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세계는 이토록 불완전한가? 왜 아름다움과 선함 속에 고통과 악, 그리고 부조리가 뒤섞여 있는가? 만약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가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다면, 어째서 그의 창조물은 이토록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인류의 정신사는 크게 두 갈래의 길을 모색해 왔습니다. 하나는 이 세계의 불완전함을 인간의 타락이나 유한함의 탓으로 돌리고, 창조주 자체의 완전함은 의심하지 않으려는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급진적이고 대담한 대답을 내놓았던 사상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의 결함이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이 세계의 ‘창조’ 자체가 어떤 근본적인 실수나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계는 완전한 신의 작품이 아니라, 어리석거나 불완전한 존재가 만들어낸 실패작 혹은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서양의 비밀스러운 지혜 전통인 영지주의 (Gnosticism)가 ‘데미우르고스 (Demiurge)’라는 이름으로 지목한 이 열등한 창조주에 대한 신화, 그리고 동양의 가장 심오한 철학 중 하나인 힌두 베단타 (Vedānta) 철학이 이 현상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마야 (Māyā)’라는 개념은, 바로 이 불완전한 창조의 문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고든 두 개의 위대한 통찰입니다.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적 비극의 인격적 가해자라면, 마야는 존재론적 착각의 비인격적 원리이며, 이 두 개념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기원후 초기 세기, 로마 제국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이 서로 뒤섞이며 탄생한 영지주의는 하나의 충격적인 선언을 그 중심에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창조주 여호와 (Yahweh)가 결코 지고의 신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참된 신, 즉 궁극적 실재는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완벽하고 초월적인 빛의 세계에 머무는 ‘알 수 없는 신 (Agnostos Theos)’입니다. 이 지고의 신으로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신적인 존재들, 즉 ‘아이온 (Aeon)’들이 유출 (emanation)되어 ‘플레로마 (Pleroma)’라고 불리는 완전한 신적 세계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 유출의 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이온들 중 가장 낮은 존재인 ‘소피아 (Sophia)’, 즉 ‘지혜’가 자신의 짝과 상의 없이, 홀로 지고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오만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유를 감행합니다. 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열정의 결과로, 그녀는 플레로마의 완전한 질서 바깥으로 하나의 태아, 즉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를 유산하게 됩니다. 플레로마의 빛으로부터 격리된 이 존재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피아도, 그 너머의 참된 신도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도 오만한 존재로 성장합니다. 그가 바로 이 물질세계를 창조한 장인 (匠人), 즉 데미우르고스입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채, 텅 빈 혼돈 속에서 자신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질투 많고 독선적인 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적 없는 상위의 플레로마 세계를 어렴풋이 모방하여, 불완전하고 조악한 물질로 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합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에게 이 물질세계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창조물이 아니라, 열등한 신이 만들어낸 어둡고 결함투성이인 감옥입니다.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오만함을 투사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법칙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들이 자신만을 숭배하도록 강요하며, 인간들이 이 물질 감옥 너머에 있는 참된 빛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는 순수한 악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리석고, 편협하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비극적인 창조주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부조리, 그리고 물질의 속박은 바로 이 불완전한 창조주의 불완전한 솜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한편, 인도의 철학적 전통은 이 세계의 불완전함의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샹카라 (Śaṅkara)에 의해 체계화된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ānta) 철학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브라흐만 (Brahman)입니다. 브라흐만은 모든 속성과 분별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순수한 환희 (Ānanda) 그 자체이며, 이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며,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 찬 현상 세계는 대체 무엇인가? 샹카라는 이 세계가 브라흐만의 신비로운 힘, 즉 마야에 의해 나타난 환영과도 같다고 설명합니다. 마야는 ‘속임수’, ‘환영’, ‘마술’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재와 비실재, 존재와 비존재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설명 불가능한 (anirvacanīya) 힘입니다.
