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제목은 익숙했지만,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85세 배우가 3시간짜리 연극을 이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세일즈맨의 죽음’을 꼭 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다. 이는 몇 년 전 85세 이순재 배우의 ‘리어왕’, 그리고 얼마 전 85세 전무송 배우의 ‘파더’를 통해 노배우들의 연기를 감명 깊게 본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 작품 중에서도 ‘세일즈맨의 죽음’이 가장 뛰어났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연극을 봐왔지만, 이 작품은 손꼽히는 명작이었다.
문화자본과 연극의 영향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정의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중에는 어릴 때부터 체화되는 형태가 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문화자본이 풍부한 편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삼촌이 공연하는 연극을 신촌의 다방에서 보곤 했는데, 작은 원형 무대에서 탈을 쓰고 펼쳐지는 ‘흥부전’ 같은 연극들이 내 문화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덕분에 내 문화자본의 상당 부분은 연극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연극을 봤음에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연 압권이었다.
연기와 연출의 완벽한 조화
아버지 윌리 로만 역의 박근형 배우, 그리고 첫째 아들 비프 역의 박은석 배우의 연기는 가히 최고였다. 박근형 배우는 나이를 잊게 만드는 발성, 몸짓, 블로킹, 그리고 압도적인 대사 전달력으로 ‘대배우’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엄청난 대사량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연기를 이어가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또한, 첫째 아들 역할의 박은석 배우 역시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아버지와의 대립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희곡의 배경은 194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의 한 가정 이야기지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통 단절, 가정 내의 갈등, 직장의 실직 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이다.
가족 간의 소통 부재와 현실의 냉혹함
아버지 윌리는 평생을 몸담았던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과거 사장의 어린 시절 이름까지 지어주었던 인연이 있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한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곳에서도 이제는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특히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의 친구 찰리가 남긴 대사는 현재 사업을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모자가 더러워지고, 그걸로 끝장이 나는 거야. 이 사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그게 필요조건이야."
이 대사는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의 본질과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윌리의 절망적인 삶과, 찰리가 말하는 세일즈맨의 현실이 교차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대학생 시절 이 연극을 봤다면 지금처럼 강한 울림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며,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 속 이야기와 감정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의 진정한 대화란 무엇인가?
연극을 보며 스친 생각 중 하나는, 아버지 윌리와 비프가 격렬하게 충돌하지만, 사실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둘 다 진솔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허풍과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가정에서 가족 간의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얼마나 진실되고 솔직하게 소통하고 있을까? 허상과 기대만으로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진실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대화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연극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였다.
연극적 연출과 무대의 효율성
놀랍게도 이 연극의 시간적 흐름은 단 하루에 불과하다. 다만, 윌리의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과거 회상이 삽입될 뿐이다. 무대 전환은 기존 윌리의 집에서 네온사인을 이용해 호텔, 바, 사무실로 변화하며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소품을 크게 이동하지 않고도 공간이 바뀌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단역 배우들조차도 모두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윌리 로만, 마지막 세일즈를 하다
윌리는 자신의 죽음을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마지막 세일즈로 선택했다. 그는 보험금 2만 달러를 가족에게 남기며, 자신의 장례식에는 옛 직장 동료들과 많은 조문객이 올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그는 평생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았고, 결국 죽음마저 자본주의적인 계산 속에서 선택했다. 이 아이러니한 설정이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
유튜브와 숏츠 같은 짧은 영상에 익숙한 나에게 3시간짜리 연극은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운이 더욱 깊게 남는다.
아버지 윌리의 대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는 것보다 죽어서 더 가치 있는 인생이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
"이제 주택 할부금융도 끝나서 드디어 자유로워졌는데 당신은 왜 그랬어요?"
대조적으로 윌리의 부인 린다가 묘비 앞에서 울부짖으며 내뱉은 이 마지막 대사는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김영진,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당신의 가치가 빛나도록 반짝이는 꿈을 파는 나는 세일즈맨이다. 영원히 미소 지을 수 있는 세일즈맨이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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