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은 그 유한한 이해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모든 존재가 흘러나온 궁극적인 시원 (始原)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만약 이 다채롭고 유한한 세계 너머에 하나의 절대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면, 그 근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의 모든 언어와 사유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일까? 이 심오한 질문 앞에서, 서양의 가장 깊은 비밀의 지혜인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Kabbalah)와 동양의 가장 정교한 형이상학 체계인 힌두교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ānta) 철학은, 마치 서로 다른 산맥의 정상에서 동일한 밤하늘의 심연을 바라보듯, 놀랍도록 닮아 있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궁극적 실재, 즉 신성의 가장 깊은 본질은 인간이 부여하는 그 어떤 속성이나 이름으로도 한정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규정 불가능한 상태라고 선언했습니다. 카발라가 ‘아인 소프 (Ein Sof)’라고 부른 이 ‘끝없는 무 (無)’와, 베단타 철학이 ‘니르구나 브라흐만 (Nirguṇa Brahman)’이라고 부른 이 ‘속성 없는 실재’는, 모든 창조와 현상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이전에 존재하는, 말할 수 없는 신성의 순수한 잠재성을 가리키는 두 개의 위대한 이름입니다.
카발라의 지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약성서의 인격적인 창조주 하느님, 즉 야훼 (Yahweh)의 이면에 있는 더 깊고 근원적인 신성의 차원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에게, 성서에 묘사된 질투하고 분노하며 인간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신은 신성의 전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드러낸 신성의 ‘얼굴’일 뿐이며, 그 얼굴 너머에는 모든 현상 세계가 발출 (emanation)되어 나오기 이전의, 완전히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은 ‘신성 자체 (Godhead)’가 존재합니다. 카발라는 이 궁극의 실재를 긍정적인 언어로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합니다. 어떤 긍정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개념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부정의 언어를 통해서만 이 심연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이름이 바로 ‘아인 소프’입니다. 히브리어로 ‘아인 (Ein)’은 ‘없음 (Nothingness)’을, ‘소프 (Sof)’는 ‘끝 (End)’을 의미하므로, ‘아인 소프’는 문자적으로 ‘끝이 없음’, 즉 ‘무한 (The Infinite)’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카발라의 부정 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아인 소프’라는 이름조차도 너무 긍정적이라고 보아, 그 이전에 더욱 근원적인 두 단계의 부정을 설정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상태는 ‘아인 (Ein)’, 즉 그 어떤 존재나 비존재의 개념조차 적용할 수 없는 완전한 ‘무’입니다. 이 ‘아인’으로부터 ‘아인 소프’, 즉 ‘무한’이 드러나고, 다시 이 ‘아인 소프’로부터 ‘아인 소프 오르 (Ein Sof Aur)’, 즉 ‘무한한 빛 (Endless Light)’이 발현됩니다. 이 세 겹의 부정, 즉 ‘무’, ‘무한’, ‘무한광’은 궁극적 신성이 우리의 사유가 미칠 수 있는 가장 먼 지평 너머에 있음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아인 소프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나 의식, 혹은 어떤 성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잠재성의 잠재성이며,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 자체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의 장막 뒤에 가려진 절대적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완벽하고, 자기 충족적이며, 어떤 변화도 없는 아인 소프가 어떻게 이 유한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창조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카발라의 대답은 ‘침춤 (Tzimtzum)’, 즉 신성한 ‘수축’이라는 역설적인 개념 속에 있습니다. 무한한 빛으로 가득 찬 아인 소프는 창조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빛을 거두어들여 내면으로 ‘수축’함으로써, 창조가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텅 빈 공간, 즉 태초의 공허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자발적인 자기 제한이라는 신비로운 행위를 통해, 비로소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한편,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계승한 샹카라 (Śaṅkara)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 또한 궁극적 실재를 두 개의 다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숭배하고 기도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격신, 즉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 (Saguna Brahman)’이며,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속성을 넘어서 있는 순수한 실재 그 자체인 ‘속성 없는 브라흐만 (Nirguṇa Brahman)’입니다. 