샹카라는 마야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어두운 밤길에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고 공포에 떠는 유명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밧줄이라는 유일한 실재 위에, 우리의 무지 (avidyā)가 뱀이라는 환영을 덧씌운 것입니다. 이 뱀은 완전히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심장이 뛰는 생생한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불을 비추어 그것이 밧줄임을 확인하는 순간, 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바로 이 뱀과도 같습니다.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이라는 밧줄 위에, 마야의 힘이 이 개별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다채로운 세계라는 뱀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환영의 세계를 진짜라고 믿으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세계의 창조주는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마야는 브라흐만과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브라흐만이 마치 마술사처럼 스스로를 다채로운 현상으로 드러내는 불가해한 힘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의 불완전함은 어떤 창조주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유일한 실재를 무수한 현상으로 잘못 보는 우리의 근원적인 ‘인식의 오류’, 즉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이처럼 데미우르고스와 마야는 모두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궁극적인 진실이 아니며, 어떤 결함이나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심오한 통찰을 공유합니다. 두 개념 모두 현상 세계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깨부수고, 그 이면에 있는 더 깊은 실재를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해방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려내는 우주의 모습과 문제의 진단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창조’의 주체에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세계는 뚜렷한 ‘인격적 행위자’인 데미우르고스가 존재합니다. 그는 무지하고 오만한 의지를 가지고 이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드라마는 지고의 신과 열등한 창조주 사이의 우주적인 투쟁의 성격을 띱니다. 반면에 베단타의 세계에는 그러한 인격적인 창조주가 없습니다. 마야는 의지나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실재의 본질을 가리고 왜곡하는 ‘비인격적인 원리’ 혹은 ‘힘’입니다. 따라서 베단타의 드라마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지를 걷어내는 인식론적 투쟁의 성격을 띱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진단하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 ‘악하고 결함 있는 감옥’입니다. 물질은 빛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구원은 이 혐오스러운 물질세계를 벗어나 영적인 고향으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과 악, 영과 육, 빛과 어둠이라는 근본적인 이원론적 대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마야에 의해 나타난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 세계의 본질은 다름 아닌 브라흐만이기 때문입니다. 밧줄이 뱀으로 보일 때, 그 뱀의 실체는 밧줄이듯, 이 고통스러운 현상 세계의 실체 또한 지복의 브라흐만입니다. 문제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를 세계로만 보고 그 본질인 브라흐만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입니다. 따라서 베단타의 구원은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꿰뚫어 보고’ 모든 것 안에서 브라흐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는 ‘잘못된 창조자’의 신화이며, 베단타의 마야는 ‘잘못된 인식’의 철학입니다. 하나는 우주적 타락의 드라마를 통해 이 세계의 고통을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착각의 논리를 통해 그 고통의 근원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위대한 사유는 혼돈처럼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경험하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당신이 겪는 고통의 뿌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만한 창조주의 실수이든, 우리의 근원적인 무지이든, 중요한 것은 이 불완전한 세계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이 감옥을 부수거나 이 환영에서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2-18.2. 내 안의 불꽃: 아트만과 프네우마
만약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어리석은 창조주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감옥이거나, 혹은 궁극적 실재 브라흐만 (Brahman) 위에 드리워진 신비로운 환영 마야 (Māyā)의 장막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적 실수 혹은 존재론적 착각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어야만 하는 무력한 피조물에 불과한가? 이 절망적인 질문 앞에서, 서양의 영지주의 (Gnosticism)와 인도의 우파니샤드 (Upaniṣad) 철학은 놀랍도록 일치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물질세계 속에 갇힌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신성 (神性)의 불꽃이 잠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추방된 왕자이며, 잃어버린 보석이고, 어둠 속에 갇힌 한 줄기 빛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신성한 본질을 ‘프네우마 (Pneuma)’라고 불렀고, 인도의 현자들은 그것을 ‘아트만 (Ātman)’이라고 불렀습니다. 두 전통 모두 구원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은총 이전에, 바로 이 내면의 신성한 불꽃을 발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꽃이 어디서 왔으며, 이 어둠 속에 왜 갇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두 개의 이야기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을 드러냅니다.
