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은 봉사인가? 오지랖인가? 내려놓기는 가능한가?
엄마의 뛰어난 자본력과 실천적인 뒷받침으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반에서 임원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생활기록부에 성적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도 매우 훌륭하게 기록되어 있다. ‘매사 책임감 강하고 의협심이 많아서 반 친구들 관계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런 문구들로 기억된다. 내 기억에 엄마는 언제나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선생님께 촌지를 주셨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선생님과 엄마가 교무실에서 상담할 때 나도 옆에 앉은 적이 더러 있었다. 엄마가 대화 중에 갑자기 책꽂이의 책 하나를 꺼내신다. 선생님은 엄마의 행동에 시선만 따라갈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윽고 엄마는 꺼낸 책 페이지를 대충 넘기다 어느 페이지에 멈추고 준비하신 봉투를 슬쩍 끼우신다. 그리고 다시 제목이 앞쪽으로 보이게 책을 제자리에 꽂으셨다. 이런 광경을 나는 종종 보았다. 그 시절 촌지 주는 방식은 그랬던 것 같다. 아니면 우리 엄마만의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육성회비도 600원, 450원, 300원, 150원으로 차별 있게 받았다. 그리고 늘 육성회비를 늦게 내는 아이들은 선생님께 혼이 났다. 야단을 맞는 아이들은 주로 육성회비가 낮은 금액의 아이들이었다. 간혹 육백 원인 아이가 육성회비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선생님에 후한 칭찬이 듬뿍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 나는 저학년부터 보이 스카우트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쭉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했다. 이 시절 보이 스카우트를 한다는 것은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행위였다. 외형적으로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이 눈에 띄기도 하고 부의 상징 같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나는 어떻게 4년씩이나 보이 스카우트를 할 수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엄마의 지속적인 후원과 경제력 덕분이었다. 소위 말하는 촌지의 힘은 대단했다. 나는 늘 반에서 반장, 또는 회장을 맡았다. 게다가 이때가 엄마가 탱크, 총, 배 등의 프라모델 모형의 제품을 제작하는 세성(世成) 과학을 경영하실 때였다. 세성과학 유니폼을 맞출 때 내 옷을 자투리 천으로 만들어 주셨다. 와이셔츠, 조끼, 재킷 같은 외투 등이었다. 그 덕택에 패션에서 이목을 끌었다. 즉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부잣집 막내아들, 그게 바로 나였다.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보이스카우트 숫자는 줄어들었다. 5학년부터는 대폭 줄었다. 경제적 부담과 함께 엄마들이 부지런하게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달 적어도 한 번은 야외활동이 있었고 방학에는 성동 전체 지역의 초등학교가 다 모여서 보이 스카우트, 걸스카우트가 함께 하는 캠프나 대회를 엄마들도 몇 박 며칠을 함께 참석해야 했다. 엄마들의 업무는 아이들 식사 준비와 수시 때때로의 간식 제공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극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운동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확실한 취미를 익히는 것도 아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계속 지원해 준 것은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부모 마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5학년이 되어서는 보이스카우트 숫자의 희소성 때문에 난 전교 임원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삼촌이 연극을 신촌 다방에서 했다. 난 엄마와 삼촌의 연극을 자주 보러 갔다. 극장은 다방 한가운데 아주 작은 동그란 무대였다. 무대 크기는 1평 남짓할 정도로 정말 작았다. 보통 2인 극이었다. 보이스카우트 대회에서 장기 자랑 시간이 있었다. 나는 삼촌의 연극에 약간의 응용을 더해서 그대로 따라 했다. 상대방 역할까지 같이 했다. 즉, 1인 2 역이었다. 오른쪽에서 몇 마디 떠들고 바로 왼쪽으로 몇 미터 옮겨서 몇 마디 던졌다. 대사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따발총을 갈기며 무지 빠른 말로 세상에 대한 풍자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대사를 빨리 던졌다. 훗날 생각했다 혹 이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니었을까? 김영진 주연의 연극을 최초로 선보인 셈이다. 그런데 왠지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크게 웃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 결과 나에게 대상이라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장기 자랑은 밤에 했는데 다음날 행사 때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나를 알아보고 눈길을 주셨다. 나의 기분은 말도 못 했다. 겉으로는 표현을 못 했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더욱 즐겁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서는 보이스카우트 군대의 분대장 같은 직책인 보장을 맡게 되었다.
또한 이때 창의적으로 보이 스카우트를 이끄시는 최기호 선생님을 만났다. 운명이었다. 더욱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기획하신 여러 활동들이 있었다. 학교에서 텐트 치고 하룻밤 자기, 스카우트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구명 활동 익히기, 북한산 2박 3일 산행, 관악산 1박 2일 산행, 불암산 같은 숱한 당일 산행이 있었다. 선생님이 산을 좋아하셔서 보이 스카우트와 함께 했는데 몇몇 산행은 6학년들만 참여했다. 내가 결혼할 때 주례를 단박에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래서 선생님 연락처 알기 위해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서울시교육청에 찾아갔다.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를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에는 대학교수님이 주로 주례에 단골이었지만 난 연극반 지도 교수님 외에는 전공과목 교수님과는 특별한 개인적인 인연도 없었다. 그래도 그 당시 교수님에게 주례를 부탁하던 시절이었다.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인연이 있으신 분이 주례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이벤트로 주례가 아닌 내 결혼 이후에도 덕담을 나누고 나의 성장을 나눌 수 있는 분이 주례의 적임자라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보이스카우트 대장 최기호 선생님이었다. 결혼 후에 선생님은 선우 돌잔치에도 모셨다. 그리고 명절 때는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께 인사를 갔다. 선생님과는 주례 이후 훨씬 더 가까워진 듯하다. 선생님의 가치관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에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선생님과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 첫 번째로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보이 스카우트와 전교 임원이라는 완장을 차고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늘 진행요원이 되어 참여할 수 있었다.
