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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도전-지리산MT

산행 가이드가 빵구난 후 오합지졸의 대원들-지리산 3박 4일 산행이야기


  tvn 드라마 ‘지리산’ 1편을 보았다. 드라마 시작과 동시에 내가 예전에 가본 지리산의 장터목, 세석, 뱀사골, 노고단 등의 전경이 화면을 꽉 채운다. 반가움과 동시에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

연극배우이자 탤런트인 삼촌에 영향을 받아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는 연극 동아리, ‘아몽’에 첫발을 들였다. 그 후 대학은 경제학과가 아닌 아몽학과를 다녔다. 동아리 특성상 연극을 하기 위해 학기 중에는 연극 연습으로 방학 때까지도 단합 MT로 매일 만나야 하는 우리는 그야말로 일 년 365일 ‘아몽인’이었다.

2학년이 되자 나는 직선제로 아몽의 회장이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어김없이 우리는 MT 장소를 고민하고 있었다. 

  “지리산 가자!”

한 선배가 매우 흥분되고 강력한 어조로 지리산을 추천한다. 

“내가 아주 잘 알아, 내가 가이드할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호! 절반은 해결됐네.’ 

  모두의 찬성 속에서 선배의 제안에 따라 MT 장소는 지리산으로 정해졌다. 들뜬 마음을 안고 기대되는 MT 당일 나는 일부 일행들과 서울역에서 만났다. 기차를 타고 우리는 수원역을 경유하였는데 우리 학교가 수원에 있어 그곳에 생활권을 둔 나머지 부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모두들 신나서 몇 번인지도 모르게 노래를 소리 높여 떼창으로 불러댔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차는 김천역에 닿았다. 

  역에서 선배를 발견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는 지리산 빠꿈이 같은 말만큼이나 특출 난 외모도 주목을 끄는데 한몫했다. 그는 덩치가 나보다도 훨씬 크고 고집 있어 보이는 곱슬머리, 왠지 싸움도 좀 할 것 같은 모습에 대구 억양의 말씨를 갖고 있었다. 흡사 김동광 농구 감독을 닮았다. 아주 짧은 머리에 스포츠형태의 머리 스타일이 약간 올려진 스타일이었다. 아주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에 멋 부리듯 위로 세운 앞머리가 흡사 김동광 농구 감독을 꼭 닮았다. 그의 튀는 외모 덕에 내 시야를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눈에 보여야 할 선배가 안 보인다. 회장으로서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역에서 연극반원들과 수다를 떨었다. 떠들면서도 내 시야는 마치 기브스를 한 목처럼 큰길 쪽으로 고정 돼 있었다. 내 기억에는 역을 등지고 오른쪽 모서리에 상가들이 쭉 형성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보통의 역처럼 큰길이면서 택시 정류장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떤 광경이 투명 유리 보듯 기억되는 것은 기억하는 이에게 잊혀지지 않는 또렷한 사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 차 그때 지리산 함께 갔었던 선배와 동기와 실로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그때 우리 지리산 갔을 때 아무개 형 만나기로 한 역이 있잖아요(있잖아)? 혹시 어디인지 기억하세요(기억하니)?’ 하고 물으면 ‘언제 때 이야기인데 지금 그것을 기억하니’, ‘‘김’ 자는 맞는 것 같다‘, ’하여간 지리산과는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었던 역이었다‘ 등의 반응이었다.

딱히 김천역이라고 정확히 기억하는 연극반원은 없었다. 유추해 보면 이 당시 선배네 집은 대구로 기억되고 그곳과 가까운 김천으로 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딱 봐도 튀는 외모에 선배는 김천역 주변에서 보이질 않는다. 선배네 집에 계속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점차 몇 시간 그냥 흐르고 있었다. 일행들도 다소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참석자 중 두 번째로 서열이 높은 고참 선배가 말한다. 

“지금부터는 회장인 영진이가 앞장서.” 

내가 평소 좋아하는 선배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회장이라 해도 지리산 경험은 전혀 없고 거기다 큰 산에 대한 지식도제로인 내가 이러한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버거운 것이었다. 고민을 뒤로하고 역 앞 모서리에 위치한 책방에 들어갔다. ‘지리산을 가려고 합니다’ 서점 사장님은 지리산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묻는다. ‘서울에서 후미로 출발하는 선배를 백무동 계곡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책방 사장님은 백무동이라는 소리에 매우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지금도 확실히 기억되는 것은 내가 리더를 해야 한다는 심리 때문에 이 사장님에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되돌이표처럼 반복해서 묻고 또 물었다. 거기다 메모도 하고 후에 쓰임새는 둘째치고 사장님의 자상한 안내에 대한 보답으로 지리산 전 코스에 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지도를 거금 주고 샀다. 나에 올곧은 심성으로 봤을 때 저 지도 값은 분명 공금이 아닌 사비였을 것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김천역에서 지리산 백무동 대피소를 다음 지도에서 검색해 보았다. 거리는 약 120km였고 버스 타는 시간만 3시간 30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선배는 단지 자기 집과 가까운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리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일 수도 있고 선배를 그냥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연극반 분위기로 파악해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백무동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자연적인 길도 그랬지만 서울에서 뒤늦게 출발한 후배 한 명을 챙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후배에게 수시로 전화를 했고 그렇게 해서 만남의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모든 일행이 한 사람을 기다릴 수 없는 일이서 나는 두 가지 길을 택했다. 한 사람은 함양에 남고 나머지 연극반원들은 우리의 목적지인 백무동에 가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는 것이었다. 

