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베냐민 마이너』 : 영혼의 방주와 관조

by 이호창

2-6.3. 『베냐민 마이너』 : 영혼의 방주와 관조의 6단계



리샤르 드 생 빅토르의 신비 신학이 지닌 진정한 탁월함은 추상적인 신학 개념을 생동감 넘치는 심리적 드라마로 전환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베냐민 마이너, Benjamin Minor』와 『베냐민 메이저, Benjamin Major』에서 성경의 역사적 사건과 기물들을 영혼의 지도로 재해석했습니다. 기성 종교의 교조주의가 성경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이나 지켜야 할 규범으로만 고착시킬 때, 리샤르는 그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인간 내면의 역동성을 포착해 냈습니다. 그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복잡한 가정사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의 언약궤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신을 찾아가는 영혼의 여정을 묘사하는 거대한 알레고리 (Allegory)로 읽어냈습니다.

먼저 『베냐민 마이너』는 『열두 족장, The Twelve Patriarchs』이라는 별칭이 시사하듯, 야곱과 그의 두 아내, 그리고 열두 아들의 탄생 과정을 통해 영혼이 어떻게 덕을 쌓고 자아를 초월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리샤르는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동력을 ‘이성 (Ratio)과 ’감정 (Affectio)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이를 야곱의 두 아내인 라헬 (Rachel)과 레아 (Leah)에 비유했습니다. 성경에서 라헬은 용모가 아름답지만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여인으로 묘사되는데, 리샤르는 이를 진리를 갈망하지만 초기에는 영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응시켰습니다. 반면 레아는 시력은 약하지만 다산의 축복을 받은 여인으로, 비록 진리를 명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부족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덕행을 실천해 내는 인간의 감정을 상징합니다.

리샤르는 영적 성장이 이성의 명석함보다는 감정의 정화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레아가 라헬보다 먼저 아들들을 낳는 순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레아가 낳은 첫째 아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며, 이는 영혼이 하나님을 처음 인식할 때 느끼는 ‘두려움 (Timor)’을 상징합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들으심'을 의미하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슬픔 (Dolor)’을 나타냅니다. 셋째 아들 레위는 '연합'을 뜻하며,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 (Spes)’을 상징합니다. 넷째 아들 유다는 '찬양'을 의미하며,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Amor)’이 탄생했음을 보여줍니다. 리샤르는 이 네 아들의 출생 순서를 통해, 영혼이 두려움과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통과하여 소망과 사랑이라는 긍정적 에너지로 나아가는 감정의 연금술을 설명했습니다. 율법주의가 신자를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 즉 르우벤이 상징하는 두려움의 단계에 묶어두어 통제하려 한다면, 신비주의는 이 단계를 반드시 통과하여 유다가 상징하는 사랑과 찬양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영혼이 자유와 완성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감정의 영역이 정돈된 후, 영혼은 감각과 상상력을 통제하는 훈련으로 진입합니다. 이는 라헬과 레아의 시녀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아들들로 비유됩니다. 단, 납달리, 갓, 아셀은 분노를 억제하고, 무절제한 욕망을 다스리며, 외부의 시련을 인내로 견디는 감각적 훈련을 상징합니다. 리샤르는 감각이나 상상력을 제거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고, 이성의 통제 하에 훈련되어야 할 도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내면의 소란이 잠재워질 때, 비로소 불임이었던 이성의 상징 라헬이 자녀를 잉태하게 됩니다. 라헬이 낳은 첫 아들 요셉은 ‘자아 성찰 (Discretio)’을 의미합니다. 감정과 감각의 소용돌이를 통과한 영혼만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 긴 여정의 끝에서 라헬은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습니다. 베냐민은 바로 ‘관조 (Contemplatio)’, 혹은 ‘정신의 이탈 (Excessus Mentis)’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리샤르는 성경의 비극적인 서사를 탁월한 신비적 메타포로 승화시킵니다. 창세기에서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끝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리샤르는 이를 영적 성장의 필연적인 원리로 해석했습니다. 베냐민으로 상징되는 신비적 관조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라헬로 상징되는 인간의 이성이 반드시 그 기능을 멈추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덕을 쌓고 자아를 성찰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까지는 유효하고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초월적인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이성의 죽음은 패배나 소멸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유 방식이 멈추고 신적 직관이 열리는 황홀한 변형의 순간입니다. 리샤르는 이성이 죽지 않으면 관조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역설을 통해, 지성적 노력의 한계 지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비약이 일어남을 강조했습니다.

