사이며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인식의 기술입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긍정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지만, 금강승의 수행자는 ‘모든 것은 공하다’는 통찰을 통해 죽음의 환영을 가로질러 갑니다. 하나는 영원한 존재의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의 관념마저 사라진 자유로운 허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개의 위대한 지도는 인류가 죽음의 심연을 탐험하며 그려낸, 가장 장엄하고도 자비로운 두 편의 서사시입니다.
2-17.5. 말할 수 없는 실재: 브라만과 도
인류의 정신사는 하나의 거대한 역설을 탐구해 온 기나긴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언어와 이성으로 붙잡으려는 바로 그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이름 짓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려 하며, 분별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려는 깊은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현자들은 한결같이 경고해 왔습니다. 진정한 실재는 모든 이름과 개념,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이원적 대립의 저편에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할 수 없는 실재’의 심연을 각기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그러나 놀랍도록 닮아 있는 깊이로 탐사한 두 개의 위대한 지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말라야의 설산 아래, 깊은 명상 속에서 인도의 현자들이 발견한 우주적 실재의 이름, 브라만 (Brahman)이며, 다른 하나는 황허의 도도한 물결 옆에서,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노자 (老子)가 노래한 우주의 근원적 길, 도 (道)입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개념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분리와 소외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온전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Upaniṣad) 사상가들에게,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세계의 배후에는 단 하나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실재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브라만입니다. 브라만은 이 세계를 창조한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브라만은 이 세계가 펼쳐져 나오는 근원적인 바탕이자, 이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실체입니다. 파도와 포말, 그리고 물보라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 본질이 모두 물이듯이,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삼라만상, 즉 돌멩이와 나무, 동물과 인간, 그리고 저 멀리 빛나는 별들까지도 모두 브라만이라는 유일한 실재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브라만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을 포함한 모든 현상 세계를 낳은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 의해 조금도 제약받지 않는 초월적인 실체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안에도 있고, 모든 것의 바깥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브라만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대상을 분별하고 한정하는 도구이지만, 브라만은 모든 분별과 한정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만을 ‘선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악하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지만, 브라만은 선과 악이라는 인간적인 가치 판단 이전에 존재합니다. 브라만을 ‘크다’고 말하는 순간, ‘작다’는 상대적인 개념이 생겨나지만, 브라만은 크고 작음의 분별이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브라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네티, 네티 (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 (否定)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고 이성으로 사유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브라만이 아니라고 하나씩 부정해 나갈 때, 마침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의 빛만이 남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브라만을 긍정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그리고 순수한 환희 (Ānand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브라만은 모든 존재의 근거이며, 모든 것을 아는 순수한 앎의 빛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여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절대적인 기쁨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가장 위대한 선언은, 바로 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나의 가장 깊은 본질인 아트만 (Ātman)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유한하고 고통받는 개별적 존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본래부터 영원하고 완전한 우주적 생명 그 자체였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국의 땅에서, 노자는 전혀 다른 언어와 비유를 사용하여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실재’를 가리켰습니다. 그가 그것에 억지로 붙인 이름이 바로 도 (道)입니다. 도덕경 (道德經)의 첫 구절은 이 실재의 본질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역설적인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는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왔지만 그 자신은 결코 이름 붙일 수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 없는 근원적인 실재입니다. 그러나 브라만이 종종 정적인 ‘존재의 바탕’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면, 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역동적인 ‘우주적 과정’ 혹은 ‘자연의 길’로 더 자주 묘사됩니다. 도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솟아나오는 거대한 풀무와 같습니다. 도는 아무것도 억지로 행하는 바가 없는 것 같지만 (無爲),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자가 도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한 비유는 바로 물 (水)입니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단단하고 강한 것을 꿰뚫고 이겨냅니다. 물은 결코 높은 자리를 다투지 않고 항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계곡의 왕이 되어 만물을 기릅니다. 이처럼 도의 길은 경쟁하고 쟁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부드러움과 겸허함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길입니다. 또한 도는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 (樸)’와도 같습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지식과 제도가 그것을 조각하고 분별하기 이전의 원초적이고 소박한 전체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도를 따르는 삶이란 복잡한 지식이나 엄격한 도덕률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인위적인 욕망과 분별지를 내려놓고, 마치 갓난아기처럼, 혹은 흐르는 물처럼, 우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외부적인 법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이자 우주 만물의 본성입니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도의 흐름 속에 있음을 깨닫고 그 흐름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브라만과 도는 각기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궁극의 지평은 놀랍도록 많은 부분에서 서로 공명합니다. 두 개념 모두 인간의 이원론적 사유가 만들어낸 모든 대립, 즉 주관과 객관,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성스러움과 속됨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비이원론적 (non-dualistic) 실재를 가리킵니다. 브라만이 ‘네티, 네티’라는 부정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듯이, 도는 ‘이름 없는 이름’이라는 역설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암시합니다. 둘 다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세계와 내 안에 내재하는 가장 깊은 실재입니다. 브라만을 깨닫는 길이 자신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을 발견하는 것이듯, 도를 체득하는 길은 자신의 본성 (德, 덕)을 따르는 것입니다. 두 길 모두,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깊은 유사성의 이면에는, 두 문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브라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ontological)’입니다. 그 핵심 질문은 ‘무엇이 궁극적으로 존재하는가?’이며, 그 대답은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입니다. 따라서 인도의 길은 무지 (avidyā)의 베일을 걷어내고 이 유일한 존재와의 합일을 실현하는, 지혜 (jñāna)와 인식의 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도의 세계는 ‘과정적 (processual)’이며 ‘관계적 (relational)’입니다. 그 핵심 질문은 ‘만물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이며, 그 대답은 ‘스스로 그러한 도의 길을 따라서’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길은 세계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무위 (無爲)와 자연 (自然)의 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브라만이 텅 빈 하늘의 고요한 충만함을 닮았다면, 도는 모든 것을 품고 흐르는 거대한 강의 역동적인 비어있음을 닮았습니다. 하나가 ‘궁극적 실체’에 대한 탐구라면, 다른 하나는 ‘궁극적 흐름’에 대한 조응입니다.
