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 속에 허락된 새로운 경험
태국 치앙마이에서 무에타이 경기를 구경하던 날, 나는 한 경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한쪽에는 앳된 소년, 다른 한쪽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남성이 있었다. 마치 고등학생 아들과 아버지가 대결하는 듯한 모습. 그 순간 나의 학창 시절, 그리고 권투 체육관에서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 눈앞에 추억의 링이 펼쳐진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갑작스레 전두환 정권의 국보위가 과외 금지령을 선포했다. 사교육이 전면 금지되었고, 다니던 왕십리 대영 EMI학원도 방학 동안 다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포의 분위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음악, 미술, 체육은 금지령에서 제외되었다. 이때 알았다. 예체능은 금지령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친구가 내게 권했다. "우리 권투 다닐까? 좀 멋질 것 같지 않냐?"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단연 복싱이었다. 가족들이 TV 앞에 모여 세계 챔피언전을 응원했고, 때론 친구들과 함께 보거나 공장 아저씨들과 마당에서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4전 5기 홍수환, 테크니션 박찬희, 무쇠주먹 김태식, 돌주먹 박종팔, 지구력과 맷집 장정구 같은 선수들은 국민적 영웅이었다.
우리 집에서 중앙시장 쪽으로 가면 왼쪽은 청계천 하류이다. 지금의 성동보건소 (옛날 경찰병원)를 지나면 첫 번째 사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가 바로 양지사거리이다. 바로 옆에 양지시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쪽에는 청구상고가 있었다. 마장 청계 주변에는 1930년대부터 야채시장이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야채 시장 주변에 하나둘씩 국밥집이 생겨났다. 설렁탕 원조라고 티브이에 소개된 옥천옥, 우거지가 잔뜩 들어간 선지 해장국이 유명한 대중옥, 이름은 낯설지만 깊은 맛으로 미식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닭내장탕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이들이 양지사거리 근처에 청계천변을 끼고 있었다.
체육관은 양지사거리에서 전통의 식당들과 반대편 쪽에 위치한 “원진체육관”이었다. 삼층에 위치한 체육관 문을 열자마자 정면 창가 쪽에 놓인 링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거울이 가득했다. 거울은 권투를 배우는 필수 요소였다. 거울을 보며 줄넘기, 스텝, 스트레이트, 어퍼컷을 익혀야 했다. 권투는 거울을 보며 폼을 잡는 운동이었다. 거울에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챔피언의 꿈을 꾸는 것이었다.
첫날, 코치는 붕대 감는 법부터 가르쳐 주었다. 왼손 바닥에 몇 번 감은 뒤, 손가락 사이사이를 지나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줄넘기를 배웠다. 처음에는 팔을 크게 휘저으며 엉성하게 돌렸다, 코치는 내게 양팔을 몸에 붙이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친구는 처음부터 능숙했다.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난 줄넘기를 익히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때부터 제법 나도 줄넘기로 한쪽 다리도 올리고 양쪽 다리를 번갈아 스텝을 밟으며 줄넘기를 할 줄 알게 되었다. 허리를 숙였다 올렸다를 반복하며 줄넘기를 했다. 권투 체육관에서 실제로 키운 실력은 권투가 아닌 바로 줄넘기였다. 난 그 맛에 취하고 매료되었다.
권투의 모든 훈련은 3분 라운드 단위로 진행됐다. 줄넘기를 5~7라운드 정도 뛰고 나면 스텝 연습이 이어졌다. 45도 각도로 몸을 틀어 기본자세를 익히고, 양손을 얼굴 가까이 올린 상태로 스텝을 밟았다. 이후 원-투-쓰리 스트레이트를 배우며, 마지막에는 허리를 돌려 강한 펀치를 날리는 법까지 익혔다.
운동은 두 시간이 기본이었다. 그 당시 운동 후에는 샤워를 했지만, 샤워기는 없었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받아 놓은 물로 몸을 씻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게시판에 학원 수강 명단이 적혀 있었다. "체육 - 원진 체육관 - 권투 - 김영진." 권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내 이름이 보이자 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덕에 나를 쉽게 건드리는 친구는 없었다. 권투 체육관의 효과는 꽤나 강력한 펀치였다.
처음엔 폼이 엉성해 억지로 다녔지만, 점점 권투에 빠져들었다. 겨울방학에도 다시 체육관을 찾았고,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깨달았다. 과외금지령으로 제한된 조치가 오히려 새로운 경험과 기회를 제공해 내 인생에 특별한 경험이 추가되었다는 것을.
훗날 내 아이들도 권투를 배웠다. 그 시절 나처럼, 권투를 배우며 자기 자신을 단련할 수 있도록. 몸치인 아빠와는 다른 세련된 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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