『베냐민 메이저』에서 리샤르는 이러한 관조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강력한 비유를 도입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 (The Ark of the Covenant)입니다. 그는 언약궤를 단순한 종교적 기물이 아니라, 관조에 도달한 영혼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신비의 방주 (Mystical Ark)로 해석했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는 시은좌 (Mercy Seat)와 그 위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보는 두 그룹 (Cherubim, 케루빔) 천사의 형상은 관조의 여섯 단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도식이 됩니다.

리샤르는 두 그룹 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비상하는 상태를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각 천사에게는 여섯 개의 날개가 있는데, 이는 관조의 여섯 단계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날개는 상상력에 의존하여 피조 세계를 바라보는 단계입니다. 이는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위를 향하는 상태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날개는 이성을 통해 내면과 영적 원리를 탐구하는 단계입니다. 이는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중간 비행에 해당합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날개는 지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이는 구름을 뚫고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고공 비행입니다.

특히 리샤르는 두 그룹 천사가 "서로 마주 보면서도 시선은 시은좌를 향하고 있다"는 출애굽기의 묘사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관조의 최고 단계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합일의 묘사로 해석했습니다. 두 천사가 마주 본다는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과 그 진리를 갈망하는 사랑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되지 않고 아래에 있는 시은좌,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를 향한다는 것은, 이성과 사랑 모두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시은좌는 인간의 노력이 멈추고 하나님의 자비가 선포되는 장소입니다. 이성의 상징인 라헬이 죽고 관조를 나타내는 베냐민이 태어나는 그 지점이 바로 이 시은좌 위입니다.

또한 리샤르는 언약궤를 둘러싼 금테와 고리, 그리고 그 고리에 꿰어진 채까지도 관조 생활의 세부적인 지침으로 해석했습니다. 언약궤의 상단을 두르고 있는 금테 (Corona)는 영적 수행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인 ‘인내 (Perseverantia)’로 해석했습니다. 금테가 언약궤의 가장자리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듯이, 인내는 시작한 선행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며, 이 덕목 없이는 어떤 관상도 온전한 결실을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네 모퉁이에 부착된 금 고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채를 끼우기 위한 기능적 도구로, 관상가가 자신의 내면에 갇히지 않고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개방성’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순종’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이 고리에 꿰어진 ‘채 (Vectes)’는 언약궤를 사람의 어깨에 메고 이동하기 위해 조각목으로 길게 깎아 금을 입힌 막대를 가리킵니다. 리샤르에게 이 채는 관상의 은혜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설교’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상징합니다. 특히 성경이 채를 고리에서 빼지 말고 항상 끼워두라고 명령한 것은, 관상가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자신의 평온한 묵상을 중단하고 이웃을 위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즉, 진정한 신비가는 골방에 숨어 있는 자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채를 통해 거룩한 관상의 빛을 세상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자여야 합니다.

리샤르가 구사한 이러한 풍성한 비유들은 딱딱한 신학 용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신비 체험의 다층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는 야곱의 가족사를 통해 영혼의 성장통을, 언약궤를 통해 영혼의 구조적 완성을 그려냈습니다. 기성 종교가 교리를 화석화된 명제로 만들어 신자들에게 주입하려 할 때, 리샤르는 성경의 이미지를 살아있는 상징으로 부활시켜 신자들 스스로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도록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르우벤의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유다의 사랑을 거쳐 요셉의 지혜에 이르고, 마침내 라헬의 죽음을 통해 베냐민의 황홀경을 맞이하는 영적 순례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순례의 끝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지어진 신비의 방주, 즉 언약궤 위, 두 천사의 날개 아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리샤르가 우리에게 남긴 사랑과 관조의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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