영지주의의 우주론 속에서 인간의 창조는 하나의 장대한 사기극이자 비밀스러운 반역의 드라마입니다. 열등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는 오만함 속에서, 상위의 빛의 세계 ‘플레로마 (Pleroma)’를 어설프게 모방하여 흙으로 인간 아담을 빚어냅니다. 그러나 그의 창조물은 생명이 없는 차가운 진흙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이때, 자신의 실수로 데미우르고스를 유산했던 지혜의 여신 소피아 (Sophia)가 이 비극적인 상황에 개입합니다. 그녀는 데미우르고스의 눈을 속여,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성한 빛의 일부를 그 진흙 인형에게 불어넣도록 유도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데미우르고스가 의도했던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 그 창조주 자신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신성한 불꽃, 즉 프네우마를 품게 된 역설적인 존재가 됩니다. 프네우마는 그리스어로 ‘숨결’, ‘영 (spirit)’을 의미하지만, 영지주의에서 그것은 단순한 생명력이나 영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고의 신이 머무는 빛의 세계 플레로마로부터 유래한, 신적인 본질 그 자체의 ‘파편’입니다. 그것은 이 물질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방문자이며, 어둠의 감옥에 갇힌 빛의 씨앗입니다.
이러한 신화적 배경 위에서, 영지주의는 인간을 세 종류로 구분하는 독특한 인간론을 펼칩니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인간 (Hylics)’입니다. 그들은 오직 데미우르고스가 부여한 육체 (soma)와 동물적인 영혼 (psyche)만을 가지고 있으며, 신성한 불꽃 프네우마가 없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물질적인 삶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 자체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두 번째는 ‘심령적인 인간 (Psychics)’입니다. 그들은 육체와 더불어, 데미우르고스로부터 부여받은 보다 높은 차원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분별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데미우르고스가 제시하는 율법과 계율을 지킴으로써 그가 약속하는 불완전한 천국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통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고귀한 존재는 바로 ‘영적인 인간 (Pneumatics)’입니다. 그들은 육체와 영혼뿐만 아니라, 그 가장 깊은 곳에 신성한 불꽃 프네우마를 간직하고 있는 선택된 소수입니다. 그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며, 그들의 구원은 행위나 믿음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본질인 프네우마를 깨닫는 특별한 ‘앎 (Gnosis, 그노시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프네우마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어두운 감옥 속에 갇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망각의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채, 이 세상의 고통과 욕망 속에서 무의미하게 표류합니다. 영지주의자에게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고통은 바로 이 프네우마가 느끼는 깊은 향수병이자 이질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안식을 찾지 못하고,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며 공허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안의 신성한 불꽃이 자신의 고향인 빛의 세계 플레로마를 어렴풋이 기억하며 보내는 무의식적인 신호입니다. 구원의 여정은 바로 이 깊은 소외감과 낯섦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 시작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이 바로 그노시스이며, 이 앎을 통해 잠자던 프네우마는 비로소 깨어나 어두운 감옥을 탈출하여 자신의 빛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 또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에 영원하고 신성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르치지만, 그 이야기는 우주적 투쟁과 추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자기 발견의 여정으로 펼쳐집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에게, 나의 가장 깊은 참된 자아인 아트만은, 영지주의의 프네우마처럼 궁극적 실재의 ‘파편’이 아닙니다. 아트만은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 그 자체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강물 속에 비친 수많은 달의 그림자들이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결국 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달에서 비롯되었듯이,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존재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은 모두 유일하고 동일한 브라흐만의 현현입니다. 