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모든 위대한 문명은 그 새벽녘에 하나의 공통된 신화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혜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태초에 신 혹은 신적인 존재로부터 직접 내려온 신성한 선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영원의 가능성을 엿보며, 밤하늘의 별들의 운행 속에서 우주의 법칙을 읽어내려 했던 인류의 첫 번째 질문에, 누군가는 대답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최초의 스승, 신과 인간 사이의 위대한 중재자이자 모든 지식의 원천인 이 신화적 원형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과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나일 강가와 그리스의 지중해의 햇살 속에서, 서양의 비밀스러운 지혜는 ‘세 번 위대한 헤르메스 (Hermes Trismegistus)’라는 신비로운 인물의 이름 아래 집대성되었습니다. 한편, 인도의 광활한 평원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자 모든 성스러운 지식의 원천인 ‘브라흐마 (Brahmā)’가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신들의 사자 (使者)와 우주의 창조주, 이 두 개의 장엄한 상징은 그 기원과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인간의 지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놀랍도록 닮아 있는 대답, 즉 지혜는 ‘계시 (revelation)’라는 통찰을 공유합니다.
서양 비의 (祕儀) 전통의 심장부에 서 있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여러 신화가 하나로 합쳐져 탄생한 지혜의 신 그 자체입니다. 그의 이름 속에는 두 개의 위대한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전령이자, 상업과 목축,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을 지하 세계로 인도하는 ‘프시코폼포스 (psychopomp)’로서, 경계와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교활하고도 지혜로운 신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의 신은 이집트의 위대한 신 ‘토트 (Thoth)’와 동일시되었습니다. 따오기의 머리를 한 토트는 지식과 문자, 마법과 지혜의 신이며, 신들의 서기 (書記)로서 우주의 모든 기록을 관리하고, 모든 제사와 의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두 신의 속성이 하나로 합쳐져, ‘세 번 위대한’이라는 뜻의 ‘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 헤르메스는, 연금술과 점성술, 신성 마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신비로운 지식, 즉 ‘헤르메스학 (Hermetica)’의 창시자로 숭배받게 되었습니다.
헤르메스가 전하는 지혜의 핵심은, 그가 직접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일련의 문헌들, 즉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Corpus Hermeticum)’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문헌들은 헤르메스가 그의 제자인 아스클레피오스 (Asclepius)나 타트 (Tat)에게, 혹은 신성한 마음 그 자체인 ‘포이만드레스 (Poimandres)’가 헤르메스에게 직접 들려주는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인간의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선택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번개와도 같은 직관적인 ‘앎 (Gnosis, 그노시스)’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계시를 통해, 지고의 신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비밀을 풀어놓습니다. 그는 신이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말씀 (Logos)’을 통해 이 세계를 창조했는지,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본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에 떨어져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내면의 신성을 깨달아 영적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헤르메스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아니라, 제자의 영혼을 일깨워 직접 신을 체험하게 만드는 영적인 안내자입니다. 그의 지혜는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을 변형시켜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구체적인 힘을 가진 ‘실천적 지혜’입니다.
인도의 광대한 신화 체계 속에서, 지혜의 시원은 창조의 행위 그 자체와 연결됩니다.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 오직 최고신 비슈누 (Viṣṇu)만이 우주적 바다 위에서 잠들어 있었을 때, 그의 배꼽에서 하나의 황금 연꽃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연꽃 속에서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창조신 브라흐마가 태어납니다. 브라흐마는 이 세계의 물질적인 재료와 모든 생명체들을 만들어내는 우주의 건축가이자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창조물은 바로 ‘지식’, 즉 ‘베다 (Veda)’입니다. 힌두 전통에서 베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책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영원하고 무오 (無誤)한 진리의 소리, 즉 ‘슈루티 (śruti)’, ‘들려진 것’입니다. 브라흐마는 깊은 명상 속에서 이 우주적 진리의 소리를 최초로 ‘듣고’, 그것을 자신의 네 개의 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낸 첫 번째 ‘리시 (ṛṣi)’, 즉 위대한 현자입니다. 따라서 브라흐마는 지식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영원한 지식의 ‘전달자’이자 ‘통로’입니다.