중학교, 대학교에서도 나의 회장 직책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초등학교 동기 모임이 만들어졌다. 모임을 처음 개설한 친구가 일 년 하고 다음 해에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 후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한 2007년부터는 각종 모임 또는 동문회에서 총무 또는 기획 국장을 맡게 되었다.
현재 직책은 없지만 그냥 시선과 나름에 정성을 들이는 모임도 몇 곳이 있다. 이런 오지랖의 시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 역시 정말 궁금하다.
오늘 아침에 산책하면서 생각해 봤다. 만약 초등학교 때 엄마가 선생님과의 거래가 없었다면 지금 난 어떻게 되었을까? 마장동의 보통 주민, 보통 개미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우리 지역의 기형적인 부동산 ‘공유지’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 유지를 받들어 그것 또한 현재 18년째 자발적으로 대표처럼 일을 하고 있다. 사실은 김영진이 없어도 그 어떤 모임도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오지랖의 성격으로 이것저것 맡아서 본인에게 과도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여러 모임의 회장을 하고 있다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것인가?
“‘회장을 하면 니 사업에 도움이 되는 거니?”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런데 회장이 되면 나와 관련된 업무를 찬조나 현금 후원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실질적으로는 회사 매출에는 마이너스였다. 초등학교 동문회에서 S 그룹 회장을 만나 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유일무이하다 싶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다 보니 가장 큰 단점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참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가을부터 올해 일월은 하루 일과 시간에는 각종 모임과 관련한 일을 진행했고 밤에는 야근으로 회사 업무를 했다. 예전에는 몸에서 반응이 없었는데 요즈음에는 곳곳에서 자극하여 신호를 보낸다. 급기야 병원 입원 신세까지 졌다.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전문의가 정신과 상담을 권유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정신의학 건강 센터에 갔다. 이때 알았다. 현대인은 참으로 많이 아프구나, 그것도 모두 ‘마음’ 이 아픈 사람들이었다. 대기자석에서는 고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넘쳐났다. 일반적인 내과에 비해 상담 시간이 긴 것도 이유가 있겠지만 대기자 수와 상담하는 의사의 숫자도 내과보다 몇 배가 많았다.
의사가 묻는다.
“김영진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일까요?”
“오지랖입니다”
“어떤 오지랖입니까?”
“지역에 각종 모임에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의사와 함께 내가 맡고 있는 회장을 하나씩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읊어갔다. 경성라이온스 클럽 회장, 동문회 산악회장, 대학원 동기회장, 경제공동체 위코노믹스 성동지회장, 마장도시재생 주민대표, 마장주민자치회 회장, 마장 장학회장, 마장 497-12 외 14개 필지 공유지 분할 대표, 회장 또는 대표를 맡고 있다. 또한 성동구상공회 부회장이면서 문화예술위원회 문화 대장, 일반적인 모임에 사무총장을 장기간 맡고 있다. 올해는 순차적인 순서가 되어서 CEO 과정의 모임의 총무를 두 개를 맡고 있다. 또한 지역의 지인들과 함께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서 협동조합을 창업했다. 이사장을 내가 맡아야 했지만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아내가 감투를 이어받게 되었다.
의사가 다시 묻는다.
“이 숱한 모임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모임은 무엇인가요?”
“현재는 협동조합과 공유지 분할입니다”
그래서 두 개에 모임에 대한 시작과 현재의 과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럼 그것부터 거리 두기를 권유합니다. 김영진 씨가 지금까지 생활해 온 각종 모임에서 꼭 필요한 사람, 즉 임원이 아닌 그냥 단순한 회원으로 참석해 보기를 제안합니다. 아무런 역할이 없는 회원 말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모임에 역할 줄이기부터 시작이 처방입니다”
사실, 일차 목표는 올해 연말에 대부분의 회장 직책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좀 더 서둘러야겠다. 난 오로지 마장에만 관심이 있다. 그것도 서마(경원선을 기준으로 서쪽의 마장동) 쪽의 공유지 분할만 신경 쓰다가 마장도시재생 주민대표와 마장주민자치 회장을 맡으면서 전체 마장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갔다. 몇 년 전 대학 연극반 선배가 ‘영진아 마장을 떠나서 생각하고 살아봐’ 그랬는데 지금은 오히려 한 발 더 푹 들어간 모양새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 있든 마장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직책과 마음을 정리해 보자^^
마무리로 요즈음 내가 자주 인용하는 건배사를 인용한다. 소취하, 마취평(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마장에 취하면 평생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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