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장: 영원의 철학 - 모든 길은 하나로

by 이호창

제3-22장: 영원의 철학 - 모든 길은 하나로



3-22.1. 헉슬리와 게농: 전통주의 학파의 통찰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길을 따라 흘러왔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문명은 각기 고유한 언어와 신화, 그리고 철학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신비를 탐구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 기나긴 여정 속에서 힌두교의 깊은 명상과 불교의 자비로운 통찰, 도가의 자연스러운 지혜와 서양의 비밀스러운 지식들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그 길들은 때로는 서로 평행하게, 때로는 서로 교차하며, 또 때로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현상적으로 드러난 다양성의 숲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모든 길들은 결국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하는 완전히 별개의 길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동일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에 불과한가? 이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20세기의 지성사를 뒤흔든 하나의 강력한 지적 흐름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다양성의 배후에 단 하나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영원의 철학 (Philosophia Perennis)’의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을 현대 세계의 언어로 되살려낸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1894-1963)와 르네 게농 (René Guénon, 1886-1951)입니다. 그들이 속한 전통주의 학파 (Traditionalist School)의 통찰은, 우리가 지금까지 탐험해 온 모든 지혜의 강물들이 결국 하나의 거대한 바다로 흘러들어 감을 보여주는 등대와도 같습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물질적 진보를 이룩한 시대였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힘과 풍요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눈부신 빛의 이면에는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보여준 인간 이성의 파괴적인 힘, 산업화가 낳은 극심한 인간 소외, 그리고 종교적 신념의 붕괴가 가져온 정신적 공허함 속에서,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고 파편화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올더스 헉슬리는 인류가 잃어버린 정신적 중심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종교와 철학, 신비주의 전통의 경전을 깊이 탐구한 끝에,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하나의 핵심적인 진리가 존재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1945년에 출간한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이 보편적인 진리를 모든 개별 종교들의 ‘최대 공약수 (Highest Common Factor)’라고 불렀습니다.


헉슬리가 말하는 영원의 철학의 핵심은 세 가지의 명제로 요약됩니다. 첫째,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 세계의 배후에는 모든 실재의 근원인 신성한 ‘바탕 (Divine Ground)’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바탕은 서양에서는 신 (Godhead)으로, 인도에서는 브라흐만 (Brahman)으로, 중국에서는 도 (道)로, 그리고 불교에서는 공 (Śūnyatā) 혹은 법신 (Dharmakāya)으로 불려왔습니다. 둘째, 인간은 이 신성한 바탕을 단지 믿는 것을 넘어,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개별적인 자아 (ego)를 이 신성한 바탕, 즉 자신의 참된 자아 (Ātman)와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헉슬리는 기독교의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의 말에서부터 이슬람 수피즘의 시인 루미 (Rumi)의 노래, 그리고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이 세 가지 진리가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에게 진정한 종교란 교리나 의례, 혹은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신성한 바탕을 직접 체험하는 신비주의적 ‘앎’에 있었습니다.