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 (리그베다), 제사 의례의 절차 (야주르베다), 노래의 선율 (사마베다), 그리고 주술적인 주문 (아타르바베다)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지식의 총체입니다. 이 성스러운 지식은 우주적 질서인 ‘리타 (Ṛta)’를 유지하고, 인간과 신들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라흐마는 이 모든 지혜의 원천으로서, 그의 네 개의 얼굴은 네 권의 베다를 상징합니다. 그는 지혜의 여신 사라스바티 (Sarasvatī)를 배우자로 삼고 있으며, 그의 손에는 항상 베다 경전이 들려 있습니다. 헤르메스의 지혜가 선택된 소수에게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비의적 지혜’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면, 브라흐마가 전한 베다의 지혜는 힌두 사회 전체의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질서 (다르마, Dharma)의 근간을 이루는 ‘보편적 지혜’의 성격을 가집니다. 물론 베다의 가장 깊은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는 소수의 구도자들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었지만, 베다 자체는 브라흐만 사제 계급에 의해 대대로 전승되며 힌두 문명 전체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처럼 헤르메스와 브라흐마는 각기 다른 문화의 지평선 위에서 떠오른 두 개의 다른 태양이지만, 그들이 비추는 빛의 본질에는 깊은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첫째, 두 존재 모두 궁극적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말할 수 없는 실재’와 ‘말할 수 있는 세계’ 사이를 잇는 첫 번째 중재자이자 계시자입니다. 헤르메스는 신성한 마음 ‘누스 (Nous)’의 말씀을 전하고, 브라흐마는 영원한 진리 ‘베다’의 소리를 전합니다. 둘째, 그들이 전하는 지혜는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 ‘신성한 계시’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진정한 앎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며,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지혜는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 ‘구원’하는 힘을 가진 실천적인 것입니다. 헤르메스의 그노시스와 브라흐마의 즈나나 (jñāna)는 모두 인간을 무지의 어둠에서 깨어나게 하여 신성한 본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 두 지혜의 시원 사이에는 그들이 속한 문명의 기질을 반영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헤르메스는 보다 역동적이고 개인적인 안내자입니다. 그는 신과 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비밀을 탐구하고, 제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신비가이자 마법사입니다. 그의 지혜는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대안적’이고 ‘비밀스러운’ 지식의 성격을 가집니다. 반면에 브라흐마는 보다 정적이고 우주적인 창조주입니다. 그는 제사를 통해 우주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근간이 되는 보편적인 율법을 선포하는 제사장적 왕입니다. 그의 지혜는 하나의 거대한 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지식의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가 ‘개인적 깨달음’의 길을 연다면, 다른 하나는 ‘우주적, 사회적 조화’의 길을 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과 서의 정신이 모두 지혜의 기원을 인간을 넘어서는 신성한 차원에 두었다는 사실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진정한 앎이란 단순히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실재의 목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것임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입니다.
