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역설

생성(生成)을 위한 자기 부정, 케노시스(Kenosis)에

by DrLeeHC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는 아마도 ‘채움’이 아닌 ‘비움’의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으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할 때, 우리는 흔히 그 안을 가득 메운 무엇인가를 떠올리지만, 진정한 생성과 변화는 역설적으로 기존의 것을 덜어내고 스스로를 비워내는 공백(空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구 정신사의 저변에서 이 심오한 역설을 담아온 개념이 바로 ‘케노시스(Kenosis)’입니다. 고대 그리스어 ‘케노오(kenóō)’, 즉 ‘비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용어는 본래 신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영광과 권능을 비워내고 인간이라는 유한한 조건 속으로 낮아지는 자기 비하(自己卑下)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의 품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필립보서』에서 그리스도의 행적을 묘사하며, 그가 신과 동등한 본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상을 취했다고 서술합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을 넘어, 충만했던 존재가 의지적으로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내는 창조적 자기 부정의 원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적 케노시스의 개념은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 우주와 자아를 이해하는 다양한 철학적, 비의적(秘儀的) 사유 체계 속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창조주가 자신의 무한함을 거두어들여 유한한 세계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우주론적 원리로, 때로는 수행자가 자신의 에고와 인식을 비워내어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신비주의적 길로 나타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창조적 영감을 얻기 위해 기존의 관념을 비워내는 예술가의 자세나, 진정한 소통을 위해 선입견을 내려놓는 우리 일상의 모습 속에서도 그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케노시스라는 개념을 축으로 삼아, 신적인 자기 비움에서부터 인간적인 자기 성찰에 이르기까지, ‘비움’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새로운 충만과 생성을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신적인 존재가 스스로를 비워내는 케노시스의 원형은,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카발라(Kabbalah) 사상에서 그 우주론적 상응물을 발견합니다. 16세기 체파트(Safed)의 신비주의자들은 절대적 무한자인 엔 소프(Ein Sof, 끝없는 이)가 어떻게 유한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만약 엔 소프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그 자신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루리아는 ‘침춤(Tzimtzum, 축소/수축)’이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제시합니다. 창조에 앞서, 엔 소프는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에게서 ‘수축’시키고 거두어들여, 비어있는 태초의 공간, 즉 ‘할랄 하파누이(Chalal ha'Panui)’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신적인 자기 수축 행위, 즉 침춤은 기독교의 케노시스와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보여주지만, 그 동기와 결과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라는 윤리적 동기에서 비롯된 의지적 행위라면, 침춤은 창조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필연성에 가깝습니다. 신이 자신의 무한함을 스스로 제한하는 이 태초의 비움이 없었다면, 다양성과 개별성을 지닌 우주는 애초에 현현할 수 없었습니다. 즉, 모든 존재는 신의 ‘자기 비움’이라는 희생적 행위 위에 세워진 셈입니다. 이 비워진 공간 속으로 신성의 빛이 흘러 들어와 세피로트(Sephirot, 신성한 권능들)라는 열 개의 그릇을 형성하지만, 일부 그릇들은 그 빛의 강렬함을 이기지 못하고 깨어지는 ‘셰비라(Shevirah, 그릇들의 깨어짐)’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신성의 불꽃들은 물질세계 곳곳에 흩어져 유배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인간의 과제는 흩어진 불꽃들을 다시 모아 올리는 ‘티쿤 올람(Tikkun Olam, 세계의 복원)’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루리아 카발라에서 비움의 행위는 창조의 시작점이자, 동시에 깨어짐과 복원이라는 우주적 드라마의 서막을 여는 역동적인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반면, 영지주의(Gnosticism) 신화는 또 다른 형태의 비움을 보여주는데, 이는 의지적이고 창조적인 케노시스와는 대조적으로 비극적이고 비자발적인 추락에 가깝습니다. 신적인 충만, 즉 플레로마(Pleroma)의 가장 낮은 아이온(Aeon)인 소피아(Sophia, 지혜)는 자신의 짝으로부터 벗어나 근원을 온전히 파악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홀로 무언가를 유출하려 시도합니다. 이 불완전한 시도의 결과로 그녀는 플레로마의 경계 밖, 어둠과 결핍의 영역으로 추락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겪는 그녀의 고통과 혼란, 무지의 상태가 바로 물질세계를 창조한 미숙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e)를 낳습니다. 소피아의 추락은 신적인 일부가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고 ‘비워지는’ 사건이지만, 이는 사랑이나 창조를 위한 자발적 선택이 아닌, 과오와 무지에서 비롯된 비극적 운명입니다. 이로 인해 신성의 불꽃인 프네우마(Pneuma)는 인간의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구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계시, 즉 ‘그노시스(Gnosis, 영적 인식)’를 통해 자신의 신적 기원을 깨닫고 물질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플레로마로 회귀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영지주의의 비움은 회복되어야 할 상실이자 극복해야 할 결핍으로, 카발라의 침춤이 생성의 필연성을 담보하는 장엄한 자기 축소인 것과는 그 결을 달리합니다.