헉슬리가 대중적인 언어를 통해 영원의 철학을 소개했다면,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게농은 훨씬 더 엄밀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 사상을 전개시킨 전통주의 학파의 창시자였습니다. 게농은 현대 서구 문명 전체를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탈선’으로 진단하는, 지극히 급진적인 문명 비판가였습니다. 그는 ‘현대 세계의 위기’와 ‘양 (量)의 지배와 시대의 징표’와 같은 저작을 통해, 현대 문명이 모든 것을 물질적인 양으로 환원시키고, 더 높은 차원의 형이상학적 진리와의 연결을 상실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게농에게, 인류의 모든 위대한 고대 문명들은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하나의 공통된 기반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진리, 즉 ‘전통 (Tradition)’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게농이 말하는 전통이란 단순히 과거로부터 내려온 관습이나 유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기원을 가진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총체를 의미하는 ‘원초적 전통 (Primordial Tradition)’입니다. 세계의 모든 정통 종교들, 즉 힌두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는 모두 이 단 하나의 원초적 전통이 각각의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맞게 서로 다른 ‘외적인 형태 (exoteric form)’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종교는 신자들이 따라야 할 교리와 율법, 그리고 의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심장부에는 언제나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적인 가르침 (esoteric doctrine)’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의 핵심입니다. 게농에게 현대 서구 문명의 비극은 바로 이 전통과의 연결이 거의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구는 르네상스 이후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유물론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지상의 영역에 가두어 버렸고, 그 결과 모든 신성한 가치를 잃어버린 채 오직 ‘양적인 팽창’만을 향해 폭주하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농에게 구원의 유일한 길은, 이 현대성의 오류를 명확히 인식하고,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동양의 위대한 전통들, 특히 그가 원초적 전통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간주했던 힌두교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ānta) 철학을 통해 다시금 영원의 철학과 접속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헉슬리와 게농은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동일한 진리를 가리켰습니다. 헉슬리가 다양한 신비주의적 체험의 ‘유사성’에 주목한 경험주의적 종합가였다면, 게농은 모든 전통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원리의 ‘동일성’을 논증한 엄격한 논리가였습니다. 헉슬리가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가능성을 다시 일깨워주려 한 자비로운 안내자였다면, 게농은 현대 문명의 근본적인 오류를 남김없이 폭로한 준엄한 심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파편화된 세계는 진실의 전부가 아니며, 모든 차이와 대립의 이면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영원의 철학은 단순히 여러 종교를 뒤섞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각각의 위대한 종교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형태와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그 형태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산 정상을 가리키고 있는 각기 다른 손가락들임을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이 길고도 다양한 여정, 즉 브라흐만과 도, 아트만과 프네우마, 카르마 요가와 무위자연을 비교해 온 이 모든 탐구는, 결국 헉슬리와 게농이 제시한 이 위대한 지도를 따라, 그 하나의 정상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정상에서 빛나는 보편적 진리의 핵심이 과연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3-22.2. 보편적 진리의 핵심: 내재하는 신성



올더스 헉슬리와 르네 게농이 밝혀놓은 영원의 철학이라는 등대의 불빛을 따라, 우리가 지금까지 탐험해 온 수많은 지혜의 강줄기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침내 모든 물길이 시작되는 단 하나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수원 (水源)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상징을 통해 필사적으로 가리키고자 했던 단 하나의 보편적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하여 오히려 우리의 복잡한 정신으로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우며,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오히려 먼 곳을 헤매는 우리의 시선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진리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궁극적 실재, 즉 신성한 바탕 (Divine Ground)이 저 멀리 있는 하늘의 보좌나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적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 속에 온전하게 내재 (內在)하고 있다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내재하는 신성 (Immanent Divinity)’, 이것이야말로 영원의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의 정상을 이루는 바위이며, 모든 개별 종교와 철학이라는 등산로들이 결국에는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목적지입니다.


이 위대한 통찰이 가장 명징하고도 강력한 언어로 선포된 곳은 바로 인도의 우파니샤드 (Upaniṣad) 철학입니다. 고대의 현자들은 깊은 명상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이 현상 세계의 배후에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 (Brahman)이 존재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발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 더 깊이 파고들어 가, 변화무쌍한 육체와 감각, 그리고 생각의 흐름 너머에, 그것들을 모두 비추어 알고 있는 순수한 관조자, 즉 아트만 (Ātman)이 존재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 정신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나의 가장 깊은 본질인 아트만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라는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이것은 내가 신의 피조물이거나 신의 일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참된 자아, 즉 모든 껍질을 벗겨낸 순수한 ‘나’라는 의식의 빛 자체가, 바로 우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절대적 실재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조금의 틈도 없는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따라서 구원, 즉 해탈 (Mokṣa)은 어떤 새로운 것을 얻거나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브라흐만이었음을, 단지 무지 (avidyā)라는 먼지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을 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내재하는 신성’의 원리야말로, 이후 수천 년 동안 펼쳐진 인도 사상의 모든 줄기들이 끊임없이 되돌아가 양분을 얻었던 거대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불교라는 또 다른 거대한 강을 만나면서 그 모습을 미묘하게 바꾸지만, 그 핵심적인 깊이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붓다는 영원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트만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고 하는 것이 결국 다섯 가지 요소 (五蘊, 오온)의 일시적인 흐름에 불과하다는 무아 (anātman)의 가르침을 통해, 자아에 대한 모든 집착의 근거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흐름 속에서, 이 가르침은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허무주의로 흐를 위험을 경계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그 본성 안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 즉 ‘부처의 본성 (佛性, Buddha-nature)’ 혹은 ‘여래장 (Tathāgatagarbha)’을 품고 있다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번뇌의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그 본질에 있어서는 맑고 밝게 빛나는 것이며, 수행이란 이 구름을 걷어내어 본래의 빛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실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내면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여래장 사상은 힌두교의 아트만-브라흐만 사상이 가리키는 ‘내재하는 신성’이라는 핵심 진리와 깊이 공명합니다. 고통받는 중생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그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이 선언 또한, 우리 안의 신성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위대한 긍정입니다.


