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가? 生, 老 病, 死 에 대하여...
요즈음 주변 환경으로 인해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주변의 죽음을 내가 목격한 것은 네 번 있었다. 아버지는 파킨슨씨와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셨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도 바로 병이 생기셨다. 그 후 오랜 기간 당뇨 합병증으로 투병하셨다. 그리고 삼십 대 중반에 회사를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죽마고우 친구, 그리고 얼마 전 루게릭병으로 수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과 작별한 나의 절친이자 형이었던 연극반 선배,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을 경험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있어 아버지의 죽음과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의 경우는 긴 투병 생활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연 이 경우가 당사자에게 있어 더 행복한 일이라 볼 수 있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2005년도만 해도 흔히 말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와 같은 사전 연명치료에 대한 동의서를 보호자나 자식들에게 받았다. 나와 형제들도 어느 날 아침 회진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갔다가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형제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의논했었다. 이 당시 형제간에 공통으로 의견이 일치된 점은 엄마가 장기간 투병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치료는 엄마에게 고통과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연명치료에 서명을 안 했다. 그것이 어머니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현대 의학이 발달해서 좀 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엄마를 너무나도 냉정하게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이런 결정을 자식들이 내려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그 당시 엄마는 6인 집중치료실에 계셨는데 환자 대부분이 처음에는 힘들어도 차차 환경에 적응해 갔다. 이때 알았다. 다수의 환자는 환경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법이 개정되어 당사자가 의식이 있을 때 사전동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내가 활동하는 모임에서 "책 쓰기 교실" 프로젝트가 있었다. 주제는 “生, 老 病, 死”이다.
첫 번째 ‘生’은 삶, 탄생의 이야기, 열심히 살아온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나는 “김영진 최초의 프로 기획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성동구청장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이자 지인이었던 분의 선거를 도와 기획을 맡았던 32살 김영진의 열정 이야기이다.
두 번째 ‘老’는 늙어가는 이야기, 낡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주제의 제목은 “성장과 쇠퇴 마라톤과 산행 그리고 무릎”이고 마라톤을 99년부터 시작해서 풀코스 24번 완주를 비롯한 각종 마라톤 대회와 지리산, 설악산을 비롯한 큰 산을 경험했지만, 최근 무릎 시술을 받고도 퇴행성 관절염 2기라는 진단이 내려져 나름 영혼까지 끌어모아 절차탁마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病'은 고장 난 몸, 고장 난 관계 이야기. 평형이 깨진 세계 이야기이다. 제목은 “김영진이 회장을 한다는 것은?”으로 최근 시술받은 이야기와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 현재 다니고 있는 정신의학과 상담 이야기이다.
네 번째 '死'은 죽음, 이별. 떠나는 이야기이다. 제목은 "이별을 준비하는 아들"로 엄마가 떠나기 전 병실에 기록한 나만의 편지 형식의 글이다. 이것은 이번에 쓴 것이 아니고 2005년 4월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겼다.
"生老病死"라는 주제로 글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양가 집안은 종교와 관련하여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사실 날라리 불교 신자이다. 평소에는 절에 간다거나 기도를 하는 일이 없고 산에 갔을 때 절이 있으면 거의 인사차 들리는 차원이다. 그럼에도 아플 때나 무슨 일이 생기면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부르며 빌게 된다. 하물며 일요일마다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종교는 죽음과 관련되어 의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죽음에 대해 강의해 보고 싶다고 한다. 이유는 잘 죽기 위해서다. 즉 '웰다잉'이다.
최근의 이틀에 한 번꼴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알았다. 일상을 누리면서 어딘가를 다니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남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새해가 되면 곧잘 인용하는 시이다. 그런데 말이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러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내가 딱 바위가 된 느낌이다. 요즈음 나에게는 굼벵이에 구르는 재주도 없다. 난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