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조카가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다. 동생은 요즘 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한다. 조카를 보러 올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반나절 남짓이다. 아이와 통화하기도 어렵다. 겨우 쉴 시간에 조카는 어린이집에 있다. 조카에게는 할머니 되는 내 엄마는 난처해했다. 나는 조카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여기 엄마가 잔뜩 있다고. 할머니 엄마, 이모 엄마, 할아버지도 엄마라고. 그 말에 조카가 울음을 그쳤다. 정말이냐고 물었다. 정말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조카가 내 목을 꼭 끌어안고 웃었던 것도 같다.
조카에겐 우리 말고도 또 엄마가 있다. 조카의 절친한 친구의 엄마 되는 분도 내 조카를 셋째 딸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음식을 살 때, 장난감을 살 때, 꼭 하나씩 더 챙겨 주신다. 우리 모두가 '엄마'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어느 날 식탁에서 조카는 말했다. 나는 이모 딸이라고. 나도 조카를 기꺼이 내 딸 삼기로 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엄마를 자칭한 그 날 이후로 생각이 많았다. '엄마'라는 단어를 역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해도 될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조카인 너를 돌보고 양육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혹여나 거기에 성편견이 들어가 있진 않을까. 아니, 사실 '엄마'라는 기표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왜 '아빠'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거야말로 고정관념이 작용한 게 아닐까. '엄마'가 '선생님'처럼 역할을 뜻하는 단어가 되면 성편견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의 정의definition에 따르자면 지금 조카에게는 엄마가 다섯 명쯤 된다. 조카는 그 사람들 모두의 딸이고. 그렇담 거기에서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차이를 혼란해하진 않을까.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두어야겠지.