니르구나 브라흐만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인 궁극적 진리입니다. ‘니르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속성 (guṇa)이 없는 (nir)’이라는 의미로,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인간의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특성, 즉 전지전능함, 자비로움, 창조주로서의 역할 등도 초월해 있는 절대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아인 소프와 마찬가지로,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행위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고, 어떤 의지나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법칙 너머에 존재합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이 니르구나 브라흐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카발라와 동일한 부정의 방법, 즉 ‘네티, 네티 (neti, 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논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고 이성으로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브라흐만 그 자체가 아니라, 브라흐만 위에 덧씌워진 이름과 형상 (nāma-rūpa)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간의 언어로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을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삿-칫-아난다 (Sat-Cit-Ānanda)’, 즉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그리고 순수한 ‘환희 (Ānanda)’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니르구나 브라흐만에 대한 완전한 정의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을 가리키는 최상의 지시어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완벽하고, 속성이 없으며, 변화하지 않는 니르구나 브라흐만으로부터 어떻게 이 속성으로 가득 찬 다채로운 세계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베단타의 대답은 ‘마야 (Māyā)’라는 신비로운 개념 속에 있습니다. 마야는 니르구나 브라흐만이 가진 불가사의한 힘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있으면서도 마치 마술사처럼 스스로를 이 다채로운 현상 세계로 드러내는 환영의 힘입니다. 궁극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실제로 창조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이 마야라는 장막을 통해 무수한 현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처럼 아인 소프와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각기 다른 문화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궁극의 지평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두 개념 모두 궁극적 실재는 인간의 모든 개념적 파악을 넘어서는 절대적 무한이며, 오직 부정의 언어를 통해서만 암시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둘 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격적인 창조주 신의 이면에 있는, 더 깊고 근원적인 ‘신성 자체’를 가리킵니다. 또한, 두 전통 모두 이 ‘말할 수 없는 근원’으로부터 어떻게 ‘말할 수 있는 세계’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깊은 유사성의 이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카발라의 아인 소프는 ‘침춤’이라는 자발적인 의지의 행위를 통해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합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신비로운 ‘사건’과 ‘과정’이 전제되어 있으며, 창조는 비록 역설적이지만 실재하는 드라마입니다. 반면에 베단타의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어떤 행위도, 변화도 겪지 않습니다. 세계의 현상은 브라흐만의 실제적인 변형이 아니라, 마야라는 힘에 의한 ‘외견상의 나타남’일 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주론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식론적 오류’에 더 가깝습니다. 하나가 신성한 ‘의지의 신비’를 말한다면, 다른 하나는 ‘인식의 착각’을 말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름과 형상이 태어나기 이전의 저 고요하고 텅 빈 심연을, 하나는 ‘끝없는 무’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는 ‘속성 없는 실재’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인류의 가장 깊은 신비주의적 통찰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진리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알려지지 않은 근원으로부터 어떻게 신성의 속성들이 드러나고 세계가 구성되는가? 이것이 바로 다음 여정의 질문이 될 것입니다.