따라서 아트만은 플레로마에서 추방되어 물질세계에 갇힌 이방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트만은 이 모든 세계의 근원적인 실체이며, 이 세계는 아트만, 즉 브라흐만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거대한 유희 (līlā)의 무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신을 유한하고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하는가? 우파니샤드는 그 원인이 ‘무지 (avidyā)’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참된 본질인 아트만은 순수하고 영원한 의식 그 자체이지만, 이 순수한 빛은 여러 겹의 ‘껍질 (kośa, 코샤)’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가장 바깥 껍질은 음식으로 이루어진 육체 (annamaya-kośa)이며, 그 안에는 생명 에너지로 이루어진 껍질 (prāṇamaya-kośa), 감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껍질 (manomaya-kośa), 그리고 지성과 분별력으로 이루어진 껍질 (vijñānamaya-kośa)이 겹겹이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껍질들을 ‘나’라고 착각하고, 육체의 쾌락과 고통, 감정의 변화, 그리고 생각의 흐름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 자아, 즉 ‘지바 (jīva)’의 상태입니다. 문제는 육체나 세계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트만이라는 진정한 주인을 잊어버리고, 그 주인이 잠시 머무는 집과 옷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정체성의 오류’에 있습니다. 따라서 베단타 철학에는 영지주의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의 등급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 본질에 있어 아트만이며,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은 모든 존재에게 보편적으로 열려 있으며, 단지 그 무지의 두께와 깊이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아트만과 프네우마는 모두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한 불꽃을 가리키지만, 그 불꽃의 본질과 그것이 놓인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첫째, 그 기원에서 차이가 납니다. 프네우마는 상위의 빛의 세계에서 ‘추락’하여 이질적인 어둠의 세계에 ‘갇힌’ 파편입니다. 그 존재론적 상황은 비극적인 유배입니다. 반면에 아트만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모든 곳에 존재하는 우주적 실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양한 형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단지 무지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둘째, 세계와의 관계가 다릅니다. 프네우마에게 이 물질세계와 육체는 혐오스러운 감옥이며,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는 극복해야 할 적입니다. 구원은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부정하고 육체를 혐오하는 이원론적 태도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트만에게 이 세계는 자신의 본질인 브라흐만이 마야의 힘을 통해 펼쳐 보인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뱀으로 보이는 것의 실체가 밧줄이듯,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 (saṃsāra)의 실체는 브라흐만입니다. 구원은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모든 것 속에서 브라흐만을 발견하고, 내가 바로 그 브라흐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셋째, 그 궁극적인 상태가 다릅니다. 프네우마의 구원은 잃어버린 자신의 ‘부분’이 본래 속해 있던 ‘전체’, 즉 플레로마로 돌아가 다시 합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전히 부분과 전체라는 미묘한 구분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트만의 해탈 (Mokṣa)은 ‘부분’이 ‘전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애초부터 ‘전체’였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합일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했던 ‘비분리 (advaita)’의 진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라는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선언은 바로 이 절대적인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결국 영지주의의 프네우마는 우주적 전쟁 속에서 실종된 신성의 파편에 대한 비극적인 신화이며, 인도의 아트만은 존재의 바다 위에 떠오른 무지라는 안개에 대한 심오한 철학입니다. 하나는 선택받은 소수의 영혼이 겪는 우주적 소외감과 귀환의 드라마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겪는 보편적인 자기 망각과 자기 발견의 여정을 그립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다른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외부의 구원자를 기다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신성한 불꽃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꽃을 깨우는 ‘앎’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다음 여정의 질문이 될 것입니다.