브라만과 도라는 두 개의 위대한 상징은,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실재’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그 속으로 돌아가고픈 깊은 향수가 빚어낸, 인류의 가장 심오한 두 편의 시 (詩)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분리와 경쟁, 그리고 개념적 분석을 통해 세계를 파편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현대인은 자연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불안과 공허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브라만과 도의 가르침은 이러한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는 개별적인 ‘나’라는 존재는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당신이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그 욕망의 강은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작은 섬이 사실은 거대한 ‘존재’의 대륙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거나, ‘나’라는 작은 배가 이미 ‘흐름’이라는 거대한 강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과 받아들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말과 생각을 넘어선 진정한 평화, 즉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존재의 충만한 고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17.6. 무위자연과 카르마 요가
우리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이 하나의 질문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현자와 구도자들을 사로잡아 온 근원적인 화두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의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또 다른 행위의 원인이 되어 끝없는 인과의 사슬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슬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고통받고, 행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대와 불안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행위의 세계를 떠나 깊은 숲이나 동굴 속으로 은둔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가? 이 딜레마 앞에서, 동아시아의 지혜를 대표하는 노자 (老子)의 도가 (道家) 사상과 인도의 영적 전통이 집대성된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ītā)는, 세상을 등지지 않으면서도 행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두 개의 위대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도가의 무위자연 (無爲自然)과 힌두교의 카르마 요가 (Karma Yoga)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룬다’는 역설의 지혜와,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위하라’는 초연함의 지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행위일 수밖에 없는 우리 현대인에게 어떻게 일하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의 무대는 인간 실존의 가장 극적인 갈등의 순간입니다. 위대한 전사 아르주나 (Arjuna)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자신이 맞서 싸워야 할 적들이 다름 아닌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과 친척들임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그는 차라리 싸움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지언정, 친족을 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의 마부로 변신한 신 (神) 크리슈나 (Krishna)가 그에게 카르마 요가, 즉 ‘행위의 요가’에 대한 가르침을 펼칩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단 한 순간도 행위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집착 (saṅga)’에 있다는 것입니다.
카르마 요가의 핵심은 ‘결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오직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라’는 가르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를 통해 얻게 될 특정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승리, 부, 명예, 혹은 타인의 인정과 같은 행위의 열매 (karma-phala)를 얻기 위해 행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대와 집착이야말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았을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근본 원인입니다. 크리슈나는 말합니다. “그대는 행위할 권리만을 가질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다. 행위의 결과를 그대의 동기로 삼지 말라. 또한 행위하지 않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행위를 무책임하게 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결과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과 불안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즉 자신의 다르마 (Dharma)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아르주나에게 그것은 크샤트리아 (kṣatriya), 즉 전사 계급으로서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의무였습니다. 이처럼 카르마 요가는 자신의 행위 자체를, 그리고 그 행위의 모든 결과를 궁극적 실재인 신에게 바치는 하나의 거룩한 제사 (yajña)로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행위는 더 이상 업보 (karma)의 사슬을 만드는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정화하고 해탈 (Mokṣa)로 나아가는 신성한 도구가 됩니다.
