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는 좋고 싫음의 경계가 분명하다. 아직 회색지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많은 성인의 선호 영역을 사분면으로 표현하면 '좋지만 굳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모호한' 등으로 감정을 나타내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조카에게는 아직 '좋음', '싫음'이라는 점 두 개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선지, 아니면 아직 이유를 덧붙이는 법을 알지 못해서인지 분명 몇 초 전에는 '이모 좋아' 했다가 뭔가 틀어지면 '이모 싫어'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게 진짜 내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냥 그 순간 순간에 충실한 것이다.
반면 장난감, TV 프로그램, 책 등 사물이나 콘텐츠에 관한 호불호가 확실한 것만은 재미있다. 그런 부분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처럼 휙휙 뒤바뀌지 않는다. 좋아하는 책은 매일 가져다 읽어 달라고 하고, 같은 애니메이션의 한 에피소드를 질릴 때까지 본다. 퍼즐 하나에 꽂히면 한 조각 한 조각의 자리를 다 외울 때까지 끈덕지게 그것만 해댄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니 내 조카지만 퍽 멋지다 생각한다. 어른이 된 나는 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어떤 것에나 양면성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어김없이 조카의 '좋아', '싫어'가 발동된 그 날은 조카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조카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조카는 12색 색연필 중에서 몇 가지 색상만을 뽑아 손에 쥐며 이것, 이것, 이건 좋아하는 색이니까 이것만 쓰고, 이것 이것은 싫어하는 색이니까 쓰지 않겠다고 했다. 남겨진 검정색 색연필이 테이블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과연 조카는 제 말대로 좋아한다고 말한 색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칠했다. 알록달록하니 화려하고 멋진 그림이 흰 종이 위에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핑크, 노랑, 오렌지, 빨강 같은 색은 좋고 검정이 싫다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검정이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색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일단 무채색 계열 모두가 그렇다. 그래도 그 색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알기 전에 좋고 싫음을 나누어 줄 세워 놓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러니 사소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 날 그 사건만은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졌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조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사실 검정은 정말 멋진 색이야. 여기 있는 색을 다 합치면 검정이 되거든. 검정은 모든 색을 전부 품은 색이야. 그래서 이모는 검정색도 정말 좋아해.
조카는 내 말에 즉각 답을 하진 않았다. 대신 며칠 뒤 어린이집에 다녀 온 아이의 가방에서 색칠 놀이 종이를 잔뜩 채운 검정, 갈색, 보라색을 발견했다. 조카가 싫어한다고 했거나 이건 쓰지 않겠다고 했던 색 뿐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이의 정서가 불안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할 정도로 세 가지 색깔뿐인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의 맥락에서 그건 조카가 나름대로 내 말을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라는 걸.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색으로 색칠된 그림이 그 날 한 장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 번이 되자 그림들은 원래 조카가 좋아한다던 색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작고 사소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고, 생각하고, 자란다. 내 행동을 관찰하고 닮고, 교감한다. 두려울 때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판단하고 깨우쳐 간다. 길을 찾고, 방향을 바꾸어 나간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든지 아니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강요와 설득의 차이를 아이도 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그건 내가 '엄마'가 아니어도 충분한 시간과 마음을 함께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