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면 어떻고 곰이면 어때!
페르소나가 필요해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의 목소리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나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솔쯤 되는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친절한 며느리로 변신하여 연신 "네, 어머님"을 반복한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정말 좋은 며느리냐? 그게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불평불만이 많으면서 바라는 것도 많음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내게 솔직히 얘기했던 친구다. 그러나 어머님 앞에서는 '착한 며느리'라는 가면을 쓰고 친절한 며느리를 연기한다. 여우주연상 후보로도 손색이 없다.
예전에는 그런 (상황, 대상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는, 혹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살짝 거부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무척 친절하게 웃음을 띠고 있지만, 없는 자리에서 180도 다른 속마음을 내비쳐 진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굳이 속마음과 너무 다르게 가식적인 행동을 하느니 차라리 없는 자리나 있는 자리나 한결같이 일관된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직장에 다니면서 남녀를 떠나 팀장님이 계신 자리에서는 갖은 친절과 낮은 자세로 팀장님께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팀장님께서 자리에 뜨는 순간 험담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진 않았다.
'여시'같은 여자들을 친구삼지도 않았다. 보통 비슷한 친구들끼리 다니다 보니 내 주변의 친구들은 다소 무뚝뚝하고 솔직하고 애교와 가식이라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쾌한 성격의 친구들이 많았다. 흔히 말하는 '곰'같은 성격이다. 전화하는 걸 들으면 상대가 연인 인지, 친구 인지, 직장 동료인지 가늠이 안된다. 목소리 톤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에 존댓말의 여부와 내용을 들어야 통화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 딴에는 곰 같은 '우리들'이, 한결같은 우리들이 좀 더 좋은 여자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발음, 얼굴의 표정 등이 달라지는 그녀들은 언제고 가면이 벗겨지면 본인마저 민망한 상황이 생길 거라고 여겼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본래의 자신을 숨기고 가식적인 행동을 해서 얻고 싶은 게 뭘까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들이 여시라는 것, 가식적인 친절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는 이미 많이 눈치채고 있었다. (곰들은 눈치도 느리다.)
가면을 써서 흉내라도 내보는 친절함, 배려, 아부, 애교 등을 사람들은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곰보다 여우가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자신의 불편함, 솔직함을 뒤로 둔 채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적절히 가식적인 친절을 보이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나쁘게 볼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진짜 나쁜 마음으로 사람 꼬셔서 뒤통수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이 순간, 저 순간 얼굴과 표정과 말투를 바꾸며 여러 개의 가면을 쓰는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어여삐 봐줄 만도 하다. 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봐주면 되는 거지, 여시니 어쩌니 따질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렇게 가면을 쓴 채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쓴 다면 언젠가는 가면 없이도 가면 속의 누군가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나이가 좀 들어보니 상황에 따라 '가식'적인 행동과 말투를 해야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해를 주려고 한 게 아니라 좋은 직장 동료,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친구, 좋은 학부모가 되고 싶은 나의 바람이 담겨있음을 알아채게 되었다. 물론 십수 년간 지내온 성격이 갑자기 바뀔 수도 없고 여전히 누구에게나 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대하는 '곰'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연에 가까운 나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단 조금 더 정돈되고 다듬어 놓은 가면을 꺼내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건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친절함과 배려 깊은 솔직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겠지만, 우리는 모두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적절한 가면을 써야 사회도 유지되는 게 아닐까. 세상 모든 사람이 솔직함을 무기로 민낯을 드러내고 산다면 그게 바로 정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곰처럼 우직하게 늘 한결같은 건 내 마음만 편했지, 민첩하게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겨 원하는 방향으로 리드하는 여시를 주변 사람들은 더 좋아한다.
나도 좀 갖고 싶다.
그 능력.
추석이 다가오니,
더 갖고 싶은 능력이다.
추석...
나 떨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