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의 네 가지 얼굴

야훼, 테트라그람마톤, 데미우르고스, 그리고 예수님의 주 아버지

by 이호창

신성의 네 가지 얼굴: 야훼, 테트라그람마톤, 데미우르고스, 그리고 예수님의 주 아버지


신성(神性)이라는 무한한 빛은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라는 각기 다른 프리즘을 통과하며 서로 다른 색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집니다. 우리가 신을 부르는 이름들은 그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 빛을 마주한 영혼의 떨림과 사유의 깊이가 아로새겨진 하나의 세계입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호흡했던 야훼(Yahweh)의 이름, 카발라(Kabbalah)의 신비가들이 우주의 설계도로 읽어낸 요드-헤-바브-헤(Yod-He-Vav-He)의 공식,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이 이 물질세계의 감옥을 지은 미숙한 창조주라 부른 데미우르고스(Demiurge), 그리고 예수가 지극한 친밀함으로 불렀던 주(主) 아버지.


이 네 가지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는 과연 동일한 존재의 다른 측면일까요, 아니면 서로를 배제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일까요. 이 물음은 신학적 논쟁의 굴레를 벗어나, 존재의 근원을 향한 인간 정신의 기나긴 여정, 그 장엄하고 때로는 비극적인 드라마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이 네 가지 신성의 얼굴을 각기 고유한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 맥락 속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구성하는지 탐구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야훼입니다. 그는 추상적인 철학의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한 민족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드러낸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의 정체성은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심은 후대의 신학적 사유를 위한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히브리 성서는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원리가 아닌, 강렬하고 때로는 인간적인 감정(anthropopathism)을 드러내는 신을 묘사합니다. 야훼는 기쁨, 사랑, 분노, 질투, 연민 등 다채로운 감정을 통해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는 역동적인 존재입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감정 중 하나는 '질투'와 '진노'입니다. 야훼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칭하며,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질투는 인간적인 시기심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언약 관계의 본질에서 비롯된 신적인 반응입니다. 언약의 파기는 곧 관계의 파괴이며, 야훼의 진노(Af)와 보복(Naqam)은 이 파괴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납니다. 신학적으로 이 진노는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거룩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그의 거룩함이 죄와 마주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바로 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격하고 두려운 신의 모습은 그의 또 다른 본질인 '사랑'과 '자비'와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목자(ro′eh)로서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고 위로하며,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아버지처럼 그들을 훈육합니다. 특히 호세아 11장은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심판의 마음과 그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긍휼 사이에서 고뇌하는 하나님의 내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진노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관계 회복을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야훼의 인격은 진노와 사랑, 정의와 자비라는 양극단의 긴장 속에서 입체적으로 드러나며, 이 역설적인 모습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끝없는 해석의 과제를 남겼습니다.