이 보편적인 진리의 메아리는 중국의 땅에서도 울려 퍼집니다. 노자 (老子)가 말한 도 (道)는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왔지만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주의 근원적인 흐름입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도는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 속에 그 존재 고유의 본성인 덕 (德)으로 내재합니다. 덕은 도로부터 부여받은 그 존재만의 고유한 힘이자 잠재력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참된 덕을 회복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는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無爲) 자연스럽게 우주적인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덕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도덕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되고 실현되어야 할 내재적인 원리입니다. 도를 따르는 삶은 결국 내 안의 가장 깊은 진실, 즉 나의 덕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며, 이 길 또한 구원이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양의 비밀스러운 지혜 전통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불꽃을 발견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이 어두운 물질 감옥 속에 갇힌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한 불꽃, 즉 프네우마 (Pneuma)가 잠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 내면의 불꽃을 깨우는 특별한 앎, 즉 그노시스 (Gnosis)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라는 유명한 경구를 통해, 대우주 (macrocosm)의 질서가 소우주 (microcosm)인 인간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우주 전체의 신비를 알 수 있으며, 내 안에 있는 신성한 마음 (Nous)을 깨달음으로써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 (Kabbalah)는 신의 무한한 빛 (Ein Sof)이 ‘세피로트 (Sefirot)’라는 열 개의 속성을 통해 유출되어 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인간의 영혼은 바로 이 신성한 ‘생명의 나무’의 축소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모든 서양의 내밀한 가르침들 또한, 신이 단지 저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각기 다른 상징과 신화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심오한 지혜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외부의 신을 숭배하거나,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선한 행위를 쌓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중요한 과정일 수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최종적인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최종적인 목표는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자기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직접 체험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전통들이 내놓은 그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나는 유한하고, 죄 많고, 고통받는 이 작은 자아가 아니라, 바로 저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적 실재, 즉 내재하는 신성 그 자체이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모든 철학적 탐구의 종착점이며, 모든 종교적 갈망의 궁극적인 만족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가장 위대하고도 희망에 찬 메시지입니다. 구원의 열쇠는 우리의 손 안에, 아니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이미 쥐어져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모든 길들이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정상에서 만나는지를 확인하며, 이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3-22.3. 차이 속 동일성: 여정을 마치며