2-19.2. 세피로트: 신의 속성과 비슈누의 뷰하
만약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모든 이해와 언어를 넘어서는, 끝도 없고 속성도 없는 절대적인 무 (無)의 심연이라면, 어떻게 그 침묵의 심연으로부터 이토록 다채롭고 질서정연한 우주가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규정 불가능한 하나가 어떻게 유한하고 다양한 모든 것을 낳을 수 있었는가? 이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질문 앞에서,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Kabbalah)는 ‘세피로트 (Sefirot)’라는 신비로운 개념을 통해 그 과정을 설명했고, 인도의 비슈누파 신학, 특히 판차라트라 (Pāñcarātra) 학파는 ‘뷰하 (Vyūha)’라는 장엄한 이론을 통해 그 비밀을 풀고자 했습니다. 세피로트가 무한한 신성 아인 소프 (Ein Sof)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세계를 창조하는 열 개의 빛나는 그릇이라면, 뷰하는 초월적인 주님 비슈누 (Viṣṇu)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전개시키는 네 가지의 신성한 형상입니다. 이 두 개의 심오한 사상 체계는, ‘하나’와 ‘여럿’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잇는 다리로서, 알려지지 않은 신성이 어떻게 알려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고 활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두 개의 위대한 우주적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인 아인 소프는 그 자체로는 어떤 활동도, 변화도 없는 완전한 잠재성의 상태입니다.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 감추어진 신성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는 통로, 즉 신성한 힘과 속성들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피로트입니다. ‘세피로트’는 ‘숫자들 (numbers)’ 혹은 ‘셈 (counting)’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세페르 (sefer)’에서 유래했으며, 단수형은 ‘세피라 (sefira)’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무한한 신 아인 소프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열 개의 근원적인 속성이자, 신성한 빛이 흘러나오는 통로이며, 그 빛을 담는 그릇입니다. 세피로트는 아인 소프 그 자체는 아니지만, 아인 소프로부터 직접 발출 (emanation)된 신성한 힘의 현현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과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색깔의 광선들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광선들은 태양이 아니지만, 태양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태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열 개의 세피로트는 ‘생명의 나무 (Tree of Life)’라고 불리는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를 형성하며, 각각은 신성의 특정한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 첫 번째 세피라는 ‘케테르 (Keter)’, 즉 ‘왕관’입니다. 이것은 아인 소프로부터 최초로 발출된 순수한 존재의 의지이며, 모든 창조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무로부터의 한 점’입니다. 케테르로부터 두 개의 근원적인 원리, 즉 남성적이고 능동적인 힘인 ‘호크마 (Chokmah)’, 즉 ‘지혜’와, 여성적이고 수용적인 힘인 ‘비나 (Binah)’, 즉 ‘이해’가 발출됩니다. 이 세 개의 상위 세피로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거의 파악할 수 없는 순수한 신성의 영역을 구성합니다. 이어서 일곱 개의 하위 세피로트가 전개됩니다. ‘헤세드 (Chesed)’는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를 상징하며, ‘게부라 (Gevurah)’는 엄격한 심판과 힘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힘은 ‘티페레트 (Tiferet)’, 즉 아름다움과 조화 속에서 균형을 이룹니다. ‘네차흐 (Netzach)’는 승리와 인내를, ‘호드 (Hod)’는 영광과 감사를 나타내며, 이 둘은 ‘예소드 (Yesod)’, 즉 기초와 토대 속에서 다시 통합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성한 빛과 힘이 최종적으로 현현하여 물질세계를 낳는 마지막 세피라가 바로 ‘말쿠트 (Malkuth)’, 즉 ‘왕국’입니다. 이 열 개의 세피로트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신성한 에너지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역동적인 우주적 생명체입니다. 인간의 영혼 또한 이 생명의 나무의 축소판이며, 수행의 목표는 바로 이 세피로트의 길을 따라 자신의 의식을 상승시켜, 마침내 근원인 케테르를 넘어 아인 소프의 무한한 빛 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인도의 광대한 신학적 전통 속에서, 특히 비슈누를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비슈누파는, 초월적인 절대자가 어떻게 이 현상 세계와 관계를 맺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베단타 철학이 속성 없는 니르구나 브라흐만 (Nirguṇa Brahman)을 궁극적 실재로 내세웠다면, 비슈누파 신학은 그 브라흐만이 바로 인격적인 최고 주님, 즉 비슈누 혹은 나라야나 (Nārāyaṇa)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판차라트라 아가마 (Pāñcarātra Āgama) 문헌들은 이 초월적인 최고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고, 또한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뷰하, 즉 ‘전개’ 혹은 ‘배열’이라는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뷰하는 최고신이 가진 여섯 가지의 신성한 속성, 즉 즈나나 (jñāna, 지혜), 샤크티 (śakti, 힘), 발라 (bala, 능력), 아이슈바르야 (aiśvarya, 주권), 비르야 (vīrya, 활력), 테자스 (tejas, 광휘)를 기반으로 하여, 네 단계에 걸쳐 우주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신성한 형상들입니다.
