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리샤르의 사랑의 삼위일체론

by 이호창

2-6.2. 리샤르 (Richard of St. Victor)의 사랑의 삼위일체론



생 빅토르의 위그가 구축한 견고한 지성적 토대 위에서 서방 신비주의를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심화시킨 인물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리샤르 (Richard of St. Victor, ?-1173)입니다. 그는 위그의 제자로서 스승의 사상을 계승했지만, 단순히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위그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손상된 이성의 눈을 회복하는 인식론적 과정에 집중했다면, 리샤르는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뚫고 들어가는 사랑의 역동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사랑이 곧 보는 눈이다 (Ubi amor, ibi oculus)”라고 선언하며, 차가운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뜨거운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을 포착하고 그분과 합일하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그의 영성 신학은 교리를 기계적으로 암기하거나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기성 종교의 율법주의적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궤적을 그립니다. 리샤르에게 있어 신학은 건조한 사변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여 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실존적인 모험이었습니다.

생 빅토르의 리샤르가 정립한 신비 신학의 독창성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를 논증하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기성 종교의 교조주의는 삼위일체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수수께끼나 무조건 복종해야 할 권위적인 교조로 제시해 왔습니다. 이들은 흔히 『요한일서 5장 7절』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려 애쓰며, 이를 이성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를 불신앙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성경에 직접 기록된 문장이 아니라 4세기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Symbolum Quicumque)을 비롯한 공의회 결정문에서 확립된 교리적 정의이며, 인용되는 성경 구절 또한 초기 사본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후대에 삽입된 ‘요한의 콤마 (Comma Johanneum)’로 밝혀져 문자주의적 해석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리샤르는 이러한 소모적인 문자적 논쟁이나 외부에서 강요된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사랑 (caritas)’이라는 개념의 내적 논리만으로 삼위일체가 필연적인 진리임을 입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저서 『삼위일체론, De Trinitate』에서 하나님이 최고선 (summum bonum)이자 완전한 사랑이라는 전제로부터 삼위의 구조를 도출했습니다.

리샤르는 하나님의 완전성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완전한 존재는 최고의 행복과 영광을 지녀야 하며, 이러한 최고의 행복은 완전한 사랑 속에서만 실현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할 때 비로소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결핍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존재는 사랑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이시라면, 그분 안에는 사랑을 주는 주체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타자가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성부는 사랑을 쏟아붓고, 성자는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 다시 되돌려 줍니다. 두 인격은 동등한 품격을 지니며, 영원 전부터 서로를 향한 사랑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리샤르가 발견한 하나님의 이원적 구조입니다.

그러나 리샤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인격 사이의 사랑이 지닌 한계를 통찰했습니다. 둘만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자칫 폐쇄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배타적 소유욕이 싹트거나, 서로만을 바라보는 좁은 관계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완전한 사랑은 둘 사이에 갇히지 않고, 제3자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리샤르는 이를 ‘사랑의 공유 (Consortium Amoris)’라고 불렀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존재가 함께 제3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기쁨을 나눌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바라보는 동시에, 둘이 공통으로 사랑하는 제3의 인격을 필요로 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리샤르는 성령을 ‘함께 사랑받는 자 (Condilectus)’라고 명명했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쏟아내는 사랑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이로써 사랑은 두 인격 사이의 좁은 교환을 넘어, 셋이 함께 나누는 열린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삼위일체는 이렇게 사랑의 논리적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완성됩니다.

이러한 리샤르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고립된 절대군주나 엄격한 심판자로 묘사하는 기성 종교의 이미지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원리주의가 하나님을 인간 위에 군림하며 복종을 요구하는 권력의지적 존재로 그리는 반면, 리샤르의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관계이고, 나눔이며, 환대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삼위일체는 난해한 수학적 모순이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타자를 향해 흐르고 공유되며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신적인 원형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 역시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타인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제3자와 기쁨을 공유할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관계적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리샤르에게 있어 신비주의는 이 신적 사랑의 흐름에 동참하여, 인간의 영혼이 삼위일체의 역동적인 순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리샤르가 전개한 이러한 사랑의 논리는 비단 12세기 서방 기독교 신학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특수한 사유가 아닙니다. 인류의 종교적 상상력과 신화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둘의 결합이 제3자를 통해 완성된다는 삼항 구조는 전 세계 문명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보편적인 원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 (Osiris), 이시스 (Isis), 호루스 (Horus)로 이어지는 신성한 가족의 구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결합이 자녀라는 제3의 존재를 통해 완성되는 이 가족의 원형은, 사랑이 폐쇄적인 이원성을 넘어 생명을 낳고 공동체를 이루는 삼원성으로 나아가야 함을 본능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사랑의 완성이란 곧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합일임을 시사하는 인류 공통의 심상입니다.

기성 종교의 교조주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다른 종교나 신화와는 전혀 관계없는, 오직 성경과 교회를 통해서만 계시된 배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며 비교 자체를 금기시합니다. 그들은 삼위일체와 이교 신화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거나, 기독교의 유일성을 훼손하는 시도로 폄하합니다. 그러나 리샤르의 관점을 확장하면, 삼위일체는 낯선 외부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사랑의 체험, 즉 가족과 생명의 탄생 원리 안에 이미 새겨진 우주적 법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이 하나 되어 셋을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셋이 사랑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신의 존재 방식이자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리샤르는 이러한 인류 공통의 원형적 진리를 신학적 언어로 정교하게 다듬어 냄으로써, 삼위일체를 박제된 교리에서 살아 숨 쉬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로 승화시켰습니다.

