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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냐 Apr 06. 2021

나는 ‘상어 가족’ 노래가 싫다

‘곰 세 마리’도 싫다


 처음 ‘상어 가족’을 들었을 때는 노래가 이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다. 요즘 유튜브에서 뜨고 있는 동요 콘텐츠라며 지인이 들려준 멜로디는 무척 중독성이 있었고, 귀여웠지만 나는 그 노래가 싫었다. 사유는 ‘곰 세 마리’ 노래가 싫은 것과 동일하다.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요가 전제하고 있는 가족의 범주가 무척이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래들만 불편한 게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진행하는 온갖 프로그램과 아이들에게 쥐어주는 교구, 선생님들이 무의식 중에 내뱉는 말들이 ‘가족은 이런 것이다’라는 개념을 공고하게 심어줄까 봐 나는 두렵다.


 6살 조카에게는 아직 혈연 가족 개념이 없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건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이름은 유동적이었다. 엄마, 할머니, 삼촌, 이모, 할아버지에서 다시 할아버지, 엄마, 할머니, 이모, 삼촌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친구들이나 가깝게 지내는 동네 이모 혹은 삼촌이라고 했다. 조카에게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까이 지내고 자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사람.


 나의 조카 같은 존재를 사회에서는 소위 한부모 가족의 자녀라 정의한다.


 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고 조카를 낳았고, 우리 가족은 동생을 지지했다. 조카는 새로운 구성원일 뿐이었다. 그러니 조카가 속한 가족은 사실 한부모 가족이 아니라 그냥 우리 가족이다. 연민 같은 것이 필요 없는. 한편 우리 같은 가족 말고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 동거하는 친구도 어쩌면 가족이고 굳이 ‘조손 가정’이라고 분류하는 가족도 가족이고 ‘다문화 가정’이라고 이름표를 써 붙인 가족도 그냥 가족이다. 어쩌면 부모가 없이 형제끼리만 생활하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가족이다. ‘결손’이 있는 범주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가족을 굉장히 좁은 의미로 상상한다. 엄마, 아빠, 자녀로 구성된 4인 가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표현하고, 기억 속에 다시 각인시키는 작업이 악의 없이,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얼마 안 되지만 교육기관에서 일하면서 전달사항이 있을 때면 꼭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 보호자라는 말을 썼다. 물론 이마저도 완벽하진 않은 용어겠다. 남들에게 써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티 나지 않을지라도, 혼자서라도 연습해보고 싶었다. 인식을 바꾸어보고 싶었다. 언어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기에. 


 근래에는 ‘엄마’라는 역할의 부담을 동생에게만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군가 ‘역시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계속해서 ‘엄마가 아니라 주양육자와 부양육자의 역할 수행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정정한다.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이모나 삼촌, 친한 동네 어른도 모두 아이를 위한 양육자나 보호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성장에는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개입이 필요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도 모성 신화를 벗겨내는 일이 중요하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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