야훼의 이러한 인격적 특성은 철학적 논증이 아닌, 역사적 사건과 언약(berit)이라는 구체적인 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는 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적, 관계적 계약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그리고 이스라엘의 순종과 충성이라는 상호 의무를 포함합니다. 이 관계는 종종 주인(Adon)과 종의 관계로 묘사되지만, 이때 주인은 종의 모든 필요를 책임지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야훼(YHWH)라는 이름 자체도 이러한 계시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하야(hayah, 존재하다)'에서 파생된 이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또는 '계속해서 자신을 계시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그의 본질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나고 증명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출애굽, 시내산 언약, 다윗 왕조의 약속 등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야훼의 자기 계시의 무대였습니다. 따라서 언약의 핵심 요구사항인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명령과 하나님을 경외(yir′at YHWH)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가르침은 모두 이 역사적이고 관계적인 신 이해의 중심에 자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훼의 이름은 너무나 거룩하게 여겨져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외심은 유대교 내에서 신의 이름을 직접 발음하는 대신 '나의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로 대체하여 읽는 독특한 전통을 낳았습니다. 이 관습은 히브리 성서의 필사본 전통인 케레-케티브(Qere-Ketiv, '기록된 것'과 '읽는 것')에 공식화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성서 본문에 야훼의 네 자음(YHWH)을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독자들이 '아도나이'라고 읽도록 아도나이의 모음 부호를 결합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YeHoVaH)'라는, 실제로는 발음되지 않았던 인위적인 형태가 만들어졌습니다. 일상에서는 심지어 '그 이름'을 뜻하는 '하솀(HaShem)'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외의 전통은 역설적인 신학적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던 인격적인 신 야훼는, 그의 이름이 신성한 침묵 속에 감추어지면서 점차 형언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의 발음이 금지되면서 생긴 이 '언어적 공백'은 신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의 이름이 더 이상 역사 속 한 인물을 지시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탐구해야 할 신비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이 신성한 침묵의 여백 속에서, 어떤 이들은 그 이름의 내적 구조를 탐구하려 했고(카발라), 또 다른 이들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적 신의 정체성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영지주의). 이처럼 야훼를 '아도나이'로 부르기 시작한 경외의 행위는, 의도치 않게 야훼를 역사적 인물에서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며, 이후 전개될 모든 신학 드라마의 막을 올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야훼의 이름이 신성한 침묵 속에 감추어지자, 유대 신비주의자들, 즉 카발리스트들은 그 침묵의 심연을 파고들어 이름의 비밀을 해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 신의 이름은 더 이상 역사적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우주 창조의 원리와 과정을 담고 있는 신성한 공식, 즉 형이상학적 청사진이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에게 야훼의 네 글자 이름, 즉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 신명사문자 יהוה)은 인격신의 이름이라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모든 정의와 개념을 초월하는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의 본체, '아인 소프(Ein Sof, 무한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며 세계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공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야훼라는 역사적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비밀, 즉 신이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지를 해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에게 신의 이름은 신의 존재 방식과 창조 행위의 구조를 담고 있는 우주적 DNA와 같았습니다. 특히 16세기 루리아 카발라(Lurianic Kabbalah)는 어떻게 완전하고 무한한 신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교한 창조 신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창조 이전, 모든 가능성을 품은 채 존재하는 무한하고 미분화된 신적 통일성의 상태가 바로 아인 소프(Ein Sof)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해나 언어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실체입니다. 유한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무한한 아인 소프는 스스로를 '수축' 또는 '움츠려야' 했습니다. 이 신적 자기제한 행위가 바로 '침춤(Tzimtzum)'입니다. 침춤을 통해 창조가 일어날 수 있는 개념적 '빈 공간'(공허)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신의 전능함이 자신을 제한하는 역설을 통해 발현되는 심오한 개념입니다. 침춤으로 생긴 빈 공간 안으로 신성한 빛의 한 줄기가 흘러 들어와, 10개의 구별되는 신적 속성 또는 에너지의 단계로 펼쳐지는데, 이것이 바로 '세피로트(Sefirot)'입니다. 이 10개의 세피로트는 '생명나무(Tree of Life)'라는 도상으로 시각화되며, 모든 실재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이자 창조의 청사진 역할을 합니다.