리샤르는 이러한 사랑의 원리를 바탕으로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관상의 단계를 체계화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베냐민 미노르, Benjamin Minor』와 『베냐민 마요르, Benjamin Major』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관련된 성경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관상의 여섯 단계를 설명합니다. 리샤르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상상력, 이성, 지성으로 구분하고, 이 세 가지 능력이 각각 대상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여섯 단계의 상승 과정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상상력에 의한 상상력의 관상 (In imaginatione secundum imaginationem)’입니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오직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물질세계의 형태와 색채, 움직임에 집중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경탄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성에 의한 상상력의 관상 (In imaginatione secundum rationem)’입니다. 영혼은 여전히 물질적인 대상을 바라보지만, 단순히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내재된 합리적인 질서와 원리를 파악하려 합니다. 사물의 현상 너머에 있는 창조의 법칙과 의미를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상상력에 의한 이성의 관상 (In ratione secundum imaginationem)’입니다. 이제 영혼의 시선은 물질세계를 떠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향합니다. 그러나 아직 순수한 이성만으로는 영적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시적인 사물의 이미지를 비유나 상징으로 활용하여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이해하려 시도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이성에 의한 이성의 관상 (In ratione secundum rationem)’입니다. 영혼은 감각적인 이미지나 비유의 도움 없이 순수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영혼의 본질을 직관합니다. 감각을 차단하고 오직 정신의 눈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에 반하지 않는 관상 (Supra rationem sed non praeter rationem)’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단일성이나 영원성과 같이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성과 모순되지 않는 신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깨닫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며 이성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상 (Supra rationem et videtur esse praeter rationem)’입니다. 이것은 관상의 최정점으로서, 삼위일체와 같이 인간의 논리로는 모순처럼 보이는 신비가 명백한 진리로 다가오는 단계입니다. 영혼은 이성의 잣대를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본성 안으로 완전히 몰입합니다.

리샤르는 이 마지막 두 단계를 ‘정신의 이탈 (Excessus Menti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진리와 마주했을 때 겪는 기능 정지 상태이자, 동시에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는 황홀경을 의미합니다. 지성은 하나님을 탐구하고 분석하려 하지만,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지성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실패의 지점에서 사랑이 개입합니다. 지성이 멈춘 곳에서 사랑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 갈망은 영혼을 지성의 한계 밖으로 끌어올립니다. 이것은 비이성적인 광기가 아니라, 이성보다 더 높은 차원의 앎인 ‘지혜 (Sapientia)’로의 도약입니다.

리샤르는 ‘정신의 이탈’이 일어나는 세 가지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열정 (fervor amoris)’이 너무나 강렬하여 영혼이 육체적 감각과 이성적 사고를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헌신 (devotio)’을 통해 영혼이 정화되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지향을 가질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환희 (exsultatio)’로서, 영혼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기쁨에 겨워 자신을 잊어버리는 상태입니다.

특히 리샤르는 관상 체험이 개인의 황홀경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을 인도했듯이, 그리고 변화산에서 영광을 본 제자들이 세상으로 돌아와야 했듯이, 참된 관상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는 영적 결혼의 비유를 들어,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 합일한 영혼은 영적인 자녀, 즉 선한 행실과 덕행을 낳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신비 체험을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거나 영적 우월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중요한 지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리샤르의 결론입니다.

리샤르의 영성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며,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힘이고, 상이한 인격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룩한 띠입니다. ‘지성 (Intellectus)’이 대상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이해하려 한다면, ‘사랑 (Amor)’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연합하여 앎에 이릅니다. 리샤르의 사상은 "사랑 없이는 참된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이는 지식의 축적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 교리주의나, 감정적 흥분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하는 열광주의, 모두에게 던지는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참된 앎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참된 사랑은 앎을 통해 깊어집니다.

또한 리샤르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학적 통찰에서도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성소, 즉 성막에 비유하며, 뜰과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나아가는 과정을 내면의 여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상상력의 뜰을 지나 이성의 성소에 이르고, 마침내 지성소인 ‘지성의 정점 (Apex Mentis)’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지성소에는 인간의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의 날개를 타고 날아올라야 합니다. 리샤르는 이 과정을 매우 정교하게 분석함으로써 신비 체험이 무질서한 혼란이 아니라 질서 정연한 영적 상승의 과정임을 입증했습니다.

리샤르의 사랑의 삼위일체론과 관상 신학은 중세 신비주의의 흐름 속에서 지성과 감성, 신학과 영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금자탑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교리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체험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난제가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사랑의 원형이자 목표입니다.

‘함께 사랑받는 자 (Condilectus)’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도 고립된 자아를 깨뜨리고 타자와 함께 사랑을 공유하는 삶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리샤르가 남긴 유산은 차가운 교리 속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시켜, 뜨거운 사랑의 불꽃으로 우리 가슴속에 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불꽃은 지성을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정화하고 고양시켜 마침내 사랑과 지식이 하나 되는 신적인 지혜의 빛으로 타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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