함양에 남아서 후배 한 명을 챙기고 올 임무는 직전 회장인 나의 일 년 선배가 손을 들었다. 아마도 성격상 충분히 잘난 체하려고 자청한 것이라 판단됐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교통비는 듬뿍 주었다. 함양터미널에서 아무개 만나면 돈 아끼지 말고 택시를 타고 백무동에 오라는 뜻이었다. 이 둘이 이뻐서가 아니라 대중교통 이용했다가 다시 이산가족이 될 것이 신경이 쓰여서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이 백무동 계곡에 도착한 시간은 완전 어둠이 내린 다음이었다. 생전처음 접한 지리산의 풍경을 감상할 만한 여유는 사치였다. 뒤늦게 도착하기로 한 선배 한 분은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당당히 백무동 야영장에 나타났다. 사실 이 선배를 이 당시 멋있게 보게 된 이유가 이런 점에 있었다. 신출귀몰의 홍길동, 무한도전의 돈키호테 같은 선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약속을 어긴 이 선배와는 그 후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이 당시 연극반 예비역 선배들과 대부분 가깝게 지냈는데 아마도 이 사건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지리산은 이것 말고도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다음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산행이 이어지는 속에서 참가자 중에 유일한 여자 동기가 한 마디 했다.


“김영진, 말해봐, 우리가 연극반인가? 산악반인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리고 그날 밤 장터목 대피소에서 하룻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전부 목격했다. 

그날 장터목에 하늘이 뚫렸다고 할 만큼 비가 쏟아부었다. 배낭을 텐트 가장자리에 막고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고 가끔 고개를 들어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좌우로 돌리며 목운동을 했다. 또한 텐트 천장에 수시로 물이 고여 그것을 쳐올리기 위해서 안에서도 계속 밀어야 했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권태스러운 몸짓 그 자체 밖에는 없었다. 텐트 바닥에서는 습기가 아니라 뚝이 무너진 것처럼 물이 배어 올라왔다. 텐트 벽과 천장에서도 습기 이상의 차가운 액체들이 침입했다. 액체들의 활기찬 활동 속에서 기체가 끼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엉덩이와 축축한 바닥 표면과의 마찰 사이로 그만 가스를 배출하고 만 것이다. 소리는 없었다. 단지 냄새가 짧고 강하게 텐트 안을 가득 채웠다. 나에게는 뭐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텐트 안은 범인을 잡기 위해 서로가 수사를 했다. 아무리 결백하다고 주장해도 서로 믿지 않았다. 

이 날 배수로에 물을 빼는 작업과 텐트의 고이는 물을 철거 작업으로 날을 보내야만 했었다. 특히 2인용 텐트는 더욱 좁았다. 텐트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뭐라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텐트의 주인은 나였기 때문이다. 


축축한 몸만큼이나 마음도 싸늘하게 변해갔다. 따스함의 온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신경들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왜냐하면 거의 다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서로의 몸이 닿게 되거나 밀치면 주먹이 바로 날아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적의를 품은 신경들과 축 늘어진 몸들이 함께 뒤섞여 혼란을 야기했다. 비가 너무 내려 배수로를 점검해야 하는데 누구 하나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만 쳐다볼 뿐이다. 선배는 후배에게 후배는 선배에게 고개로 표시를 했다. ‘빨리 좀 나가라고’. 우산과 우의가 있었지만 그 장대비를 뚫고서 작업을 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가서 배수로 작업을 하기가 무섭게 다시 배수로에 물이 넘쳤다. 배수로의 물이 차면 찰수록 서로 간의 불신의 배수로 역시 점점 가득 찼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불굴의 책임 정신과 평소 다져온 인간수양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극 공연에서 음향을 전문으로 하는 선배가 우산을 받쳐주는 임무는 했다.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작업하는 사람은 늘 두 명이었다. 여기서 한 사람은 밝히겠다. 얼마 전에 안타깝게도 고인이 된 무디고 착하고 책임감 강해서 백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선배였다. 날이 밝아 오자 우리의 마음도 차차 밝게 개었다. 다행히도 비가 계곡에 범람하는 속에도 백무동-장터목-천왕봉-칠선계곡에 산행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무사히 산행을 마친 보상은 ‘밀주 막걸리’의 전설적인 맛이었다. 지금도 그 밀주 집을 다시 찾는 지리산 투어를 해보고 싶을 정도이다. 


추억의 사전적 의미는 ‘오래 전의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또는 그 생각이 나 추상’으로 풀이되어 있다. 

“과거의 향기는 라일락 꽃밭보다 향기가 진하다”라고 한 프란츠 투생의 말처럼 지리산의 추억이 2021년 지금 다시 내게 소환되었다. 무모했지만 과감했고 서툴고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젊음의 향기를 깊게 풍기며 나를 들뜨게 한다. 

다만 그때의 지리산 멤버 중에 한 형은 최근에 우리와 영영 이별했고 또 한 형은 현재 투병 중이이서 연락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슬프다.

그 당시 대학 연극반 생활을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 나오는 세르반테스(돈키호테)의 대사로 빗대어 본다.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버리는 것,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는 것이죠.

그것이 진정한 저의 임무이자 본분

아니 특권입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지리산 장터목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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