가장 첫 번째이자 근원적인 뷰하는 ‘바수데바 (Vāsudeva)’입니다. 그는 여섯 가지의 신성한 속성을 모두 온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인 순수한 의식 그 자체입니다. 그는 다른 세 뷰하의 원인이자, 해탈한 영혼들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바수데바로부터 두 번째 뷰하인 ‘상카르샤나 (Saṃkarṣaṇa)’가 전개됩니다. 그는 지혜와 능력을 주된 속성으로 가지며, 우주의 파괴와 율법의 전파를 주관합니다. 상카르샤나로부터 세 번째 뷰하인 ‘프라디윰나 (Pradyumna)’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권과 활력을 주된 속성으로 하며, 우주의 창조와 다르마 (Dharma)의 확립을 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라디윰나로부터 네 번째 뷰하인 ‘아니룻다 (Aniruddha)’가 현현합니다. 그는 힘과 광휘를 주된 속성으로 하며, 우주의 유지와 보호를 책임집니다. 이 네 명의 뷰하, 즉 바수데바, 상카르샤나, 프라디윰나, 아니룻다는 단순한 네 명의 다른 신이 아니라, 단일한 최고신 비슈누가 우주적 활동을 위해 취하는 네 가지의 다른 역할이자 모습입니다. 그들은 모두 완전한 신성을 갖추고 있으며,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영적인 성향에 따라 이 네 가지 뷰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숭배함으로써, 점차 더 높은 차원의 신성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최고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카발라의 세피로트와 비슈누파의 뷰하는, 규정 불가능한 절대자가 어떻게 규정 가능한 속성들의 세계로 자신을 드러내는지를 설명하는 ‘발출론 (emanationism)’이라는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이론 모두, 절대자 자신이 직접적으로 변화하거나 유한해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으로부터 일련의 신성한 원리나 형상들을 전개시킴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역설적인 신비를 풀고자 했습니다. 또한 두 체계 모두, 이 발출된 신성한 원리들이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관계를 맺고 수행의 길잡이로 삼을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체임을 강조합니다. 세피로트의 길을 오르는 카발라 수행자와, 뷰하를 숭배하는 비슈누파 신자는 모두 이 신성한 지도를 통해 궁극의 근원을 향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체계 사이에는 그들이 탄생한 문화적 토양의 차이를 반영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세피로트의 체계는 열 개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세피라는 신성의 특정한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비, 심판, 지혜, 아름다움과 같은 추상적인 원리들이며, ‘생명의 나무’라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우주 전체와 인간 심리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는 포괄적인 지도가 됩니다. 반면에 뷰하의 체계는 주로 네 개의 ‘인격적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은 창조, 유지, 파괴와 같은 특정한 ‘우주적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들의 구조는 세피로트보다 단순하며, 형이상학적 지도라기보다는 숭배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측면이 더욱 강조됩니다. 또한, 세피로트가 발출되는 과정은 아인 소프의 ‘자기 수축’이라는 비극적이고 역설적인 사건을 통해 시작되는 반면, 뷰하의 전개는 최고신의 ‘자비로운 유희 (līlā)’라는 긍정적이고 은총이 가득한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하나가 신성 내부의 긴장과 균형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중생을 구원하려는 신의 넘치는 사랑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진 신의 무한한 심연과 우리가 사는 유한한 세계 사이에, 신성한 속성들의 빛나는 다리를 놓으려 했던 이 두 개의 위대한 시도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를 탐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9.3. 아담 카드몬과 비라트 푸루샤: 우주 인간