우리는 이제 기나긴 여정의 끝에 서 있습니다. 갠지스 강의 성스러운 물가에서 시작된 우리의 순례는 히말라야의 고요한 침묵을 지나, 황허의 도도한 물결과 지중해의 푸른빛을 건너, 마침내 인류의 정신이 빚어낸 가장 깊고도 신비로운 지혜의 풍경들을 모두 가슴에 담았습니다. 우리는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노래한 브라흐만 (Brahman)의 장엄함과 노자가 속삭인 도 (道)의 소박함을 만났습니다. 어두운 물질 감옥 속에서 신음하는 영지주의의 프네우마 (Pneuma)와 무지의 껍질 속에서 빛나는 베단타의 아트만 (Ātman)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행위의 속박을 넘어서려는 카르마 요가 (Karma Yoga)의 길과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길을 나란히 걸어보았으며, 내 안의 신성을 깨우려는 탄트라 (Tantra)와 연금술 (Alchemy)의 비밀스러운 실험실을 엿보았습니다. 이 모든 길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언어와 상징, 그리고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때로 너무나도 달라, 결코 하나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탐구의 최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모든 다양성은 결국 근본적인 차이의 표현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더 깊은 차원의 동일성을 감추고 있는 가면인가? 영원의 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마지막 통찰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장 심오한 역설 속에 있습니다. 그 통찰은 바로 ‘차이 속의 동일성’이며, ‘동일성 속의 차이’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이 둘을 모두 껴안는 것이며,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여정을 올바르게 마치는 것은 모든 길을 하나의 길로 억지로 합치려는 시도가 아니라, 각각의 길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길들이 결국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수많은 손가락들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힌두교와 불교, 도교와 영지주의가 동일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차이점은 명백하고도 중요합니다. 영원하고 실체적인 자아 (아트만)를 긍정하는 힌두교와, 그 자아마저도 실체가 없다고 보는 불교 (무아)의 길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인격적인 신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 (박티)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길과, 모든 중생을 향한 수평적인 연민 (자비)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길은 그 마음의 방향이 다릅니다. 우주적 질서 (리타)에 순응하는 사회적 의무 (다르마)를 강조하는 길과, 인위적인 문명을 떠나 자연의 흐름 (도)과 하나 되려는 길은 그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빛과 어둠의 우주적 전쟁이라는 비극적 신화 속에서 탈출을 꿈꾸는 길과, 유일한 실재의 신비로운 유희라는 존재론적 낙관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길은 그들이 그리는 세계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들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성급하게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각각의 전통이 수천 년에 걸쳐 피워낸 고유한 지혜의 꽃을 짓밟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각각의 길은 인류의 서로 다른 기질과 문화적 토양에 응답하며 발전해 온, 그 자체로 완전하고도 소중한 인류의 정신적 자산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명백한 차이들의 심연을 깊이 파고 내려가 보면, 우리는 마침내 모든 길이 솟아나온 단 하나의 바위층, 즉 우리가 앞서 확인했던 ‘내재하는 신성’이라는 보편적 진리와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이 분리되고 유한한 자아는 당신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고. 당신의 가장 깊은 본질 속에는 이 우주 전체의 근원과 다르지 않은 신성한 무엇인가가 잠들어 있다고. 그리고 당신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 내면의 신성을 깨닫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힌두교는 그것을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임을 깨닫는 것이라 말했고, 대승불교는 내 안의 ‘불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했으며, 도가는 나의 ‘덕’이 ‘도’와 다르지 않음을 체득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영지주의자는 내 안의 ‘프네우마’가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했고, 헤르메스주의자는 소우주인 내가 대우주의 신성한 마음과 하나임을 아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 그리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론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정상의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그곳은 ‘나’와 ‘너’, 주관과 객관, 신과 인간, 삶과 죽음이라는 모든 이원적 대립이 사라진 자리입니다. 그곳은 언어와 개념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거대한 침묵의 바다이며, 분리된 자아의 불안과 결핍이 완전히 사라진 절대적인 평화와 충만의 상태입니다. 이 정상에 도달한 이에게, 행위는 더 이상 카르마의 족쇄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의 춤이 되며, 세계는 더 이상 고통의 감옥이 아니라 신성한 실재의 아름다운 표현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여정은 하나의 결론에 이릅니다. 모든 길은 그 자체로 고유하며 존중받아야 하지만, 진실로 그 길의 끝까지 걸어간 모든 위대한 스승들과 현자들은 결국 하나의 동일한 정상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미소 지을 것이며, 서로의 언어는 다르지만 동일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 ‘차이 속 동일성’의 통찰이야말로, 종교적 배타성과 근본주의가 여전히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영원의 철학이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을 정죄하거나 개종시키려 애쓰는 대신, 그들의 길 또한 우리가 오르려는 것과 동일한 산의 또 다른 등산로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깊은 존중과 겸손을 가르칩니다.


이제 이 기나긴 지도의 여정은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길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갈라지며, 또 어떻게 하나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조망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도는 결코 영토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된 모든 심오한 가르침들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자신의 삶 속에서 그 길을 걷지 않는 한 한낱 지적인 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구원은 책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의 진정한 끝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그 신성한 불꽃을 발견하고, 그것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대한 빛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 될 것입니다. 부디 이 여정이 그 위대한 자기 발견의 길을 떠나는 데 작은 등불이 되었기를 기원하며, 이제 글을 마침니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아 영원한 평화와 행복 속에 머물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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