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태양의 찬가

by 이호창

제 3-8장. 프란치스코 영성과 자연 신비주의


3-8.1.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St. Francis of Assisi)와 태양의 찬가



13세기 초 이탈리아 아시시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된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서구 기독교 신비주의의 흐름을 수직적 초월에서 수평적 내재로 전환시키는 거대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수도원 영성이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고자 했다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St. Franc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피조물과의 형제애를 통해 창조주를 만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신을 찾기 위해 인간의 육체나 자연을 부정해야 한다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신의 발자취를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단순한 자연 애호나 낭만적인 감상주의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비움과 가난이라는 신학적 토대 위에서 구축된 치열한 영적 투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자연은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신을 찬양해야 할 전례적 동반자였으며 『태양의 찬가, Canticle of the Sun』는 이러한 그의 우주적 형제애가 응축된 신학적 선언문이자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시대는 상업 자본주의가 태동하며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아버지의 재산과 상속권을 모두 포기하고 알몸으로 거리로 나선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회심을 넘어 시대정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적 소유가 인간과 신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를 단절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소유는 필연적으로 방어를 낳고 방어는 폭력을 부르며 폭력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절대적 가난 (Altissima Poverta)은 결핍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만이 누구와도 적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벌거벗은 존재로 세상에 설 때 비로소 모든 피조물과 벌거벗은 만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자신과 동료들을 '작고 보잘것없는 형제들 (Fratres Minore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명칭은 깊은 신학적 함의를 지닙니다. 프란치스코가 단수가 아닌 '형제들 (Fratres)'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구원이 고독한 영웅의 단독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맺음과 상호 섬김을 통해 이루어지는 집단적 과업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형제'라는 호칭은 수도사들이 원장을 '아버지 (Abbas)'라 부르며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주인 (Dominus)'이라 칭하며 섬겨야 했던 당시 수도원과 사회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위계 질서를 철저히 배격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공동체 내에서 누구도 다른 이의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 한 분 아래서 모두가 동등한 형제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진 '작은 자 (Minores)'라는 수식어는 당시 사회의 지배 계급인 '큰 자 (Majores)'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타인을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권력의지 자체를 완전히 포기했음을 선언하는 존재론적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의 상태에서 프란치스코는 세상 모든 만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에게 태양과 달 바람과 불은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형제와 자매였습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쓴 『태양의 찬가』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큼 아름다운 운율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은 피조물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에게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는 태양을 형제 태양 (Frate Sole)이라고 부르며 그 빛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임을 고백합니다. 달과 별은 자매로서 밤하늘을 수놓으며 바람과 공기는 형제로서 생명의 호흡을 나눕니다.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소중하고 깨끗한 자매로 묘사되고 불은 밤을 밝히며 아름답고 활기찬 형제로 묘사됩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조차도 ‘자매 죽음 (Sora Morte)’이라고 부르며 환대했습니다. 이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범신론과는 명확히 구별됩니다. 프란치스코는 태양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만드신 분을 태양과 함께 노래한 것입니다. 그는 만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이라는 거대한 끈으로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임을 통찰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자연 신비주의는 성육신 (Incarnation) 신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는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물질 세계 전체가 거룩해진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형상을 입음으로써 물질은 더 이상 천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신성이 머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레초 (Greccio)에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재현하여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했습니다. 이는 신의 겸손과 가난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피조물들 안에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이나 둥지를 튼 새들 심지어 늑대와 같은 맹조이제차도 프란치스코에게는 설교를 듣고 회개해야 할 영적인 청중이었습니다. 그는 동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그들도 창조주를 찬양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적인 구원관을 넘어 우주 만물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태학적 영성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카타리파 (Cathars) 이단과 대척점에 서 있었습니다. 카타리파는 물질과 육체를 악마의 창조물로 여기고 영혼의 순결만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심지어 굶어 죽는 것을 최고의 성취로 여겼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는 육체를 형제 당나귀 (Frate Asino)라고 부르며 비록 다루기 힘들고 고집스럽지만 영혼을 태우고 가는 소중한 동반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금욕을 실천했지만 육체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으며 세상을 도피하는 대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했습니다. 카타리파가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거룩해지려 했다면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긍정하고 축복함으로써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의 긍정의 영성은 중세의 어두운 비관주의를 걷어내고 르네상스라는 인간성 회복의 시대를 예비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지성적인 탐구보다는 의지적인 실천과 직관적인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의 대학들이 신학을 논리적인 학문으로 정립하려 애쓸 때 프란치스코는 숲과 들판을 강의실로 삼아 자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했으며 자신의 제자들이 학문에 몰두하여 기도의 영을 잃어버릴까 염려했습니다. 그에게 앎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교만만 키울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은 역설적으로 보나벤투라 (Bonaventura)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를 배출하며 프란치스코의 직관을 심오한 신학적 체계로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평화의 정신은 십자군 전쟁이라는 시대적 광기 속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무슬림을 적으로 규정하고 칼로 정복하려던 당시 기독교계의 주류 흐름을 거스르고 비무장으로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 (Al-Kamil)을 찾아가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술탄을 개종시키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신앙과 인격에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종교 간의 갈등을 폭력이 아닌 대화와 존중으로 해결하려 했던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타자를 적으로 만들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그의 보편적 형제애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늑대와도 화해하고 강도들과도 형제처럼 지내며 세상의 모든 적대적 관계를 사랑으로 녹여내려 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생태적 직관은 오늘날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파악하는 가이아 이론 (Gaia Theory)과 놀라운 접점을 보여줍니다. 제임스 러브록 (James Lovelock, 1919-2022)이 제시한 가이아 가설이 지구를 물리적 환경과 생물체가 상호 작용하며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자기 조절 시스템으로 설명했다면 프란치스코는 이미 800년 전에 이를 영적인 언어로 선취했습니다. 그는 『태양의 찬가』에서 땅을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 (Sora Nostra Matre Terr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가 우리를 돌보며 다양한 과실과 형형색색의 꽃을 생산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는 지구를 단순한 자원의 창고가 아니라 생명을 품고 기르는 모성적 존재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사상은 가이아 이론이 말하는 생물학적 공생 관계를 넘어섭니다. 가이아 이론이 생존을 위한 기능적 연결을 강조한다면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이 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형제자매라는 존재론적 유대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연을 냉정한 시스템이 아니라 서로 돌보고 사랑해야 할 가족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를 통해 현대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윤리적 책임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생태 위기와 인간 소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단순한 성인의 지위를 넘어 예언자적인 울림을 줍니다. 자연을 자원이나 도구로만 바라보는 현대 문명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인간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는 “자연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가족임”을 일깨웁니다. 그의 가난은 끝없는 소비와 소유를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제동을 걸며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존재의 충만함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태양을 형제로 바람을 친구로 물을 자매로 부를 수 있을 때 세상은 삭막한 경쟁터가 아니라 신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지식과 권력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으로 낮아진 구유에서 참된 구원과 평화가 시작됨을 자신의 삶 전체로 보여주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자가 되어 만물과 입맞춤했던 그의 삶은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의 열쇠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생명들 안에 숨겨져 있음을 영원히 속삭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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