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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식 Oct 09. 2023

찌그러진 천장

 여고 2학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어머닌 막내 동생을 집에서 출산 했다. 마침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닌 혼자서 출산을 시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산고는 극심했다. 얼마 후 어머니 입에서 단말마 같은 비명 소리가 터지는 동시에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태어난 아기는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지금도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 경험도 없었던 필자가 어떻게 어머니 산바라지를 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하다. 신생아인 동생은 태반에 이어진 탯줄이 배꼽과 연결돼 있었다. 이 때 소독한 가위로 탯줄을 잘라 아기 배꼽 위에 올리고 알콜로 소독을 한 후 붕대를 친친 감았다. 당시 막내 남동생 출산을 곁에서 지켜보며 어머니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철부지였지만 새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아기가 태중에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랐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인체인 배꼽은 우리 몸에 남아있는 어머니 흔적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어머니 자궁 일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승희는 글 「여성 이야기」에서 “배꼽은 나의 우주 중심이며 과일 꼭지처럼 모든 것이 출발하며 완결 되었던 곳”이라고 일렀다. 그러고 보니 김승희 언술처럼 배꼽은 과일 꼭지처럼 인생사 출발점이자 잉태된 한 생명을 완성으로 이끈 곳인지도 모르겠다. 필자 역시 가끔 배꼽을 매만질 때마다 그곳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자식은 어머니 분신이다. 더구나 태어난 새 생명은 얼마나 존귀한가? 초롱초롱한 눈빛, 앙증맞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과 발, 잠든 아기 모습은 또 어떤가. 세상사 속진俗塵이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아기 표정은 평화 그 자체 아니던가. 이렇듯 귀엽고 사랑스런 새 생명을 태중에 열 달 동안 잉태 했다가 탄생케 한 어머니 모성은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위대하다.     


 하지만 숭고한 모정이 친자식인 영아를 살해하고 그도 모자라 냉장고에 그 시신을 수년간 저장했다는 언론 보도는 많은 이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천륜을 저버린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태어난 지 40일 밖에 안 된 아기를 친모가 학대하여 숨지게 했다. 자애롭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어머니가 오히려 자식 목숨을 해한 이 비정함을 그 어떤 말로 비판 할 수 있으랴. 울산에선 쓰레기장에 영아를 버린 인면수심인 어머니도 있잖은가. 유행가 가사 대로 도대체 세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핏줄인 귀한 자식 생명마저 파리 목숨만큼도 안 여기는 세태에 이르렀단 말인가.     


 영아 시신을 냉장고에 저장한 여인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 아기 두 명을 살해했단다. 살기 힘들다고 태어난 새 생명을 살해 하고, 한편 유기도 하다니…. 이게 어떻게 어머니로서 변명할 말이 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드는 게 이 세상 어머니 아니던가. 필자 어머니는 지난날 가난과 온갖 고초 앞에서 살을 저미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우리를 양육 했다. 평소 밥상머리 교육은 엄격했고 무엇보다 사람답게 성장하는 덕목에 최선을 다하였다. 어머니는 혹한에 누덕누덕 기운 내의를 입으면서도 자식들은 남 앞에 꽃처럼, 새로 돋는 잎처럼 보이게 하려고 철마다 옷감으로 직접 옷을 지어서 입혔다. 당신은 몰래 부엌에서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메워도 보리밥일지언정 자식들에겐 밥을 먹게 한 어머니다. 또한 양식은 못 구해도 우리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은 망설임 없이 사주곤 했다.     


 지극한 어머니 자식 사랑은 어떤 위험이나 위협, 심지어 가난으로부터 조차 우리들을 보살피는 보호막으로 작용 했다. 우리들 앞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당신 몸부터 내던져 그것을 온몸으로 막았고, 삶의 살얼음판도 당신 먼저 앞장서 걸었다. 이런 어머니에 반하여 이즈막 자식을 살해하고, 불결한 쓰레기장에 아기를 유기한 어머니 이야기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며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다.     


 자식을 살해한 여인은 ‘애초부터 병적인 심리를 지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겐 ‘찌그러진 천장’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은 어머니 이슬을 먹고 자라잖는가. 그러나 이렇듯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인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 할 수 없을 터. 요즘 지탄指彈 받아 마땅할 뉴스를 대하며 이 말을 다시금 상기해 본다. “ 찌그러진 천장 밑에서 큰 아이는 마음이 찌그러진다.”가 그것이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부모님 사랑과, 관심이 최우선이다. 이것은 어린이를 양육할 때 부모가 행하여 할 변함없는 진리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한 아이가 훗날 가슴에 온기를 지녀 타인에게도 사랑을 베풀 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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