한편, 중국의 땅에서 노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위의 문제를 풀어냅니다.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도 (道)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도는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근원적인 흐름이자 자연의 질서입니다. 도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無爲),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고통과 사회의 혼란은 인간이 자신의 작은 지혜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이 거대한 도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는 법과 제도, 도덕과 예의를 만들어 자연스러운 질서를 통제하려 하고, 인위적인 목표를 세워 스스로를 닦달하며,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애씁니다. 이러한 모든 ‘유위 (有爲)’, 즉 억지로 하는 행위야말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노자의 처방이 바로 무위자연입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도의 흐름에 거스르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나무가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자라나듯이, 상황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최소한의 힘으로 행위하는 ‘함이 없는 함’입니다. 무위의 행위는 계획과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함으로써 상황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꿰뚫어 보는 데서 나옵니다.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게 다스리고, 최고의 장군은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킵니다. 이처럼 무위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행위의 방식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을 의미하며, 바로 이 무위의 결과로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인위적인 강제가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은 자신의 본성 (德, 덕)에 따라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무위자연의 삶이란, 나의 작은 에고가 세운 계획을 내려놓고, 우주적인 도의 리듬에 나의 삶을 조율하여, 억지로 애쓰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위대한 춤과도 같은 삶의 방식입니다.
이처럼 카르마 요가와 무위자연은 행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공통된 목표를 향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길의 풍경과 철학적 기반은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길 모두 ‘자아 (ego)’의 의지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카르마 요가는 행위의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이기적인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게 하고, 무위자연은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인위적인 자아의 노력을 내려놓게 합니다. 두 길 모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나의 작은 자아를 넘어선 더 큰 질서에 자신을 맡길 때 찾아온다고 가르칩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행위의 모습 또한 닮아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불안 없이 오직 의무에 집중하는 카르마 요기의 행위는 군더더기가 없고, 도의 흐름에 올라탄 도인의 행위는 거침이 없습니다. 둘 다 내면의 갈등과 저항이 사라진,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효율적인 행위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두 길이 서 있는 땅은 다릅니다. 카르마 요가의 세계는 ‘다르마’, 즉 사회적, 우주적 의무와 질서라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전사, 사제, 상인 등 각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 속에서 어떻게 영적으로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행위는 신에게 바치는 봉헌이며, 그 배경에는 인격적인 신과 카르마의 법칙이라는 유신론적, 도덕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위자연의 세계는 ‘도’라는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인 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의무보다는 우주적 질서와의 조화를 더 강조하며, 인위적인 문명보다는 소박한 자연의 삶을 이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복잡한 사회 규범을 떠나 만물의 근원적인 흐름과 하나 되려는 범신론적,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카르마 요가가 불타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주어진 행위를 회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면, 무위자연은 애초에 그러한 갈등과 다툼 자체가 인위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다툼 없는 낮은 자리로 물러나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카르마 요가와 무위자연은, 행위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뱃사공 기술과도 같습니다. 카르마 요가는 거친 물살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배의 목표 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눈앞의 노를 젓는 행위에만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강을 건너라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무위자연은 억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 말고, 강의 가장 깊고 빠른 물길을 찾아내어 그 흐름에 배를 맡김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강을 건너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행위 속에서의 부동심 (不動心)’을, 다른 하나는 ‘흐름과의 완전한 합일’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과와 효율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도록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종종 방향을 잃고 소진되며, 결과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받습니다. 인도의 현자와 중국의 성인이 수천 년 전에 제시한 이 두 개의 지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제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 즐거운 춤으로 만들고 있는가.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길의 끝에는 행위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 되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이 기다리고 있음을 두 지혜는 약속하고 있습니다.
2-17.7. 덕(德)과 리타(Ṛta): 우주적 질서
우리는 종종 혼돈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느낍니다. 매일의 뉴스에는 부조리한 사건들이 넘쳐나고,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우연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표면적인 무질서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계의 배후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숨겨진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깊은 직관을 품어왔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어김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계절이 순환하며, 씨앗이 싹을 틔워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는 그 모습 속에서, 고대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원리, 즉 우주적 질서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질서에 순응할 때 삶은 평화롭고 풍요로워지며, 그것을 거스를 때 혼란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통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지혜 전통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심오한 질서를 가리키기 위해, 고대 인도의 베다 (Veda) 시인들은 ‘리타 (Ṛta)’라는 이름을 노래했고,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 (老子)는 ‘덕 (德)’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신비를 설명했습니다. 리타가 우주와 사회를 지탱하는 신성한 법칙의 장엄함을 드러낸다면, 덕은 그 거대한 법칙이 모든 개별 존재 속에서 어떻게 고유한 본성으로 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두 개의 고대어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어떻게 하면 다시 우주적인 조화와 연결되어 온전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가장 오래된 성전인 리그베다 (Ṛgveda)의 세계 속에서, 리타는 모든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성스럽고도 강력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자연법칙과 도덕적인 선 (善), 그리고 제사 의례의 정확성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적이고 신성한 질서 그 자체입니다. 태양이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오르고,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며, 계절이 어김없이 순환하는 것은 모두 리타의 질서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조차도 이 리타의 힘 아래에 있으며, 그들의 위대함은 리타를 수호하고 실현하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특히 하늘의 신 바루나 (Varuṇa)는 ‘리타의 수호자’로서, 천 개의 눈으로 인간 세상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며 이 우주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거짓과 불의, 즉 ‘안리타 (anṛta)’를 심판하는 준엄한 신으로 묘사됩니다. 베다 시대의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은 리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제사 의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거행하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지상에서 재현하고 신들과의 조화를 유지하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고, 약속을 지키며,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정직한 삶이야말로 리타의 길을 걷는 것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는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리타는 인간이 임의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발견하고 따라야만 하는 선재적 (先在的)인 우주적 진리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아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리타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주 전체의 조화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교향곡의 일부가 됩니다.