2-18.3. 무지로부터의 해방: 즈나나와 그노시스
만약 인간의 실존이 불완전한 창조주의 실수로 인해 어두운 감옥에 갇힌 것이거나, 혹은 유일한 실재 위에 드리워진 환영의 장막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라면, 구원의 길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행위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은총인가? 이 질문 앞에서 서양의 영지주의 (Gnosticism)와 인도의 베단타 (Vedānta) 철학은 한목소리로 선언합니다. 구원은 행위나 믿음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오직 특별한 종류의 ‘앎’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인간 고통의 근본 원인은 죄 (sin)나 카르마 (karma)의 무게 이전에, 바로 ‘무지 (ignorance)’입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야말로 우리를 이 감옥에 속박하고 이 환영 속에서 헤매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사슬입니다. 따라서 해방은 이 무지의 어둠을 깨뜨리는 ‘빛’과도 같은 ‘앎’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구원적 앎을 ‘그노시스 (Gnosis)’라고 불렀고, 인도의 현자들은 그것을 ‘즈나나 (Jñāna)’라고 불렀습니다. 두 단어 모두 단순한 지식이 아닌, 존재 자체를 변형시키는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앎이 어떻게 오며, 무엇을 아는 것이며, 그 결과로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한 전혀 다른 두 개의 길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망각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신성한 불꽃, 즉 프네우마 (Pneuma)는 자신이 빛의 세계 플레로마 (Pleroma)에서 온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창조한 이 물질세계의 법칙과 운명에 따라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깊은 잠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그노시스는 그리스어로 ‘앎’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책을 통해 배우거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 (episteme)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갑자기 번개가 치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계시적 (revelatory)’인 앎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구원자, 즉 플레로마에서 온 ‘메신저’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지혜입니다. 영지주의의 많은 분파들은 바로 이 메신저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았지만, 그들의 예수는 정통 기독교에서처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들에게 망각의 술을 마시게 하고 물질 감옥에 가두어 둔 데미우르고스의 속임수를 폭로하고,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프네우마를 일깨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온 영적인 안내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노시스가 알려주는 비밀스러운 지혜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네 가지의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 대답은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보다 더 높은, 빛의 세계 플레로마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우리는 신성한 불꽃의 파편으로서, 어둠과 물질의 감옥 속에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어디에 던져졌는가?’. 그 대답은 ‘우리의 창조주가 무지 속에서 만들어낸 이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그 대답은 ‘우리를 속박하는 이 세상의 법칙과 운명,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무지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진실을 아는 것, 즉 자신의 신적인 기원과 현재의 비참한 상태,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이 앎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꾸는 실존적인 충격입니다. 그노시스를 얻은 영지주의자 (Pneumatic)는 더 이상 이 세계의 가치관이나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자 추방된 왕자임을 자각하고, 오직 자신의 영적인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더 이상 그를 유혹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고통은 더 이상 그를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그는 이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희비극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 마침내 육체의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이 감옥을 탈출할 그날을 준비합니다.
인도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 또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앎’에 있다고 보지만, 그 앎의 성격과 그것을 얻는 방식은 그노시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베단타의 구원적 앎인 즈나나는 외부의 메신저가 가져다주는 비밀스러운 계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스스로의 탐구를 통해 ‘발견’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바로 나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 (Ātman)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 (Brahman)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 (不二, advaita)’의 진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반대를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무지 (avidyā) 때문에 자신의 참된 본질인 아트만을 잊어버리고, 그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육체와 마음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이 정체성의 오류야말로 모든 고통과 속박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즈나나는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는 과정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제거해 나가는 ‘지우개’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즈나나를 얻는 길은 세 단계의 수행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슈라바나 (śravaṇa)’, 즉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격을 갖춘 스승, 즉 구루 (guru)로부터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와 같은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구루는 영지주의의 메신저처럼 외부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가리켜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둘째는 ‘마나나 (manana)’, 즉 사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승에게 들은 가르침이 이성적으로 타당한지를 깊이 숙고하고, 모든 의심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단계입니다. 베단타 철학은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며, 철저한 이성적 탐구를 통해 진리에 대한 확신을 세울 것을 강조합니다.