2-20.2. 소우주와 대우주: 탄트라 몸-우주론
신성한 지혜가 헤르메스나 브라흐마와 같은 태초의 스승으로부터 흘러나왔다면, 그 지혜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동서양의 비밀스러운 지혜 전통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원리를 그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우주 (microcosm)’인 인간과 ‘대우주 (macrocosm)’인 세계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구조와 원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통찰입니다. 서양의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는 이 심오한 진리를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라는 간결하고도 유명한 경구 속에 담아냈습니다. 한편, 인도의 탄트라 (Tantra) 전통은 인간의 몸이야말로 우주 전체의 모든 신들과 힘들이 거주하는 신성한 지도라고 보는, 정교하고도 실천적인 ‘몸-우주론 (body-cosmology)’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사상 체계는, 우주의 신비를 풀기 위해 저 멀리 있는 별들을 관찰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야말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가장 완벽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헤르메스주의 지혜의 초석을 이루는 ‘에메랄드 타블렛 (Emerald Tablet)’은 바로 이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응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참되고, 거짓 없으며, 확실하고 가장 진실한 것은,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고,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인 모든 것 (the One)’의 기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가 프랙탈 (fractal) 구조처럼, 가장 작은 부분 속에 전체의 패턴이 온전하게 담겨 있다는 존재론적 원리에 대한 명시입니다. 밤하늘 행성들의 운행 질서는 인간의 장기들의 활동과 조응하고, 계절의 순환은 인간의 감정과 기질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원소들은 인간의 육체와 성격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헤르메스주의자에게 점성술은 미신적인 점괘가 아니라, 대우주의 천체들이 소우주인 인간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읽어내는 신성한 과학이었습니다. 또한 연금술은 단순히 납을 금으로 바꾸는 물질적 기술이 아니라, 소우주인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불순한 요소를 정화하여 신성한 황금, 즉 깨달음의 상태로 변형시키는 정신적 과정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우주 속에 우연히 내던져진 미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의 정점으로서, 대우주의 모든 힘과 지혜를 자신의 존재 안에 품고 있는 ‘작은 우주 (minor mundus)’입니다. 인간의 마음 (Nous)은 우주적 마음의 불꽃이며, 인간의 이성 (Logos)은 우주를 관통하는 신성한 질서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앎이란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우주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경구는 헤르메스주의자에게 ‘너 자신을 앎으로써 우주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구원의 여정은 나의 작은 자아를 넘어 대우주와 합일하는 것이며, 그 합일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대우주의 지도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를 때 가능해집니다. 이처럼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원리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간극을 허물고, 모든 것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과 지성으로 묶는 위대한 통일성의 비전입니다.
인도의 탄트라 전통 또한 이 소우주와 대우주의 합일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하지만, 그 방법론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으로 깊이 내려갑니다. 탄트라 사상가들에게, 헤르메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은 결코 영혼을 가두는 죄악의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 전체의 축소판이자,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신성하고도 강력한 도구 (yantra)였습니다. 탄트라는 이 몸 안에 대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힘들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히말라야 산맥과 갠지스 강, 태양과 달, 그리고 힌두 판테온의 모든 위대한 신들이 바로 이 육체라는 작은 우주 안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교한 몸-우주론의 핵심에는 ‘미세신 (subtle body)’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거친 물질적 육체 이면에, 프라나 (prāṇa)라고 불리는 미세한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미세신의 중심에는 척추를 따라 수직으로 배열된 일곱 개의 주요한 에너지 중심점, 즉 ‘차크라 (cakra)’가 있습니다. ‘바퀴’를 의미하는 차크라는 각각 우주적 존재의 서로 다른 의식 차원과 상응합니다. 가장 아래에 있는 물라다라 차크라 (Mūlādhāra cakra)는 땅의 요소와 물질적 생존의 차원을, 가장 위에 있는 사하스라라 차크라 (Sahasrāra cakra)는 순수한 의식과 절대적 실재와의 합일의 차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수만 갈래의 미세한 에너지 통로인 ‘나디 (nāḍī)’들이 이 차크라들을 중심으로 온몸에 퍼져 있으며, 프라나라는 우주적 생명력을 몸 구석구석으로 전달합니다. 