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기차표를 샀다

굳건한 마음으로 취소불가 옵션을 선택했다

by 정번영

'결제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깨달았다. 출발일이 내일이라는 것.

나는 한국에 있고, 출국 비행기는 다음 주 월요일이다.

내일 오후 3시 55분에 프랑스 님에서 떠나는 떼제베 기차는 2등석의 좌석 두 개를 비워둔 채

철컹철컹... 덜컹덜컹... 바르셀로나로 향하겠지...


2주 전, 엄마가 갑자기 유럽 여행을 가자고 했다. 5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할지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딸과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곧 결혼을 해서 남편이 생기고, 또 아이가 생기면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가기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에 (진짜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와이낫? 항공권 사이트를 뒤져서 괜찮은 금액의 파리 직항 편을 예매했다. 내가 진짜로 결혼을 하는 건 아니고... 그래도 곧 결혼을 할 거라는 엄마의 믿음에서 비롯된, 사실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는 모녀여행은 그렇게 결정됐다.


항공편을 예매하고 한동안은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여행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번주 월요일, 그러니까 출국까지 1주일을 남겨둔 시점에서야 겨우 숙박, 이동 수단, 간략한 여행 동선을 계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 월요일 파리로 떠나 니스, 무스티에 생트마리, 아비뇽 등의 남부 도시들을 지나,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17박 19일의 일정이다.


숙소예약부터 쉽지 않았다. 폭풍 써치 후 가격이 적당하면서도, 시내와 거리가 멀지 않고, 엄마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추려 엄마에게 카톡으로 이미지와 각 숙소의 장/단점을 정리해서 보내면 '잘 찾아보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미 잘 찾았어!!!라는 말을 꾹 참길 잘했지. 결국 엄마는 봐도 잘 모르겠다며 숙소 결정권을 나에게 넘겼다. 아차차... 이 여행의 많은 것을 좌우할 요인을 미리 적지 않았는데 여행 경비는 모두 엄마 주머니에서 나올 예정이다. 언제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삼십 대 중반의 딸과 함께 가는 유럽여행에 모든 경비를 대는 어머니라니. 게다가 엄마는 패키지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패키지여행이라면 안 간다고 으름장을 놓던 지난날의 나 때문에 선택한 자유여행이 아닌가. 그 딸은 엄마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아름답고 안전한 여행을 제공할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 스물두 살 때도 엄마와 유럽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엄마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히피처럼 집시처럼 여행을 주도한 까닭에, 나랑 여행을 가면 개고생이라는 엄마의 오해(?)를 풀 기회이기도 하다.


숙소 결정권을 갖게 된 후로 파리, 니스, 무스티에 생트마리, 아비뇽까지의 숙소와 파리에서 니스로 가는 기차표를 시원하게 갈겼다. 여기까지가 수요일까지의 진행사항이다. 이제 남부프랑스에서 다닐 렌트카와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는 기차표를 끊을 차례였다. 어디에서 기차를 타느냐에 따라 렌트카의 드롭오프 장소도 달라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마르세유, 님, 아비뇽, 어디에서 기차를 타는 옵션이 가장 좋을지 고민하다가, 님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가장 저렴하고 시간도 아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프랑스에서 마지막 날, 아비뇽 숙소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차를 타고 님으로 건너가 반나절 동안 님을 구경한 뒤, 차를 기차역 근처에 드롭하고, 기차를 타고 스페인으로 넘어가면 되겠다! 아주 훌륭한걸? 좋아좋아 출국까지 나흘 남았으니 어서 진행시켜야지.'