무한하고 속성 없는 절대적 심연이 어떻게 유한하고 질서 있는 우주로 자신을 드러내는가? 이 ‘하나’와 ‘여럿’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잇기 위해, 인류의 신비주의 전통은 종종 하나의 장엄하고도 심오한 상징을 그 중심에 세워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우주 인간 (Cosmic Man)’의 원형입니다. 이 우주 인간은 신성의 첫 번째 현현이자, 모든 창조물의 청사진이며,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세계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임을 보여주는 신성한 매개체입니다. 서양의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Kabbalah)는 이 원초적 존재를 ‘아담 카드몬 (Adam Kadmon)’이라고 불렀고, 동양의 인도 베다 (Veda) 전통은 그를 ‘푸루샤 (Puruṣa)’ 혹은 ‘비라트 푸루샤 (Virāṭ Puruṣa)’라고 노래했습니다. 아담 카드몬이 무한한 신성의 의지가 응축된 최초의 빛의 형상이라면, 비라트 푸루샤는 우주 전체가 그의 몸을 이루는 희생 제물로서의 거인입니다. 이 두 개의 위대한 상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우주 속의 미미한 먼지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구조와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쥔 존재임을 보여주는, 두 개의 위대한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의 창조 신화 속에서, 아담 카드몬의 등장은 장엄한 우주적 드라마의 서막을 엽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인 무한 신성 ‘아인 소프 (Ein Sof)’가 창조를 위해 스스로를 내면으로 수축 (침춤, Tzimtzum)하여 태초의 텅 빈 공간을 마련했을 때, 그 공허 속으로 무한한 빛의 한 줄기가 곧게 뻗어 들어옵니다. 바로 이 최초의 빛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형성한 첫 번째 존재가 바로 아담 카드몬, 즉 ‘원초적 인간 (Primordial Man)’입니다. 그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흙으로 빚어진 아담과는 전혀 다른, 순수한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는 아직 구체적인 물질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신성의 모든 잠재성을 품고 있는 완벽한 청사진으로서 존재합니다. 앞서 살펴본 열 개의 세피로트 (Sefirot), 즉 신성의 속성들은 바로 이 아담 카드몬의 신체 구조 안에 ‘생명의 나무 (Tree of Life)’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케테르 (왕관), 호크마 (지혜), 비나 (이해)라는 지고의 세피로트가, 그의 팔과 몸통, 그리고 다리에는 나머지 일곱 개의 세피로트가 각각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담 카드몬은 단순히 정적인 청사진이 아니라, 창조 과정의 능동적인 매개체입니다. 카발라의 대가인 이삭 루리아 (Isaac Luria, 1534-1572)의 가르침에 따르면, 창조는 아담 카드몬의 신체로부터 신성한 빛이 방출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의 눈과 귀, 코와 입과 같은 구멍들로부터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와, 세피로트라는 ‘그릇들 (vessels)’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상위의 세 그릇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개의 그릇들은 이 무한한 빛의 강렬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그릇들의 깨어짐 (Shevirat ha-Kelim)’이라고 불리는 우주적 재앙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성한 빛의 불꽃들은 파편이 되어 껍질을 의미하는 ‘클리포트 (Klippot)’라는 물질과 악의 영역 속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물질세계는 바로 이 ‘깨어짐’의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카발라에서 인간의 역할은 지극히 중요해집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아담 카드몬의 축소판으로서, 율법 (토라)의 계명을 지키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이 물질세계 속에 흩어져 갇혀 있는 신성의 불꽃들을 해방시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세상의 수리 (Tikkun Olam)’라는 위대한 과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담 카드몬은 창조의 원형이자, 타락의 원인이며, 동시에 회복되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우주적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고 있는 웅장한 상징입니다.
한편, 인도의 가장 오래된 성전인 리그베다의 찬가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우주 인간, 즉 푸루샤를 만납니다. 유명한 ‘푸루샤 숙타 (Puruṣa Sūkta)’는 이 세계의 창조를 하나의 거대한 제사 의식으로 묘사합니다. 태초에 존재했던 것은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진 거인 푸루샤뿐이었습니다. 그는 온 땅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으며, 모든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는 불멸의 존재였습니다. 신들은 바로 이 푸루샤를 희생 제물로 삼아 창조라는 위대한 제사를 거행합니다. 그들이 푸루샤의 몸을 나누었을 때, 그의 각 신체 부위는 우주의 각기 다른 부분으로 변모했습니다. 그의 마음 (manas)에서는 달이 생겨났고, 그의 눈 (cakṣus)에서는 태양이, 그의 입 (mukha)에서는 불의 신 인드라와 아그니가, 그리고 그의 숨결 (prāṇa)에서는 바람의 신 바유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배꼽에서는 하늘의 공간이, 머리에서는 하늘이, 발에서는 땅이, 그리고 귀에서는 네 방향이 생겨났습니다.