탄트라 요가 수행의 목표는 바로 이 내면 우주의 지도를 명확히 인식하고, 호흡 조절 (prāṇāyāma)과 명상, 그리고 특정 자세 (āsana)를 통해 이 미세 에너지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특히 척추 가장 밑에 잠들어 있는 우주적 여신의 힘, 즉 쿤달리니 (Kuṇḍalinī)를 각성시켜 이 차크라들을 따라 위로 상승시키는 것은, 소우주인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대우주의 창조와 합일의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수행자는 자신의 몸이 단순한 살과 뼈의 집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임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헤르메스주의와 탄트라는 모두 소우주와 대우주가 하나라는 심오한 통찰을 공유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곧 우주에 대한 앎이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두 전통 모두,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물질세계 너머에 보이지 않는 힘과 구조가 존재하며, 인간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헤르메스주의의 점성술이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운명을 읽어내려 했다면, 탄트라의 수행자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태양과 달의 에너지 (핑갈라와 이다 나디)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이 이 원리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헤르메스주의는 보다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에서 이 상응 관계를 탐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주된 도구는 점성술과 연금술, 그리고 신성 마법과 같은 ‘지적인’ 기술들이며,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에 탄트라는 훨씬 더 ‘체험적’이고 ‘에너지적’인 차원에서 이 관계를 탐구합니다. 그 주된 도구는 자신의 육체와 호흡이며, 몸 안에 있는 우주적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각성시키고 변형시키는 구체적인 신체적, 심리적 기술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가 ‘세계의 구조를 앎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다른 하나는 ‘자신의 에너지를 앎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되려 합니다. 헤르메스주의자가 하늘의 별자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는 동안, 탄트라 요기는 자신의 척추라는 하늘 기둥 속에서 신들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서양의 경구와 ‘이 몸 안에 있는 것이 곧 우주 안에 있는 것이다 (yat piṇḍe tat brahmāṇḍe)’라는 동양의 선언은, 인류의 정신이 얼마나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의 통일성을 갈망하고 탐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두 개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우주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이것이 바로 다음 여정의 질문이 될 것입니다.
2-20.3. 정신적 연금술: 요가를 통한 마음 변형
만약 인간이 우주 전체의 신비를 담고 있는 소우주라면, 그리고 그 내면에 신성한 질서의 지도가 숨겨져 있다면, 인간의 궁극적인 과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헤르메스주의와 인도의 요가 전통은 모두, 평범하고 불완전한 상태의 인간을 완전하고 신성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기술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원료로 보았습니다. 이 원료를 정제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며, 마침내 가장 고귀한 본질을 드러내게 하는 이 위대한 작업, 즉 ‘자기 변형의 기술’은 서양의 비밀스러운 전통 속에서 ‘연금술 (Alchemy)’이라는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고, 인도의 심오한 지혜 속에서 ‘요가 (Yoga)’라는 체계적인 수행의 길로 발전했습니다. 납을 금으로 바꾸려는 연금술사의 신비로운 실험과,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잠재우려는 요기의 고요한 명상은,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심장부에서는 동일한 목표, 즉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변혁이라는 ‘위대한 작업 (Magnum Opus)’을 향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연금술은 흔히 값싼 금속인 납을 귀한 금으로 바꾸려는 물질적인 욕망의 산물로 오해받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연금술사들에게, 외부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물질적 작업은 그들의 내면, 즉 영혼의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연금술 (Spiritual Alchemy)’의 외적인 표현이자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납’은 바로 번뇌와 욕망, 그리고 무지에 의해 더럽혀지고 파편화된 평범한 인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금’은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자신의 신성한 본질과 완전히 합일된, 깨달음을 얻은 완벽한 인간의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연금술 실험실의 밀폐된 증류기 (alembic)는 바로 이 위대한 변형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몸과 마음 그 자체를 상징했습니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끊고 자신의 내면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이 신성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적 연금술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 혹은 네 단계의 상징적인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니그레도 (Nigredo)’, 즉 ‘흑화 (黑化)’입니다. 이것은 원료, 즉 ‘프리마 마테리아 (Prima Materia)’를 불에 태워 부패시키고 분해하여, 검고 균일한 혼돈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입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어두운 측면, 즉 그림자 (shadow)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단계입니다. 