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각 실패-
‘계집 죽고/ 자식 죽고/ 망근 팔아 장사하고/ 뻐꾹뻐꾹 뻐꾹새야 / 숲에 숨은 뻐꾹 영감 / 짚신 팔아 술 사먹고/ 목이 말라 못다우나 / 뻐뀩 소리 왜 그치노….’ 전래 민요다.
처연한 뻐꾹새 울음소리에 밤이 깊어지자 어머닌 마음이 심란한지 화각 실패에 무명실을 감으며 귀 너머로 들어온 이 민요 한 자락을 입 속으로 가만히 부른다. 실패에 감긴 실을 바늘에 꿰어 홈질• 공그르기• 감침질• 박음질• 상침질….갖가지 기법으로 옷을 깁는 어머니였다. 그때마다 어머니 곁을 지킨 귀한 물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화각( 쇠뿔 조각) 실패였다.
외할머니는 수백 마지기 농토를 지녔던 부농의 안주인이었다. 무엇보다 화각실패는 산호 노리개 못지않은 귀물로 경주 김씨 대종손 맏며느리인 외할머니의 위엄을 한껏 지키게 하였다. 귀하디귀한 것이기에 외할머니는 그것을 어머니 혼수에 넣었나보다. 어머니는 그것에 감겨진 무명실로 우리들 옷을 바느질했다. “ 베 고의에 방귀 나가듯 한다.” 라는 속담처럼 아버지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도록 여름이면 성근 삼베로 바느질한 고의적삼을 아버지 앞에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입성은 몇 년 묵은 헌 적삼을 걸치면서도 아버지 옷이나 우리들 옷은 늘 며칠 밤 뜬눈으로 지새우며 새 옷을 지어내곤 하였다. 아버지 고의적삼은 참으로 잔손이 많이 가는 옷이었다. 어머닌 서른 자 삼베를 물에 푹 담가서 구정물을 빼내었다. 양잿물을 밭혀 가라앉힌 물로 때를 가셔내었다.
그리곤 볕에 널어 삼베가 축축한 듯 말라갈 때 무명 보자기에 싸서 발로 꾹꾹 밟았다. 그런 후 삼베 올이 꼿꼿하도록 다듬이질을 하여 첫 손질이 끝나면 대청마루에 앉아 마름질을 하였다. 소맷동. 앞 길, 뒷길, 겉섶, 깃, 큰 사폭, 작은 사폭, 마루 폭, 허리 등속을 자른다. 이렇듯 복잡한 마름질이 끝나면 어머니는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바느질을 했다.
옷을 깁기 위해 어머니께서 공을 들일 때마다 화각 실패에 감겨진 무명실이 금세 축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닌 읍내 장에서 사온 무명 실타래를 우리들 두 팔에 끼우고 실마리를 찾아 화각 실패에 실을 감곤 하였다. 어머니가 실패에 실을 감는 동안 지루함을 참지 못하여 한껏 입을 벌려서 하품을 해대기 일쑤였다. 하여 팔이라도 내릴라치면 실타래가 형편없이 엉켜서 어머니께 꾸중 듣기 예사였다.
어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 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온 신경을 바늘 끝에 쏟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눈에도 마냥 아름답게 비쳤다. 가족들의 입성을 장만하며 늘 우리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의 의지가 오롯이 배인 옷이기에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우리들 모습은 늘 남 앞에 꽃처럼 환했다. 가족들 날개를 완성 시키는 무명실이 감겼던 화각 실패이다. 바늘과 실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아닌가. 하지만 요즘은 공장에서 다량으로 만든 기성복에 떠밀려 그 효용 가치를 상실했다.
이젠 그 어디에서도 호롱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 하는 여인네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예부터 바느질은 여인이 갖춰야할 가장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낮에 들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잠이 짓누르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뜨며 가족들 옷을 바느질 하였다. 요즘은 어떤가? 양말 코가 떨어져 나가도 쓰레기통에 버리는 세상이다.
필자 역시 아녀자 솜씨를 돋보이게 했던 바느질 도구인 화각 실패를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아 안방 반짇고리에 보물처럼 모시고 있다. 필자는 친정어머니처럼 바느질 솜씨는 뛰어나지 못하다. 하지만 마음이 까닭 없이 허허로울 때면 화각 실패를 바라보며 한 땀 한 땀 구멍 난 내 마음을 촘촘히 기우련다.
* 위 글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는 옛 것을 재조명 하며 쓴 글로써 저서<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에 수록된 글이기도 하다. 이것을 뉴질랜드 교민지 '위클리 코리아'로부터 원고 청탁이 와서 그곳에 절찬리에 연재중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