셋째는 ‘니디드히아사나 (nididhyāsana)’, 즉 깊이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듣고 사유함으로써 얻은 지적인 이해를,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명상을 통해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단계입니다. 수행자는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이 마음이 아니다 (neti, neti)’라는 부정의 명상을 통해 거짓된 자기 동일시를 하나씩 벗겨내고, 마침내 ‘나는 브라흐만이다 (Aham Brahmāsmi)’라는 진리 속에 온전히 안주하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즈나나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수행자는 더 이상 개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모든 이름과 형상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 의식, 환희 그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이 세계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속박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인 브라흐만이 펼쳐 보이는 신비로운 유희로 보입니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했던 무지가 사라지자, 두려움을 주던 뱀은 사라지고 본래의 밧줄만이 남은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해탈 (jīvanmukti)’의 상태입니다. 그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활동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브라흐만의 평화 속에 머뭅니다.
이처럼 그노시스와 즈나나는 모두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말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길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앎의 ‘원천’이 다릅니다. 그노시스는 초월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계시’이며,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은총과도 같습니다. 반면에 즈나나는 모든 존재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진리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며, 원칙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둘째, 앎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노시스의 내용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우주론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추방과 귀환이라는 서사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즈나나의 내용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진리’입니다. 그것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하나다’라는 비이원론적 통찰 그 자체입니다. 셋째, 앎이 가져오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노시스는 이 세계를 악한 감옥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의 ‘탈출’을 최종 목표로 삼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즈나나는 이 세계의 본질이 곧 브라흐만임을 깨닫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혁’을 통해 세계 속에서의 자유를 성취하는 비이원론적 세계관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는 세계에 대한 ‘부정’을 통해 구원을 찾고, 다른 하나는 세계에 대한 ‘궁극적 긍정’을 통해 해방을 찾습니다. 이 두 개의 위대한 ‘앎’의 길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빛을 추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심오한 증거입니다.
2-18.4. 이원론적 세계관: 상캬와의 비교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종종 하나의 근본적인 분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과 물질, 의식과 육체, 영원한 것과 변화하는 것 사이의 깊은 간극입니다. 이 간극을 넘어서려는 노력 속에서, 어떤 사상들은 이 두 개의 원리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독립적인 실체로 규정하는 이원론 (dualism)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서양의 영지주의 (Gnosticism)가 빛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이고 우주적인 투쟁의 드라마 속에서 그 이원론을 펼쳐 보였다면, 인도의 가장 오래된 철학 체계 중 하나인 상캬 (Sāṃkhya) 학파는 순수한 의식과 근원적인 물질이라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원론을 구축했습니다. 영지주의가 ‘왜 이 세계는 악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다면, 상캬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분리’를 통한 해방을 모색했습니다. 이 두 개의 심오한 이원론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곤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두 개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비극적인 투쟁의 서사입니다. 그 중심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대립적인 힘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모든 선과 빛의 근원인,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알 수 없는 신’이 머무는 영적 세계 ‘플레로마 (Pleroma)’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지와 오만 속에서 이 불완전한 물질세계를 창조한 열등한 신 ‘데미우르고스 (Demiurge)’와 그가 지배하는 어둠의 물질세계입니다. 이 이원성은 단순한 철학적 구분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영과 육이라는 가치 판단이 깊이 개입된 ‘윤리적 이원론’입니다.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 악하며, 인간의 육체는 빛의 세계에서 추락한 신성한 불꽃 ‘프네우마 (Pneuma)’를 가두고 있는 혐오스러운 감옥입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에게 구원이란 이 두 개의 대립적인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하여, 악한 물질 감옥을 부수고 자신의 영적인 고향으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삶은 투쟁이며, 세계는 극복해야 할 적입니다.