카발라 체계의 정수는 테트라그람마톤의 네 글자를 10개의 세피로트 및 4개의 창조 세계와 체계적으로 연결하여 우주론적, 심리학적 지도를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 네 글자는 신성이 유출되어 물질세계에 현현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상징합니다. 첫 글자 요드(י)는 모든 가능성을 품은 최초의 신적 의지의 점(點)이자 '천상의 아버지'를 상징하며, 지혜를 의미하는 세피라 '호크마(Chokmah)'와 연결되어 가장 높은 차원의 세계인 '아찔루트(Atziluth, 유출의 세계)'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글자인 첫 번째 헤(ה)는 요드의 씨앗을 받아 형태를 부여하는 '천상의 어머니'로서, 이해를 의미하는 세피라 '비나(Binah)'와 연결되어 두 번째 세계인 '브리아(Briah, 창조의 세계)'를 주관합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인 세 번째 글자 바브(ו)는 '아들' 또는 왕자를 상징하며,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세피라 '티페레트(Tiferet)'를 중심으로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를 매개하며 세 번째 세계인 '예찌라(Yetzirah, 형성의 세계)'에 자리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헤(ה)는 창조의 모든 과정이 최종적으로 현현한 물질세계, 즉 '딸' 또는 신부를 상징하며, 왕국을 의미하는 세피라 '말쿠트(Malkuth)'와 연결되어 마지막 세계인 '앗시야(Assiah, 행위의 세계)'에서 그 결실을 봅니다. 이처럼 카발라의 사유 체계는 단순한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일종의 신학적 '홀로그래피 원리'를 보여줍니다. 테트라그람마톤이라는 단일한 이름(부분)은 네 개의 세계와 열 개의 세피로트(전체)의 구조를 온전히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각각의 세계는 그 안에 온전한 생명나무를 포함하고 있으며, 각각의 세피라 또한 다른 모든 세피라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이는 신의 이름이 단순히 신을 가리키는 상징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프랙탈(fractal)적 암호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카발리스트들은 역사적 야훼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 속에 잠재되어 있던 무한한 형이상학적 구조를 '해독'하고 '펼쳐낸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신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으로 심화되는 지성의 위대한 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혼이 이처럼 역사와 신비의 조화 속에서 안식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목도하며, 일부 사상가들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전능하고 선한 창조주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왜 세상은 이토록 무지와 폭력,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 고뇌에 찬 물음 속에서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급진적인 사상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야훼를 심화시키거나 재해석하는 대신, 그를 열등하고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며 가장 극적인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영지주의 사상의 출발점은 물질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소외감과 혐오입니다. 그들은 선하고 빛으로 가득한 영적 세계(플레로마, Pleroma)와 악하고 어두우며 고통으로 가득 찬 물질세계를 철저히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견지했습니다. 이들에게 물질은 그 자체로 결함투성이이며, 인간의 육체는 신성한 영혼의 불꽃을 가두는 '육신의 감옥(soma sema)'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에게 구원은 이 물질세계 안에서의 번영이나 완성이 아니라, 이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하에서, 이 결함 있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존재는 결코 지고의 선한 신일 수 없었습니다. 악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창조주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고, 이는 기존의 신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급진적인 신정론(theodicy)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불완전한 창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영지주의자들은 정교한 신화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1945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문헌 중 하나인 『요한의 비밀 가르침, Apocryphon of John』은 그 과정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빛의 세계인 플레로마에 거주하던 하위의 신적 존재(아이온, Aeon) 중 하나인 '소피아(Sophia, 지혜)'가 자신의 짝과 상의 없이, 즉 불균형의 상태에서 홀로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불완전한 행위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불완전하고 흉측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사자의 얼굴을 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소피아는 자신의 무지 속에서 태어난 이 끔찍한 결과물을 플레로마의 다른 신들이 보지 못하도록 빛의 세계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이 존재가 바로 '데미우르고스(Demiurge, 제작자)'이며, 그는 '얄타바오트', '사클라스(어리석은 자)', '사마엘(눈먼 신)' 등의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자신의 기원과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참된 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창조한 물질 우주가 전부인 줄 알고 오만함에 빠졌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던진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바로 이 오만하고 무지한 데미우르고스를 구약성서의 창조주 야훼와 동일시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데미우르고스가 외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는 선언이, 구약 이사야서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야훼의 자기 선언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야훼의 모든 속성은 부정적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자비로운 보호자가 아니라, 영혼을 물질이라는 감옥에 가둔 폭군이자 간수였습니다. 그가 내린 율법(모세의 율법)은 영혼을 해방시키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더욱 깊은 무지와 물질세계의 법칙에 옭아매는 족쇄로 간주되었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아르콘(Archon, 지배자)'이라 불리는 하위 권력자들을 창조하여 이 세계를 통치하게 하고, 영혼들이 영적 세계로 돌아가려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야훼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하고 타파해야 할 적대자였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감옥을 탈출하여, 저 너머에 있는 미지(未知)의 참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관점은 단순한 신학적 이견을 넘어, 존재론적 고통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신화 속 인물을 넘어, 인간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억압적이고 불합리하며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힘의 신학적 투영(projection)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구약성서에 묘사된 야훼의 가혹한 면모를 목격하고, 이 두 가지 부정적 경험을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즉, '이런'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저런' 성격의 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의 탄생은 신학적 사변인 동시에, 기존의 신적 권위에 대한 실존적 항거이자 심리적 반란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을 영혼의 적으로 선포하는 궁극적인 신학적 전복 행위였습니다.


이 복잡하게 얽힌 신성의 드라마 속으로 예수가 걸어 들어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부른 '아버지'라는 이름은 앞선 모든 해석의 중심에 서서 새로운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 이름은 한편으로는 야훼와의 연속성을 완성하는 정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데미우르고스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혁명적인 외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신성의 네 얼굴에 대한 논쟁은 기독론적 대립으로 최고조에 달합니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양분하는 핵심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정체성, 구원의 본질, 그리고 구약성서의 권위를 결정하는 시금석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연속성과 성취를, 다른 한쪽에서는 단절과 대립을 주장하며, '아버지'라는 동일한 호칭 아래 전혀 다른 두 개의 신학 체계가 충돌했습니다. 주류 기독교, 즉 정통 교회의 입장은 예수의 아버지가 구약의 야훼와 전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신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가장 깊고 본질적인 성품, 즉 사랑과 용서를 온전히 드러낸 최종 계시자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핵심에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불완전하고 그림자 같은 계시였습니다. 율법과 예언을 통해 희미하게 알려졌던 야훼의 모습은 예수를 통해 비로소 그 완전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의 비유는 율법의 엄격함으로 대표되던 야훼의 이미지에, 모든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긍휼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덧붙여 그를 완성시킵니다. 예수가 사용한 '아버지'라는 호칭은 이러한 연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여기는 사상은 구약에도 이미 존재했지만, 대부분 집단적이고 공적인 관계를 나타냈습니다. 반면 예수는 '아빠(Abba)'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친밀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율법적 계약 관계에서 사랑에 기반한 자녀-부모 관계로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함으로써,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 야훼가 보낸 메시아임을 증명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아버지'는 야훼의 완성된 초상이며, 신약은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이야기입니다.