이 우주적 해체를 통해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질서 또한 창조되었습니다. 푸루샤의 입은 사제 계급인 브라흐만 (Brahmin)이 되었고, 그의 두 팔은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Kṣatriya)가, 넓적다리는 상인과 농민 계급인 바이샤 (Vaiśya)가, 그리고 두 발은 노동자 계급인 수드라 (Śūdra)가 되었습니다. 이후의 힌두 사상에서 이 푸루샤는 종종 ‘비라트 푸루샤’, 즉 ‘광대하게 빛나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창조신 브라흐마 (Brahmā)나 유지신 비슈누 (Viṣṇu), 혹은 우주 그 자체와 동일시됩니다. 푸루샤 신화의 핵심은, 이 우주가 신의 몸으로부터 직접 만들어진 신성한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세계는 신과 분리된 피조물이 아니라, 신의 자기희생을 통해 변모된 신의 몸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부분, 즉 태양과 달, 강과 산, 그리고 인간 사회의 각 계층들은 모두 신성한 기원을 가지며,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체 (肢體)들입니다. 소우주인 인간의 몸과 대우주인 이 세계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응 관계가 성립하며, 인간은 이 우주적 몸의 일부로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아담 카드몬과 비라트 푸루샤는 모두 무한한 신성과 유한한 세계 사이를 잇는 원초적 인간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깊은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두 상징 모두, 우주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우주-인간 동형론 (anthropocosmism)’을 통해, 인간이 결코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의미 있는 존재임을 확증합니다. 둘 다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신비로운 연결을 보여주며, 인간의 내면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두 우주 인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서사의 구조와 철학적 함의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창조의 ‘과정’이 다릅니다. 아담 카드몬은 신성한 빛의 ‘발출 (emanation)’을 통해 창조의 매개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깨어짐’이라는 우주적 재앙이 발생합니다. 이는 창조의 과정에 본질적인 결함과 타락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반면에 비라트 푸루샤는 ‘자기희생 (self-sacrifice)’과 ‘해체 (dismemberment)’를 통해 우주 그 자체가 됩니다. 이 과정은 비극적인 타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충만한 전체가 자비롭게 자신을 나누어 다양한 모든 것이 되게 하는 신성한 변형입니다.
둘째, 창조된 세계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아담 카드몬의 신화에서 비롯된 물질세계는 신성한 빛의 불꽃이 갇혀 있는 어두운 ‘감옥’이며, 수리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여기에는 영과 물질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비라트 푸루샤의 몸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 자체가 ‘신성한 현현’입니다. 물질은 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스스로를 드러낸 모습입니다. 따라서 세계는 부정되거나 탈출해야 할 감옥이 아니라,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할 신성한 무대입니다.
셋째,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다릅니다. 카발라 수행자의 목표는 ‘세상의 수리 (Tikkun Olam)’, 즉 흩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모아 원초적 인간 아담 카드몬의 완벽함을 회복시키는 우주적 복원 작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협력자로서 창조의 드라마를 완성할 책임을 가집니다. 반면에 힌두 사상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 (Mokṣa)’, 즉 이 현상 세계의 모든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 (브라흐만)와 내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현상 자체를 ‘초월’하는 인식의 혁명입니다. 결국 아담 카드몬이 ‘타락과 회복’이라는 역사적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비라트 푸루샤는 ‘존재의 영원한 변형’이라는 존재론적 서사시의 주인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위대한 상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형상 속에 우주 전체의 비밀이 담겨 있으며,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신을 아는 길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2-19.4. 쿤달리니와 셰키나: 내면의 여신