반면에 상캬 철학이 제시하는 이원론은 이러한 윤리적 투쟁의 색채를 띠지 않습니다. 상캬의 세계는 서로 독립적이고, 영원하며, 결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개의 근본 실체, 즉 ‘푸루샤 (Puruṣa)’와 ‘프라크리티 (Prakṛti)’로 구성됩니다. 푸루샤는 순수한 의식 (cit)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며, 어떤 속성도 갖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영원한 ‘관조자 (sākṣin)’입니다. 영지주의의 프네우마가 단일한 신에게서 유래한 파편이라면, 푸루샤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의식의 중심들로 존재합니다. 즉, 푸루샤는 ‘다수 (multiple)’입니다. 프라크리티는 이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집니다. 그것은 의식이 없는 근원적인 ‘물질-에너지 (matter-energy)’이며, 모든 현상 세계의 잠재적 원인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활동하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들을 전개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푸루샤가 다수인 반면, 프라크리티는 ‘단일 (single)’합니다. 프라크리티는 다시 세 가지의 근원적인 힘, 즉 ‘구나 (guṇa)’로 구성됩니다. ‘사트바 (sattva)’는 가볍고, 밝으며, 기쁨과 지혜를 낳는 순수성의 힘입니다. ‘라자스 (rajas)’는 움직이고, 자극하며, 욕망과 고통을 낳는 활동성의 힘입니다. ‘타마스 (tamas)’는 무겁고, 어두우며, 무지와 나태를 낳는 불활성의 힘입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에서 이 세 가지 구나는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푸루샤의 ‘근접’이라는 미스터리한 계기로 인해 이 균형이 깨지면서, 프라크리티는 지성 (buddhi), 자아의식 (ahaṃkāra), 마음 (manas), 감각기관, 그리고 물질의 다섯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차례로 전개시켜 나갑니다.
상캬 철학에서 인간의 속박과 고통은 프라크리티나 물질세계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활동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푸루샤는 마치 투명한 수정이 붉은 꽃 옆에서 붉게 보이듯이, 프라크리티의 산물인 지성과 자아의식, 그리고 육체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동일시합니다. 행위하는 것은 프라크리티이지만, 푸루샤는 자신이 행위한다고 착각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프라크리티의 산물인 마음이지만, 푸루샤는 자신이 고통받는다고 착각합니다. 이 ‘분별 없음 (aviveka)’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상캬의 해방, 즉 ‘카이발야 (kaivalya)’는 이 세계를 탈출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프라크리티가 아니다. 나는 프라크리티의 어떤 활동과도 무관한, 순수한 관조자일 뿐이다’라는 철저한 ‘분별지 (viveka-jñāna)’를 통해, 푸루샤가 프라크리티로부터 자신의 본래적인 독립성과 초연함을 회복하는 ‘분리’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와 상캬는 모두 이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하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그 이원성의 ‘성격’이 다릅니다. 영지주의는 선과 악의 ‘윤리적 이원론’이며, 세계를 부정하고 그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합니다. 상캬는 의식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며, 세계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것과의 잘못된 동일시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합니다. 둘째, 그 두 원리의 ‘기원’이 다릅니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세계와 데미우르고스는 상위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실수, 즉 타락의 결과물입니다. 그 기원은 일원론적 비극에 있습니다. 상캬에서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해 온 두 개의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입니다. 셋째, ‘구원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영지주의에서 구원의 대상인 프네우마는 단일한 신에게서 유래한 파편이며, 그 구원은 본래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상캬에서 구원의 주체인 푸루샤는 무한히 많은 개별적 의식들이며, 각각의 푸루샤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해방을 성취합니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잘못된 세계’에 대한 저항의 철학이며, 상캬의 이원론은 ‘잘못된 자기 이해’에 대한 분석의 철학입니다. 하나는 우주적인 전쟁의 신화를 통해 인간의 소외감을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정교한 심리-철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다른 길은 우리에게 동일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그것은 과연 당신의 참된 본질인가, 아니면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다른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찾는 것, 즉 ‘분별’의 지혜를 얻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윤리적 투쟁의 형태를 띠든 형이상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든,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첫걸음임을 두 위대한 이원론의 지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