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식 Dec 20. 2023

코딱지와 모래성

 

                                                                   

 마술에 홀린 것은 열세 살 무렵이었다. 이것은 마치 최면술로 둔갑이라도 한 듯 제 요량껏 필자를 조종하였다. 가슴을 온통 분홍빛 물감으로 젖어들게 하는가 하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마냥 필자를 흡인 시켰다. 이 때문에 자나 깨나 눈앞에 아른 거리는 모습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듯 혼미한 정신 상태였기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은 귓등으로 흘려듣기 예사였다. 그토록 가슴을 한껏 핑크빛으로 채색했던 아가페 적 물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깡그리 퇴색되는 위기를 불러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때 교회 여름 야외 캠프장에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주랑 함께 참석한 교회 캠프장 장소는 경기도 송추 어느 한적한 야외였다. 마침 참가자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분주할 때다. 영주 오빠가 내게 다가와 도와 줄 일 없느냐고 물어온다. 

  그 때까지 만해도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체취에 도취돼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또한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이 탓에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가슴 역시 심히 두근거려 대답도 미처 못 한 채 얼결에 그 말에 고개만 끄덕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육학년 여름 방학 때다. 이웃에 사는 영주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친구 오빠를 대했다. 그는 첫인상이 흡사 명장이 빚은 조각처럼 이목구비가 수려했다. 훌쩍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 전부인 단단한 몸매는 어린 마음에도 첫눈에 반할만큼 매력적이었다. 이후 그는 무척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였다. 근처 빵집에서 단팥빵이며 꽈배기를 한 보따리씩 간식으로 사주곤 했다. 틈만 나면 숙제를 핑계로 그를 보기 위해 친구 집을 드나들었다.

  조숙했나보다. 한창 순정적인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여서인지 영주 오빠를 본 이후로 은밀한 마음을 남모르게 숨긴 채 혼자 냉가슴을 앓았다. 영주네 집 마당은 꽤 넓었다. 마당 한구석에 아령 및 역기를 놓고 그가 틈틈이 운동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아령을 들고 운동 할 때마다 굵은 팔뚝에선 근육이 불끈 솟아오르곤 하였다. 순간 강인한 남성미를 느낀 나는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영주 오빠는 이런 마음을 전혀 눈치 못 챈 듯했다. 운동을 마치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

  날만 새면 아침 일찍 친구 집에 놀러가서 하릴없이 영주랑 수다를 떨곤 했다. 그리곤 괜스레 그의 방 앞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였다. 이 때 나의 눈길은 영주보다는 그를 찾기에 여념 없었다. 이런 혼자만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애간장을 녹였다. 급기야는 밥맛도 없고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곤 하였다. 그야말로 상사병에 걸렸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짝사랑의 신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었다. 그토록 열렬히 친구 오빠를 사모하는 마음을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 이것을 신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더는 애태우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다는 말이 꼭 맞을 성 싶다.

 그날 교회에서 개최한 여름 캠프 야외 행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영주랑 나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날이 밝은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기 위하여 야영장에 있는 우물가를 찾았다. 절묘하게도 그 시간에 영주 오빠가 내 쪽을 향해 걸어 왔다. 그리곤 나를 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위하여 펌푸 물 좀 퍼달라고 청해온다. 그 말에 떨리는 손으로 힘껏 펌푸 물을 펐다. 


  펌푸 물로 세수를 마치자 그는 목에서 수건을 풀더니, ‘툭툭’ 털은 후 부지런히 얼굴 물기를 닦는다. 그러면서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을 걸어올 때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의 오른쪽 콧망울 옆에 참깨 알보다 세 배는 큰 시커먼 코딱지가 떡하니 붙은 게 눈에 띠었다. 그것을 보자 그동안 영주 오빠에게 향했던 뜨겁던 마음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황홀경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우주가 되어주기도 했잖은가.


 그는 화장실도 안 갈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순수 시절 철부지 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토록 맹렬히 불타오르던 사랑의 불꽃이었다. 그 온도는 아홉 살 때 처음 만난 베아트리체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온 단테의 그리움보다 더욱 강렬하고 또 뜨겁다고 자부해온 나 아니던가. 한낱 그의 얼굴에 붙은 코딱지 때문에 향했던 지고지순한 마음이 돌연 싸늘히 냉각 된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그가 내 앞에 나타나서 얼굴에 코딱지를 붙일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일로 말미암아 짝사랑에 눈멀었던 마음이 일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절름발이 사랑이었던 짝사랑은 이리 허무히 막을 내렸다. ‘돌봄의 마술사’라고 일컫는 사랑의 속성을 당시엔 철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면 궁색한 변명일 터. 하지만 이즈막 돌이켜 보노라면 잠시나마 한 남성에게 쏟아 부었던 그 순백의 열정이 왠지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여자는 마지막 남자를 기억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결단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어느 사이 나의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해서인가보다. <끝>



작가의 이전글 아낙의 보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