자신의 오만과 이기심, 억압된 욕망과 두려움을 남김없이 인식하고, 기존의 낡은 자아 구조가 완전히 해체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과 해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새로운 탄생도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알베도 (Albedo)’, 즉 ‘백화 (白化)’입니다. 검게 타버린 재를 깨끗하게 씻어내어 순수한 백색의 상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흑화 단계에서 드러난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정화하고, 마음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청정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치 달빛처럼, 수행자의 의식은 더 이상 욕망의 불꽃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순수한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치트리니타스 (Citrinitas)’, 즉 ‘황화 (黃化)’로, 백색의 물질이 태양의 황금빛을 띠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종종 마지막 단계에 통합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루베도 (Rubedo)’, 즉 ‘적화 (赤化)’입니다. 이것은 백색의 여왕 (달)과 적색의 왕 (태양)의 ‘화학적 결혼 (Chemical Wedding)’을 통해, 마침내 모든 대립이 사라지고 완전한 합일이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불멸의 영약이자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촉매제인 ‘철학자의 돌 (Philosopher's Stone)’이 탄생합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수행자의 인간적인 의식이 신성한 의식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분리된 자아가 아닌 신적인 인간, 즉 ‘아담 카드몬 (Adam Kadmon)’의 상태를 회복하는 궁극의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연금술은 단순한 화학 실험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 정화와 합일이라는 우주적 드라마를 자신의 내면에서 실현하는 장엄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한편, 인도의 요가 전통은 이 마음 변형의 과정을 훨씬 더 체계적이고 심리학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요가’라는 단어 자체가 ‘결합’, ‘통합’을 의미하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개별적 자아의식을 우주적 의식과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요가의 대가 파탄잘리 (Patañjali)는 그의 ‘요가 수트라 (Yoga Sūtra)’에서 요가를 ‘마음 작용의 소멸 (citta-vṛtti-nirodha)’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여기서 연금술의 ‘납’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끊임없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감각적 대상에 따라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 작용 (citta-vṛtti)’ 그 자체입니다. 이 마음의 혼란은 다섯 가지의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 즉 ‘클레샤 (kleśa)’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참된 본질을 모르는 ‘무지 (avidyā)’, 육체와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는 ‘자아의식 (asmitā)’, 쾌락에 대한 ‘탐착 (rāga)’, 고통에 대한 ‘혐오 (dveṣa)’,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abhiniveśa)’입니다.
이 불순물로 가득 찬 마음을 정화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파탄잘리는 여덟 단계의 점진적인 수행 체계, 즉 ‘아쉬탕가 요가 (Aṣṭāṅga Yoga)’를 제시합니다. 처음 두 단계인 ‘야마 (Yama)’와 ‘니야마 (Niyama)’는 비폭력, 진실, 금욕 등 사회적, 개인적 윤리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연금술의 ‘정화’ 작업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 ‘아사나 (Āsana)’, 즉 ‘자세’는 육체를 안정시키고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며, 연금술사가 자신의 실험 용기를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 번째 ‘프라나야마 (Prāṇāyāma)’, 즉 ‘호흡 조절’은 생명 에너지인 프라나의 흐름을 통제하여 마음을 더욱 미세한 차원으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다섯 번째 ‘프라티아하라 (Pratyāhāra)’, 즉 ‘감각 제어’는 밖으로 향하던 감각들을 내면으로 거두어들여, 연금술의 용기를 완전히 밀폐시키는 단계입니다.
이 외부적인 준비가 끝나면, 비로소 진정한 내면의 연금술, 즉 ‘삼야마 (saṃyama)’라고 불리는 마지막 세 단계가 시작됩니다. 여섯 번째 ‘다라나 (Dhāraṇā)’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이며, 일곱 번째 ‘디아나 (Dhyāna)’는 그 집중이 끊어짐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명상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사마디 (Samādhi)’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지고, 명상하는 자와 명상의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삼매’의 경지입니다. 이것은 연금술의 ‘루베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여왕의 합일과 정확하게 조응합니다. 이 사마디의 상태가 더욱 깊어져, 마음의 모든 잠재적 인상마저 사라지고,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 (Puruṣa)’가 물질세계인 ‘프라크리티 (Prakṛti)’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자신의 본래적인 빛을 회복할 때, 요가는 최종 목표인 ‘카이발야 (kaivalya)’, 즉 ‘궁극적 해방’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요가가 만들어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돌’입니다.