수천 년의 세월과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의 땅에서 노자는 이 우주적 질서의 또 다른 측면을 ‘덕’이라는 개념을 통해 밝혔습니다. 만약 도 (道)가 만물의 근원이자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주적 흐름 그 자체라면, 덕은 그 보편적인 도가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 속에 내재하여 그 존재 고유의 본성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덕은 도로부터 부여받은 그 존재만의 고유한 힘이자 잠재력이며, 그 존재가 가장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내적인 원리입니다. 소나무의 덕은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나는 것이며, 물의 덕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덕은 사회가 강요하는 인위적인 도덕이나 지식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다듬어지기 이전의 소박하고 진실한 본성, 즉 ‘통나무 (樸)’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 덕을 온전히 따를 때, 인간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無爲) 자연스럽게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 자신의 덕을 잃어버리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며,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인위적인 가면을 씁니다. 이러한 모든 유위 (有爲)의 노력은 우리를 자신의 근원인 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결국에는 지치고 공허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 (上德)은 자신이 덕을 쌓고 있다고 의식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며, 그 행동은 저절로 모든 것을 이롭게 합니다. 반면에 덕을 잃어버린 사람 (下德)은 인위적인 도덕률 (仁義禮)을 만들어 자신과 타인을 속박하려 애씁니다. 이것은 마치 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조화 (造花)를 만들어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도가의 덕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어떤 외부적인 목표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내면의 보물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귀를 막고,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고유한 결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처럼 리타와 덕은 모두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깊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두 개념 모두 이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조화롭고 올바른 삶이며,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고통과 혼란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리타를 따르는 삶이 진실 (satya)의 삶이듯, 덕을 따르는 삶 또한 진실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또한, 두 질서 모두 인간의 작은 지혜를 넘어서는 어떤 경외로운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리타를 창조할 수 없으며 오직 그것을 따를 뿐이고, 덕 또한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으며 오직 그것을 회복할 뿐입니다. 둘 다 우리에게 자아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더 큰 전체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두 개념이 그려내는 세계의 모습에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리타는 보다 객관적이고 법칙적인 질서의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새겨진 불변의 헌법과도 같아서, 인간의 행위는 이 법칙 앞에서 심판받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게 됩니다. 리타의 세계는 바루나와 같은 신들에 의해 감독되고 유지되는, 어느 정도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질서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리타는 종종 사회적 규범과 의무의 형태로 구체화되는 다르마 (Dharma)의 개념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반면에, 덕은 보다 주관적이고 내재적인 질서의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각 존재의 내면에 심어진 고유한 본성의 씨앗입니다. 덕의 세계는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인 도의 흐름 속에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길을 찾아가는, 보다 예술적이고 유기적인 질서의 세계입니다. 리타가 우리에게 ‘무엇이 우주적으로 옳은가?’를 묻는다면, 덕은 우리에게 ‘무엇이 나에게 가장 진실한가?’를 묻습니다. 하나가 ‘우주적 조화 속에서의 올바른 역할 수행’을 강조한다면, 다른 하나는 ‘자신의 본성을 통한 우주적 흐름과의 합일’을 강조합니다.
결국 리타와 덕은, 우리가 잃어버린 우주적 조화를 회복하기 위한 두 개의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리타는 우리에게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저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사회의 의무 속에서 우리의 올바른 위치를 찾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덕은 우리에게 시선을 안으로 돌려,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발견하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길은 결국 하나의 정상에서 만날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덕을 온전히 실현하는 삶은 저절로 우주의 리타와 조화를 이룰 것이며, 우주의 리타를 진심으로 따르는 삶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가장 진실한 덕을 꽃피우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외부의 기준을 강요하며 우리를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동시에 우주와의 연결 감각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인도의 현자와 중국의 성인이 수천 년 전에 밝혀놓은 이 두 개의 등불은, 우리에게 진정한 질서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진실과 우주의 거대한 진실이 만나는 그 경계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