신성의 무한한 빛이 어떻게 유한한 인간의 내면과 만나는가? 만약 인간이 거대한 우주적 질서의 축소판이라면, 그 질서의 동력, 즉 신성한 생명력은 우리 존재의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 이 가장 내밀하고도 신비로운 질문 앞에서, 동과 서의 지혜는 놀랍도록 닮아 있는 하나의 상징을 통해 그 대답을 속삭여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잠들어 있거나 추방되어 있는 ‘여신 (Goddess)’의 원형입니다. 인도의 탄트라 요가 (Tantra Yoga) 전통은 인간의 척추 가장 낮은 곳에 똬리를 튼 뱀의 형상으로 잠들어 있는 우주적 에너지, 즉 ‘쿤달리니 (Kuṇḍalinī)’를 일깨우는 것을 영적 여정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Kabbalah)는 이 물질세계 속에 현존하지만 본래의 짝으로부터 분리되어 유배된 신성의 여성적 측면, 즉 ‘셰키나 (Shekhinah)’의 귀환을 갈망했습니다. 잠자는 뱀과 추방된 여왕, 이 두 개의 강력한 이미지는 모두 구원이란 남성적 원리로만 대표되는 초월적 신을 향한 수직적 상승 운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여성적 신성의 힘을 깨닫고 그것과 다시 결합하는 내면적이고도 통합적인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이 두 내면의 여신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분리와 합일의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인도의 탄트라 사상에서, 이 우주 전체는 절대적 의식인 시바 (Śiva)와 그의 역동적인 힘이자 에너지인 샤크티 (Śakti)의 영원한 사랑의 유희 (līlā)입니다. 시바가 변화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의 바탕이라면, 샤크티는 그 바탕 위에서 스스로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무수한 이름과 형상으로 드러내는 창조의 힘 그 자체입니다. 이 거대한 우주적 원리가 소우주인 인간의 몸 안에도 그대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시바는 순수한 의식으로서 정수리에 있는 최상의 에너지 중심점, 즉 사하스라라 차크라 (Sahasrāra cakra)에 머물러 있습니다. 반면에, 우주를 창조한 그의 연인 샤크티는 그 모든 힘을 응축하여, 척추 가장 아래에 있는 뿌리 차크라, 즉 물라다라 차크라 (Mūlādhāra cakra)에 세 바퀴 반을 감은 뱀의 모습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쿤달리니입니다. ‘쿤달리니’는 ‘똬리를 튼 것 (coiled one)’을 의미하며, 개별 인간 속에 잠재된 무한한 우주적 에너지, 즉 내면의 여신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유한하고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의 시바와 샤크티가 이처럼 분리되어, 신성한 힘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탄트라 요가 수행의 모든 과정은 이 잠자는 여신 쿤달리니를 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아사나 (āsana, 자세), 프라나야마 (prāṇāyāma, 호흡 조절), 만트라 (mantra, 진언), 그리고 명상과 같은 다양한 기법을 통해 물라다라 차크라에 강력한 영적인 열을 발생시킵니다. 이 열기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쿤달리니 뱀은, 척추의 중심을 따라 나 있는 미세한 에너지 통로인 수슘나 나디 (suṣumnā nāḍī)를 따라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상승하면서 각각의 차크라, 즉 존재의 각기 다른 의식 차원을 차례로 꿰뚫고 지나갑니다. 그녀가 차크라를 통과할 때마다, 그 차크라에 묶여 있던 카르마의 매듭들이 풀리고, 수행자는 그 차원에 해당하는 초월적인 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상승이 아니라, 물질에 속박된 의식이 점차 순수한 영성의 차원으로 정화되고 변용되는, 장엄한 내면의 연금술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쿤달리니 샤크티가 최상의 차크라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합일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연인 시바와 재결합하는 순간, 수행자는 완전한 깨달음, 즉 사마디 (samādhi)를 성취합니다. 이 합일의 순간, 더 이상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에너지와 의식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바로 시바와 샤크티의 영원한 사랑의 춤 그 자체이며, 무한한 지복 (ānanda)의 바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쿤달리니의 여정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여신을 깨워, 그녀를 왕좌에 앉은 내면의 신과 재회시키는, 한 인간의 몸 안에서 펼쳐지는 우주적인 로맨스입니다.