이처럼 정신적 연금술과 요가는 서로 다른 상징과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인간 변형의 과정에는 놀라운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둘 다 평범한 인간의 의식 상태를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원료’로 간주합니다. 둘 다 윤리적, 신체적, 정신적 정화의 과정을 통해 이 원료의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둘 다 집중과 명상이라는 내면의 불을 통해, 마침내 모든 이원적 대립이 사라진 통합과 합일의 경지, 즉 깨달음이라는 ‘황금’을 만들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습니다. 연금술의 ‘함께 녹이고 다시 응고시켜라 (Solve et Coagula)’는 원리는, 요가의 ‘마음 작용을 소멸시키고 참된 자아를 확립하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의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연금술은 종종 우주적 힘과의 조응을 통한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변형’을 강조하는 반면, 요가는 개인의 의지적인 노력을 통한 ‘심리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더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과 서의 지혜가 모두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보고, 그 완성을 위한 구체적인 기술과 지도를 제시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하고 완성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2-20.4. ‘하나인 모든 것’과 브라흐만
모든 지혜의 길이 끝나는 곳, 모든 철학적 탐구가 침묵하는 곳, 그리고 모든 분별과 대립이 하나로 녹아내리는 그 궁극의 지평을 인류는 어떻게 이름 붙여 왔는가? 신비주의 전통의 역사는 이 ‘말할 수 없는 하나’를 가리키기 위한 수많은 손가락들의 역사와도 같습니다. 지혜의 시원인 헤르메스로부터 시작하여, 소우주와 대우주의 신비로운 상응 관계를 배우고, 정신적 연금술을 통해 내면을 변형시키는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헤르메스주의자는 마침내 모든 것의 근원이자 실체인 ‘하나인 모든 것 (The All, the One)’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편, 인도의 현자들은 베다의 찬가 속에서 시작하여 우파니샤드의 깊은 사유를 통해, 이 현상 세계의 모든 다양성 너머에 존재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실재, 즉 ‘브라흐만 (Brahman)’을 발견했습니다. 서양 비의 전통의 정점에 서 있는 ‘하나’와, 동양 형이상학의 심장부를 이루는 ‘브라흐만’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있어서는 마치 하나의 산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두 개의 풍경처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위대한 이름은,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가 바로 ‘궁극적 통일성’에 있음을 보여주는 인류 정신의 가장 심오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헤르메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 즉 일곱 가지 원리 중 첫 번째인 ‘심성 (心性)의 원리 (The Principle of Mentalism)’는 이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하나인 모든 것은 마음이며, 우주는 정신적이다 (The All is Mind; The Universe is Mental).” 여기서 ‘하나인 모든 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인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인 모든 것’ 안에 있으며, ‘하나인 모든 것’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는 이 궁극적 실재의 내적인 본질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의 마음으로 무한한 실재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마치 캔버스 위에 캔버스 자신을 그리려는 시도처럼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인 모든 것’에게 어떤 이름이나 속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한한 전체가 아니라 유한한 부분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고, 알려질 수 없으며, 영원하고, 무한하며, 살아있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알려지지 않는 실재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헤르메스주의는 그 관계가 바로 ‘정신적 창조’의 관계라고 설명합니다. 우주는 ‘하나인 모든 것’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거대한 명상 혹은 생각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물질, 에너지, 그리고 생명 현상들은 모두 ‘하나인 모든 것’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관념의 투사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단순한 환영이나 꿈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가 그의 손을 통해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구현되듯이, 우주는 ‘하나인 모든 것’의 정신적 실재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살아있는 창조물입니다. 따라서 우주는 ‘하나인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하나인 모든 것’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주는 ‘하나인 모든 것’ 안에 있으며, ‘하나인 모든 것’은 우주를 초월해 있습니다. 이 ‘정신적 우주’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헤르메스주의의 모든 지혜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소우주인 인간의 마음 또한 ‘하나인 모든 것’의 마음의 불꽃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앎으로써 우주 전체의 법칙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법칙을 활용하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신적인 잠재력을 지니게 됩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 또한 이 궁극적 통일성의 원리를 그 사상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수많은 신들과 다채로운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유일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고대의 현자들은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브라흐만은 ‘팽창하다’, ‘성장하다’는 의미를 가진 어근 ‘브리 (bṛh)’에서 유래했으며, 모든 것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모든 것으로 확장해 나가는 절대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실재를 의미합니다. 