내 정신 상태가 그랬다. '어서' 진행시켜야 한다는 약간의 조급함이 일을 그르쳤다. 이전까지 예약할 때 더블, 트리플로 체크하던 날짜도 다시 확인하지 않고, 취소/수정 가능 옵션을 두 눈으로 보고도 취소나 수정할 일이 없을 거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첵첵첵 퀵퀵퀵 예약을 해버렸다. 그리고 e-티켓을 확인한 순간 (서두의 문장은 사실 과장이었지롱) 내 눈에 믿을 수 없는 출발일이 보였다. 3월 23일... 내일이잖아... 취소/수정 버튼은 아예 비활성화되어 있고, AI 챗봇은 어떤 입력어를 써도 취소/수정을 할 수 없는 예약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고... 헬프센터에 수기요청을 보내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에어비앤비보다 호텔에 묵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정확히 무슨 상품인지는 알 수 없지만 3월 만기인 투자형 적금이 손해가 났다고 한다. 무려 1500만 원을 잃었다는 엄마에게 실수로 20만 원짜리 기차표를 잘못 예약했으니 엄마는 1520만 원을 날렸다고 알리는 내 마음은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3월에 돈을 찾으면 여행도 가고, 지금 다른 지역에 임시 거처를 두고 지내고 있는 아빠에게 원룸도 얻어줄 생각에 가뿐했던 엄마의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았겠지. 엄마는 이미 일어난 일이니 20만 원은 생각은 잊고 편하게 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잠 못 이루며 속상한 밤을 보내겠지. 오늘밤에 더 이상의 예약은 하지 말자고 했다. 내일 아침 카드사에 연락해서 결제취소가 되는지 문의하려면 결제내역을 더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에 동의했다. 그게 가능 여부를 크게 좌우하진 않겠지만, 엄마도 나도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킬 에너지가 없었다.


여행 준비를 잠시 중단하니 여행 유튜브도 이상하게 지겹고, 뭘 해도 지금 해도 되는 일 같지 않았다. 20만 원을 날리니 비로소 여행에 큰돈이 들어간다는 자각도 들었다. 큰돈이 들어간다는 자각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현타로 이어졌다. 분명 엄마도 그런 마음에 '여행 갈 마음이 안 난다'라고 했겠지. 엄마랑 나랑 최소 800만 원을 써가며 유럽에 가서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추억으로 남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오면 되는 걸까? 유튜버는 여행을 가서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여행작가는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에세이를 펴낸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갑자기 내 직업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일종의 글... 그러니까 글 형태의 창작물로 돈을 벌긴 하는데, 자주 그렇진 않고 지금은 돈 받고 쓰는 글은 없다. 누군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나를 작가라고 소개하는 일은 잘 없다. 아니 없다. 없어요 그냥 없어요. 그런 내가 최소 800만 원이 드는 여행을 가서 무엇을 남기면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까. 오줌을 싸면서 문득, 브런치에 만들어 놓은 계정에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그 자체로 발산하는 에너지이고, 어두운 기분은 응축돼.

응어리를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치면 그때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일기를 오래 미뤄두다가 오랜만에 쓰던 날 적은 생각이다.

여행기도 그럴 줄은 몰랐지. 신나서 예약하다가 화가 나니까 글 쓸 동력이 생겨버렸다.

고치고 다듬은 글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쓰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반전은 뭔 줄 알아?

이거 쓰다가 수기요청 보낸 플랫폼 헬프센터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원래 안 되지만 스페인 철도회사에 요청은 해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오오!!! 제발!!! 그럼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이러면서 바로바로 답장했는데, 취소 처리됨.

새벽 3시 48분에 받은 취소확정 메일


Omio라는 사이트고, 자기들 서비스에 대해서 리뷰 남겨달라고 하는데 쌉가능이지. 너무 고맙잖아. 물론 플랫폼 서비스 수수료는 환불 안 해 줄 거래. 왜냐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내 환불건에 대해 열심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잖아? (여긴 새벽인데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기분 한결 나아짐 유후~ 엄마는 1520만 원을 잃을 뻔했는데 1500만 원만 손해를 보게 됐어! 내일 일어나면 엄마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게 돼서 기쁘다 하하하


그래도 여행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여행하는 동안 뭐라도 남길 수 있을 거 같다. 그게 오늘의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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