신적인 차원의 자기 비움이 우주적 창조와 구원의 서사를 이끌어간다면, 인간적 차원에서의 비움은 자아의 한계를 넘어 궁극적 실재와 만나는 신비적 합일의 통로가 됩니다.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 길을 ‘압게쉬덴하이트(Abgeschiedenheit)’, 즉 ‘버리고 떠나 있음’ 또는 ‘초연함’이라는 개념으로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그에게 있어 영혼의 가장 고귀한 덕은 사랑이나 겸손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아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는 상태, 즉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 지식, 소유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비워내어 영혼의 중심에 순수한 ‘무(Nichts)’의 공간을 마련할 때, 비로소 신은 그곳에 ‘말씀(Logos)’으로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아의 모든 활동을 멈추는 적극적인 ‘내려놓음’의 실천입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케노시스는 신과의 분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Grund)이 곧 신의 심연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돌파(Durchbruch)’의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유한한 개별적 자아의 껍질을 벗고 본래적인 신적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움의 영성은 동양의 지혜 전통에서 더욱 깊은 공명을 일으킵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Śūnyatā)’은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함을 의미하며, 이를 깨닫는 것은 곧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포함한 모든 집착을 비워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노자(老子)가 『도덕경』에서 “그릇의 쓰임은 그 비어 있음에 있다(當其無, 有器之用)”고 설파한 것 또한, 비어있는 중심, 즉 ‘곡신(谷神)’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야말로 만물을 낳고 기르는 근원임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아시아 사유의 원형적 깊이는, 한민족의 고유한 경전으로 전해지는 『천부경, 天符經』의 사상 속에서 독창적인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총 81자의 함축적인 문자로 이루어진 『천부경』은 우주의 생성과 순환,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무(無)’에서 ‘일(一)’이 비롯되는 창조의 신비가 자리합니다. ‘시무시일(始無始一)’, 즉 시작 없는 시작으로서의 ‘일’은 그 근원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場)인 ‘무’에 두고 있으며,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의 순환이 끝나도 근원으로서의 ‘일’은 결코 소멸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의 ‘무’는 단순한 공허나 부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낳는 창조적 잠재력이 응축된 ‘비움’, 즉 만물의 다함없는 근원(無盡本)입니다. 이는 신이 창조를 위해 스스로를 수축시킨 카발라의 침춤처럼, 절대적 가능성의 상태가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구체적인 현실을 생성하는 우주론적 케노시스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천부경』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 선언하며, 이 거대한 우주적 비움과 채움의 원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그대로 구현됨을 밝힙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운 생각과 욕망, 고정된 관념들을 비워내고 그 근원적 마음자리, 즉 ‘본심(本心)’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하늘과 땅과 하나 되는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에크하르트가 말한 영혼의 심연에서 신을 만나는 경험과 다르지 않으며, 자아의 비움을 통해 우주적 전체성과 합일하는 동양적 지혜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케노시스는 단순히 신학적 용어나 추상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는, 존재의 근원적 작동 원리이자 변화를 위한 심오한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신이 유한한 세계를 품기 위해 스스로를 비워낸 우주적 사건에서부터, 인간이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더 큰 실재와 만나기 위해 떠나는 내면의 여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발견됩니다. 비움은 상실이나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공간의 창출이며, 낡은 것을 내보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반영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가장 충만한 자기실현으로 이어지며, 침묵 속에서 가장 깊은 진리가 들리고, 어둠 속에서 가장 밝은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케노시스의 공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충만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의 문제 이전에, 무엇을 어떻게 비워낼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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