리그베다의 찬가에서부터 이미 “진리는 하나이지만,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Ekam sat viprā bahudhā vadanti)”는 통찰이 나타났듯이, 힌두 사상의 핵심은 현상적 다원성 이면에 있는 존재론적 일원성 (monism)을 꿰뚫어 보는 데 있습니다. 우파니샤드에서 브라흐만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마지막에는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그릇들의 본질이 흙이듯이, 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장신구들의 본질이 금이듯이,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이름과 형상 (nāma-rūpa)의 궁극적인 본질은 바로 브라흐만입니다.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은 이 브라흐만의 본질을 더욱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브라흐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관점에서, 브라흐만은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인격신이자 이 세계의 창조주인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 (Saguna Brahman)’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브라흐만은 인간의 모든 개념과 속성을 넘어서 있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속성 없는 브라흐만 (Nirguṇa Brahman)’입니다. 이 니르구나 브라흐만이야말로 ‘하나인 모든 것’과 가장 깊이 공명하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행위하지도, 변화하지도 않으며, 오직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순수한 환희 (Ānanda)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브라흐만이 실제로 변화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신비로운 힘인 마야 (Māyā)에 의해,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 위에 덧씌워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브라흐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진실로 브라흐만이다 (Sarvam khalvidam brahma)’. 그리고 이 우주적 실재와 나의 가장 깊은 본질인 아트만 (Ātman)은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이 ‘비이원론적 (advaita)’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즉 해탈 (Mokṣa)입니다.
이처럼 서양의 ‘하나인 모든 것’과 동양의 ‘브라흐만’은 그들이 도달한 궁극적 지평에서 놀랍도록 깊은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첫째, 두 개념 모두 절대적인 ‘일원론’을 지향합니다. 그들은 모든 다양성과 대립의 이면에 단 하나의 통일된 실재가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둘째, 그 실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우주는 그 실재 안에 있지만, 그 실재는 우주에 의해 한정되지 않습니다. 셋째, 그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합니다. 헤르메스주의가 ‘하나인 모든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고 말하듯이, 베단타는 니르구나 브라흐만을 ‘네티, 네티 (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넷째, 인간의 구원은 바로 이 ‘하나의 실재’와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데 있음을 가르칩니다. 헤르메스주의자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인 모든 것’의 마음의 일부임을 깨닫고, 베단타 수행자는 자신의 아트만이 브라흐만 그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깊은 공명 속에서도 두 문화의 사유 방식이 빚어낸 미묘한 색채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헤르메스주의가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적인 비유는 ‘마음 (Mind)’입니다. 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심성론적 (mentalistic)’입니다. 세계는 신성한 마음의 생각이며, 그 관계는 사유하는 주체와 그 사유의 내용 사이의 관계입니다. 반면에, 베단타 철학이 사용하는 핵심적인 비유는 ‘존재 (Being)’ 혹은 ‘실체 (Substance)’입니다. 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ontological)’입니다. 세계는 브라흐만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그 관계는 흙과 그릇, 혹은 바다와 파도의 관계입니다. 또한, 헤르메스주의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상응의 원리를 통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법칙을 활용하여 현실을 변형시키는 ‘실천적’이고 ‘마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마야라는 환영의 장막을 걷어내고, 본래부터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를 ‘인식’하는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가 ‘세계의 법칙을 아는 앎’을 통해 ‘하나’에 이르려 한다면, 다른 하나는 ‘세계의 비실재성을 아는 앎’을 통해 ‘하나’임을 깨달으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신비가와 갠지스 강의 현자가 각기 다른 길 위에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일한 진리의 봉우리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인류의 정신이 지리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 얼마나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