반면, 영지주의자들과 특히 2세기 신학자 마르키온(Marcion of Sinope)은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가 결코 동일한 존재일 수 없다고 선언하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단절을 시도했습니다. 마르키온의 신학은 두 명의 신, 즉 '이신론(ditheism)'에 기초합니다. 그는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야훼/데미우르고스)은 물질세계를 만든 열등하고, 변덕스러우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하는 잔인한 신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반면, 예수가 '아버지'라 부른 신은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가득한 지고의 '선한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신은 모든 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창조주 야훼가 정의와 진노의 본성으로 결함 있는 물질세계를 다스린다면, 구원자이신 예수의 아버지는 선과 사랑의 본성으로 영적 세계를 주관합니다. 야훼는 율법과 예언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심판자이지만, 예수의 아버지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계시되며 믿음을 통한 은혜와 용서를 제공하는 구원자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신념에 따라, 마르키온은 구약성서 전체를 기독교 경전에서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그는 구약이 열등한 신의 기록이며,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대신 그는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10개만을 선별하고, 그 안에서조차 유대교적 색채나 구약 인용을 모두 삭제하여 자신만의 '정경'을 만들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는 데미우르고스인 야훼의 아들이 아니라, 저 너머의 참되고 미지의 아버지로부터 온 '외계의 사자'입니다. 그는 율법을 완성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물질세계라는 감옥의 문을 부수고 갇힌 영혼들에게 구원의 지식(그노시스)을 전해주러 온 해방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질이 악하기에 선한 신의 사자인 예수가 실제 육체를 가졌을 리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마르키온과 영지주의자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는 결코 야훼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야훼의 폭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완전한 타자(他者)였습니다. 마르키온의 이러한 급진적 주장은 역설적으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형성을 촉진하는 '필연적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가 최초로 자신만의 축소된 정경을 제시하자, 위협을 느낀 주류 교회는 어떤 문헌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는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는 신약 정경화 과정의 결정적인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두 신 이론'에 맞서기 위해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아버지가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인지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점진적 계시론과 같은 정교한 신학적 개념들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르키온이라는 '대 이단'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정통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신학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입니다. 그의 '단절'의 시도는 오히려 더 강력한 '연속성'의 논리를 구축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성의 네 가지 얼굴—역사 속의 야훼, 우주적 공식으로서의 테트라그람마톤, 왜곡된 그림자로서의 데미우르고스, 그리고 친밀한 관계 속의 아버지—을 각기 다른 사유의 프리즘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네 이름이 동일한 실체의 다른 측면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인지를 묻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혼이 존재의 근원을 어떻게 마주하고 경험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단일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 의식이 신성을 이해하는 세 가지 주요 경로, 즉 하나의 스펙트럼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역사적 연속성의 경로로서, 정통 기독교가 걸었던 길입니다. 이 길에서 야훼는 예수의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이며, 그의 본성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계시를 통해 더욱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둘째는 형이상학적 심화의 경로로서, 카발라가 개척한 길입니다. 이 길에서 야훼라는 이름은 껍질일 뿐이며, 그 안에는 테트라그람마톤이라는 우주적 창조의 공식이 숨겨져 있습니다.


셋째는 실존적 단절의 경로로서, 영지주의가 절규하며 걸었던 길입니다. 이 길에서 야훼는 데미우르고스라는 거짓 창조주로 전복되며, 참된 아버지는 이 고통스러운 세계 너머에 있는 해방자로서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 경로는 단지 고대의 신학적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신과 세계를 경험하는 근본적인 방식, 즉 영적 원형(archetype)에 해당합니다. 야훼는 우리가 전통, 법, 사회,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신성을 경험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테트라그람마톤은 우주의 경이로운 질서와 모든 존재의 근원에 놓인 심오한 패턴을 발견하며 느끼는 합일의 경험을 상징합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세상의 고통, 개인적 소외감, 그리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실존적 절망과 항거의 경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모든 역사와 구조와 그림자를 넘어,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신성의 얼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 영혼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심, 희망과 절망이 그 안에 고스란히 투영됩니다. 마치 강과 빙하와 수증기가 본질적으로는 같은 H₂O이지만 그 존재 양태와 우리에게 주는 경험이 전혀 다른 것처럼, 이 네 이름이 가리키는 신성 또한 그러합니다. 화학적으로는 동일한 근원을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각각이 독립된 세계이자 경험입니다. 이 고대의 신학적 드라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통의 하나님(야훼)과 씨름하고, 우주적 지혜(테트라그람마톤)를 갈망하며, 세상의 어둠(데미우르고스)에 절망하고, 궁극적인 사랑(아버지)을 희구합니다. 이 네 가지 얼굴 사이를 방황하며 우리 자신의 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참된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순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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