카발라의 세계 속에서, 내면의 여신은 셰키나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셰키나는 히브리어로 ‘거주하다 (to dwell)’는 의미를 가지며, 신의 ‘현존 (presence)’, 특히 이 물질세계 속에 거주하는 신의 내재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을 의미합니다. 카발라의 ‘생명의 나무’에서, 셰키나는 열 개의 세피로트 중 가장 마지막인 ‘말쿠트 (Malkuth)’, 즉 ‘왕국’과 동일시됩니다. 말쿠트는 위로부터 흘러내려 온 모든 신성한 빛과 힘이 최종적으로 응축되어 이 물질세계를 형성하는 지점입니다. 따라서 셰키나는 천상의 여왕이자, 신성한 어머니이며, 이스라엘 공동체와 모든 개별 인간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문입니다.
그러나 카발라의 신화 속에서, 셰키나는 지금 깊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원초적 인간 아담 카드몬의 몸에서 빛이 방출될 때, 그 그릇들이 깨어지는 우주적 재앙 (‘그릇들의 깨어짐’)으로 인해, 셰키나는 그녀의 남성적 짝인 여섯 번째 세피라 ‘티페레트 (Tiferet)’, 즉 ‘아름다움’ 혹은 ‘왕’으로부터 분리되어, 깨어진 껍질들의 파편과 함께 이 어두운 물질세계로 추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셰키나의 유배 (Galut ha-Shekhinah)’입니다. 이 우주적인 이별로 인해, 신성 자체는 온전함을 잃어버렸고, 이 세계는 신의 빛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결핍과 부조리, 그리고 신의 부재감은 바로 이 추방된 여신의 신음소리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통곡하고, 그녀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슬퍼합니다.
따라서 카발라 수행자의 삶의 목표는 바로 이 추방된 여신을 위로하고, 그녀를 다시 그녀의 짝과 재결합시켜, 깨어진 우주를 회복하는 ‘세상의 수리 (Tikkun Olam)’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토라의 계명을 지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든 신성한 행위는, 이 낮은 물질세계에 흩어져 있는 셰키나의 빛을 끌어올려 그녀에게 힘을 더해주는 신비로운 힘을 가집니다. 특히 안식일 저녁,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신성한 의식으로, 천상에서 벌어지는 티페레트와 셰키나의 거룩한 결합 (Hieros Gamos)을 상징하고 촉진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카발라 수행자는 자신의 모든 삶을, 이 추방된 여왕을 그녀의 왕좌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헌신적인 기사의 삶으로 여깁니다. 셰키나와 티페레트가 다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악은 사라지고, 신성의 빛이 온전히 드러나는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쿤달리니와 셰키나는 모두 신성의 여성적 원리가 남성적 원리와 분리되어 있으며, 이 분리의 상태가 바로 인간과 세계의 고통의 근원이라는 깊은 통찰을 공유합니다. 둘 다 구원이란 이 분리된 두 원리를 다시 합일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수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쿤달리니는 ‘잠들어’ 있고, 셰키나는 ‘유배’되어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본래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인간의 영적 실천을 통해 깨어나고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두 여신 모두 ‘상승’의 이미지를 통해 그 회복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쿤달리니는 척추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고, 셰키나는 가장 낮은 세피라 말쿠트에서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내면의 여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결은 다릅니다. 쿤달리니의 드라마는 전적으로 한 개인의 ‘내면 우주 (inner cosmos)’ 안에서 펼쳐지는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과정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해탈 (Mokṣa)을 위한 길이며, 그 목표는 ‘나’라는 개별적 의식이 우주적 의식과의 합일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비이원론적 깨달음입니다. 반면에, 셰키나의 드라마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온 세상의 운명이 걸린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과정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길이며, 그 목표는 인격적인 신의 내적인 온전함을 회복시키고 창조 세계의 조화를 되찾는 관계적이고 유신론적인 구원입니다. 쿤달리니의 요기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뱀을 깨우는 동안, 카발라의 신비가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통해 추방된 여왕의 귀환을 돕습니다. 하나가 ‘자기 해방’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주적 책임’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과 서의 가장 깊은 지혜가 모두 잃어버린 ‘여신’을 되찾는 것을 구원의 핵심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인류의 영성이 진정한 온전함이란 남성성과 여성성, 초월과 내재, 의식과 힘의 위대한 통합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